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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명문해석에 대한 일고찰

라디오에요 2010. 4. 6. 15:15

출처 가우리학문공동체 http://cafe.naver.com/gaury/8957

Ⅰ. 머리말

七支刀는 廣開土大王碑文과 더불어 古代韓日關係史를 연구하는데 있어 근본 사료로서 널리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칠지도는 현재 日本 나라(奈良)현 테리시(天理)의 이소노가미징구(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종의 신물로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칠지도에는 앞․뒤면 총 61자의 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해석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학계 학자들의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며, 양국학자들간의 의견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칠지도의 명문이 광개토왕비문과 더불어 任那日本府設을 증명하는 근거로 일본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온지도 100년이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연구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명확한 성과가 없이 양국학계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양국이 모두 명문자체의 사실적인 연구를 하기 보다 각자의 입장에 유리하게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광개토왕비가 발견된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견된 칠지도는 그 내용에 있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며 현재 남아 있는 글자도 金象嵌이 거의 훼손이 되어져 있어 정확히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어 더욱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일본내에서도 국보임을 내세워 칠지도의 실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 국내학계의 연구는 한계성을 보일 수밖에 없다.

 자연히 칠지도 연구는 일본학계에서 더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고, 한국학계의 연구는 일본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것을 단순히 반박하는 정도의 연구성과를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연구는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고,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하여 명문해석에 대해 한․일 고대사학계가 의견일치에 도달한 부분도 적지 않으며, 명문의 해석과 의미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공통된 인식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한 칠지도의 연구사를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명문 발견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내용이나 그 성과가 큰 변화를 보이고 있는바, 이를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제 1유형은 시기적으로 칠지도 명문을 발견한 이후부터 1945년 이전인데, 이 때는 명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年號가 '泰始'인지 '泰初'인지에 대한 분석에 주력하였고, 전체 명문에 대한 판독은 뒤로 미루어졌다. 그리고 명칭도 六叉刀(모)→七枝刀→七支刀의 순으로 바뀌게 된다. 이 때 나온 연구성과는 칠지도를 백제가 倭에 獻上한 것이고, 그 근거로 《日本書紀》의 神功王后 52年條에 나오는 기사를 든 것이다.


 제 2유형은 명문 연구사 심화되어 명문의 글자수와 제작연대가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일본학자 福山敏男․榧本杜人 등에 의해서 前面의 34자, 後面의 27자, 총 61자가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는 연호를 '泰和'로 읽게 되었고 이를 東晋의 연호로 해석하여 泰和4년을 동진의 太和4년과 동일시 하여 369년으로 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칠지도의 백제헌상성이 일본학계의 통설이 되었고, 《일본서기》의 관련기사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제 3유형은 북한학자 金錫亨의 分國論1)과 그에 대한 반론이 주류를 이룬다. 이 때 나온 결론은 '泰和'는 백제의 年號이고, 前面의 侯王과 後面의 倭王은 동일인이며, 황제의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下賜하였다는 百濟下賜設이 제기되었다.


 제 4유형은 '泰和四年'을 東晋의 '太和四年'으로 비정하고, '奇生聖晋'의 '聖晋'을 東晋으로 판독하고 칼의 제작지를 東晋으로 본 것이다. '世子'란 용어도 남북조시대에는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경우에 사용되기 때문에 이 견해를 東晋下賜設이라 불렀다. 칠지도가 원래 東晋에서 만든 것이데, 백제에 건너와 명문을 넣은 뒤 다시 왜에 주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설은 '奇生聖晋'이 '奇生聖音'으로 확인됨으로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상과 같이 칠지도 연구사를 간략하게 4가지 유형으로 살펴보았는데, 연구의 실마리와 방법이 처음부터 석연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명문의 엄밀한 검토와 해석이 선행된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의 기사를 근거로 금석문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는 그 뒤에도 시정되지 않았다. 둘째, 연대 고증을 위한 자료 선정에 있어서 일본측 해석에 유리한 자료만을 선별하여 검토했기 때문에 연대 고증의 신빙성이 취약하다. 셋째, 명문 작성의 주역은 백제임에 분명한데도 중국과 일본 자료만을 조사하였고, 한국계 금석문 자료는 소홀히 다룬 점이다. 넷째, 1945년 이후에도 일본학계의 국수주의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칠지도 명문에 대한 연구는 잘못된 연구방법으로 일본학계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한국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단순히 반박하는 정도였다.


  七支刀에 관한 견해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칠지도를 백제로부터의 헌상품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일본학계에서 일반적인 학설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福山敏男, 榧本杜人, 西田長男, 三品彰英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칠지도는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하는 설로 藪田嘉一郞이 대표적이다. 셋째 칠지도는 백제의 우위성을 드러낸다는 百濟下賜說이다. 이 주장은 한국학계의 대표적인 학설로 金錫亨, 李丙燾, 李進熙, 일본학자로 上田正昭 등을 들 수 있다. 넷째로 칠지도의 배후에는 東晋이 있었다고 하는 東晋下賜說이다. 栗原朋信이 대표적이다.2)


 이처럼 칠지도에 대한 연구는 그 중요성을 입증하는 것처럼 연구의 관점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따라서 칠지도 연구는 여러 학자들간의 합일되지 않은 다양한 논점의 한계를 극복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동안의 한․일 양국학계의 칠지도에 관한 연구상황과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고, 비교해보자 한다. 물론 칠지도 명문의 세부적인 고찰도 다룰 것이지만 이는 너무나 많은 학자들이 각자 많은 해석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 그 모든 것을 다루기는 어렵고 대표적인 학자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볼 것이다. 

