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弗大王傳(을불대왕전)

을불대왕전 미천왕 14년

라디오에요 2016. 3. 27. 12:13

 

 

미천대제기 14년 313년.
◎ 十月, <仙方>, 與<楽浪王><子述>會, 獵于<薩川原>. <子述>, 見<仙方>之精騎甚多, 欲退之. <仙方>, 追而擒之, 又使<祖文>・<紐碧>等進攻海濱諸邑, 平之. <倉覓>, 破校尉府而虜校尉屬國等七人, 献之. <長莫思>, 襲破<楽浪城>虜男女二千餘口, 献之. 以<仙方>為<楽浪王>, 進爵太公, 以鎭其衆. 是年十月, <代公><猗盧>, 遣其子<六脩>・兄子<普根>等引数萬為前鋒, 自引二十萬継之, 爲<劉琨>攻<晉陽>. <漢><劉曜>大敗身被七創.  <石勒>欺<王浚[遵]>.  <猗盧>, 城<盛楽>為北都, 故<平城>爲南都. 又作新<平城>於<瀑水>之陽, 使<六脩>鎭之.

○ 10월, <선방>이 <낙랑왕><자술>과 <살천원>에서 만나 사냥하기로 하였는데, <자술>이 <선방>의 정예기병이 심히 많음을 보더니만, 내빼려 하는지라, <선방>이 따라가서 사로잡았고, 또한 <조문>과 <뉴벽>을 시켜 海濱(해빈)의 여러 읍을 평정하였다. <창멱>은 교위부를 깨고 교위 속국 등의 일곱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고, <장막사>는 <낙랑성>을 습격하여 깨고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서 바쳤다. <선방>을 <낙랑왕>으로 삼고 작위를 태공으로 올려주어서 <낙랑>의 무리들을 지키게 하였다.
이해 10월, <대공><탁발의로>가, 자기 아들인 <육수>와 형의 아들인 <보근>을 시켜 수만 병을 이끌고 전봉을 서게 하고, 자신은 20만병을 이끌고 뒤따르며, <유곤{<동진>을 세운 <사마예>의 신하}>을 위하여 <진양>을 공격하였다. <한{前趙}>의 <유요{末帝}>는 대패하고 몸에 창을 일곱 군데나 맞았다.  <석륵{後趙;高祖}>은 <왕준>을 속였다.  <의로>는 <성락>에 성을 쌓아 북도로 삼고, 옛<평성>을 남도로 삼았다. 또한 새로운 <평성>을 <폭수> 북쪽에 쌓고, <육수>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 十五年甲戌, 春正月, <周>皇后生皇子<武>, 以太子<斯由>封皇子 賜玉冊・金印, 以<檀林神宮>爲<周>皇后宮, 宴群臣宗戚于<肖門院>.  
<羅>, 以<急利>爲伊飡. 二月, <訖觧>, 以旱, 止修闕之役.  秋九月, <方夫>, 與<仙玉>・<休都>・<芙莢>等, 進圍<平郭>下之. 移其民於<新城>東北之地, 以墾耕為業.  <仙方>, 遣<祖文>等, 伐<帶方>取<岑城>・<提奚>二城, 献俘. 「南部」大使者<大玄>從征<楽浪>而卒, 年三十五.

○ 15년{단기2647년/AD314}갑술, 춘정월, <주>황후가 황자 <무>를 낳자, 태자 <사유>를 <황자>로 봉하고 옥책과 금인을 주었으며, <단림신궁>을 <주>황후의 궁으로 하였고, 군신과 종척들에게는 <초문원>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에서는 <급리>가 이찬이 되었고, 2월엔 <흘해>가 가뭄이 들자 궁궐을 고치는 공역을 중지하였다.  추9월, <방부>가 <선옥>・<휴도>・<부협> 등과 함께 진격하여 <평곽>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그 곳의 백성들을 <신성>의 동북으로 옮겨 땅을 개간하며 농사짓고 살게 하였다.  <선방>이 <조문> 등을 보내 <대방>을 쳐서 <잠성>・<제해> 두 성을 빼앗았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바쳤다. 「남부」대사자 <대현>이 <낙랑>정벌을 따라갔다가 죽으니, 나이 35살이였다.

