奈解紀(나해기)
帝卽位之日大雨 是年自正月至四月 不雨 故民皆歡慶
帝(제)의 卽位日(즉위일)에 큰 비가 내렸다. 이 해에 1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경축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제10대 奈解 尼師今, AD196년 ~ AD230년, 재위 34년
奈解尼師今立 伐休王之孫也 母內禮夫人 妃昔氏 助賁王之妹 容儀雄偉 有俊才 前王太子骨正及第二子 伊買 先死 大孫尙幼少 乃立伊買之子 是爲奈解尼師今 是年 自正月至四月 不雨 及王卽位之日 大雨 百姓歡慶
내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벌휴왕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이다. 왕비 석씨는 조분왕의 누이이다. 왕은 용모와 풍채가 훌륭하였고 재주가 뛰어났다. 전 임금의 태자 골정과 둘째 아들 이매가 먼저 죽고 장손이 아직 어렸으므로, 이매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내해 이사금이다. 이 해에 봄 1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가, 왕이 즉위하던 날 큰 비가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즐거워하며 경축하였다.
元年 正月 受朝月宮 奈音伊伐飡
원년(AD257년) 1월, 月宮(월궁)에서 조회를 받았다. 奈音(내음, 아달라와 자황의 아들)을 伊伐飡(이벌찬)으로 삼았다.
二年 正月 謁始祖廟
2년(AD258년) 1월, 시조묘(始祖廟)을 찾아뵈었다.
岳門伊伐飡 發仁稟主
악문(岳門)을 이벌찬으로, 발인(發仁)을 품주로 삼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년
2년 1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三年 正月 受朝 南桃
3년(AD259년)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黃長伊伐飡 柿姬稟主
황장(黃長)을 이벌찬으로, 시희(柿姬)를 품주로 삼았다.
四月 壤井楊柳樹王老臥多年 忽自起 皆稱其慶 乃行昔鄒只珍大祭
4월 양정(壤井)의 버드나무 수왕(樹王)이 오랫동안 늙어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저절로 일어났다. 모두 그 경사스러움을 헤아려, 이에 석추(昔鄒)와 지진(내례)의 큰 제사를 지냈다.
五月 西路大水 免其一年租調
5월 서로(西路)에 큰 비가 내려, 그 곳의 일년 동안의 세금을 적합하게 면하여 주었다.
七月 遣謁休 巡視撫恤 吉完伊伐飡
7월 알휴(謁休)를 보내어,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어루만지며 구휼하도록 하였다. 길완(吉完)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년
3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수재를 당한 주와 현에 1년의 세금을 면제하였고, 가을 7월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四年 七月 夫余侵境 美羅生河道女河羅
4년(AD260년) 7월 夫余(부여)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美羅(미라)가 河道(하도)의 딸 河羅(하라)를 낳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4년
4년 7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五年 七月 太白晝見 隕霜殺草 大師國良陳王道十二條 上嘉納之 賜衣酒 角干南亥卒
5년(AD261년) 7월 太白(태백,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大師(대사) 國良(국량)이 王道十二條(왕도12조)를 말하였다. 왕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옷과 술을 내렸다. 角干(각간) 南亥(남해)가 죽었다.
九月 大閱於閼川 美理神生河道女河理
9월 閼川(알천)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美理神(미리신)이 河道(하도)의 딸 河理(하리)를 낳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5년
5년 7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六年 二月 加耶請和 先是與夫余內應謀反 故將以大兵拔之 其君臣懼而腹之
6년(AD262년) 2월 加耶(가야)가 화친을 청하여 왔다. 예전에 夫余(부여)와 內應(내응)하여 謀反(모반)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大兵(대병)을 일으켜 칠려고 하였다. 그 君臣(군신)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三月 大旱 錄內外因 放其輕罪 淡王太子薨
3월 크게 가물었다. 나라 안팎의 죄인을 기록하고,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풀어주었다. 淡王太子(담왕태자)가 죽었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6년
6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해왔다.
3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큰 가뭄이 들자,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였다.
七年 正月 玄公伊伐飡 世羊稟主
7년(AD263년) 1월 현공(玄公)을 이벌찬으로, 세양(世羊)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內禮太后崩 春秋七十八
2월 내례(內禮)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78세였다.