 

 Ⅱ. 石上神宮의 七支刀

 七支刀는 日本의 奈良縣 天理市에 소재한 石上神宮 內의 神庫에 봉인되어 있는 일본 최고의 국보이다. 石上神宮는 그 기록은 이미 『古事記』와 『日本書紀』가운데도 자주 나타나는 오랜 신궁이다. 이 石上神宮은 宮室의 寶物을 보관하는 寶庫로서 여러 종류의 무기류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는데 칠지도도 그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칠지도는 全長이 약 75㎝, 刀身이 65㎝, 자루부분이 약 10㎝이며, 刀身 左右에 세 개의 가지가 서로 엇갈리게 돋혀 있는 특이한 製品이다. 李丙燾는 일찍이 중국에서는 이러한 형태가 없었다고 한다.3)

  칠지도에는 前面에 製作 年月日과 그 干支, 品名, 吉祥句, 作者 등이 기록되어 있고, 後面에는 칠지도가 전달된 대상과 그 목적이 새겨져 있다. 칠지도가 어떠한 용도로 쓰여졌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그 주장이 다양하지만 종교적인 儀具로써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金元龍은 칠지도가 백제시대의 중요한 금속공예품의 하나로, 특수한 儀器的 武器라고 하였다. 또한 左右의 三枝는 신라․백제의 冠飾 三枝와 같고, 그것은 샤먼敎에서의 聖樹를 상징하는 것으로, 현재도 일본의 神道에서 神官이 사철나무 가지를 흔들어 벽邪淨불하는 전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4) 李道學 역시 대부분의 銘文鐵劍은 칼등에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七支刀는 명문의 훼손이 쉬운 칼면에 새겨져 있으므로 칠지도는 비실전용 刀劍으로 聖器 혹은 呪具로서의 가능성이 크다고 하고 있다.5) 칠지도가 소장되어 있는 石上神宮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古事記》와 《日本書紀》가운데도 자주 나타나는 역사가 깊은 신궁이다. 書紀 神代紀에 인용된 一書中에 素盞鳴命이 八岐大蛇를 斬殺했다고 하는 劍을 이름하여 '蛇之鹿正'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 《古事記》垂仁條에는 印色入日子命이 鳥取의 河上宮에서 橫刀壹千口를 만들게 하여 이를 石上神宮에 奉納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石上神宮에는 神寶를 장치하는 神庫가 있어 歷代의 寶物․名劍 등을 보관하기 때문에 백제에서 보내온 칠지도 등도 여기에 보관되었던 것이다.6)

 이러한 칠지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석상신궁의 大宮司로 있던 管政友(1824~1897)에 의해서였다. 그는 1873년(明治 6년) 학자의 신분으로 석상신궁에 취임하게 되었고, 1874년 8월 신궁의 禁足地에서 劍과 曲玉등을 찾아냈고, 또한 근처에 있는 神庫에서 칠지도를 찾아냈다. 그는 뒤에 "아주 시커멓게 녹슬었는데 金色이 조금 보이는 게 있어 의심이 나서 그 위의 녹을 조심스레 제거하다 보니 비로소 문자가 나타났다", "이것은 내가 이 신궁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도면에 새겨진 명문은 오랜 세월동안 自然수化로 인해 해독이 불가능한 것이 몇 군데 있고 年號와 月日에 대한 글자가 人爲的인 刺削이 가해져 있는 실정이라 명문해석에 큰 어려움을 주게 된다. 이에 대해 李進熙는 명문의 이같은 刺削의 장본인은 管政友라고 주장하고 있다.7) 이는 그가 명문의 중요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神功紀와 결부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는 칠지도에 대한 기록이 어떻게 남겨져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五十二年 秋九月丁卯朔丙子, 久저等從千熊長彦詣之. 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 及種種重寶. 仍啓曰, "臣國以西有水, 源出自谷那鐵山. 其邈七日行之不及. 當飮是水, 便取是山鐵, 以永奉聖朝". 乃謂孫枕流王曰, "今我所通, 海東貴國, 是天所啓, 是以, 垂天恩, 割海西而賜我. 由是, 國基永固. 汝當善脩和好, 聚斂土物, 奉貢不絶, 雖死何恨" 自是後, 每年相續朝貢焉』8)

《일본서기》에서는 '七支刀'를 '七枝刀'로 표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支'와 '枝'는 동일한 의미라 하여 이를 바탕으로 일본학계에서는 칠지도를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七枝刀와 동일시하면서 칠지도 헌상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서기》의 연대를 120년(二週甲) 끌어내려 神功皇后52년조의 기사를 372년으로 비정하였으며, 이로써 神功皇后 52년조 기사에 보이는 七枝刀와 석상신궁의 칠지도를 동일한 유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일본학계는 大和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일부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소위 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칠지도 명문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Ⅲ. 七支刀 銘文解釋 考察

