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弗大王傳(을불대왕전)

乙弗大王傳(을불대왕전) 101p (52p)

라디오에요 2010. 2. 20. 01:17

 

 

 






以雉葛王九年金神之九月 爲新王之元年 大赦天下 放民二十已下赴役男女及其兄弟父子者三分之二 擇其壯丁之自願修宮者千人 營之 民多不歸而留之曰 爲吾君營室 新王命皆厚餽而勞之 以尙遒妻梨氏爲仙方子槨妻


雉葛王(치갈왕, 烽上王) 9년, 金神(금신, 庚申, AD300년) 9월을 新王(신왕)의 元年(원년)으로 삼았고, 天下(천하)를 대사면하였다. 백성들중에 20세이하 赴役(부역)하는 男女(남녀) 및 兄弟(형제) 父子(부자) 3분의 2를 놓아주었고, 그 壯丁(장정)중에 宮(궁)의 수리를 自願(자원)하는 자 1000명을 택하여 궁실을 짓도록 하였다. 백성들은 대부분 돌아가지 않고 머무르며 말했다. “우리 君(군)을 위해 집을 짓겠습니다.” 新王(신왕)은 명을 내려 모두 후하게 대접하고 위로하였다. 尙遒(상주)의 처 梨氏(리씨)를 仙方(선방)의 아들 仙槨(선곽)의 처로 삼았다.

 

元年九月 大王封功臣十二人倉助利祖弗萧友烏陌南柘仙方方夫再生談河松巨長莫思休都于其鄕 賜奴婢有差 尊考咄固爲太王 母高氏乙氏爲太后 乙氏私夫于卓爲太公 父乙寶爲老太公 以草后爲正后 以妹丹氏耽氏爲副后 封太平女平氏休都妻鹿氏方夫妻高氏仙方妻兎大烏陌南妻倉氏皆賜夫人爵 賜奴婢有差 以前王后緣眼氏爲再生妻 解蒲氏爲仙方妻 多氏爲談河妻


元年(원년, AD300년) 9월, 大王(대왕)은 功臣(공신) 倉助利(창조리), 祖弗(조불), 萧友(소우), 烏陌南(오백남), 柘(자), 仙方(선방), 方夫(방부), 再生(재생), 談河(담하), 松巨(송거), 長莫思(장막사), 休都(휴도)등의 12인을 그 고향에 封(봉)하고 奴婢(노비)를 하사했는데 차등을 두었다. 죽은 咄固(돌고)를 尊(존)하여 太王(태왕)으로 삼았고, 어머니 高氏(고씨)와 乙氏(을씨)를 太后(태후)로 삼았고, 乙氏(을씨)의 私夫(사부) 于卓(우탁)을 太公(태공)으로 삼았고, 아버지 乙寶(을보)를 老太公(노태공)으로 삼았다.
草后(초후)를 正后(정후)로 삼았고, 누이 丹氏(단씨)와 耽氏(탐씨)를 副后(부후)로 삼았다. 太平(태평)의 딸 平氏(평씨)와 休都(휴도)의 처 鹿氏(록씨), 方夫(방부)의 처 高氏(고씨), 仙方(선방)의 처 兎大(토대), 烏陌南(오백남)의 처 倉氏(창씨) 모두를 封(봉)하여 夫人(부인)의 작위를 내렸고, 奴婢(노비)를 하사했는데 차등을 두었다. 前王(전왕)의 后(후) 緣眼氏(연안씨)를 再生(재생)의 처로, 解蒲氏(해포씨)를 仙方(선방)의 처로, 多氏(다씨)를 談河(담하)의 처로 삼았다.


以再生談河爲左右主簿 而使決政事 以休都方夫爲左右衛將 使決軍事 倉助利不知王意 稱病辭退曰 臣以無才事先王不忠 以亂國政 不足以立新朝 願乞骸骨而歸 仙方乃密奏曰 陛下新立而不思中興大功 而重用從外小功 故衆心不定


再生(재생)과 談河(담하)를 左右主簿(좌우주박)으로 삼아 政事(정사)를 결정하도록 하였고, 休都(휴도)와 方夫(방부)를 左右衛將(좌우위장)으로 삼아 軍事(군사)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倉助利(창조리)는 왕의 뜻을 몰라서 病(병)을 칭하며 辭退(사퇴)하며 말했다. “臣(신)이 無才(무재)하여 先王(선왕)을 섬김에 不忠(불충)하였고, 國政(국정)을 어지럽힌 까닭에 新朝(신조)을 세움에 부족하오니, 원컨데 乞骸骨(걸해골)하여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에 仙方(선방)이 은밀히 아뢰었다. “陛下(폐하)께서 새로이 왕위에 오르셨으나, 中興(중흥)의 大功(대공)을 생각지 않으시고, 겉의 小功(소공)을 따라서 重用(중용)한 까닭에 군중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大王(대왕)이 이에 倉助利(창조리)의 집을 방문하여, 조리를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叔父(숙부)가 나를 버리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위하겠습니까?” 倉助利(창조리)가 말했다. “臣(신)은 이미 늙었지만, 청컨대 三輔(삼보)를 세워 함께 일해 보고자 합니다.”


