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弗大王傳(을불대왕전)

乙弗大王傳(을불대왕전) 해석 by 하모님.

라디오에요 2016. 3. 28. 14:00

을불대왕전(乙弗大王傳)

약로대왕(藥盧大王, 西川王) 9년(278년) 춘정월. 왕은 모든 비빈(妃嬪)들과 단림지궁(檀林之宮)에서 야연을 베풀었는데 홀연 벽력소리가 나고 하늘로부터 화광이 내려와 작은 개같은 것이 돌고(咄固)태자(咄固太子)의 침전으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왕은 크게 놀라 급히 침전으로 가서 안을 살폈는데 별다른 불빛은 없었고, 다만 돌고태자(咄固太子)와 다비(茶妃) 을씨(乙氏)가 교합을 하고 기식이 엄엄하여 용보(龍步)가 지척에 이르도록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비(茶妃) 을씨(乙氏)는 주통태후(酒桶太后)의 서자인 을보(乙寶)의 딸이니 현상(賢相) 을파소(乙巴素)의 증손이다. 아름답고 지혜영민(慧敏)하므로 왕이 그를 아끼어 후궁에 들이고 누차 총애를 받아 차비(次妃)의 지위에 올랐던 것인데, 언제부터 돌고(咄固)와 밀통했는지 알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을씨(乙氏)를 주살하려하자 태사(太史) 우선(于先)이 상주하였다. “천랑성(天狼星)이 궁중에 떨어졌으니 반드시 귀한 자식이 태어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렸다가 주살함이 가할 것 입니다.” 왕은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과연 열달에 이르러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풍준(豊雋)하고 기걸(奇傑)찼으며 또 오색구름이 산실을 에워싸고 감돌았다. 왕은 하늘이 정한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을씨(乙氏)를 돌고(咄固)의 처(妻)로 삼고 아기의 이름을 을불(乙弗)이라 지었다. 때는 황구(黃狗, 戊戌, 278년)의 10월(孟冬)이었다.


왕은 을불(乙弗)을 아끼고 사랑해서 을씨(乙氏)에게 내리는 작록이 예전과 다름없었다.
을불(乙弗)은 3살에 능히 길흉(吉凶)을 말할 수 있었다. 왕제(王弟) 달가(達賈)가 숙신(肅愼)정벌을 떠나기에 앞서 왕에게 입사(入辭)했는데 왕은 을불(乙弗)을 무릎위에 안고있다가 물었다 “이번 출행이 길(吉)하겠느냐?” 을불(乙弗)은 “길(吉)”이라 답했다. 과연 대승을 거두었다. 왕은 이에 첫승을 올린 땅을 을불(乙弗)의 식읍(邑)으로 삼고 돌고(咄固)에게 명하여 그곳으로 나아가 다스리도록 하였다.
왕은 다시 을씨(乙氏)를 총애하여 딸 단씨(丹氏)를 낳았는데 을불(乙弗)이 단씨를 몹시도 아껴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왕은 을불(乙弗)을 놀려서 말하되 “단씨는 내 딸이고 너는 곧 내 손자이니 네가 그 아이를 누이로 할 수 없다.” 을불(乙弗)은 울면서 “나도 왕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하였다. 왕은 측은히 여겨서 그를 허락하고 봉하여 太子(태자)로 삼았다.
그때의 궁중은 엄하지 않아서 후비(后妃)들이 행실이 없었다. 돌고(咄固)의 어머니 고씨(高氏) 또한 소후(小后)로써 치갈태자(雉葛太子)와 밀통하고 있었다. 을불(乙弗)이 이를 간하되 “할머니는 어찌하여 치갈(雉葛)과 함께 어울리십니까?”하자 고씨는 말했다. “치갈(雉葛)은 후일의 천자(天子)이다. 어찌 교태를 부려 잘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이를 말하지 말라.” 을불(乙弗)이 말했다 “나 또한 태자이니 이는 훗날의 천자가 아닙니까?” 고씨는 크게 놀라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천위(天位)는 이미 정해졌다. 너는 망령된 말을 하지마라.”
을불(乙弗)은 불복하며 스스로 나는 천자가 될것이라고 자인하였다.
치갈(雉葛)은 다시 을씨(乙氏)와도 밀통하였다. 을씨가 울면서 말했다 “대왕이 이를 알면 반드시 나를 호음(好淫)한다 하여 주살할 것입니다.” 치갈(雉葛)이 말했다 “심야지사를 대왕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때 을불(乙弗)이 일어나 말했다. “태형(太兄)은 이미 내 조모와 통하고 다시 내 어머니를 핍박했으니 죄가 큽니다. 내가 마땅히 이것을 부왕께 아뢸 것이오.” 치갈(雉葛)은 크게 놀라 차고 있던 옥도(玉刀)를 끌러주며 말했다. “네가 만약 이 일을 아뢴다면 네 어머니는 주살되고 나는 마땅히 태형을 받을 것이다. 그리 되느니만 못하거든 말을 말거라.” 을불(乙弗)은 어머니가 죽을까봐 두려워서 이를 숨겼다.
뒤에 왕은 옥도를 발견하고 물었다. “이것은 곧 사군의 보물(嗣寶)인데 어찌하여 네가 이것을 차고있느냐?” 을불(乙弗)이 말했다. “나는 연(鳶)이 끈떨어졌는데 그것을 이을수 있어 차지한다면 천명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습니까?(飛鳶落之無乃有可嗣之天命乎)???” 왕은 그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은밀히 을씨에게 이르되 “네 아들이 식우(食牛:호랑이새끼)의 기상을 가지고 있으니 천명(天命)이 있는게 아닌지 몰라 두렵구나.” 이에 방회(方回)와 대발(大發)을 좌우스승(左右師)으로 삼아 기사(騎射)와 병진(兵陣)의 학문을 가르쳤다. 9세에 능히 3대의 화살을 쏴서 명중시키니 왕은 그에게 상을 내렸다.
그 때에 왕제(王弟) 일우(逸友)와 색발(索勃)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을불(乙弗)이 왕에게 아뢰었다. “두 숙부는 무(武)를 숭상해서 예양지학(禮讓之學)을 모른 까닭에 저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臣)은 좋은 스승에게 예양을 배우기를 청하옵니다.” 왕은 그를 옳게 여겨 우선(于先)에게 명하여 효경(孝經)으로 가르치게 했다. 을불(乙弗)이 마침내 왕에게 상주했다. “신이 어리고 예(禮)를 몰라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고, 아버지를 형으로 삼았으니 지금에야 그 잘못됨을 알았습니다. 청컨대 신의 태자 작위를 삭제함으로써 명분을 바로 잡으소서.” 왕이 말했다. “네 말이 비록 옳다마는 이미 봉한 작위를 어찌 빼앗을 수 있겠느냐? 남의 아들도 내 아들로 삼을 수 있거늘 하물며 내 아들의 아들이겠는가? 다만 네 아비는 돌고(咄固)이니 너는 그 아비를 따름에 네 소원대로 하라.” 이에 을불(乙弗)이 아버지를 섬김에 지성으로 효도하니 돌고(咄固) 또한 인효우애(仁孝友愛)하였다. 국인(國人)들이 이를 우러러 “현태자(賢太子)가 현태자(賢太子)를 낳았다.”라고 하였다.
