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처음 설치한 助比川(조비천)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7년, AD132년
四月 覆岩君都氏與其子孟百入朝 置助比川 主以大盖爲之 古陀耶 主以叔公爲之 加西妻叔公 加亥妻大盖
4월, 覆岩君(복암군) 都氏(도씨)가 그녀의 아들 孟百(맹백)과 함께 입조하였다. 助比川(조비천)을 설치하여, 大盖(대개)를 主(주)로 삼았고, 古陀耶(고타야)를 설치하여, 叔公(숙공)을 主(주)로 삼았다. 加西(가서)는 叔公(숙공)에게 시집갔고, 加亥(가해)는 大盖(대개)에게 시집갔다.
*都氏(도씨)는 여자.
百濟王紀(백제왕기) 肖古王(초고왕) 2년, AD227년
二年 丁未 八月 破新羅助比川城 而虜一千口而還 羅又引兵 逼我漢水 故還其所俘
2년(AD227년) 정미 8월 신라의 助比川城(조비천성)을 깨뜨리고 1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신라가 또 병사를 이끌고 우리 漢水(한수)를 핍박하였는데, 그래서 빼앗은 신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파사왕은 초기부터 강역 확장에 나서서, 서북쪽에 집중합니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황산하를 얘기하면서 김해 금관가야를 침공한 것으로 기술했으나, 그는 착각에 빠진 것이죠.
*지마왕은 신라의 서쪽과 북쪽에 집중하여, 주일의 대가야(비지가야)을 공격하는거죠.
통설은 바껴야 합니다.
*助比川(조비천)성에 대한 논문이 역사문에 올라 왔는데, 읽어 보니,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비봉산으로 비정해 놨군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왕산은 과거에 대양산이였다는 사실을 밣히면서, 양산이란 현재의 대왕산일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助比川(조비천)은 신라의 파사왕 7년(132년)에 처음 설치하여, 초고왕때(227년)는 잠시 빼앗겼다가 다시 돌려 받은 것으로 사서에 나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