왕은 이에 倉助利(창조리)를 太輔(태보)로, 우탁을 左輔(좌보)로, 乙盧(을로)를 右輔(우보)로 삼았다. 王子(왕자) 柘(자)를 大主簿(대주박)으로, 선방과 烏陌南(오맥남)을 左右衛將軍(좌우위장군)으로, 조불과 소우를 前後衛將軍(전후위장군)으로, 휴도, 방부, 송거를 馬將軍(마장군)으로 삼았다. 長莫思(장막사)를 南部于臺(남부우대)로, 于璘?(우린)을 西部于臺(서부우대)로, 于豊(우풍)을 中部于臺(중부우대)로 삼았다. 이에 모든 무리의 정세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大王(대왕)은 草后(초후)와 尙寶(상보)의 집에 행차하여 玄氏(현씨)와 芙氏(부씨)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玄氏(현씨)가 말했다. “첩은 이미 늙었는데 尙寶(상보)가 功臣(공신)에게 득죄하니 의지할 바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왕은 그를 용서하소서.” 
大王(대왕)은 말했다. “尙寶(상보)는 저의 后(후)의 아버지입니다. 조만간 相(상)으로 삼을 것이나, 지금은 잠시 중의를 좇아서 罪案(죄안)에 올린 것입니다. 祖母(조모)는 걱정하지 마시오.” 라고 하였다. 玄氏(현씨)가 이에 사은하고 물러갔다.


芙氏(부씨) 또한 草后(초후)를 안고 울며 말했다.
“우리가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여 왕을 축원한 것은 함께 귀해지고자 함이었습니다. 어찌 오늘날 남편이 하옥되고 형제가 모두 밖으로 유배당하고자 하는 뜻이었겠습니까?”

大王(대왕)이 말했다. “芙莢(부협)과 芙獜(부린)의 죄는 비록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나 장모를 위하여 사면하리다. 심려말고 눈물을 거두시오.”


芙氏(부씨)가 말했다. “형제가 만약 살아난다면 어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로부터 날씨가 추워지니 속히 풀려나기를 바라옵니다. 또 再生(재생)과 談河(담하)는 모두 우리집의 家奴(가노)였는데 이제 主簿(주박)의 직책에 있어 우리 남편의 죄를 논하니 어찌 배은망덕이 아니겠습니까?”

大王(대왕)이 말했다. “再生(재생)이 밖으로는 공론을 좇고 있으나 안으로는 기실 그를 보호하고 있으니 장모는 의심하지 마시오.”
이날 밤에 大王(대왕)은 芙氏(부씨)와 상통하였는데 혹은 이르기를 大王(대왕)이 太子(태자)시절에 이미 먼저 상통했으며 이때 이르러 다시 상통한 것이라 하였다.


芙氏柔美善於嬌媚 故雉葛之時寵未衰 至是又爲大王寵妾 多專內政

芙氏(부씨)는 柔美(유미)하여 교태롭게 아부를 잘 하므로, 雉葛(치갈)의 시절에도 총애가 쇠하지 않았는데, 이때 이르러 다시 大王(대왕)의 寵妾(총첩)이 되니, 內政(내정)을 많이 독차지하였다.


十月 宴仙翁高朴兒太平于于卓家 以仙翁爲馬山公 高朴兒爲棠山公 太平爲陽化公
10월, 于卓(우탁)의 집에서 仙翁(선옹), 高朴兒(고박아), 太平(태평)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仙翁(선옹)을 馬山公(마산공)으로, 高朴兒(고박아)를 棠山公(당산공)으로, 太平(태평)을 陽化公(양화공)으로 삼았다.

 

黃霧四塞五日 大王問於太史于先曰 "朕之過歟" 于先曰 "霧氣自下而上 兆在后妃 恐群臣以草后爲前王妖物 而有欲廢之者也"
누런 안개가 5일동안 四塞(사새)에 나타났다. 大王(대왕)은 太史(태사) 于先(우선)에게 물었다. “짐의 잘못인가?” 于先(우선)이 말했다. “안개의 기운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니 조짐이 后妃(후비)에게 있습니다. 두렵게도 群臣(군신)들이 草后(초후)를 前王(전왕)의 妖物(요물)이라 하면서 廢(폐)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芙氏柔美善於嬌媚 故雉葛之時寵未衰 至是又爲大王寵妾 多專內政

芙氏(부씨)는 柔美(유미)하여 교태롭게 아부를 잘 하므로, 雉葛(치갈)의 시절에도 총애가 쇠하지 않았는데, 이때 이르러 다시 大王(대왕)의 寵妾(총첩)이 되니, 內政(내정)을 많이 독차지하였다.


十月 宴仙翁高朴兒太平于于卓家 以仙翁爲馬山公 高朴兒爲棠山公 太平爲陽化公
10월, 于卓(우탁)의 집에서 仙翁(선옹), 高朴兒(고박아), 太平(태평)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仙翁(선옹)을 馬山公(마산공)으로, 高朴兒(고박아)를 棠山公(당산공)으로, 太平(태평)을 陽化公(양화공)으로 삼았다.

 

黃霧四塞五日 大王問於太史于先曰 "朕之過歟" 于先曰 "霧氣自下而上 兆在后妃 恐群臣以草后爲前王妖物 而有欲廢之者也"
누런 안개가 5일동안 四塞(사새)에 나타났다. 大王(대왕)은 太史(태사) 于先(우선)에게 물었다. “짐의 잘못인가?” 于先(우선)이 말했다. “안개의 기운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니 조짐이 后妃(후비)에게 있습니다. 두렵게도 群臣(군신)들이 草后(초후)를 前王(전왕)의 妖物(요물)이라 하면서 廢(폐)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