百濟(백제)
고이왕은 초고왕과 그의 어머니 田氏가 낳은 아들입니다.
라디오에요
2009. 1. 19. 19:05
百濟王紀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40.pdf 구지왕 27년. 二十七年 甲午 四月 田氏生王子素古 王酷愛之欲立爲太子 重用龜宮屬. 27년(AD214) 갑오 4월 田氏(전씨)가 왕자 素古(소고)를 낳았다. 왕이 그를 매우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고 싶어하여, 龜宮(구궁)의 전속들을 중용하였다. *구지왕과 태후 田氏(전씨)가 素古(소고)를 낳았습니다. 肖古王(초고왕) 諱素古 仇知王第五子也 體鴻大有遠識 臨事不輕決 古尸田氏不敢擅威 國人稱之. 휘는 素古(소고), 仇知王(구지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체격이 컸으며, 앞을 내다볼 만큼의 식견이 있었다 . 정사에 임하여 경솔히 결정하지 않았다. 고시와 전씨는 감히 멋대로 하거나 협박하지 못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것을 칭찬하였다. *素古(소고)= 肖古王(초고왕). 五年 庚戌 八月 沙氏生王子仇首 九月 以沙市爲上佐平 委以政事 烏候爲右佐平 委以兵事 富輪爲左佐平 委以密事 流太公古尸于小熊島移 太后於彭宣家 十月 遣將侵羅邊邑 掠其府庫 十二月 皀衣舍人眞可說王曰 “陛下以英明之姿 早破古尸之奸 以雪父王之恥 則可也 自古以來 未有讎母之君 伊時若非太后 陛下焉得以王 異日若有不測 則非太后 而孰有偕乎” 王大悟 乃冒雪夜 幸彭宣家 偕太后而歸. 5년(A.D.230) 경술 8월 沙氏(사씨)가 왕자 仇首(구수)를 낳았다. 9월 沙市(사시)를 상좌평으로 삼아 政事(정사)를 맡기고, 烏候(오후)를 우좌평으로 삼아 兵事(병사)를 맡기고, 富輪(부륜)을 좌좌평으로 삼아 밀사(密事)를 맡겼다. 태공 古尸(고시)를 小熊島(소웅도)로 유배 보내고, 太后(태후)는 彭宣(팽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10월 장수를 보내어 신라의 국경 마을을 침략하여 관청의 창고를 약탈하였다. 12월 皀衣舍人(조의사인) 眞可(진가)가 왕을 설득하기를 “폐하께서는 英明(영명)한 자태로, 일찍이 古尸(고시)의 간사함을 깨뜨렸고, 부왕의 치욕을 설욕하셨으니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자고이래 어머니를 원수로 대한 왕은 없었습니다. 지난날 태후가 아니었다면 폐하께서는 어찌 왕이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훗날 不測(불측)한 일이 있을때 태후가 아니면, 누가 함께 하겠습니까?” 왕은 크게 깨달아, 이내 눈이 오는 밤임에도 무릅쓰고, 팽선의 집으로 행차를 하여 태후를 데리고 돌아왔다. *초고왕과 沙氏(사씨)가 왕자 仇首(구수)를 낳았습니다. 구수는 배가 틀린 아들입니다. *태후 전씨는 구지왕이 죽자, 팽선의 집에 가두었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와 상궁에 살지요. 六年 辛亥 二月 新建太后宮曰 上宮 召帶方人焦毛等 鑄印及兵仗于西院 6년(A.D.231) 신해 2월 태후궁을 새로 세우면서 上宮(상궁)이라고 불렀다. 대방인 焦毛(초모) 등을 불러 西院(서원)에서 도장과 병장기를 주조하여 만들게 하였다. 十年 乙酉 正月 上宮生子古爾 賜酺群?臣 三月 以太公古尸于內新院 奉供如初封 王妹素利素元 弟素大素仁等大仁及古尸出也. 10년(A.D.235) 을유 1월 上宮상궁(태후)이 아들 古爾(고이)를 낳았다.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3월 태공 古尸(고시)를 內新院(내신원)으로 옮기고 처음에 봉해진 것과 같이 받들어 모셨다. 왕의 여동생 素利(소리) · 素元(소원), 남동생 素大(소대) , 素仁(소인) 등의 大仁(큰 덕)이 古尸(고시)의 석방에 영향을 미쳤다. *초고왕 자신의 어머니 田氏(전씨)가 태후이고, 사는 곳이 상궁입니다. 여기서 태후라 적지 못하고, 上宮상궁이라고 완곡히 표현한 것입니다. *결론, 古爾(고이)는 초고왕의 어머니 田氏(전씨)와 근친관계로 낳은 아들입니다. 자신의 어머니와 관계로 낳은거죠. 그래서, 상장돈장 계보가 맞는거예요. 전씨가 괄시를 받은 것은 古尸(고시)와 사통하여 아들도 낳고,고시와 밀통하여 반란을 꿰하여,아버지 구지왕을 죽게 만들었죠.게다가 고시를 처단할려니 어머니를 가둔 것입니다.고시와 전씨가 결탁하여 아들 초고를 왕으로 내세웠지만, 초고왕이 성장하자..반대로 아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바람난 어머니였죠. 자꾸 곡해를 해서 답답해서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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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 以太公古尸于內新院 奉供如初封 王妹素利素元 弟素大素仁等 大仁及古尸出也. 3월 태공 古尸(고시)를 內新院(내신원)으로 옮기고 처음에 봉해진 것과 같이 받들어 모셨다. 왕의 여동생 素利(소리) · 素元(소원), 남동생 素大(소대) , 素仁(소인) 등은 大仁(대인)과 古尸(고시)가 낳은 자식이다. 