奈解紀(나해기)
------------------------------------------ 신라본기 첨해 3년 2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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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해 3년 249년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秋七月 作南堂於宮南 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 3년(249) 여름 4월에 왜인이 서불한 우로(于老)를 죽였다. 가을 7월에 궁궐의 남쪽에 남당(南堂)을 짓고<남당(南堂)을 혹은 도당(都堂)이라고도 하였다.> 양부(良夫)를 이찬으로 삼았다. 미추 7년 268년 七年 春夏不雨 會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又遣使五人 巡問百姓苦患 7년(268)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아놓고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왕이 친히 물었다. 또한 사자(使者) 다섯 명을 보내 두루 돌며 백성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를 물어보게 하였다. 미추 7년에 기사가 있어서 그랬는지.. 김부식의 조작사건은 미스테리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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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열전에서 七年 癸酉, 大王出居于柚村, 味鄒王時 이 부분이 핵심사항으로.. 7년 앞의 미추를 빼먹었고..癸酉는 313년, 大王은 성군으로서 추앙받는 '미추왕'을 뜻하죠.미추왕이 음란하다고는 하나 지혜롭고 정치를 잘 했습니다.柚村은 디지털 삼국사기 홈피에선 '우유촌'으로 잘못 해석한걸로 보이고.. 국로추사를 보면.. 백제가 2천명의 군사를 지원해 줍니다. 이 때 백제왕은 누구일까요? '비류왕'입니다. ○夏四月 倭遣使葛耶古 修聘於新羅 王使于老爲儐 與聘使戲談 早晩以汝王與妃俱爲奴婢 倭使歸告倭君 聞之大怒 命將軍于道朱君率兵五千 進攻新羅 欲雪向日之憤恥 羅王使于老爲先鋒出戰良久 倭將捕于老燒殺 王大驚失色 請救於濟 王遣將士二千 合勢大戰大破倭軍 盡燒其營 [見羅古志] 여름 4월 왜는 사신 葛耶古(갈나고)를 보내어 신라에 수빙하였다. 신라왕은 우로를 보내 접대하였다. 사신을 응대하면서 희롱하며 말하길, "조만간 너희 왕과 왕비를 노비로 삼겠다" 라고 하였다. 왜 사신이 돌아가 왜왕에게 고하자,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장군 于道朱君(우도주군)에게 명하여 병사 5천명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였다. 지난날의 분노와 수치를 설욕하기 위해서였다. 신라왕은 우로를 선봉으로 출전시켜 오래동안 잘 싸웠으나, 왜의 장군은 우로를 붙잡아 불태워 살해하였다. 왕은 대경실색하여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니, 백제왕은 장사 2천명을 보내주어, 합세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진영을 불태워 버렸다. [견라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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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상당히 신뢰성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국로추사'와 '팔린통빙고'는 전혀 계통이 틀린 사서인데도 팔린통빙고에는 짧게 '相結'이라는 구절이 나오므로 해서.. 미추왕은 백제의 군사지원을 받았다고 판단합니다. 이때 미추왕과 비류왕은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비류왕 331년을 보실까요? 二十八年 春夏 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3)乃雨 年饑 人相食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신라 기사와 일치합니다. 우로의 사건은 4월달에 일어났고, 7월달에 비가 온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로 아들, 흘해는 3살이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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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의 기년은 많이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백제/고구려 기년은 기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특히나 중국사서와 연결이 되어 있어 조작이 힘들고... 2 :1 관계로.. 신라기년 조작을 하기 위해서는 백제,고구려의 기년은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이왕 이후의 백제기년은 그대로 믿어도 됩니다. 구지왕을 김부식이 몰랐을리는 없고..아마 수서에 나오는 구태(구지왕) 기사가 맘에 안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죠. 구지왕은 백제 시조격인 우대왕과 비슷한 칭송을 듣는 후덕한 임금이였으니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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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우로 기사에 왜왕의 이름이 나왔다면..300년대의 일본서기 기년 파악에 절대적 기준점이 됩니다.어마어마한 일이죠. 안 나오니..물 건너갔죠. 