*사진은 을불대왕전 86페이지 기사입니다.

미천왕 14년 313년, 이미 안평을 점령했으니, 낙랑을 점령할려고 부하들에게 문의를 하니.. 仙方이 낙랑왕 子述은 용맹은 하나.. 지략이 부족하다며 꾀를 내어 점령하는게 좋다고 조언을 하지요.


가을 10월달이 되어 子述을 꼬드겨 내어 薩川原에서 사냥을 하자며 불러 내니, 子述이 仙方의 정예기병의 숫자가 많음을 보고 놀래서 달아 나려는 것을 사로잡아.. 손쉽게 낙랑성을 점령해 버립니다.

薩川原= 살수의 수원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살천원은 낙랑과 고구려의 경계지역임을 알 수 있죠. 아마도 국경부근에서 만나 사냥을 했을테니까요..

다음해 15년 314년, 1월에 斯由(고국원왕)을 태자로 책봉을 하고,
方夫가 平郭을 포위하여 함락시키고 그 주민들을 新城 동북쪽 땅으로 옮깁니다. 그 다음으로 帶方 2성을 함락시켜 버리지요.
新城은 고구려의 서쪽의 전방에 있는 성이므로 平郭과는 가까운 거리라는 걸 알 수 있죠.
을불대왕전에서 帶方 2성의 이름이 빠져 있지만..고구려사초에서는 帶方의 岑城,提奚 2성의 이름이 나옵니다.

남부대사자 大玄이란 사람은 어머니와 함께, 仙方를 따라 다니다가 낙랑에서 병을 얻어 35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을불대왕전에는 그의 출신에 대해 적혀 있죠. 사초에선 빠져 있고...

오랜 숙원 사업이던 낙랑과 대방, 평곽의 점령이 이 때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미천왕은 더 이상 서쪽으로 못 뻗어 나가죠.

미천왕 20년, 319년 仙玉이 모용외랑 싸우다가 패하여 平郭을 잃어 버립니다.
모용외 때문에 미천왕은 서쪽으로 더 못 나가게 됩니다.


라디오(2008-11-28 21:44:56)

낙랑군

낙랑군은 대체로 위만조선의 고지를 중심으로 평남의 대부분과 황해도의 일부에 걸쳐 있었는데, 설치 당시의 속현(屬縣)은 조선(朝鮮)·염한·패수(浿水)·점제(黏蟬)·수성(遂成)·증지(增地)·사망(駟望)·둔유(屯有)·누방(鏤方)·혼미(渾彌)·탄열(呑列) 등 11현이었다. 낙랑군의 치소(治所)에 대해서는 평양설도 있으나, 대동강의 대안(對岸)인 토성리(土城里)가 유력하다.

낙랑군은 한나라 소제(昭帝) 때인 BC 82년에 진번군을 병합하여 그 일부에는 새로 낙랑군 남부도위(南部都尉)를 분치(分置)하고, 그 관하에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의 7현을 두고 그 가운데 소명현(昭明縣:信川)을 남부도위의 치소로 삼았다. 또, BC 75년에는 앞서 BC 82년 현도군에 폐합되었던 임둔군의 고지(故地)도 병합하여 그 관할구역이 너무 광대하고 멀어서 단단대령(單單大嶺: 함남 長津郡과 咸州郡 사이의 黃草嶺) 이동(以東)의 옛 땅에는 낙랑군 동부도위를 분치하고, 그 관하에 동이(東暆)·불이(不而)·잠대(蠶臺)·화려(華麗)·사두매(邪頭昧)·전막(前莫)·부조(夫租) 등 이른바 영동(嶺東) 7현을 두었다.

《한서(漢書)》 <지리지> 낙랑군조에 의하면 6만 2812호(戶), 40만 6748명, 25속현에 이르는 대군(大郡)이 되었다.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우자 낙랑군을 낙선군(樂鮮郡)으로, 패수현(浿水縣)을 낙선정(樂鮮亭)으로, 증지현(增地縣)을 증토현(增土縣)으로 고쳤으나,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일어나 왕망을 무너뜨리자 다시 옛 이름으로 돌아갔다.