치갈(雉葛)은 성품이 교만방자(驕逸)한데다 호색(好色)하고 패덕한 소행(悖行)이 많아 국인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가 일찌기 왕에게 조용히 상주하되 “나라가 의지하는 바는 사군(嗣君)에 있습니다. 이제 을불(乙弗) 부자는 모두 어질고 현명하나 치갈(雉葛)은 불초하니 형왕(兄王)은 모름지기 이를 유념하소서.”하였다. 왕은 말했다. “짐도 그것을 알지만 어찌 차마 장자를 폐하고 소자를 세우겠는가? 네가 그를 잘 가르칠지어다.” 이에 치갈(雉葛)을 불러 꿇어 앉히고 경계하여 말했다. “국인들이 너의 무도함을 근심한다. 안국군은 네가 아버지로 섬김에 나와 같이 할지니 대소사를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묻고나서 행해야 가할 것이다.(安國君汝其父之事之如我事無大小皆咨而行之可也)”
치갈(雉葛)은 내심 불평을 품었으나 애써 노력하여 그를 좇았다. 이로부터 안국군이 규제하고 간하는 것이 많았다. 치갈(雉葛)은 이를 괴롭게 여겨 돌고(咄固)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자가 되면 마땅히 먼저 달가(達賈)를 죽이리라.”하였다. 돌고(咄固)가 그 말을 달가(達賈)에게 고하며 이르되 “숙부는 스스로 위태롭게 하지 마소서.”하였다. 달가(達賈)는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爲國之心)에 어찌 스스로의 이해를 돌보겠는가?” 돌고(咄固)는 탄식하며 말했다 “군자의 말씀입니다!”
치갈(雉葛)의 어머니 우씨(于氏)는 아름답고 요염 간교(奸姣)하니 왕이 그를 가장 아껴서 정후(正后)로 삼고 그녀가 말하는 바는 모두 들어 주었다. 때문에 치갈(雉葛)의 불초함을 알면서도 그를 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씨(于氏) 또한 국인들이 돌고(咄固)를 많이 추앙함을 알고 돌고(咄固)가 후계(嗣)를 뺏을까 두려워했다. 그의 행실을 훼손코자 거짓으로 부스럼(瘡)이 있다 칭하고 돌고(咄固)를 불러 같은 수레에 타고 온탕(溫湯)으로 들어갔다. 은밀히 돌고(咄固)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스럼은 옥문(玉門)의 해심(荄心)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양경(陽莖)에다 이 유약(油藥)을 발라서 넣어라.”고 하였다. 돌고(咄固)가 이를 어렵게 여겨 말했다. “신이 어찌 감히 성후(聖后)를 증(烝) 하오리까?” 우씨는 노하여 말했다. “네가 을씨의 젊음은 사랑해서 통하고 나는 늙었음으로 해서 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네가 나와 더불어 알몸으로 탕에 들어왔으니 비록 통정하지 않았다 해도 남이 어찌 알겠는가? 내 당장 네가 나를 핍박하여 간음했다고 성언하여 주살할 것이다.” 돌고(咄固)는 어찌할 수 없어 그를 증(烝)하였다. 이로부터 우씨는 누차 돌고(咄固)를 이끌어 은밀히 그에게 총애를 주고 치갈(雉葛)로 하여금 오게해서 그것을 보게했다. 치갈(雉葛)이 이에 돌고(咄固)를 꾸짖어 말했다. “국인들이 너를 현명하고 호색하지 않는다 하는데 현자(賢者) 역시 모후(母后)를 치붙는가?” 돌고(咄固)는 고개를 숙인채 말을 못했다.
우씨는 또 달가(達賈)의 옹병군권(擁兵)을 두려워해서 늘 달가(達賈)에게 교태를 부려 말했다. “부왕(夫王)의 천추후에 아즈반(叔)은 마땅히 산상왕(山上王)이 될 것이니 첩은 마땅히 그를 따를 것입니다.” 달가(達賈)가 말했다. “왕위를 이을 사군(嗣君)이 수후(嫂后)마마에게 있는데 이 무슨 어지러운 말씀입니까?” 우씨는 즐거워 하지 않고 오히려 왕에게 그를 참소하였다. “달가(達賈)가 나를 유혹해 말하기를 ‘형왕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고 나는 마땅히 산상왕이 되어 형수를 후(后)로 삼을 것이니 이제 먼저 통하여 결친(結親)함이 옳을 것이오’하기에 내가 그 뺨을 때리고 피했습니다.” 왕은 우씨의 거짓말을 알고 웃으며 “네가 달가(達賈)의 처가 되고 싶다면 내 죽음을 기다릴게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그에게 갈 수 있다.” 우씨는 울며 말하기를 “그대는 아우는 아끼면서 처는 아끼지 않으니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어찌 달가(達賈)의 처가 되겠습니까?”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달가(達賈)와 나는 한 몸이니 네가 끼어들 바가 아니다.” 우씨는 참소할 수 없음을 알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왕은 달가(達賈)에게 말하였다. “네 형수 우씨가 내게 너를 참소하니 이는 필시 네가 그 청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무릇 형제동처(兄弟同妻)는 고금에 있어온 것이니 하물며 한 어머니의 아우이겠는가? 아(私)다이 통정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이 가할 것이다.” 달가(達賈)가 대답하되 “남녀의 예(禮)가 무너집니다. 어찌 도(道)로써 남을 책망받도록 하겠습니까?(어찌 남을 책망받도록 하는게 도(道)이겠습니까?”(何以責人爾乎)???? 왕은 그말에 탄복하여 말했다. “어질도다! 나의 아우여. 내가 미칠 수 없구나!”
달가(達賈)의 처 음씨(陰氏)는 상국(相國) 음우(陰友)의 딸이다. 신장이 7척이요 얼굴은 붉은 대추(重棗)와도 같았는데 능히 장창(長槍)을 쓸 수 있었다. 일찌기 달가(達賈)를 따라 출전(出戰)하여 적을 베고 공을 세워서 봉작(封爵)을 받고 장군(將軍)이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늘 베치마(布裙) 차림으로 노복 무리들과 더불어 밭에 종자를 심으며 집안에 말하기를 “농사란 천하의 근본이다. 비록 재상의 처(妻)라 해도 알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왕이 일찌기 미행(微幸)하여 그 장원에 이르렀는데 하늘에서는 바야흐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달가(達賈)와 음씨는 진탕에 서서 맨발에 헝크러진 머리로 종묘(種苗)를 하느라 분주하여 어가(駕)가 이르른 것도 알지 못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국왕의 제매(弟妹)가 어찌 수고가 이와 같은가?” 음씨가 말했다.“천자도 친히 밭을 갈아(親藉) 백성에게 보이는데 하물며 제매(弟妹)이리까?” 왕은 음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궁중에 비록 미인이 많으나 너와 같은 자는 없다. 이 저녁에 한번 행(幸)할 수 있겠느냐?” 음씨가 말하되 “여자는 정절을 귀하게 여기니 비록 천자라 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형제의 처(妻)이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크게 부끄러워 말하되 “내가 특별히 농담한 것 뿐이니 누이는 용서하라.”하였다. 음씨 가로되 “천자는 농담(戱言)이 없습니다. 만약 왕명을 좇는다면 부정(不貞)이고, 왕명을 좇지 않는다면 불충(不忠)이니 이것이 첩의 어려움입니다. 만약 행(幸)한다면 난륜(亂倫)이고, 행(幸)하지 않는다면 식언(食言)이니 이것이 왕의 어려움입니다. 어찌 말하기가 쉽겠습니까?” 달가(達賈)가 말했다. “불충(不忠)이 부정(不貞)보다 크니 너는 마땅히 수행(幸)을 받으라.” 왕이 말했다 “내가 차라리 식언(食言)을 할지언정 어찌 난륜(亂倫)의 이름을 받겠는가?” 달가(達賈)가 말했다.“왕(王)이라 함은 참말(信)인 것으로 식언(食言)은 중대합니다.” 끝내 음씨로 하여금 목욕하고 수행(受幸)토록 하였다. 왕이 탄식하여 가로되 “말 한마디의 어려움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누이에게 무슨말을 하겠는가. 형제의 정은 사사로이 다를 바 없고, 누이는 난륜한 것이 없으니 나를 꾸짖으라.”(兄弟之情無所私異妹無以亂倫責我)(何言妹乎)??? 음씨가 말했다. “한번 동침은 백년부부입니다. 지금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첩은 이로부터 부왕(夫王)을 섬길 것입니다. 폐하는 마땅히 미녀를 택하여 달가(達賈)의 처로 삼아야 옳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장녀 다씨(多氏)를 달가(達賈)의 처로 하였다. 다씨(多氏)는 돌고(咄固)의 포매(胞妹)였다. 어질고 아름다운 까닭에 치갈(雉葛)이 첩으로 삼고자하여 여러차례 고씨에게 말을했었다. 이제 달가(達賈)의 처가 되기에 이르자 더욱 질투심을 갖고 불령지도(不逞之徒)와 더불어 은밀히 죽여 없앨 것을 모의했다. 급기야 왕이 병질로 눕게되자 그 모의는 더욱 급박해졌다. 달가(達賈)의 신하 선옹(仙翁)이 달가(達賈)를 설득해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선제(先制)합니다. 지금 치갈(雉葛)이 무고히 우리 군(吾君)을 죽이려하고 대왕은 병질에 빠진지가 수삭(數朔)이니 위태롭기가 누란(累卵)과 같습니다. 우리 군(吾君)은 이때로써 군사를 이끌고 입궁하여 군측(君側)의 간신을 제거하고 돌고(咄固)태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가히 국가로 하여금 근심을 없애고 오군(吾君)이 안전할 수 없습니다.” 달가(達賈)는 말하되 “내가 천하에 중시되는 까닭은 장의충군(仗義忠君)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스스로 역모를 꾀한다면 위로는 형왕(兄王)의 병을 더하고 아래로는 국민(國民)의 의를 저버림이니 나는 차마 할수 없다.” 선옹은 탄식하여 말하되 “다만 선(善)으로써 악(惡)을 도울뿐이니 저는 떠납니다.”하고는 마침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났다.