七月 板興伊伐飡 國元稟主
7월 판흥(板興)을 이벌찬으로, 국원(國元)을 품주로 삼았다.
八年 正月 靑神祭
8년(AD264년) 1월 靑神祭(청신제)를 거행하였다.
*AD264년은 甲申年으로 靑神年, 여기서 神은 원숭이(猿)를 뜻함.
七月 夫余入寇 利音擊破之
7월 夫余(부여)가 침입하여, 利音(리음)이 격파하였다.
十月 末曷入寇 萱堅擊破之 桃李再花 忽宗伊伐飡 晉氏稟主 國中行疫 禱于桃山
10월 末曷(말갈)이 침입하여, 萱堅(훤견)이 부딪쳐 깨뜨렸다. 복숭아와 오얏꽃이 다시 피었다. 忽宗(홀종)을 伊伐飡(이벌찬)으로 晉氏(진씨)를 稟主(품주)로 삼았다. 나라안에 전염병이 돌아, 桃山(도산)에서 빌었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8년
8년 10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九年 二月 眞忠伊伐飡 發萱稟主
9년(AD265년) 2월 진충(眞忠)을 이벌찬으로, 발훤(發萱)을 품주로 삼았다.
九月 穀大登 行大場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대장(大場)을 거행하였다.
十年 三月 國良伊伐飡 雲童稟主 紫凰太后崩
10년(AD266년) 3월 국양(國良)을 이벌찬으로, 운동(雲童)을 품주로 삼았다. 자황(紫凰)태후가 죽었다.
七月 霜雹交 下南郊 公穀多被傷 尼今憂之 遣添公祀郊 査?及畯職而歸 太史斗宣奏 太白犯月
7월 서리와 우박이 번갈아 가며 남쪽 교외 아래에 내려 나라의 곡식이 많이 상처를 입었다. 왕이 걱정하여 첨공(添公)을 보내어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고, 준직(畯職, 농사를 담당하는 관리)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태사(太史) 두선(斗宣)이 아뢰어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고 하였다.
八月 弧鳴于金城査?壇 翌日又鳴于壤井廟庭 尼今歎曰 “寡人否德 奈何” 是日 紫井太子薨 黃雲覆天 人皆以爲昇天 仙術甚高故也 利音請加戍西路 許之
8월 여우가 금성(金城)의 사단(査壇)에서 울고, 다음날 또 양정(壤井)의 사당의 뜰에서 울었다. 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덕이 없음이로다.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이날 자정(紫井, 일성과 자리의 아들)태자가 죽었다. 누런 구름으로 하늘이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며, 선술(仙術)이 심히 높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음(利音)이 서로(西路)의 병사를 늘려주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 기사
10년 2월, 진충을 일벌찬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시켰다.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고, 금성이 달을 범했다.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十一年 三月 巡視西路
11년(AD267년) 3월, 西路(서로)를 巡視(순시)하였다.
五月 夫余與浦上通謀
5월, 夫余(부여)는 浦上(포상)과 通謀(통모)하였다.
1. 부여와 포상8국이 동맹을 맺음으로 인하여 급해진 것은 신라와 가야이다. 이에 비지가야는 포상8국의 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짐.
2. <고구려사초>에 포상8국의 이름이 사물(史勿), 초팔(草八), 골포(骨浦), 칠포(漆浦), 가리(加利), 성산(星山) 등이라 하였다.
十月 吉斗使加耶
10월, 吉斗(길두)는 加耶(가야)에 사신으로 갔다.
十二年 正月 利音伊伐飡 兼視軍政
12년(AD268년) 1월, 利音(리음)은 伊伐飡(이벌찬)이 되어, 軍政(군정)을 겸하여 맡았다.
*利音(리음)은 소비갈문왕으로 아달라와 자황의 아들이다. 利音(리음)과 奈音(나음)은 형제이다.
*新羅本紀 奈解尼師今 12년, AD207년.
十二年 春正月 拜王子利音 或云奈音 爲伊伐湌 兼知內外兵馬事
12년(207) 봄 1월, 王子(왕자) 利音(리음)<혹은 奈音(나음)>을 拜(배)하여 伊伐飡(이벌찬)으로 삼고, 內外兵馬事(내외병마사)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AD268년- AD207년= 61년 편차.