七支刀 銘文에 대한 연구는 그 역사가 이미 100여년 동안 긴 시간이 지나왔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그에 따른 학설도 매우 다양하다. 특히 한․일 양국 학계의 칠지도에 대한 연구는 각별한 관심속에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칠지도를 둘러싼 논쟁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칠지도를 백제로부터의 헌상품으로 보는 百濟獻上說, 둘째 칠지도는 일본제라고 생각하는 僞作說, 셋째, 칠지도는 백제의 우위성을 드러낸다는 百濟下賜說, 넷째, 칠지도의 배후에 東晋의 존재를 지적하는 東晋下賜說로 나눌 수 있다.9)

 百濟獻上說은 일본학계의 가장 지배적인 학설로서 대표적인 학자는 福山敏男이다.   그는 관정우 이후 칠지도 명문 해석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킨 사람으로 金石銘文 해석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僞作說은 金廷鶴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서기》에 쓰여진 '七枝刀'라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사기》에 쓰여진 橫刀, 즉 太刀를 潤色하여 七支刀라고 한 것이라 보고, 따라서 석상신궁 소장의 칠지도는 《일본서기》의 기사에 의하여 어느 시기에 假作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10)

百濟下賜說은 한국학계의 주도적인 학설로서 金錫亨, 李丙燾, 李進熙 등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며, 일본학계의 학자로는 上田正昭가 대표적이다. 그는 칠지도는 백제왕의 정치세력이 한층 높아진 때 만들어진 것으로, 명문의 형식이 下行文書의 형식이고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文言을 취하고 있다고 하면서 백제왕이 후왕이라 본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라고 주장하였다.

 東晋下賜說은 栗原朋信이 대표적인데, 그 또한 칠지도의 명문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주는 형식의 명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上田正昭와는 달리 상위자를 백제에 그치지 않고 백제가 東晋의 명에 따라 칠지도를 후왕에게 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칠지도 명문해석에 대해서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학계는 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기 위해 칠지도 명문을 이용하고 있으며, 한국학계는 이를 단순히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명문해석 연구를 저해하는 것이다. 양국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귀중한 역사적 보물을 이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으로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한․일 양국 학자들의 의견을 정리해 보고 세부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학계학자

명문해석

년도

菅 政 友

泰始四年月十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벽百兵□供□□□□□□□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生聖晋□爲□王□造傳示□世

1907

星 夜 恒

泰初四年□月十一日丙午正陽造□練□七支刀□벽百□□□供[侯][王]□□□□作

[先]□□□未有此[刀][百]□□□□奇生聖□[故]爲□□□造[傳]□□□

1892

高橋健自

 泰[始]四[年]六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生벽百兵□□供□□□□□□作

□□□□□有此刀百□□也□□生聖□[故][爲]□□王□造□不□□也

1914

喜田貞吉

泰初四年六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生벽百兵□□供[侯]作

□[世]□□□有此刀百□□世□[奇]生聖[晋]故爲□王□造[전]不□世

1919

木崎愛吉

泰初四年六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生벽百兵□□供□□□□作

□□□□□有此刀百□□也□□生聖□故爲□□王□□造□不□□也

1921

大場磐雄

 泰初四年六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生벽百兵□□供□.......

□□□未秀此刀.....

1929

末永雅雄

 泰初四年六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鍊□七支刀生벽百兵□□供□□□□□作

□□□□□有此刀百□□也□□生聖□故爲□□王□造□不□□也

1941

福山敏男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生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자□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不□世

1972

榧本杜人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世]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晋故爲倭王[旨]造전[示][後]世

1955

西田長男

泰[和]四年[五]月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世]벽百兵宜復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替]造傳[示][後]世

1956

藪田嘉一郞

泰初四年六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政刀以벽百兵宜復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世身生聖意故爲倭王敬造傳示後世

1961

三品彰英

泰始四年六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生벽百兵百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자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전不倭世

1962

일본학계학자

명문해석

년도

佐伯有淸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出]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자[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전示[後]世

1977

岡 崎 敬

泰和四年四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晋故爲倭王旨造전示□世

1971

鈴木靖民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生]벽百兵宜[復]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자[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世]

1982

山尾幸久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벽百兵宜□復和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者旨造傳[示][後]世

1988

 

 

 

한국학계학자

명문해석

년도

金錫亨

 泰和四年五月十三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世벽百兵宜供供□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滋王由益壽出聖旨故爲□王□造傳示後世

 1963

李丙燾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出]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74

黃壽永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世]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77

金貞培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傳示後世

1980

李進熙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벽百兵宜□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奇生聖□故爲倭王□造傳示後世

1982

朴鐘大

 泰□四年□月十□日正陽造百鍊□七支刀□벽百兵宜□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百자□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世

 1980

許興植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世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造傳□□世

 1984

金鍾恒

泰和四年□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鍊구七支刀□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滋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不□世

1987

金聖昊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벽百兵宜復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88


한국학계학자

명문해석

년도

李道學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벽百兵宜□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後世

1990

金昌鎬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벽百兵宜復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世

1990

蘇鎭轍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鋼七支刀生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慈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94

이근우

泰和四年□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구七支刀世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자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世

1994

金仁培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出]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95

金元龍

泰和四年四月十一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生벽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後世

1996

盧泰天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生벽百兵宣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滋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98

金澤均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鋼七支刀□避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자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98

연민수

 奉□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철七支刀世벽百兵宜復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자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1998