치갈(雉葛)의 신하 원항(猿項)이 기뻐하며 말했다. “안국군에게 선옹이 없으니 쉬워졌을 따름입니다.” 왕은 병이 매우 깊어지자 달가(達賈)를 부르도록 명하였다. 돌고(咄固)태자가 입내(入內)하였으나 우씨가 그를 저지하였다. 거짓으로 조서(詔)를 칭탁하여 달가(達賈)의 병권을 남김없이 우씨의 형제 평자(枰刺?)에게 옮기게 했다. 달가(達賈)의 신하 이경(以竟)이 달가(達賈)에게 간했다 “지금 왕의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데 홀연 병권을 외척에게 옮기니 필시 속임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컨대 스스로 쥐고 있으면서 변황을 기다리소서.” 달가(達賈)가 말하되 “내가 병권 때문에 수후(嫂后)에게 밉보인 까닭이다. 만약 지금 주저하며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 노여움을 더욱 크게 할 뿐이다.”하고는 즉시 인수(印綬)를 풀어서 넘겨주었다. 이경(以竟)은 통곡(哭)하며 “호랑이가 이와 발톱이 빠지면 사람들 모두가 잡아 묶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달가(達賈)의 입내(入內)를 기다리며 여러번 재촉을 했으나 오지않자 마침내 “달가!”“달가!”하고 부르짖다가 붕하였다. 춘추 53세에 재위는 23년이었다.
우씨(于氏)는 이에 치갈(雉葛)을 세워 대맥대왕(大貊大王)으로 삼았다. 때는 수서(水鼠/임자-292)의 중추(8월)였다. (임자 3월에 문천(門天)을 태보(太輔), 상루(尙婁)를 우보(右輔), 가?방(稼?方)을 좌보(左補)로 삼았다)
치갈(雉葛)은 이에 우씨(于氏)를 태후(太后)로 삼고 연씨(緣氏)를 후(后)로 삼고, 5부(部) 37국(國)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3월에 달가(達賈)에게 죽음을 내리되 “안국군(安國君)은 오래도록 병권을 장악하면서 안으로 불궤지심(不軌之心)을 품고 당을 결성해 나라를 위태롭게한 까닭에 대의멸친(大義滅親)한다.”라고 하였다. 이경(以竟)은 달가(達賈)에게 출분(出奔)할 것을 권하였으나 달가는 말하되 “나는 형왕(兄王)을 따라 순사해 죽는것이 진실로 소원이다.”하고 곧 조용히 자진하니 사자(使者)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왕은 달가의 처 다씨(多氏)를 소후(小后)로 삼고 그 전처 음씨(陰氏)를 원항(猿項)의 처로 하였다. 음씨(陰氏)가 말했다. “나는 선왕(先王)과 안국군(安國君)의 대은(大恩)을 받았다. 이제 두 지아비의 상(喪)을 입어 빈소를 지키는 몸이니 다시 결혼할 수는 없다.” 원항이 협박하여 말했다. “네가 만약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안국군의 모든 자식들을 죽일 것이다.”......................................................

음씨(陰氏)의 아들 숙(菽)이 권하여 말했다. “성인 또한 시변을 추찰한다하니 무의(毋宜)하더라도 권도를 좇아 원수를 갚으소서.” 음씨(陰氏)가 이에 원항(猿項)에게 시집가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음씨(陰氏)의 탈절(脫節)을 애석히 여겼다.
상국(相國) 상루(尙婁)는 음씨(陰氏)의 형이다. 사람됨이 온근(溫謹)하고 규각(圭角)이 없었으며 사람을 잘 영접하여 그 뜻을 주재하니 우태후(于太后)와 왕(王)의 신임을 받았다. 그가 음씨(陰氏)에게 힘써 권하며 “안국군(安國君)의 모든 자식들과 우리 집안의 안위가 너의 한 혼사에 달려있다.”하니 음씨는 흐느껴 울면서 그를 따랐다.
원항은 크게 기뻐하여 상루에게 말했다. “이로부터 형제가 되어서 천하를 함께합시다.” 상루가 말하기를 “우리 장군(將軍)은 좋은 아우이니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원항은 본시 미천한 사람으로서 오로지 권도와 속임수(權詐)로 발신(拔身)한 자이니 상루(尙婁)와 더불어 결친(結親)을 하게되자 비로소 그 마음이 흡족하였다.
안국군(安國君)의 옛 신하(舊臣)들과 돌고태자(咄固太子)의 가인(家人)중에 많은 이들이 원항과 척을 지어 원수가 되니 상루는 그들을 어루만지며 다독거렸다.
상루(尙婁)의 아들 상보(尙寶)에게 딸이 있어 이름을 초랑(草娘)이라 했는데 매우 아름답고 노래를 잘하였다. 을불(乙弗)이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냇가에서 만나보고는 기뻐하여 함께 상루(尙婁)의 집에 이르렀다. 상루(尙婁)의 처 현씨(玄氏)를 보고 처(妻)로 맞게 해줄 것을 청하자 현씨(玄氏)는 어리다하여 그를 사양했다. 을불(乙弗)은 연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매일같이 와서 놀며 혹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가고, 혹은 밤이 깊어 이르기도 했다. 초랑(草娘) 역시 을불(乙弗)을 사랑하여 서로 끌어안고 떨어지길 싫어했다. 현씨(玄氏)는 이를 민망히 여겨 초랑(草娘)의 어머니 부씨(芙氏)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했다. 부씨(芙氏)는 부드럽고 어질어서 그들의 정분을 금할 수 없자 마침내 밀통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을불(乙弗)은 초랑(草娘)과 공모하여 담장 밖에 사다리를 내리고 밤이면 와서 자곤했다. 부씨(芙氏)는 이를 알았으나 차마 금하지 못했다.