五月 述明使加耶
5월, 述明(술명)은 加耶(가야)에 사신으로 갔다.
十三年 二月 西巡一善沙伐至管城 撫慰將士 歷捺己召文而還 凡十有七日 立五太子祠 小光板公汗昔左玉紫井五仙也
13년(AD269년) 2월, 一善(일선)과 沙伐(사벌)을 西巡(서순)하여 管城(관성)에 이르러, 將士(장사)들을 撫慰(무위)하였고, 捺已(날이)와 召文(소문)에서 거쳐 돌아왔는데, 범 17일이 걸렸다. 다섯 太子(태자)의 사당을 세웠는데, 小光(소광), 板公(판공), 汗昔(한석), 左玉(좌옥), 紫井(자정)으로 五仙(오선)이다.
四月 倭人犯境 利音率輕騎 擊退之
4월, 倭人(왜인)들이 변경을 침입하여, 利音(리음)이 輕騎(경기)를 이끌고 擊退(격퇴)시켰다.
九月 加耶入朝 報河道新立 命美知往弔孝修
9월, 加耶(가야)가 入朝(입조)하여 河道(하도)가 새로 즉위하였다고 보고하였다. 美知(미지)에게 명하여 가서 孝修(효수)를 조문하도록 하였다.
*新羅本紀 奈解尼師今 13년, AD208년.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湌利音 將兵拒之
13년(208) 2월, 郡邑(군읍)을 西巡(서순)하고 열흘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倭人(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伊伐飡(이벌찬) 利音(리음)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AD269년- AD208년= 61년 편차.
十四年 正月 行白虎祭
14년(AD270년) 1월, 白虎祭(백호제)를 行(행)하였다.
*白虎= 庚寅의 해= AD270년.
*AD270년 - AD209년 = 61년 편차.
七月 加耶王子于考太子入 告浦上八國入侵 請求 乃命于考與利音將六部兵 往求之
7월, 加耶王子(가야왕자) 于考太子(우고태자)가 와서 浦上八國(포상8국)이 침입하였다고 고하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于考(우고)와 利音(리음)에게 명하여 六部(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
14년 7월, 바닷가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일벌찬 이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八月 利音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群臣賀之 乃獻俘獲于祖廟 河道以其女大理妻美知
8월, 利音(리음)이 八國(팔국)의 將軍(장군)을 쳐서 죽이고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군신(群臣)들이 치하하며, 포로들을 조상의 사당에 바쳤다. 하도(河道)는 그의 딸 대리(大理)를 미지(美知)에게 시집보냈다.
*美知(미지)= 벌휴와 미시의 아들.
十五年 四月 旱久 發使 綠因 除二死餘皆放之
15년(AD271년) 4월 가뭄이 오래 지속되어 사신을 보내어, 죄를 기록하고 두 가지의 죽을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풀어주었다.
七月 述明伊伐飡 淵蓬稟主
7월 술명(述明)을 이벌찬으로, 연봉(淵蓬)을 품주로 삼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5년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신을 보내 군읍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는 모두 석방하였다.
十六年 正月 連同伊飡 骨忠稟主
16년(AD272년) 1월 연동(連同)을 이찬으로, 골충(骨忠)을 품주로 삼았다.
萱堅伊伐飡 允宗一吉飡 白凰稟主
훤견(萱堅)을 이벌찬으로, 윤종(允宗)을 일길찬으로, 백황(白凰)을 품주로 삼았다.
여기의 기사는 품주의 인사가 두 번이나 있다. 또한 품주는 이벌찬과 부부사이인데 일길찬의 다음에 품주의 인사를 기록함으로 특이하다. 앞부분을 살펴보면 품주가 왕의 총애를 받음으로 인하여 남편이 이벌찬이 되는 기사가 여럿이 있는데 그런 인사의 관습이 깨어진 것은 아닐까.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6년
16년, 1월에 훤견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十七年 三月 加耶王子來 質
17년(AD273년) 3월, 加耶王子(가야왕자)가 와서 인질이 되었다.
*신라가 포상8국을 깨뜨렸지만 그들의 위협이 계속된 듯하다.
五月 大雨 漂毁民屋 大理生美知子車理
5월, 큰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大理(대리)가 美知(미지)의 아들 車理(차리)를 낳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7년
17년 3월,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유실되었다.