1) 前面의 銘文解釋 考察


(앞면의 글)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生(?出)벽百兵 宜供供侯王

 □□□□作


▶ 「泰和四年」

 명문의 처음 부분이면서 명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年號에 관한 글자이다. 현재 연호에 대한 부분 중 '和'자는 左邊만이 희미하게 남겨져 있어 아직까지도 정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를 주로 "의"邊, 혹은 "女"邊이나 "禾"邊으로 보아, 중국 西晋의 연호인 "泰始"나 "泰初" 등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東晋의 太和로 비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太'와 '泰'가 서로 의미가 통하며 같은 글자라 하여, 특히 東晋의 太和 4년은 백제의 근초고왕 24년에 해당함으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칠지도 제작의 주체가 백제가 아닌 중국으로 보아 칠지도가 백제로부터의 하사품이 아닌 것으로 단정짓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명문의 최초 발견자인 管政友는 '泰'자로 시작되는 명문의 연호는 西晋 武帝의 '泰始'로 보아야 한다고 하고, "泰始四年"은 《日本書紀》 神功紀 52년조의 七枝刀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泰始四年"은 서기 268년이고 신공기 52년은 252년이므로 칠지도가 제작되기도 전에 헌상되었다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管政友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이 여기에 대한 의견을 냈으나 주로 《일본서기》의 간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 즉 干支를 2運甲 낮추어야 된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공기 52년인 252년을 중국의 비슷한 연대와 연호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福山敏男은 西晋의 "泰始"가 아닌 東晋의 '泰和'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되는데 이를 통해 일본학계는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그는 漢字의 '泰'자와 '太'자는 같이 통용되는 것이 常例임으로, 명문의 연호는 泰和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東晋의 연호인 太和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칠지도의 제작연대는 東晋 太和四年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것은 서기 369년의 일로서 《일본서기》신공기의 칠지도 헌상 기사(372)와 거의 연대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11) 이 東晋泰和說은 무엇보다도 年代가 잘 들어맞는다는 이유로 큰 호응을 받게 되었으며, 지금은 일본학계의 통설로 자리잡은 실정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가장 큰 의문은 작은 검의 명문을 새김에 있어 '泰'자와 '太'자가 동일한 글자라면 간단한 '太'자로 표기하지 않고 굳이 복잡한 '泰'자를 썼을까하는 것이다. 일본학계의 연구가 《일본서기》에 기반을 두고 있어 무조건 《일본서기》의 기사에 맞추기 위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연호에 대한 한국학계의 연구방향은 주로 백제의 연호라는 쪽이다. 李丙燾는 삼국시대의 금석문에 있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으며, 대개 自國의 연호나 그렇지 않으면 干支로 표시하는 것이 예로 되어 있다고 한다. 즉 '泰'자 아래의 글자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이 중국의 연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연호로 해석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그 당시 백제와 동진과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12) 즉 동진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것은 372년이므로 수교가 이루어지기도 전인 369년에 이미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東晋과의 수교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에 나타나 있다.

『二十七年 春正月遣使入晉朝貢』13)

 이렇게 해서 한국학계에서는 近肖古王이나 古爾王의 연호로 보고자 하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여러 가지 기록을 보아서도 백제의 연호일 것이라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연호 다음의 연도에 대한 것은 일본학계와 한국학계 모두 "四年"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五月十六日」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날짜에 대한 명문으로 해석은 매우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그 이유는 月․日을 알려주는 중요한 두 글자가 거의 마모가 되어 자세한 판독이 어렵기 때문이다. 해방이전까지만 해도 "六月十一日"이 유력하였으나 "五月十六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泰和四年 五月十六日"은 그 干支가 뒤에 이어지는 '丙午'가 아니라 '乙未'가 되는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한국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일본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五月十六日"에 동의하고 잇으나 그 해석적인 면에 있어서는 앞의 연호 및 뒤의 간지와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어 여러 가지 해석이 이루어져 있다. 한편 李道學은 "丙午正陽"은 원래 吉祥句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日干支를 실제 月日에 맞추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丙午正陽"은 태양으로부터 불을 채취하여 철을 단조, 주조하는 盛夏(4, 5, 6월의 여름 가운데 그 眞中)의 병오(丙은 火의 兄, 午는 正南)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丙午正陽은 여러 명문에 常用되는 길상구이므로 "丙午"라는 일간지와 월일의 일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4)

 양국학계에서 이 부분을 가지고 해석이 분분한 이유는 앞의 날짜와의 관계 때문이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미 369년으로 그 연도를 고정하고 369년의 "丙午正陽"과 날짜가 맞지 않는 부분을 길상구라 하여 해석을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

▶「造百練鐵」

 '練'자에 대해서는 '練'자인지 '鍊'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두 글자의 뜻이 통함으로 이 부분에 대한 별다른 이견은 없다. '鐵'자에 대해서도 '鋼'자나 '鐵'자의 古語인 '철'자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鐵'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百練鐵"로 파악된다. 百練이라는 말은 흔히 鍛造와 관련되는 것으로, 단조란 금속을 가열하여 두드려서 필요한 형체를 만드는 것인데 실제로 칠지도의 모조품을 만들어 보면 본체와 가지 사이가 너무 좁아서 단조가 대단히 어려웠다고 한다. '練'자는 주로 '두드렸다'는 뜻으로 보고 이 부분은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칠지도가 수없이 단련한 강철을 이용해 만들어진 것으로, 매우 세련된 수공업적 작업과정을 거친 완성도가 뛰어난 철제품임을 알 수 있다.

