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동이전 濊(예)전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 朝謁 二郡有軍征 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正始六年(정시 6년, AD245년) 樂浪太守(낙랑태수) 劉茂(유무)와 帶方太守(대방태수) 弓遵(궁준)은 領東濊(영동예)가 句麗(고구려)에 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濊(예)를 쳤다. 不耐侯(불내후)등이 읍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六年(정시 8년, AD247년) 조정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조서를 내려 다시 不耐濊王(불내예왕)으로 拜(배)하였다. 居處(거처)는 民間(민간)에 잡스럽게 있었다. 四時(사시)로 郡(군)에 이르러 朝謁(조알)하였다. 二郡(이군)은 軍征(군정)이 있으면, 賦調(부조,부역과 세공)하였고, 役使(역사)를 供給(공급)하였다. 그들을 民(민)처럼 대우하였다. 삼국지 韓(한)전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 千有餘人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景初中(237~ 239년) 위나라 明帝는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은밀히 보내, 海를 건너 二郡를 평정하였다. 여러 韓國의 臣智는 邑君에게 印綬를 加賜하였고, 그 다음은 邑長에게 주었다. 그 풍속은 衣幘을 좋아하는데, 下戶가 郡에 도착하여 朝謁하는데, 모두 衣幘을 빌렸다. 스스로 印綬와 衣幘을 입은 사람도 천여명이나 있었다. 部從事 吳林은 樂浪이 본래 韓國을 통치하였다는 이유로, 辰韓八國을 분할하여 樂浪에게 주었다. 吏의 통역의 전달이 다름과 같음이 있어, 臣智는 韓의 분노를 일으켜, 帶方郡 崎離營을 공격하였다.이때 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은 병사를 일으켜 그들을 벌하였다. 弓遵은 전사하였고, 二郡은 마침내 韓을 멸망시켰다. 弓遵은 전사하였고, 二郡은 마침내 韓을 멸망시켰다. 경초 237년에는 낙랑태수 鮮于嗣(선우사)와 대방태수 劉昕(유흔)이였지만.. 정시 6년 245년에는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으로 직책이 바뀌었습니다. 삼국지 한전과 예전에 동일한 인물들이 복수로 나타나는 걸로 봐서.. 韓전의 사건은 연대 편차가 있습니다. 245년에는 弓遵(궁준)이 죽지 않고 활동하고 있었단 말이죠. 二郡이 韓을 멸망시킨 연대는 237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시기는 245년이후란 걸 추측할 수 있습니다. 237년은 공손연이 멸망하기 1년전에 일이고.. 245년은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침입한 244년, 그 다음해입니다. 위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치면서... 고구려만 친게 아니고. 東濊도 치고.. 韓國를 쳤는데, 그 시기는 245년 이후의 관구검 침략시기란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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