이때에 모용외(慕容廆)는 왕(王)이 새로 서서 숙부 달가(達賈)를 죽여 국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 왔다. 장군(將軍) 우평(于枰)이 싸웠으나 패배하자 경도(京都)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왕은 신성(新城-國之西北大鎭)의 군사가 정예하고 양곡이 풍족하므로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했다. 출행하여 곡림(鵠林)에 이르렀는데 모용외는 왕이 나온것을 알고 경도를 핍박하지 않고 곧장 정기(精騎)를 이끌고 왕을 추격했다. 뒤쫓아 장차 미치게 되었다. 왕은 화가 임박하자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홀연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있어 왕을 마중하기위해 5백기를 영솔하고 나왔다가 적과 조우하자 일제히 그들을 분격(奮擊)하였다. 모용외는 대비가 있는 줄 알고 후퇴하였다. 돌고태자(咄固太子) 또한 우자(于刺)등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모용외의 후미를 쳐서 대파(大破)하니 모용외는 마침내 퇴각하여 물러갔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고노자(高奴子)의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하고 곡림(鵠林)을 하사하여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군신(群臣)들이 우평(于枰)의 군사가 패한 죄(罪)를 묻고자하며, 또 돌고태자(咄固太子)의 공(功)을 표창할 것을 청하자 왕이 말했다.
“승패는 일시의 운(運)이요, 충심(忠心)의 다과(多寡)에 있는것이 아니니 다시 복론하지 말 것이다. 또 돌고(咄固)는 내가 일찌기 그에게 준 바 없는 병력을 거느렸노라. 창황한 시기를 맞아 제군(諸軍)이 추대한 바 그리 되었다하나 나는 과연 그것이 충심(忠心)을 가지고 그런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돌고(咄固)를 추대한 장수들은 모두 대사(臺司)에 내려 이를 심문하라.”
돌고(咄固)가 방회(方回)에게 물었다.
“형왕(兄王)이 병력을 거느린일로 나를 의심하니 나는 어찌 처신해야 마땅하겠소?” 방회(方回)가 말했다. “마땅히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들어앉아 삼가고 조심하십시오.”
그때에 돌고(咄固)의 어머니 고씨(高氏)와 처 을씨(乙氏), 누이 다씨(茶氏)는 모두 총애가 쇠하고 오직 우태후(于太后)가 낳은 돌고의 딸 탐씨(耽氏)만이 그를 구하고자 힘써 우태후에게 탄원하고 있었다.
상국(相國) 상루(尙婁) 또한 말했다.
“돌고(咄固)는 난국(難)에 임하여 위급(急)을 구하느라 미처 명을 받들지 못하고서 기병(起兵)한 것이니 사사로운 뜻은 없었습니다. 공은 크고 죄는 적으니 청컨대 우애지정(友愛之情)으로써 그를 관대히 용서하소서.”
왕은 노하여 말했다.
“앞서 달가(達賈)가 불궤(不軌)할 때 경(卿)은 주살해야 된다는 말 한마디 없다가 이제 돌고(咄固)를 위해 변호하니 경 역시 달가의 부류(流)가 아닌가? 돌고는 겉으로 꾸미고 안으로 음험하여 내 모후를 증(烝)해서 딸 탐씨(耽氏)를 낳았건만 국인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를 어질다고 한다. 달가의 무리가 나를 폐하고 그를 세우려한지가 오래 되었도다. 지금 달가가 비록 주살되었다하나 그 무리들이 산재하여 언제 변을 일으킬지 몰라 짐은 마음이 불안하다. 화근을 제거하지 않고 어찌 그 재앙을 멈춘단 말인가?”
상루는 황공하여 땀을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두드려 사죄하였다. 원항이 말했다.
“상국의 충심은 신(臣)이 명백히 아는 바 입니다. 폐하의 우애지도(友愛之道)를 위해서 특별히 돌고(咄固)를 구하고자 했을 따름이니, 만약 달가(達賈)와 같은 마음이라면 신의 처(妻)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왕은 “상국의 마음은 내가 태자 때부터 알고있으나 오늘의 말은 뜻밖에 나온고로 특별히 그를 시험했을 따름이다.”하며 술을 내리도록 명하고 그를 위로하고서 나갔다.

그 때에 을불(乙弗)은 집안의 화(禍)가 임박했음을 모르는 채 초랑(草娘)에 대한 애정에 빠져서 매일 밤으로 상국(相國)댁의 담장을 넘고, 부씨(芙氏)의 침방(寢房)에 들어가서 초랑(草娘)과 더불어 무산(巫山)의 운우를 희롱하고, 어수(魚水)의 동락을 탐닉하였다.
이날 밤에 성긴 비가 흩뿌리며 가을 바람소리가 정원 나무에 소란스러웠고, 이따금씩 뇌성(雷聲)소리가 은은히 원근에 울려퍼졌다.
부씨(芙氏)는 당(堂)안에 비단 금침을 깔고서 초랑(草娘)의 머리를 빗기고 연지(臙脂)를 바르며 그를 기다렸다. 갑자기 을불(乙弗)이 언손에 입김을 불며 들어서는데 얼굴에는 우울한 기색이 서려있었다. 초랑(草娘)이 좇아나가 그를 안고 당(堂)안으로 맞아들이며 물었다. “낭군은 무슨일로 근심합니까.”
을불이 말했다.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하여 나의 부군(父君)을 참소하니 화(禍)가 멀지않은 곳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즐길 날이 많지 않은듯하여 두렵구나.”
부씨(芙氏)가 잔에 술을 따라 내밀며 그를 위로하였다.
“태자는 근심하지 마시오. 우리 아버지 상국(相國)이 반드시 그를 구할 겁니다.”
을불(乙弗)은 저으기 마음이 풀어져서 초랑을 안고 금침으로 들어갔다. 혹은 희롱하며 혹은 농탕하였다.
부씨(芙氏)는 등불을 돋우고 그 앞에서 을불(乙弗)의 옷을 마름질하며 말했다.
“이옷을 다 만들면 마땅히 좋은 사위, 좋은 딸과 더불어 수왕(樹王)께 빌러 갈 것이로다.” 을불(乙弗)이 물었다. “무슨 일을 빌러갑니까?”
부씨(芙氏)가 말하길 “좋은 손주 낳기를 빌지요.” 초랑이 말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합니까? 시작해야 할 일이라면 나는 부군(父君)의 무사를 빌고 또 한가지 일을 빌고 싶습니다.” 부씨가 “무엇이냐?”하고 묻자 초랑은 말하지 않았다. 을불이 “장모(妻母)는 곧 내 어머니인데 말하는데 무얼 꺼리는가?”하자 초랑이 이에 기원하여 말했다. “우리 낭군 빨리 왕위(王位)에 올라서 이몸을 후(后)로 봉하소서.” 을불이 이어서 말했다. “장모(妻母)를 태후(太后)로 봉하소서.”
부씨(芙氏)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남들이 들을까 두렵습니다.”
그때 갑자기 차마(車馬)의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시비가 들어와 상국(相國)이 돌아왔음을 고했다. 부씨는 당황하여 급히 나가서 현씨(玄氏)와 더불어 상루(尙婁)를 당(堂)으로 맞이해 들이며 조복관대(朝服冠帶)를 벗기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상루가 말했다. “초아(草兒)는 어디에 있길래 나와서 할애비를 보지 않느냐?” 부씨가 말했다. “갑자기 이처럼 추워져서 일찍 재운 까닭에 미처 데리고 나오질 못했습니다.” 상루가 말하기를 “늙어가며 유일한 낙이라고는 초아(草兒) 하나뿐인데 어째서 나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재웠단 말이냐? 오늘 밤 늙은 애비는 마땅히 초아(草兒)와 함께 자야겠노라.”
현씨가 웃으며 말했다. “초아는 이미 젖먹이가 아닌데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가? 밤낮으로 생각하는 바는 오직 을불(乙弗)태자일 따름이니 속히 혼사를 치르어 그 마음을 편케 해야 할 것이다.”