十八年 正月 牛芻伊伐飡(南忠) 骨正妻玉帽生帝子沾解 帝洗之
18년(AD274년) 1월, 우추(牛芻)를 이벌찬으로 삼았다. (남충(南忠)을 품주로 삼았다.) 골정(骨正)의 처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첨해(沾解)를 낳아서,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첨해이사금은 옥모의 남편인 골정의 아들로 알고 있다. 왕의 탄생기사가 기록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묘하게도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잘못을 피해가는 듯 하다.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머리기사
제12대 첨해 이사금 (沾解 尼師今 247~262, 재위기간 15년 )
첨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분왕의 동복아우이다.
七月 以骨正女紅帽爲后 沙飡孫光隨吳人米會入吳
7월 골정(骨正)의 딸 홍모(紅帽, 우로태자의 어머니, 흘해이사금의 할머니)를 후로 삼았다. 사찬 손광(孫光)이 오나라 사람 미회(米會)를 따라서 오나라로 들어갔다.
*손광(孫光)이 상장돈장 58페이지에 계보도가 있다.
十九年 三月 大風 折木 實理生高知子宣知
19년(AD275년)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렸다. 실리(實理)가 고지(高知)의 아들 선지(宣知)를 낳았다.
七月 仙權伊伐飡 忽仁稟主 扶余來功腰車城 殺城主薛夫 命利音率精兵六千 伐夫余 破沙峴城 河道獻其女河羅
7월, 선권(仙權)을 이벌찬으로, 홀인(忽仁)을 품주로 삼았다. 부여(扶余)가 와서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6천을 거느리고 가 부여를 쳐서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하였다. 하도(河道)가 그의 딸 하라(河羅)를 바쳤다.
十二月 雷震 行禱
12월 천둥번개가 쳐서 빌었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9년 기사
19년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7월 백제가 서쪽 지방 요거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그들은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二十年 正月 行火神祭 乾臣伊伐飡 陽元稟主
20년(AD276년) 1월 화신제(火神祭)를 행하였다. 건신(乾臣)을 이벌찬으로, 양원(陽元)을 품주로 삼았다.
*화신(火神)은 병신(丙申)년 이다.
七月 加耶于考太子歸 大理生美知女索理
7월 가야(加耶)의 우고(于考)태자가 돌아갔다.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딸 색리(索理)를 낳았다.
二十一年 正月 暖檍伊伐飡 連色稟主
21년(AD277년) 1월 난억(暖檍)을 이벌찬으로, 연색(連色)을 품주로 삼았다.
三月 行射馬選科 于北川
3월 북천(北川)에서 활을 잘 쏘거나 말을 잘 타는 자의 시험을 치렀다.
玉帽生帝女乳帽 于宅 命骨正洗之
옥모(玉帽)가 왕의 딸 유모(乳帽)를 댁에서 낳았다. 골정(骨正)에게 명하여 아기를 씻게 하였다.
紅后生于老太子
紅后(홍후)가 于老太子(우로태자)를 낳았다.
四月 行先今祭
4월 선금(先今, 벌휴)의 제사를 지냈다.
二十二年 正月 索孝伊伐飡 駿仁稟主
22년(AD278년) 1월 색효(索孝)를 이벌찬으로, 준인(駿仁)을 품주로 삼았다.
八月 行大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綠帽生仇道子末昕
록모(綠帽)가 구도(仇道)의 아들 말흔(末昕)을 낳았다.
二十三年 正月 汗忠伊伐飡 柿月稟主
23년(AD279년) 1월 한충(汗忠)을 이벌찬으로, 시월(柿月)을 품주로 삼았다.
七月 武庫兵物自出 孫光還自吳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나왔다. 손광(孫光)이 오(吳)로부터 돌아왔다.
夫余來圍獐山城 上親擊破之
부여(夫余)가 쳐들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여, 왕이 친히 격파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3년
23년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밖으로 나왔다.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격퇴하였다.
二十四年 正月 布喜伊伐飡(板忠) 玉帽生帝子仲解 帝洗之
24년(AD280년) 1월 포희(布喜)를 이벌찬으로, (판충(板忠)을 품주로 삼았다).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중해(仲解)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七月 興失伊伐飡 亥文稟主
7월 흥실(興失)을 이벌찬으로, 해문(亥文)을 품주로 삼았다.