▶「七支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학계 모두가 "七支刀"로 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일본서기》에는 '枝'자로 표기되어 있고 칠지도에는 '支'로 되어 있지만 의미상에 있어서 크게 차이나는 것은 없다. 이에 일본의 학자들은 神功皇后때에 백제가 일본의 천황을 위해서 헌상한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칠지도의 전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억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生벽百兵」

 처음 글자는 '生'자, '世'자, '出'자 등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이 주위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백제를 구원했기에 백제가 그 보답으로 칠지도를 만들어 보냈다"고 하는 의미에서 과거형인 '生'으로 보아왔지만 최근에는 미래형인 '世'나 '出'자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李丙燾는 '生'자같이 보이지만 '出'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 의미가 더 확실하다고 하여 이 부분을 "이 칼이 나아가 백병을 물리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15) "百兵"에서 '百'은 '一百'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모든' 또는 '다수'라는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학계나 일본학계가 거의 동일한 시각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하나로 통일되지는 못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모든 병해를 막을 수 있다"라는 정도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의견으로 '벽'자를 '徵'의 뜻으로 보는 것이다. 즉 "백병을 부른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의견은 백제왕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칠지도 제작의 의미를 고찰하려고 하는 시도로 보인다.16)


▶「宜供供侯王」

 이 명문에 대한 해석은 육안으로 제대로 식별할 수 없기에 매우 난항을 거듭했던 부분이다. 현재 첫 글자에 대한 의견은 '宜'자로 보는 것으로 좁혀졌지만 그 뒷글자에 대해선 여전히 많은 논란이 오가고 있다. 즉 "供供"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復供"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전제적인 연구성과로 볼 때는 "供供"으로 보는 것이 주도적이다. 이는 공공으로 보았을 때 해석이 증여․하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復供"으로 보았을 때는 다수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뒤에 이어지는 "侯王"에 대한 문제이다. 이 부분에 대한 판독은 한일학계 모두가 일치하고 있지만 가장 논쟁이 많은 부분 중의 하나이다. 후왕의 성격에 대해서 일본학계는 칠지도 후면에 나오는 倭王과 같은 것으로 해석해 왔으나 이러한 해석에 대해 최근의 연구자들은 후왕이 왜왕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 후왕의 上王이 되는 제왕은 바로 백제왕이 아니라 東晋의 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후왕'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는 금석문 등에서도 자주 보이는 것으로, 어떠한 신분질서상의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길상구로 보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학계는 후왕이라는 명문이 칠지도가 하사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후왕=왜왕이고, 이는 백제의 신하로서 백제국의 왕이 上王이 된다는 것이다. 

 李進熙는 백제에서 侯王制度가 등장하는 것은 5세기 후반이라고 지적하였고 따라서 칠지도의 제작연대를 480년 北魏 太和4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기서 후왕의 존재는 백제의 대왕에 귀속되어 있는 신하로서의 후왕으로서 백제의 우위를 말해주는 것이므로 칠지도는 하사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7)

한국학계와 일본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해석은 모두 자국 중심적인 해석으로 그 결말은 보지 못하고 있지만 한 가지 등식에 있어서는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즉 후왕=왜왕이라는 등식인데, 단지 백제와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는 두 학계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作」

 이 부분은 제일 끝자만이 '作'자로 추정되고 있을 뿐 나머지 명문은 정확히 어떤 자인지 판독이 불가능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학자들이 제작자의 이름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는데 고유명사인 인명의 파악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장이 없는 형편이다.


2) 後面의 銘文解釋 考察


(후면의 글)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世後世


▶「先世以來未有此刀」

 이 부분은 비교적 금상감이 잘 남아 있어 그 글자를 확연하게 판독할 수 있다. 그 뜻에 있어서도 "선세이래로 이러한 칼이 없었다"정도로 해석하는데 양국학계의 이견이 없다. 단지 그 내포되어 있는 뜻을 놓고, 양국학계가 팽팽히 맞서 있다. 즉 일본학계에서는 이 부분이 단순히 吉祥句라고 주장하면서, 앞뒷면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을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학계에는 대체적으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전달함에 있어 그 특별성과 칠지도 자체의 우수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문구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백제하사설이 더욱 확실해 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百濟」

 한일양국학계간에 가장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 의미에 있어서는 "百濟"로 보고 있지만 문자자체로 보아서는 '濟'자가 자세히 보이지 않아 '濟'자인지 '滋'자인지 통일된 견해를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慈'자로 보려는 견해가 많은데 이는 백제를 낮추어 부르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滋'나 '殘'은 '濟'의 음차이지만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백제를 낮추어 부르기 위해서 고구려가 사용하였던 문투였던 것이다.

 일본학계에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濟'자가 아닌 '滋'자로 판독하고 있는 것은 은근히 백제를 낮추어 왜국과의 관계를 제설정하려는 의도로서, 결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三國史記》를 보아도 처음 백제가 건국하고 국호를 "十濟"라고 하였다가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百濟"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濟'자를 계속해서 이어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통적으로 쓰던 '濟'자를 쓰지 않고 '滋'자를 썼을리는 만무하다고 할 수 있다.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百濟...』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18)

칠지도의 배후에 어떠한 나라가 있던 지간에 제작한 나라, 즉 自國의 국호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국호에는 자국의 위상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음으로 명문상으로 확실하지 않다고 하여 다른 글자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王世子」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주체가 단수냐, 복수냐 하는 것이었다. 즉 백제왕, 백제왕세자, 백제왕과 왕세자인가 하는 것인데, 일본학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王世子"로 보고 있으나 왜왕과 비교할 때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강력히 부정하고 있다.