상루는 무연(憮然)히 말하였다. “을불의 혼사는 깨졌으니 말하지 마라. 오늘 밤 황상(皇上)은 돌고(咄固)태자에게 죽음을 내리고, 을불(乙弗)은 삭탈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을불의 어머니 을씨(乙氏)를 우탁(于卓)의 첩으로 삼고, 돌고의 어머니 고씨(高氏)를 내 첩으로 삼은 까닭에 내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태가 이미 이지경에 이르러서 을불(乙弗)의 목숨이 심히 위태롭거늘 어찌 한가하게 혼사를 말하겠는가?”
부씨(芙氏)는 이 말을 듣고서 실신(失神)하여 바닥에 엎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현씨(玄氏)가 말하였다. “그대는 상국(相國)이 되어서 어찌 죄없는 태자를 죽게했는가?”
상루는 말했다. “내가 비록 힘써 구하고자 했으나 황상이 불허하니 어찌하랴. 내 달가(達賈)가 제거되는 것을 보았을 때 부터 상국이 되고싶은 뜻이 없었으나 한번 스쳐본 화(一流目之禍???)의 불측(不測)함이 두려웠던 까닭에 사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오늘 밤에 이르러 이러한 대참사를 보게되니 내 마음은 재가 되고 혼백은 죽노라. 내 어찌 녹을 탐하는 자이겠는가? 초아(草兒)를 생각하면 사랑스런 모습이라, 능히 순국(殉國)하여 아이를 버리지 못하는 부류인 것이다.”
현씨(玄氏)는 다만 “네!” “네!”하면서 부씨(芙氏)를 부축해 일으키고 말했다.
“마땅히 이때는 밖으로 기색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지니 너는 자중하고 네 아버지께 술을 내어가야 옳을 것이다.”
부씨는 눈물을 수습하며 술상을 차려 올렸다.
상루는 술에 취하자 부씨의 등을 어루 만지며 말했다. “만사는 재천이니 억지로는 할 수 없다. 을불의 일은 모름지기 네가 초아에게 좋게 말해서 끊도록하라.”
부씨는 울며 말했다. “초아는 이미 스스로 사사롭게 기혈(氣血)을 교합하여 농밀하게 되었으니 끊기가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상루는 놀라서 말했다. “네가 내 며느리가 되어서 어찌 아이를 이와같이 가르쳤더냐?” 부씨가 말하길 “금지해도 듣지않으니 어찌합니까? 현사(玄事)가 어렵다는 것은 반드시 이를 말함입니다.”
상루가 말했다. “주상이 이를 알면 우리 가족들은, 마땅히 을불을 멀리 도피시켜 소재를 모르게한 연후에야 안전하리라.”
이에 심복 종(奴) 두사람을 불러세우니 그 한사람은 북부(北部)에서 죽을 죄를 지은 것을 상루(尙婁)가 숨겨줘 살아난 까닭에 이름을 ‘재생(再生)’이라 했고, 또 한사람은 그 어머니를 토호(土豪)에게 빼앗기고 그 아버지가 장차 살해당하려는 것을 상루가 구하여 살려준 자로서 이름을 ‘담하(談河)’라고 했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을불(乙弗)을 유배인으로 변장시키고 비류(沸流)로 달아나 상루의 먼 친족인 음모(陰牟)의 집에 이르르자 거짓말로 상루(尙婁)집안의 죄인이라 칭하고 그를 맡겼다.


때는 수우(水牛:계축293)의 9월 추(秋) 5일의 심야(深夜)였다. 하늘은 칠흑같이 어둡고 궂은비는 쏟아지듯 내리고 있었다. 초아(草兒)는 을불(乙弗)을 안고서 호곡하다가 이별을 참지 못하고 난간에 쓰러지니 을불이 말했다. “십년만 나를 기다리면 다시 아내로 맞을수 있으리라.” 초아가 말했다. “비록 백년이라해도 기다릴 것이니 심려말고 가소서.”
이튿날 왕은 을불을 찾다가 행방이 묘연하자 그를 수색하고자 했다.
때에 우탁(于卓)은 을씨(乙氏)의 미색을 기뻐하여 그녀를 찾아 첩으로 삼고 함께 동침하려 하였다. 을씨가 노하여 말했다.
“나는 종실(宗室)의 딸이다. 오직 두 왕과 태자에게만 소천(所薦)되었을 따름이다. 지금 비록 몰락했다고 하나 어찌 너에게 더럽힘을 당하겠느냐? 조속히 죽여야 가할 것이다.”
우탁은 그 굽힐수 없음을 알고 후(后)의 예로써 배알하였다.
“신이 어찌 감히 강압하겠습니까? 다만 현사(玄事)에는 귀천이 없다하니 소후(小后)께서는 신의 연모지정을 가엾이 여기고 한번의 동침을 허락해 주신다면 물불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어찌 을불태자의 장래는 생각지 않고 헛되이 죽으려 하십니까? 신이 만약 그를 구하여 안전해질 수 있다면 그 장성함을 기다렸다가 설욕할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자복(雌伏) 회계(會稽)는 이를 비유해 이르는 말이니 소후(小后)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을씨(乙氏)가 말했다.
“네가 만약 그 아이를 구해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가히 더불어 동침하리라.”
우탁(于卓)은 이에 힘써 왕에게 간하였다.
“을불(乙弗) 꼬마가 비록 달아났다하나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하늘(天)은 진살(盡殺)함이 없고, 일(事)은 지나치게 궁지로 모는 것(太窘)을 꺼린다 했습니다.”
왕은 그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이에 대연(大宴)을 설(設)하여 군신(群臣)들을 향응하고, 대신(大臣)과 내외친척들을 내정(內庭)에 불러들여 또한 가무(歌舞)를 설(設)하고 5일동안 야연(夜宴)을 베풀었다.
왕은 상루 집안의 초랑(草娘)이 있다함을 듣고 사람을 시켜 정연(庭宴)에 참석할 것을 재촉했다. 초랑이 병질로 사양하자 왕은 어의를 보내어 치료하고 억지로 일으켜 연회에 나오도록 했다. 왕이 그 가희(歌姬)를 보내어 함께 반주하고 노래를 시키니 초랑이 억지로 추스리고 발성(發聲)을 하였다. 왕이 듣고서 아름답게 여기고는 가까이 오도록하여 손을 잡고는 “상국에게 이처럼 고운 아이가 있으면서 어찌 일찍 궁중에 들이지 않았는가.”하며 금과 비단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초랑은 사은(謝恩)하고 귀가했으나 을불의 소식을 몰라 즐거운 기색이 없었다. 부씨(芙氏)가 위로해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치게 상심할 것 없다.”
그 후 며칠 안돼서 홀연 왕이 미행(微行)하여 상루의 집에 이르렀다. 상루는 크게 놀라서 나와 맞으며 안팎으로 허둥거렸다. 왕이 말했다.
“짐이 초랑이 보고 싶어 왔으니 경은 이를 허물치 말라.”
상루는 이마를 조아리며 “천한 여식이 추한데다 창졸간에 예를 차릴 줄 몰라 성지(聖旨)를 저버릴까 두렵습니다.” 왕은 웃으며 말했다.
“한번 본 이래 마음속에 잊을 수가 없었다. 속히 보기를 청하노라.”
상루는 어쩔 수 없이 왕을 내당(內堂)으로 맞이하고 부씨(芙氏)로 하여금 초랑(草娘)을 단장시켜서 나와 절하게 하였다. 왕은 초랑을 이끌어 무릎위에 안고서는 마치 옥(玉)과 같이 아꼈다. 상루는 부씨로 하여금 술을 내오게하고 왕에게 말했다.
“천한 여식이 성은을 입음이 이와같으니 신의 집안에 복(福)이옵니다.”