다른 방법을 써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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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얘기를 덧붙이자면.. 백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신라를 제어하기 위해, 왜와 결탁을 하였죠. 근초고왕때 통교를 했다는 통설을 믿어보더라도.. 300년대 이르러 왜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로 성장합니다. 그 소문은 백제에까지 전해지고.. 왜의 군사력을 빌렸겠죠. 하지만, 그 댓가는 만만치가 않았죠. 왜의 장군이나 귀족들이 들어와서 권력을 남용하고 내정간섭을 합니다.왕의 승계과정에도 개입하여 백제는 왜에 의해 휘둘리는 나라로 변했죠. 그것에 반발하는 신하나 백성들은 대거 고구려나 신라로 유민으로써 탈출하게 됩니다. 위기를 느낀 내물왕은 딸을 광개토왕에게 보내면서까지 고구려의 힘을 빌리죠. 광개토왕은 임기내내 왜때문에 골치를 썩었습니다.인덕천황은 30년간 전쟁을 하였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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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볼때마다, 혜성이 나타난 일도 각각 백제와 신라가 다른 시기에 나타나 이상했던 경험이 있을겁니다. 기년을 일치시켜 보면 웃긴게 너무 많습니다. 비류왕 13년 316년 十三年 春 旱 大星西流 夏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첨해 7년 253년+ 63년= 316년 七年 夏四月 龍見宮東池 金城南臥柳自起 自五月至七月 不雨 禱祀祖廟及名山 乃雨 年饑 多盜賊 7년(253) 여름 4월에 용이 궁궐의 동쪽 연못에 나타났다. 금성(金城) 남쪽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으므로 조묘(祖廟)와 명산에 빌며 제사지냈더니 비가 왔다. 이 해에 흉년이 들고 도적이 많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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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얘기한 일치하는 연도입니다. 비류 28년 331년 二十八年 春夏 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乃雨 年饑 人相食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미추 7년 268년+ 63년= 331년. 七年 春夏不雨 會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又遣使五人 巡問百姓苦患 7년(268)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아놓고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왕이 친히 물었다. 또한 사자(使者) 다섯 명을 보내 두루 돌며 백성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를 물어보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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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 33년 336년 三十三年 春正月辛巳 彗星見于奎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혜성이 규(奎)에 나타났다. 미추기 12년 336년 十二年 火猿 三月 麗遣其臣于莘于晉貢物 請伐燕 時有大星流其西北 故恐其侵入也 12년 丙申 3월 고구려가 신하 우신을 진나라에 보내 공물을 바치며, 연나라를 벌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 큰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연나라의 침입을 두려워하였다. 고국원왕 6년 336년 六年 春三月 大星流西北 遣使如晉貢方物 6년(336) 봄 3월에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갔다.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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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살해사건을 331년으로 일단 믿어 본다면, 일본서기에서 응신 or 신공 둘중에 하나가 될겁니다. 어느쪽일까요? 沾解尼今紀(첨해니금기) 四年 四月 倭獻土物 其太子求婚 于老戱之 ‘虜汝王爲鹽奴矣 何可婚乎’ 使怒歸和絶 4년(A.D.313) 4월 왜가 토산물을 바치고, 그 太子(태자)가 구혼하였다. 于老(우로)가 그 사신을 희롱하며 "너의 왕을 사로잡아 鹽奴(염노)로 만들겠다. 어찌 혼사가 가능하느냐" 라고 하였다.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화친이 끊어졌다. 첨해 4년, 313년에 왜의 太子가 혼인을 청했다니까.. 태자의 나이가 17살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여아같은 경우는 10살,13살도 비일비재합니다만.. 대충 15~20살로 짐작하는거죠. 대충 296년정도에 태자가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시 유추해서 접근을 해보는거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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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로추사에서 "여름 4월 왜는 사신 葛耶古(갈나고)를 보내어 신라에 수빙하였다." 葛耶古(갈나고)=>'갈야고' 로 정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