 한국학계는 대부분인 "王世子"로 보고자 하는데 백제하사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부분으로 보고 있다. 즉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칠지도를 만들었기에, 백제왕이 왜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金錫亨은 이에 대한 해석을 삼국시대에는 물론이고 왕의 뒤를 이을 아들을 통례로 '太子'라고 하지 '世子'라고 한 일은 없다고 하였다. 金仁培 역시 이 의견을 따라서 한국의 고대 삼국시대에는 물론이고 왕의 뒤를 이을 아들을 통례로 '太子'라고 했지 世子라고 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世世"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1) 蘇鎭轍도 백제왕세자가 왜왕을 그의 후왕으로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 《禮記》에 나와있다고 하면서 오직 그의 父王인 '大王'만이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世世(세세토록)"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9) 하지만 한국학계의 모든 해석은 백제왕이 왜왕보다 우위에 있음을 전제로 한 명문해석이다.


▶「奇生」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 중 하나이다. 일본학계서도 조차 통일된 의견이 제기되지 못할 만큼 해석이 분분하다. 즉 "奇生"이란 것을 人名으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서술적인 표현인지에 대해 통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명으로 본다면 앞의 명문이 왕세자가 되면서 "백제왕세자 기생에 의해서 칠지도가 하사되었다"라고 해석된다. 뒤의 경우로 본다면 '기탁하여 삶'으로 해석됨으로 東晋의 배후를 인정하면서 백제하사설을 부인할 수 있게 된다.

  福山敏男은 이 명문이 인명일 것이라 하고, 그 주인공이 '貴須'였으며 백제왕세자를 백제의 왕과 세자로서 그 대상을 '近肖古王'과 '貴須'로 보았다. 이 주장은 이후 학계에 가장 유력한 명문해석의 기초가 되었다.

한국학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일본학계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있지만 종합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통일된 시작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칠지도가 하사되었다는 것이다.

  '貴須'로 보는 해석은 한국학계에서도 일반화 되었는데, 李丙燾는 이에 대해 태화를 근초고왕대의 연호로 비정하여 그에 따라 근초고왕의 아들인 '仇首'를 '奇生'으로 판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奇生"을 百濟王世子의 名號로 보아, "奇生"은 貴須․仇首의 通音이므로 실재로는 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20)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는데, "奇生"을 '기이하게 생겨난 고로'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각종 史書에서도 '近仇須王'에 대한 표기가 보이지만 그 표기법에 '貴首, 貴須'로 나타나고 있는바, 이같은 음을 벗어난 예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奇生과 관련짓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21)

 이처럼 일본학계나 한국학계 모두가 이 부분을 인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서술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聖音」 

 이 부분에 대한 일본학계의 해석은 "聖晋"이 가장 우세하다. 현재 남아 있는 명문을 보아 '晋'으로 볼 것인지 '音'으로 볼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성음으로 보기 보다는 성진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東晋을 연결하여 칠지도 문구상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下行形式의 문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칠지도의 백제하사설을 부정하면서 동진의 존재를 끌어들여 동진하사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을 성음으로 보아 '성스러운 소식'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백제하사설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객관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성음으로 보는 견해 중에서 복산민남은 이 부분을 "백제왕과 왕세자가 生을 御恩(倭王)에 依倚하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하면서 천황의 존재를 백제왕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로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백제헌상설을 주장하고 있다.22) 

 이 부분을 佛敎와 관련지어 보는 견해도 있는데, 즉 "聖音"을 '佛陀의 소리', '釋迦의 가르침', '釋尊의 恩澤' 등의 불교적인 용어로 간주하는 것이다. 村山正雄은 성음을 불타의 말씀으로 보고 성음과 칠지도가 불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23)

 한국학계 역시 일본학계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명문해석은 두 가지 정도로 좁혀진다. 첫째는 성음으로 보는 견해로 백제왕자의 이름내지 敬稱으로 생각하는 견해이다. 즉 성음은 백제왕자에 대한 古訓에 해당하는 말로 왕자에 대한 존친인 殿下와 같은 백제어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24)

 두 번째로 성음을 성스러운 소식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앞의 기생과 함께 칠지도의 제작주체로 백제왕을 설정하고 그 치세기간에 성스러운 소식이 생긴고로라고 해석하는 견해인데 이는 좁은 칼면에 중복되게 이름을 여러 번 사용할 리가 없다는 시작에서 나온 주장이다.25) 이처럼 한국학계에 있어서 명문해석상 대전제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백제왕의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백재왕을 높이는 경칭으로 혹은 백제왕세자를 높이는 경어적 표현을 씀으로써 왜왕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故爲倭王旨造」