왕이 술잔을 잡으며 부씨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하자 부씨가 대답했다. “첩은 상루(尙婁)의 아들 보(寶)의 처(妻)이니 곧 초랑의 어미입니다.” 왕은 또한 그녀를 끌어 안으며 “그대의 아름다움이 이와같은 까닭에 이렇게 좋은 아이를 낳았구나!”하고는 상루에게 물었다. “상보(尙寶)는 어디에 있는가?” 상루가 대답했다. “신의 아들은 서토(西土)로 출정하여 지금은 우자(于刺)의 군중(軍中)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경의 부자는 짐에게 큰 공이 있으니 덕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구려. 짐은 초랑을 후(后)로 삼아서 경의 외손을 빛나게 하고자 하니 경은 그 한아비(祖)가 되어서 나라를 지켜주시오.”
상루는 이마를 조아리며 사은(謝恩)하고 부씨에게 명하여 이불을 깔게하니 곧 을불(乙弗)과 더불어 운우를 즐기던 그 금침이었다. 초랑은 꿈속처럼 황홀하여 상루가 물러가고 부씨가 옆에 시측하여 하의를 벗기는 것도 몰랐다. 왕이 손으로 초랑의 치마와 띠(裙帶)를 풀고 금침속으로 안아들이니 마치 미친 나비가 화심(花心)을 탐하는 듯 백가지 애정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초랑(草娘)은 다만 푸주에 들어온 소처럼 희노(喜怒)의 감정을 끊었다.
삼십대왕(三十大王)의 장양지경(壯陽之莖)이 이칠(二七)의 소문지애(小門之艾)를 상봉하니 구름은 짙고 비는 진했으며 파도는 높고 소리는 세찼다. 왕은 보고 또 얼우고, 얼우고 또 보거늘 초랑은 다만 기식이 엄엄해 할 따름이었다.
왕은 행(幸)을 마치자 부씨(芙氏)에게 향탕(香湯)을 내오도록하여 옥체(玉體)를 닦으며 부씨를 끌어안고 희롱하였다. “경은 나이가 몇인가?” 부씨가 “첩은 이제 설흔 한살입니다.”하자 왕은 “나보다 네 살이 적다, 만남이 뒤늦은 게 한스럽구나!”하고는 그대로 부씨의 붉은 치마를 헤치고 옥문을 만지려 하였다. 부씨가 이를 거부하며 “첩은 마침 더러운 것이 있어 성수(聖手)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하자 왕은 강제로 그것을 취하여 어루만지며 “꿩(치갈?)을 생각하여 알을 얻는 정의 원인??이 그러하다(得卵思雉情因然也)???”하고는 입을 맞추며 색정을 도발하였다. 부씨는 얼굴이 불같이 달아올라 크게 콧숨을 토해내며 “바라건대 폐하는 첩을 용서하소서.”하였으나 왕은 강제로 부씨의 옷을 벗겨 알몸을 안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또한 통하였다. 초랑은 망연자실하여 묵묵히 그것을 바라 볼 따름이었다. 왕은 연달아 모녀를 행하고는 피로하여 쓰러졌다.
부씨는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비녀에게 명해서 치란탕(雉卵湯)을 짓게하여 이를 진공하니 왕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부씨에게 입마추며 “경은 진정 사랑스럽소!”하였다. 부씨는 입으로 불어 받들어 올리며 “모녀의 동방성은(同房聖恩)이 하늘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했다. “초처(草妻)는 오히려 어리니 경이 먼저 내 알(子)을 낳으시오.” 부씨는 웃는 눈으로 끄덕거렸다.
왕은 꿩(雉)을 씹어 초랑에게 먹이고, 알(卵)을 씹어 부씨에게 먹이며 “알처(卵妻)는 꿩(雉)을 먹고, 꿩처(雉妻)는 알(卵)을 먹으니 가히 정이 균등하다.”라고 했다.
왕은 다시 초랑을 안고 운우를 행하였다.
새벽이 되자 닭은 ‘꼬꼬댁. 꼬꼬댁(喔)’ 울어대고 비온 땅은 미끌 미끌하였다. 왕은 부씨에게 말했다. “국인이 이를 알까 두렵다. 내일 밤 다시 오겠노라.”
부씨는 시비에게 명하여 탈것(駕)을 내오게하고 이마를 조아려 사은(謝恩)하였다. 왕은 초랑을 안아 일으키고 서로가 옷을 입혀주었다.
밖으로부터 상루가 들어와 사은숙배하니 현씨(玄氏) 또한 절하고 옆에 시측하였다.
왕은 초랑을 안고 문을 나서다가 현씨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좋은 할머니(好祖母)이니 가히 좋은 할아비(好祖父)를 붙들 수 있겠소.” 현씨는 이에 상루를 붙들고 웃으며 말했다. “첩의 남편은 늙고 박정하여 폐하가 천녀를 아끼심만 못합니다.”
왕이 초랑을 남겨두고 수레로 들어가자 상루가 그 옆에 참승하였다. 수레가 출발하려하자 부씨는 초랑과 더불어 차전(車前)에 부복하여 “성은이 하늘과 같사옵니다(聖恩如天)”라고 제창하였다. 왕은 차마 곧장 출발하지 못하고 다시 초랑을 끌어당겨 안고 입맞추며 “나의 처(吾妻)! 나의 처(吾妻)!”라고 불렀다. 상루가 말했다. “하늘이 밝아오니 출발해야 합니다.”
왕의 어자(御者)가 마침내 말을 채찍질하여 궁(宮)으로 돌아갔다.
부씨(芙氏)는 초랑을 안고서 입맞추며 말했다.
“우리 딸이 복이 많아 성천자가 강림하셨도다.”
초랑이 웃으며 말했다. “구왕(仇王)이 나를 적셔놔서 걷자니 양다리가 축축한데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기쁩니까?” 부씨가 말했다. “주상의 나이 한창이고 양기위강하여 한번 동침하니 혼이 흩어지고 은공이 깊거늘 너는 어찌 구왕(仇王)이라 하느냐?”
초랑이 말했다.
“나의 남편은 을불태자입니다. 구왕(仇王)이 비록 장양(壯陽)해도 내가 어찌 동(動)하겠습니까?”
부씨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왕의 처가 되게 해 달라고 빌은 까닭에 신(神)이 왕경(王莖)으로써 너에게 주었거늘 너는 어찌 감사하지 않고 곡정(曲情)하느냐? 구사지중(九死之中)의 을불태자를 구하는 것은 오직 왕에게 어떻게 교태를 부리느냐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초랑은 이내 크게 깨닫고 말했다.
“과연 어머니 말과 같습니다. 내 마땅히 왕에게 교태를 부려 나의 남편을 구할것이로다.” 부씨는 웃으면서 초랑을 끌어당겨 그 옥문을 만지며 말했다.
“이 문이 왕경(王莖)을 머금고 천음(濺淫)할 시에 또한 미상불 환희하였으렸다!”
초랑이 웃으며 어머니를 때렸다. “무슨 음담을 그리 심하게 합니까?”
부씨 말하기를 “내가 네 덕택에 성양(聖陽)을 모셔서 쾌미(快味)를 맛볼 수 있었으니 잊을 수가 없다.”
초랑은 귀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고백하였다.
“왕의 양미(陽味)인즉 맛있었습니다.”
부씨는 웃으며 초랑에게 입맞추고 말했다.
“대웅(大雄) 복자(伏雌)를 즐거워하지 않을 여자는 없다. 너 또한 여자이다.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은공을 생각하고 성왕(聖王)을 구왕(仇王)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초랑은 혼란하여 떠듬 떠듬 말했다.
“성왕(聖王)..!성왕(聖王)..! 그렇다면 을불(乙弗)은 버려야하는가? 성왕(聖王)을 사모해야 하는가?”