이 부분은 해석에 오류가 났습니다. 두가지 관점에서 모순이 걸립니다. 1, 素大(소대)는 전씨와 고시가 몰래 낳은 아들이죠.그래서, "大仁(대인)과 古尸(고시)가 낳은 자식이다." 이 대목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古尸(고시)는 왕의 庶弟(서제)이다. 고시의 어머니는 일찍이 왕과 잠통하여 宮中秘事(궁중비사)를 밀고를 하였다. 그래서, 무룻 왕에게 영향력이 있었다. 왕 역시 古尸(고시)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고시는 나이가 젊고 멋있기에, 田氏(전씨)와 은밀히 상통하여 아들 素大(소대)를 낳았다. 항상 왕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苩仁(백인) 등이 이를 발설하려고 하자, 고시가 먼저 앞서 그들을 친 것이다. 苩仁(백인)은 그 계교가 어긋남을 알고 말갈로 도망갔다. 고시가 이에 田氏(전씨)와 더불어 정사를 마음대로 하니 왕이 괴로워하다 죽었는데 나이가 72살였다. 2, 부인의 호칭을 田氏(전씨),勿氏(물씨),沙氏(사씨)등으로 氏을 붙여서 일관되게 표현했습니다. 大仁(대인)이란 이름이 갑자기 나올리가 없죠. ------------------------------------------------------- 王妹素利素元 弟素大素仁等 大仁及古尸出也. 왕의 여동생 소리와 소원 및 남동생 소대와 소인등의 큰 덕은 고시의 나옴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 及을 동사로 해석하는거죠. 古尸(고시)를 小熊島(소웅도)로 유배 보낸지 5년만에, 소대와 소인의 大仁을 베풀어 섬에서 나오게 했다는 뜻이죠. 사면목권해 주었다고 해석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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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供如初 封王妹素利素元 앞부분도 띄워쓰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封을 뒷문장과 연결시키면 왕의 여동생에게 작위를 내리는걸 뜻하죠. 封 [동사] 봉하다. 왕이 작위(爵位)나 작품(爵品)을 내리어 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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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 以太公古尸于內新院 奉供如初 封王妹素利素元 弟素大素仁等大仁及古尸出也 3월 태공 古尸(고시)를 內新院(내신원)으로 처음과 같이 奉供(봉공)하였다. 왕의 여동생 素利(소리)와 素元(소원)에게 작위를 내렸고, 남동생 素大(소대)와 素仁(소인)등이 大仁(대인)을 베풀어 古尸(고시)을 섬에서 나오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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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시는 사료의 출전을 밝혀주실 수 있겠는지요? 참고문헌을 꼭 쓰셔 지적재산권 시비에 휘말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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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은 밣혔습니다. 제가 정서를 한거라 괜찮습니다. 三月 以太公古尸于內新院 奉供如初封 王妹素利素元 弟素大素仁等大仁及古尸出也 다시 이 문장을 如初封으로 붙여서 해석해 봅니다. 奉供(봉공)이나 初封(초봉)을 검색해 보면, 관용어처럼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初封으로 해 보면...이렇게 되죠. 3월 태공 古尸(고시)를 內新院(내신원)으로 처음 봉해진 것과 같이 奉供(봉공)하였다. 왕의 여동생 素利(소리),素元(소원)과 남동생 素大(소대), 素仁(소인)등이 大仁(대인)을 베풀어 古尸(고시)을 섬에서 나오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앞,뒤 관계를 다시 살펴서 합당한 해석을 골라야 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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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증거는.. 아달라기 二十三年 正月 潛宣伊伐飡 斗氏稟主 23년(A.D.235) 1월 잠선(潛宣)을 이벌찬으로 두씨(斗氏)를 품주로 삼았다. 田氏生肖古子古尒 전씨(田氏)가 초고(肖古)의 아들 고이(古尒를 낳았다. ---------------------------------------------------------------------- 초고왕 10년(A.D.235) 1월에 고이가 출생했다고 백제왕기에 나왔지만.. 