 한일양국학계가 명문 자체의 해석부분에서는 모두 "故爲倭王旨造"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데, 일본학계에서는 '爲'자를 '~를 위하여'로 해석하고 헌상설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명령자를 동진의 황제로 설정하고, 그 명을 받아 백제왕이 만들어 보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한국 학계는 이에 대해 왜왕을 위하여 백제왕이 명령을 내려 하사한 것이라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즉 왜왕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왜왕이 된 고로' 등으로 해석하여 백제가 上國으로서 下國인 일본에 신임의 징표로 칠지도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旨'자에 대한 해석 또한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즉 人名으로 보거나 '敎旨, 指示' 등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먼저 前者의 경우를 본다면 외교상 상대국의 王名을 거론하는 것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보내는 문서에서만 가능한 것임으로 칠지도가 왜왕에게 하사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上田正昭는 이를 왜왕(應神天皇)의 이름으로 보고 명문의 형식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즉 이 칼은 왜왕 지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준 것이라는 것이다.26) 敎旨의 의미로 보는 견해는 日本天皇의 교지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백제왕은 천황에게 칠지도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받고 만들어 받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한국학계의 명문해석은 대부분이 '旨'로 판독하고 있고, 그것을 왜왕의 이름일 것이라는 통일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편 소진철은 지의 정체에 대해 일본계 왜왕의 이름이 아니라 백제 骨族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27) 이는 分國設 및 沸流백제설에 바탕을 둔 해석으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

 金仁培는 이를 '왜왕인 된 뜻으로'라고 해석하고 있다. '旨'가 구체적으로 왜왕의 누구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旨'라는 이름으로 행세한 왜왕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막연히 왜왕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 것으로 "왜왕을 위하는 뜻으로 만들었으니", 혹은 "왜왕이 된 뜻으로 만들었으니"라고 풀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28) 한편 李道學은 旨는 그 字意가 '생각', '뜻'이고, 公文 가운데도 임금의 뜻과 관련하여 이 글자가 쓰임으로 굳이 인명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敎旨'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29)

  '造'자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 '造'자로 읽고 있다.


▶「傳示後世」

 양국학계 모두 "傳示後世"로 판독하고 있으며, 그 뜻은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양국학계가 큰 이견은 없지만 일본학계에서는 이를 길상구로 보고 있는데에 반해 한국학계에서는 이 부분을 하행 형식의 명령조의 말로 백제하사설의 근거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3) 前․後面 銘文의 關係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한일학계의 연구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명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前面의 명문에는 칠지도가 제작된 일반적인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연호와 제작․년․월일이 쓰여있고 이 刀가 백련철강으로 만들어져 백병을 물리칠 수 있으며 후왕에게 줄만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에 제작자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後面의 내용은 전면보다 더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先世以來로 이러한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가 이를 왜왕을 위해 만들어 주었으니 후세에 傳示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칠지도의 전면의 명문과 후면의 명문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서로 관련없는 기록으로 보고 따로 떼어서 고찰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 동안의 일본학계의 연구는 명문의 전․후면을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보고 이루어져 왔다. 명문의 문장을 보면 전면에서 후면으로 이어지는 문장으로서 年月日, 吉日吉時, 刀名, 그리고 吉祥句, 作刀者, 緣由의 순서로 되어 있다. 鏡(거울)의 명문에서는 作者와 作所가 글 끝에 오고 글의 처음에 나오는 예가 있으나 칠지도에 있어서는 뒷면의 문장이 앞면보다 글자수가 적은 것으로 오히려 '□□□□作'은 뒷면의 문장에 옮겨야 글자수에 균형이 잡히는 것으로 보아 전후면이 이어진 문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후면이 '吾'라고 하지 않고 '百濟國'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제 3자적 문장이라는 것이다. 일본측에서는 372년 후반에 백제에 온 동진의 冊封使가 칠지도를 가져온 것으로 상상하여 '吾'라고 하지 않고 백제왕이라는 3자적 문장을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30) 그러나 이는 하사하는 주체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여기에서도 동진과 관련시킨 것은 백제의 위상을 저하시키기 위한 일본의 저의에서 나온 무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일본학계의 초기연구 때에는 칠지도를《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기의 七枝刀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다음에는 고고학적 조사 위에서도 칠지도가 백제에서 헌상하였다고 보았다. 백제에서 칠지도를 왜왕에게 한상하였다는 것은 신공기의 기사를 칠지도라는 실물과 일치시키려는 데서 나온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발상은 칠지도 명문의 전후면의 자료를 서로 연관시켜 보지 않고 분리시켜서 검토하였기 때문이다. 칠지도 연구에서 중요한 방향전환은 백제가 왜왕에게 헌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하였다는 뜻으로 풀이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적어도 명문의 전후면의 관계를 연결시켜 해석하는 작업이 활발함에 따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로 栗原朋信과 上田正昭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칠지도가 하사되었다는 대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이같은 일면의 論旨에서 '侯王'와 '倭王'의 문제가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우선 栗原朋信은 결론적으로 칠지도의 동진하사설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명문에 敬語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문장이 하행문서의 형식으로 상위자가 하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上田正昭와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이 칼은 백제의 궁상을 도와준 왜왕의 공로를 높혀서,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 황제(海西公)가 백제를 통하여 왜왕 지에게 보낸 것이다"31)라고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그는 후면의 명문 가운데 '聖音' 부분을 '聖晋'으로 판독하면서 동진을 백제와 왜의 양국사이에 개입시켜 놓고 칠지도 하사의 주체를 동진으로 본 것이다.