부씨는 이에 초랑을 안고 탕에 들어가 몸을 씻고나서 현씨(玄氏)와 상루(尙婁)를 배견하고 사은하였다.
“부모님의 은혜가 무거워 이러한 영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상루는 왕을 전송하고 돌아와서 아직 조복을 벗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부씨와 초랑을 좌우로 끌어당겨 어루만지고 입맞추며 말했다.
“우리 선군(先君)께서 다년간 적덕(積德)하시며 늘 우리 형제에게 이르기를 ‘우리 가문이 三世에 상(相)이 일어나고 반드시 후비(后妃)를 낳으리라’했는데 과연 너희들이 그러하다. 이로부터 입궁하면 우리 부부를 효(孝)로써 대함이 불가하니, 집에 있을때 진열(盡悅) 진효(盡孝)함으로써 늙은 애비를 위로해야 할 것이다.”
이에 초랑을 안고 그 아버지 음우(陰友)의 묘(廟)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손녀 초랑(草娘)이 이제 주상의 총행(寵幸)을 입었으니 곧 우리 아버지의 덕(德)입니다.”하고는 묘실안에서 춤을추고 또 현씨와 부씨에게도 명하여 춤을 추게했다.
초랑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주상을 안고 누우면서 그 양물을 보니 지푸라기 같았는데 할아버지는 어찌 기뻐함이 이와같이 심합니까?”
상루는 자세를 바꿔앉아 부복하며 “우리 딸은 다른 날의 후(后)인고로 교오(驕傲)함이 이와같으니, 노신(老臣)은 비록 할아비(祖)이로되, 또한 신하(臣)입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초랑이 상루를 안아 일으키며 “그대는 미쳤음인가? 어찌 이런 꼴을 하오?”하자 상루는 크게 기뻐하며 다시 초랑을 안고 춤을 추다가 묘(廟)에서 나왔다. 종(奴)에게 명하여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집안(宅中)의 신(臣) 노(奴) 처(妻) 녀(女)에게 하사하고 다함께 경축했다.
왕이 궁중으로부터 비단(帛緞) 50필, 포단(布緞) 3백필과, 초랑(草娘)과 부씨(芙氏)의 차마(車馬)와 자의(紫衣), 금관(金冠)을 내려보냈다. 상루는 가인(家人)들을 모아 공수(共壽)하고 그 포(布)를 친척과 오랜 친구(故舊)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이 이로부터 혹은 매일밤으로 혹은 사,오일밤 간격으로 와서 행(幸)하니 초랑의 총애가 높아지고 은사가 깊어졌다. 초랑 역시 운명의 거역할 수 없음을 알고 곱디 곱게 진정을 다했다.
이 때에 왕후(王后) 연안씨?(緣眼氏?)는 부마 연나(椽那)의 딸이었다. 나이 30으로 연태자(椽太子)와 안태자(顔太子)를 낳았고, 또 왕녀 2인을 낳았는데 성품이 유순하고 투기하지 않았다. 우탁의 딸 산씨(山氏)와 왕매(王妹) 다씨(多氏)는 모두 나이 이십 육,칠세로 총애가 처음과 같지 않았다. 왕모 우태후는 나이 51세로 색(色)이 한창 왕성한지라 왕이 매일밤으로 증(烝)하며 총애가 가장 많았다. 서모 해포씨(解蒲氏)는 나이 29세로 왕이 태자때부터 통정하여 총애가 쇠하지 않고 이에 이르렀으나 초랑이 새로 총애를 받자 모든 방이 다 공허해졌다.
우태후는 왕에게 아부하려는 뜻에서 속히 궁중으로 맞아들일 것을 권하였다. 왕은 거처할만한 궁이 없으므로 장작령(匠作令)에게 명하여 신궁(新宮)을 크게 일으켰는데 사치가 극심하였다. 초랑을 맞아들여 택일하고 책립하여 차비(次妃)로 삼으니 지위가 연씨(緣氏)의 다음이요, 제후(諸后)의 위(上)였다.
우태후(于太后)는 “초후(草后)는 내 딸이다.”하며 매번 초후(草后)와 함께 같은 이불에서 왕의 총행을 받았다. 이에 초후(草后)의 총권(總權)이 내외(內外)를 기울어지게 했다. 왕은 다시 상루의 정원에 부씨궁(芙氏宮)을 짓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하사했다. 부씨(芙氏)와 음씨(陰氏)의 자제들을 발탁해서 모두 추요(樞要)에 늘여 세우고 부씨의 아비 포(布)를 남부패자(南部沛者)로 삼았다.
상루(尙婁)는 상주하여 말했다. “노신의 영예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원컨대 치사(致仕)하고 병을 요양코자 합니다.” 왕이 말했다. “경은 바로 나의 할아버지(祖)요. 스스로 태공(太公)이 되어도 가할것이나 상국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오?”
상루가 말했다. “신(臣)의 처 현씨(玄氏)는 두 살때 어머니를 따라 창협(倉夾)의 집으로 개가(改嫁)하여 자랐습니다. 창협의 아들 조리(助利)는 곧 신처(臣妻)의 포제(胞弟)입니다. 충직하고 재주가 있어 신이 일찌기 남부대사자(南部大使者)로 삼았는데 훌륭한 치적이 많습니다. 국상(國相)을 맡음에는 이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합니다.”
왕이 말했다 “내 할머니(祖母)의 포제(胞弟)요. 먼저 대주부(大主簿)로 진작(進爵)시켜 입조(入朝)케 함이 가할 것이오.”
창조리(倉助利)가 명을 받들고 나아와 알현하자 왕은 상루의 장원(尙婁庄) 옆에 새 집(新宅)을 하사하고 그를 권려하였다. “이른 새벽 마땅히 상(相)이 됨으로써 짐의 몸을 보필할 것이다.”

이때에 부씨(芙氏)가 왕의 아이를 배었다. 왕은 그녀를 심히 아껴서 상보(尙寶)로 하여금 따로 왕의 누이(姉) 불씨(弗氏)를 아내로 맞게하고, 부씨(芙氏)를 소후(小后)로 세워 그 지위를 초후(草后)의 아래에 두고자 하니 (모두가) 난감해 하였다.
창조리(倉助利)가 간하였다.
“폐하께서 이미 그 딸을 납(納)하시고 다시 그 어미까지 납(納)하여 국인들이 음란을 즐긴다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어미를 아래에 두고 딸을 위에 두십니까?”
왕이 말했다.
“이미 내가 그르쳤다. 짐의 과오로다.(旣己誤之朕之過也???)”
창조리가 말했다.
“현사(玄事)의 어려움은 반드시 귀천(貴賤)이 동일합니다. 폐하께서 부씨를 행(幸)함은 일시의 취흥에 불과한데 하필 구구하게 후(后)로 세워서 만민(萬民)으로 하여금 똑같은 잘못을 바라보게 하십니까? 은밀한 색공(色供)으로 삼음이 가할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중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씨(芙氏)가 왕자 진(津)을 낳았다.
상루가 말하기를 “왕자의 어머니가 신하의 집에 거(居)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입궁해야 마땅한 일이나 봉작(封爵)이 없으니 어찌할꼬!”
창조리가 말했다.
“천첩(賤妾)의 자식이 어찌 빠짐없이 왕통(王統)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상국께서 음사(淫事)로써 왕을 돕는 것은 불가합니다.”
상루는 사과했다.
“내가 실수했노라.”
왕이 상루에게 말했다.
“창조리는 원리원칙(正則)대로 똑바르니 거의 인정(人情)이 아니오.”
상루가 말했다.
“천하에 왕노릇하는 자(王天下者)는 부인의 정(情)으로써 정(情)을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정(情)에 이끌리면 법이 해이해지고 백성이 문란해져 구제할 수 없습니다.”