河羅生帝女守羅
하라(河羅)가 帝의 딸 수라(守羅)를 낳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거행하였다.
二十五年 正月 行白牛祭
25년(AD281년) 1월 백우제(白牛祭)를 행하였다.
백우(白牛)은 신축(辛丑)년이다.
三月 旱
3월 가물었다.
發門伊伐飡 病免
발문(發門)이벌찬이 병으로 그만두었다.
六軍頭上利音薨
6군두상(六軍頭上) 이음(利音)이 죽었다.
忠萱伊伐飡兼執軍政 成氏稟主
충훤(忠萱)을 이벌찬 겸 집군정(執軍政)으로 삼고, 성씨(成氏)를 품주로 삼았다.
七月 大閱 陽山西
7월 양산(陽山)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加耶女君美理神殂 命述命往弔之
가야(加耶)의 여왕 미리신(美理神)이 죽었다. 술명(述命)에게 명하여 가서 조문하도록 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5년
25년 3월 이벌찬 이음이 사망하자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7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二十六年 七月 凉宮城
26년(AD282년) 7월 양궁(凉宮)이 완공되었다.
虹公伊伐飡 臼燕稟主
홍공을 이벌찬으로, 구연을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加耶河道殂 女河理立
9월 대장(大場)을 거행하였다. 가야(加耶)의 하도(河道)가 죽어 딸 하리(河理)가 섰다.
二十七年 四月 雹傷麥
27년(AD283년) 4월 우박이 내려 보리가 상했다.
南新懸豪民諸馬武身死 體溫微曆月 其妻不忍葬之 抱而摩之 乃醒言夢見陰司治獄之事 其設多符合 衆信奇之 稱諸先生 以車馬迎之 聽法
남신현(南新懸) 호민(豪民, 세력이 있고 재물이 넉넉한 백성) 제마무신(諸馬武身)이 죽었다. 몸이 체온이 미약하게 남아 1달을 지내다가 그 처가 참지 못하고 장사를 지냈다. 끌어안고 남편을 쓰다듬었는데 이에 깨어나며 말하기를 꿈에 음사(陰司, 내력이 올바르지 않은 귀신을 모셔 놓은 집)와 치옥(治獄, 형률을 관장하는 자)의 일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설명이 부합하여 무리들이 그 기이함을 믿으며 ‘제선생(諸先生)’이라 불렀다. 차마(車馬)를 보내어 그를 맞이하여 방법을 들었다.
七月 添公伊伐飡 休介稟主
7월 첨공(添公)을 이벌찬으로, 휴개(休介)를 품주로 삼았다.
十月 夫余入寇牛頭州 忠萱與賊戰 于熊谷 失利 命連珍代之 貶萱爲牛頭鎭主
10월 부여(夫余)가 우두주(牛頭州)를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충훤(忠萱)이 웅곡(熊谷)에서 적과 싸웠는데 손해를 보았다. 연진(連珍)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고, (충)훤을 낮추어 우두진(牛頭鎭)의 주(主)로 삼았다.
連珍大破夫余兵 獻俘
연진(連珍)이 부여(夫余)의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포로를 바쳤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7년
27년 4월,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가 상했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 달에 다시 살아났다.
10월,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 왔으므로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막으려 하였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二十八年 正月 連珍伊伐飡兼知軍事 淡眞稟主
28년(AD284년) 1월 연진(連珍)을 이벌찬 겸 지군사(知軍事)로 삼고, 담진(淡眞)을 품주로 삼았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行壤井)를 행하였다.
加耶入朝
가야(加耶)가 입조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二十九年 正月 昔盧伊伐飡 江氏稟主
29년(AD285년) 1월 석노(昔盧)를 이벌찬에, 강씨(江氏)를 품주로 삼았다.
三月 骨井太子薨
3월 골정(骨井)태자가 죽었다.
七月 連珍大破夫余 於烽山城下 殺獲一千餘級 請築城而防之 命康萱築烽山城 螺碧伊伐飡 采氏稟主
7월 연진(連珍)이 부여(夫余)를 봉산성(烽山城) 아래에서 크게 깨뜨려 1천여 명을 죽이고 목을 얻었다. 성을 쌓아 방어하기를 청하여 강훤(康萱)에게 명하여 봉산성을 쌓았다. 나벽(螺碧)을 이벌찬으로, 채씨(采氏)를 품주로 삼았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9년
29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전투를 하였다. 그는 봉산 아래에서 백제병을 격파하고 1천여 명을 죽였다.