 반면에 上田正昭는 상위자를 백제로 설정하였다. 그의 의견을 보면 "백제왕의 정치세력이 俟集하여 한층 높아진 때의 作刀이다. 그것도 그 명문의 형식은 하행문서의 형식이고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文言을 취하고 있다. 또 '왜왕에 供供'이라는 공공도 헌상의 의미보다는 공급의 의미라 할 것이다. 이 刀는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준 것이다. 명문의 어디에 헌상․봉헌․奉함․贈함의 의미가 있는가? 헌상한다면 상대를 우선 왜왕이라고 부를 리가 없지 않는가. 백제왕이 후왕이라 본 왜왕에게 하사한 刀라고 나는 본다."32)인데, 그는 후왕와 왜왕을 동일인으로 보고, 명문의 전면과 후면에 나타난 글을 서로 연결시켜 이해한 것이다. 이는 종래 일본학자들의 견해와 매우 다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神保公子는 명문의 전후면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고 '侯王'이라는 용어는 신분제도로서의 후왕이 아니라 吉祥句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후왕이라는 의미가 후왕처럼 신분이 높게 되거나 출세할 수 있다는 정도의 길상구라고 하더라도 천황에게 후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을까? 따라서 이 문구로 보더라도 이는 당시 왜의 지도자가 결국 후왕정도의 위치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명문에서 보여주는 후왕은 융통성 있는 해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후면의 기록과 무관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전후면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구가 있다. '先世以來 未有此刀' 부분인데 여기서 '此刀'는 분명히 전면에서 밝히고 있는 칠지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先世以來로 倭에는 此刀, 즉 칠지도가 없었으며 백제로부터 이같은 종류의 도가 전해짐으로서 전혀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학계의 주장은 전․후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문구에 대해서는 단순한 길상구라 하여 그 의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칠지도 명문의 전후면은 서로 연결되며 하행문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어떠한 다른 해석이 나온다 하여도 백제가 칠지도를 왜에게 하사하였다는 것은 변함없는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Ⅳ. 맺음말

管政友로부터 시작된 七支刀 연구는 벌써 100년이 휠씬 넘어섰다. 칠지도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칠지도에 새겨져 있는 전후면 총 61자의 명문에 대한 해석이다. 이는 고대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료이며,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再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칠지도 명문해석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각자 상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명문의 판독에 있어서는 상당부분이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그 의미해석에 대해서는 서로 자국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어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학계는 전체적인 내용을 倭가 백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百濟獻上說적인 입장에서 칠지도를 해석하려 하였고, 이에 따라 연구가 계속 이어지면서 맹목적으로 헌상설을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東晋의 존재를 끌여들이면서까지 백제의 우위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백제가 사회, 경제, 문화적인 모든 면에 있어서 왜보다 우세하였다는 가정하에 百濟下賜說적인 입장에서 칠지도를 해석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국학계의 대립은 전체적인 칠지도 명문의 해석에 치중한 나머지 현재 남아 있는 명문 자체를 망각하게 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칠지도 연구는 지금까지도 매우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한국학계에 있어서 칠지도 연구가 한계성을 뛸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칠지도의 실제 모습을 접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고대사 연구가 다른 시대의 연구에 비해 어려운 이유도 실물을 접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미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칠지도를 국보라 하여 칠지도의 공개를 꺼리고 있다. 따라서 일본학계에서는 칠지도의 실물을 공개하여 보다 더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칠지도는 어느 한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자기의 학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편협한 연구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며, 한일 양국학계가 서로 합동하여 각자의 연구를 비교하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參 考 文 獻

◎ 資料

◇成殷九 譯註, 《日本書紀》, 정음사, 1987.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96.

 

◎ 單行本

◇金仁培․金文培, 《任那新論》, 고려원, 1994.

◇蘇鎭轍, 《金石文으로 본 백제 무녕왕의 세계》,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4.

◇金元龍, 《寒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96.

◇李道學, 《韓國古代史 노트》(下), 一志社, 1996.

◇李進熙, 《廣開土大王陵碑의 探究》, 一潮閣, 1997.

◇李道學, 《새로 쓰는 백제사》, 푸른 역사, 1997.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7.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 論文

◇李丙燾, 〈百濟七支刀考〉, 《震檀學報》 第 38號, 1974.

◇李道學, 〈百濟 七支刀 名文의 再解釋〉, 《韓國學報》 60, 一志社, 1990.

◇金貞培, 〈七支刀 硏究의 새로운 방향〉, 《東洋學》 第 10輯,

            단국대 부설 동양학연구소, 1980.

◇金廷學, 〈石上神宮所藏 七支刀의 眞僞에 對하여〉, 《百濟硏究》 第 17輯,

           忠南大 百濟硏究所, 1986.

◇盧泰天, 〈4世紀代 百濟의 炒鋼技術〉, 《百濟硏究》 第 28輯,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8.

◇姜鍾元, 〈百濟 近肖古王의 王位繼承〉,《百濟硏究》 第 27輯,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7.

◇安國承, 〈七支刀 銘文 解讀을 考察해 본 百濟의 對倭關係〉, 《京畿鄕土史學》              창간호, 1996.

◇金澤均,〈七支刀 銘文에 對한 一考〉, 《江原史學》第 13․14合輯, 江原大 史學會,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