후한의 광무제(25년 ~ 75년)가 중국 중원(中原)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동란기(動亂期)에 낙랑군에서는 토착민(조선인)인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자칭 대장군 낙랑태수라 칭하며 군(郡)을 장악하고, 새로 일어난 후 漢 정부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AD30년 후한에서 새로 파견된 낙랑태수 왕준(王遵)이 군사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이르렀을 때 낙랑의 한인군리(漢人郡吏)들이 王調(왕조)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여 낙랑군은 다시 후한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해 후한은 낙랑군 동부도위를 철폐하여 영동 7현을 포기하고 그 곳의 토착민 거수(渠帥:우두머리)를 봉(封)하여 현후(縣侯)로 삼아 자치(自治)토록 하였다.


라디오(2008-11-28 21:45:17)

《후한서》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낙랑의 세력이 18성(城), 6만 1492호(戶), 25만 705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낙랑군의 지배에서 벗어난 영동의 7현(지금의 함남) 지방에서는 유력한 거수를 중심으로 하는 부족연맹체가 새로이 형성되어 부조현(夫租縣)을 중심으로 옥저(沃沮)라는 사회가 일어나고, 그 남쪽에는 사두매(邪頭昧:文川)·불이(不而:安邊) 등을 중심으로 동예(東濊)라는 사회가 일어났다.

후한의 말기인 환제(恒帝:147~167)·영제(靈帝:168∼189) 때에는 한(韓)·예(濊)가 강성해져 낙랑군의 토착주민들은 특히 진한(辰韓) 방면으로 많이 유입하여 낙랑군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땅은 황폐화하였다. 이때에는 중국 본토도 군웅할거의 동란기를 맞아

184년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어 독립적인 세력을 심고 있던 공손탁(公孫度)은 현도군과 더불어 낙랑군도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이어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은 후한의 헌제(獻帝:196~220) 때에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황폐한 땅을 분할해서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낙랑군의 남부도위(南部都尉) 관할의 7현을 관할하게 하고, 군치(郡治)를 대방현에 두었다. 이로써 낙랑군은 설치 당시의 속현 11현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238년 공손씨가 3대의 공손 연(公孫淵)에 이르러 3국의 하나인 위(魏)에게 멸망당하게 되자 낙랑군은 현도·대방과 더불어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에 속하게 되고, 그 뒤 위나라가 서진(西晉)에 멸망하자 서진의 유주자사에 속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낙랑군을 《진서(晉書)》 지리지에는 '통현(統縣) 6, 호(戶) 3,700'이라 하여 영토와 인구의 현저한 축소를 나타냈는데, 낙랑군은 11현에서 5현(염한·패수·점제·증지·탄열)이 없어지고, 그 이남의 6현(조선·둔유·혼미·수성·누방·사망)만이 남게 되었다.

이 당시에 현도군도 낙랑군과 같이 영토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두 군의 축소는 강성해진 고구려에 잠식되었기 때문이며, 고구려의 손이 미치지 않은 대방군만이 7현(옛 낙랑군 남부도위)을 유지하고 있었다.

311년 서진(西晉)의 국도 뤄양[洛陽]이 흉노족의 전조(前趙)에게 함락되는 등 중국 본토에 혼란이 일자 313년(미천왕 14년) 고구려는 낙랑군을 공략해서 이를 함락함으로써 설치 421년 만에 낙랑군 땅도 중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국토로 회복되었다.

또, 고구려는 314년에 낙랑군 남부도위였던 대방군도 공격해서 얼마 후 이를 함락하였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이때 낙랑·대방의 두 군에 거점을 두고 있던 요동인(遼東人) 장통(張統)이 고구려 미천왕(美川王)과 연년(連年) 공방전을 벌이다가 민호(民戶) 1,000여 가를 이끌고 요서(遼西)의 모용씨(慕容氏: 鮮卑族)에게로 귀속하였다하여 낙랑과 대방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한족(漢族)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라디오 (2008-11-28 22:45:13)

한서지리지 낙랑군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
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縣二十五:

朝鮮,龠邯,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

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黏蟬,遂成,增地,莽曰增土。

帶方,駟望,海冥,莽曰海桓,列口,長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

鏤方,提奚,渾彌,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

東暆,不而,東部都尉治。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