8월 봉산성을 쌓았다.
三十年 正月 淵于伊伐飡 馬淡稟主
30년(AD286년) 1월 연우(淵于)를 이벌찬으로, 마담(馬淡)을 품주로 삼았다.
四月 閱馬 于桃山
4월 도산(桃山)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紅后生帝女阿爾兮 有五色雲覆之
홍후(紅后)가 왕의 딸 아이혜(阿爾兮)를 낳았는데 오색구름이 아이를 감싸고 있었다.
九月 行一善大場
9월 일선에서 대장을 행하였다.
夫余君古尒殂 子責稽立
부여(夫余)의 왕 고이(古尒)가 죽어, 아들 책계(責稽)가 섰다.
三十一年 正月 國興伊伐飡 白兮稟主
31년(AD287년) 1월 국흥(國興)을 이벌찬으로, 백혜(白兮)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國良卒 孫光大日大師
2월 국양(國良)이 죽어 손광(孫光)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삼았다.
三月 旱不雨 行禱
3월 가물어 비가 오지 않아 빌었다.
加耶女君河理 禪于其夫孝道
가야(加耶) 여군(女君) 하리(河理)가 남편 효도(孝道)에서 선위하였다.
六月 中外祈雨 行赤羊祭
6월 나라 안팎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적양제(赤羊祭)를 행하였다.
*적양(赤羊)은 정미(丁未)년이다.
七月 汗達伊伐飡 黃珍稟主
7월 한달(汗達)을 이벌찬으로, 황진(黃珍)을 품주로 삼았다.
孫光祈雨 於陰山七日 乃大雨
손광(孫光)이 음산(陰山)에서 7일 동안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였는데, 이에 큰 비가 왔다.
發倉廩 賑飢民
창고를 드러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十月 放輕因
10월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하였다.
命助賁太子 巡視州郡
조분(助賁)태자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펴보게 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1년
31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10월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하였다.
三十二年 正月 碧正伊伐飡 隆主稟主
32년(AD288년) 1월 벽정(碧正)을 이벌찬으로, 융주(隆主)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巡狩西南郡邑 弘后助賁從之
2월 (왕이) 나라의 서남(西南)의 군읍(郡邑)을 살폈다. 홍후(弘后)와 조분(助賁)이 따라갔다.
*신라왕이 나라를 살필 때 대개 서쪽으로 가서 다시 북쪽을 돌아다니는 형태다. 아마도 서쪽과 남쪽을 살폈는지도 모르겠다.
三月 還都
3월 도읍으로 돌아왔다.
七月 康萱伊伐飡 同忠稟主
7월 강훤(康萱)을 이벌찬으로, 동충(同忠)을 품주로 삼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2년
32년 봄 2월, 왕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 강훤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三十三年 正月 行土鷄祭
33년(AD289년) 1월 토계제(土鷄祭)를 행하였다.
토계(土鷄)는 기유(己酉)년이다.
七月 允宗伊伐飡 邊月稟主
7월 윤종(允宗)을 이벌찬으로, 변월(邊月)를 품주로 삼았다.
三十四年 正月 元豆伊伐飡 昌兒稟主 命助賁太子 監國
34년(AD290년) 1월 원두(元豆)를 이벌찬으로, 창아(昌兒)를 품주로 삼았다. 조분(助賁)태자에게 명하여 나라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四月 蛇鳴南庫三日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九月 地震
9월 지진이 있었다.
十月 大雪深五尺
10월 큰 눈이 내려 5자나 쌓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4년
34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9월 지진이 있었다.
10월 눈이 크게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三十五年 正月 薛白伊伐飡 牛忠稟主
35년(AD291년) 1월 설백(薛白)을 이벌찬으로, 우충(牛忠)을 품주로 삼았다.
三月 帝崩 紅后立母兄助賁太子爲尼今 行祥登祚
3월 왕이 죽었다. 홍후(紅后)가 오빠 조분(助賁)태자를 니금(尼今)으로 삼고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5년
35년 3월 왕이 붕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