아달라기 원문엔 <아달라 22년(234년) 5월달>에 이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정성일님이 해석을 하면서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원문 확인 19p.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36.pdf ) 원문에는 한 해전 5월달 기사에 있으나, 박창화님이 다음 해 1월기사랑 서로 금을 그어서 연결해서 표시를 해 놓았죠. 필사하면서 실수를 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으며, 보통 1년편차는 존재합니다. 이것을 5월달 기사로 복구하는게 좋아요. 밑에다 그런 사실이 있다고 따로 명기해야 옳습니다. 해석하는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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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근친관계과 이해가 안 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전례가 나와 있어요. 초고왕 3년 三年 戊申 五月 帶方王恭 以位讓于前王子淵 遣使告慶 王幸龜宮宴宝皐夫人 宝皐泣歌之 王憐之 遂宿於龜宮通之 自是累幸. 3년(A.D.228) 무신 5월 대방왕 공손공이 前王(전왕)의 아들, 公孫淵(공손연)에게 양위를 하였다. 사신을 보내 경사를 알렸다. 왕은 龜宮(구궁)으로 행차하여 宝皐夫人(보고부인)에게 잔치를 열었다. 宝皐(보고;공손탁의 막내딸)가 울면서 노래를 부르니 왕이 가엽게 여기어, 드디어 구궁에서 머무르며 보고와 정을 통하였다. 이 때부터 누차 幸(행)을 하였다. 四年 己酉 四月 宝皐生王女龜氏 王納佐平沙市女 而又烝太后田氏 沙氏者太后婢也 田氏妬王愛宝皐 而自媒沙氏 以引之及己也. 4년(A.D.229) 기유 4월 宝皐(보고)가 왕의 딸, 龜氏(구씨)를 낳았다. 왕이 佐平(좌평) 沙市(사시)의 딸을 맞아들이고, 또한 태후 田氏(전씨)와도 私通(사통)하였다. 沙氏(사씨)란 사람은 태후의 하녀였다. 田氏(전씨)는 왕이 宝皐(보고)를 사랑하는걸 질투하여 본인이 사씨를 중매하여, 그녀를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하였다. *烝=증, 김이 오르다. 손위 여자와 私通(사통)하다. ------------------------------------------------------------ 구지왕 30년(AD217)에 언니 宝婁(보루)에 이어서, 여동생 宝皐(보고)가 또 시집을 옵니다. 둘다 공손탁(공손도)왕의 딸입니다. 언니 宝婁(보루)는 자식을 못 낳고 恨을 안고 먼저 세상을 떠나죠. 이어서 구지왕이 죽자, 홀로 된 宝皐(보고)는 술먹고 우니까...초고왕이 외로움을 풀어 줍니다. 다음 해, 4년에는 태후 田氏(전씨)와도 私通(사통)을 합니다. 그러니까, 田氏(전씨)를 팽선의 집에다 가두기 전에, 이미 정을 통한 것입니다. 여러번 정을 통한 것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근친관계가 형성된거예요. 이 관계를 이해를 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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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백제전.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歷十餘代, 代臣中國, 前史載之詳矣. <開皇>初, 其王<餘昌>遣使貢方物, 拜<昌>爲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동명'의 후손에 '仇台(구태)'란 사람이 있는데, 인자함과 믿음이 두터워, 처음 나라를 '대방'의 옛 땅에 세웠다. '한''요동 태수 公孫度(공손도)'는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고, 점점 창성해지더니,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百家백가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인하여 '백제'라 불렀다. 10여대를 지나면서 중국의 신하가 되었는데, 앞의 역사의 기재는 상세하다. '개황'(수나라,581년)초에 그 왕 '餘昌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자, '창'을 배하여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았다. ----------------------------------------------------------------------- 이 仇知王(구지왕)은 수서 백제전에 나오는 仇台(구태)를 말합니다. 원년이 188년입니다. 篤於仁信 ⓑ …(하기)에. [형용사 뒤에 쓰임] 敢于斗争; 투쟁에 용감하다 善于斗争; 투쟁을 잘하다 易于了解; 이해하기 쉽다 难于实行; 실행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