왕이 이에 왕자 진(津)을 초후(草后)의 아들로 삼고 부씨(芙氏)를 유모로 삼아서 입궁시키니 군신(群臣)들 모두가 창조리(倉助利)를 두려워하여 감히 간사한 수작을 않게 되고 마침내 조정이 숙연해졌다. 왕은 창조리가 큰 그릇(大器)임을 알고 그를 더욱 무겁게 여겼다.
청호(靑虎:갑인294) 9월, 상루(尙婁)가 자택에서 졸(卒)하였다. [나이는 63세였다, 그 어머니 상해(尙解)는....年六十三其母尙解○女○妾以陰友○從母姓爲○○ (행간의 細注부분인데 글자가 너무작고 흐릿해서 확인이 안됨, 해석불능)]
왕은 애도하며 그를 태공(太公)의 예(禮)로 장사하였다.
[갑인 9월, 연방(椽方)을 좌보(左輔)로 삼고, 우평(于枰)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창조리(倉助利)를 맞아 상국(相國)으로 삼고 노비(奴婢)를 더하였다. 창조리가 말했다.
“상국(上國)이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입니다. 위엄이 없으면 서지못하니 원컨대 폐하의 보검을 얻어 명령을 듣지 않는 자를 참하고자 합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곧 죽려검(竹呂之劒)을 하사했다. 창조리는 이에 검을 들어 군신(君臣)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경계하고 분발하라!”
때에 알자(謁者) 원항(猿項)은 왕의 총애를 믿고 대신들을 능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안국군 달가(達賈)의 처 음씨(陰氏)는 달가의 자녀들을 이끌고 원항에게 재가함으로써 달가의 집안을 보전했는데, 겉으로는 교태롭게 굴었으나 기실 속으로는 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왕은 돌고태자의 어머니 고씨(高氏)를 상루(尙婁)에게 내렸는데 상루가 받지않자 원항이 스스로 이를 취하였다. 고씨(高氏)가 말했다. “너는 궁노(宮奴)의 자식으로써 어찌 감히 선왕(先王)의 후(后)에게 행음(淫)하느냐?” 원항이 말하길 ”솥안의 고기가 감히 후(后)를 말하는가?“하며 강제로 증음(烝)하고는 고역(苦役)에 내몰아 일을 시켰다.
음씨(陰氏)가 애처럽게 여기고 그를 두터이 대우하며 말했다.
“우리는 땅에 떨어진 용(龍)입니다. 어찌 스스로를 괴롭히며 적에게 항거하십니까?”
고씨가 말했다.
“나는 이미 늙어서 다만 이 문을 더럽힐 따름이지만 그대는 아직도 젊으니 도적의 자식을 낳게 된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음씨가 말했다.
“과연 나는 임신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마땅히 압살(壓殺)할 것입니다.”
계집종이 이말을 엿듣고 원항에게 일러 바쳤다. 원항이 장차 고씨(高氏)를 포박해서 형(刑)을 가하려 하자 음씨(陰氏)가 노하여 말했다.
“내가 분을 참고 너를 따른 것은 집안을 보전코자 함이었다. 네가 지금 선왕의 여후(女后)를 능욕하고 달가의 몽녀(冡女)를 간음하니 네 음욕이 장차 무슨 수로 틀어 막히겠느냐?”
이에 장창(長槍)을 휘두르며 나아가니 원항이 수하(奴)로 하여금 대적토록 했으나 모두 피살당하고 격상되었다. 원항이 놀라서 우림위(羽林衛)로 달아나 왕명을 빙자해 말했다.
“달가(達賈)의 족당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병력을 발하여 그를 잡아야 할 것이다.”
창조리의 아들 멱(覓)이 당시 위두(衛頭)가 되어서 말했다.
“상국(相國)의 명(命)이 오지않았으니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원항이 말하길 “상국이 왕과 더불어 숙귀(熟貴)하다하나 왕명을 듣지 않는 자는 참해도 가할것이다.”
멱(覓)이 말했다.
“그대는 왕명이라 말하나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무슨 수로 왕명임을 알겠습니까?”
원항이 말했다.
“내말이 곧 왕명이다.”
멱(覓)이 노하여 말하길 “신하로써 왕을 칭하는 자는 역적(賊)이다.”하고는 그를 포박해서 상부(相府)로 보냈다.
창조리는 이내 그 왕명을 빙자한 진상을 알고 대사(臺司)에 물었다.
“왕명을 빙자하여 병력을 동원한 죄(矯詔發兵之罪)는 무엇이냐?”
“법은 마땅히 참형입니다.”
창조리가 이에 참수할 것을 명하자 서리(吏)가 말했다.
“일찌기 주상이 조서(詔)를 내리되 ‘원항은 비록 죽을 죄가 있어도 마땅히 품신하고 다스리라’했습니다. 지금 급거히 죽임은 불가합니다.”
원항이 웃으며 말했다.
“상국은 생사지추(生殺之椎)를 오로지 하고 싶겠지만 그게 되겠는가? 내 마땅히 이 한을 갚아 주겠노라.”
창조리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죽려(竹呂)를 받을 시에 원항을 제외하라는 명은 없었으니 가히 이로써 벨 수 있느니라.”
원항은 안색이 변했고 그의 무리는 궁으로 달려들어가 왕에게 고했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사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창조리는 그 사자를 문밖에 세운 채 원항의 목을 내걸은 다음 들여보냈다. 사자가 “원항을 구하러 왔는데 지금 이미 효수됐으니 어찌하랴?”하니 창조리가 말했다.
“그대가 오는 것이 더디었네.”
왕은 원항이 이미 참수된 것을 알고 노하여 말했다.
“상국이 나의 심복을 베다니 반(反)하고자 함인가?”
초후(草后)가 곁에 있다가 제지하며 말했다.
“내가 입궁하기 전부터 이미 원항의 흉간(凶干)을 들어왔다. 상국은 내 할아버지의 아우인데 어찌 우리 부처(夫妻)를 배반할 리 있으랴. 그대(汝)는 원항에게 기만된 까닭에 국인들이 그것을 의혹하였노라. 상국이 그대(汝)를 위해 적(賊)을 참했으니 또한 경사가 아닌가?”
왕은 초후(草后)를 아끼어 “예(唯), 예(唯),”하면서도 마음은 오히려 즐겁지 않았다.
창조리(倉助利)가 이에 원항의 무리 52인을 체포해서, 남의 부녀자(婦女)를 강탈하고, 전택(田宅)과 우양(牛羊)을 노략질하고, 조서를 사칭해 칭왕(稱王)하고, 비밀리에 반역을 모의한 정상 12가지를 들어 참수할 죄상으로써 이를 상주하였다.
왕은 이에 경악하고 “짐은 원항이 이와같이 극악간흉한 줄 몰랐노라. 우리 처(妻)는 거의 조금도 상국을 의심하지 않았도다.”하며 마침내 원항의 처 음씨(陰氏)와 고씨(高氏)를 창조리(倉助利)의 처(妻)로 삼고, 그 재산을 남김없이 창조리에게 하사하였다.
창조리가 말했다.
“고씨(高氏)는 선왕(先王)의 후(后)이고, 음씨(陰氏)는 나의 형매(兄妹)이니 내가 어찌 강요하겠는가? 달가(達賈)는 비록 주살되었으나 죄가 없으니 그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는 그 자녀에게 돌려줘야 가할것이고, 고씨의 재산 또한 스스로 지니고 생활을 경영함이 가할 것이다. 다만 원항의 불인(不仁)한 재산은 그 자녀에게 줄 수 없으니 원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돌려주고, 돌려줄 수 없는 것은 공금에 소속(屬公)시켜 애민선정(愛民善政)한 관리(吏)와 충용선전(忠勇善戰)한 무사(士)를 장려할 것이다.”
이에 상하가 모두 상국(上國)의 득인(得人)을 칭송하였다.
음씨(陰氏)가 창조리(倉助利)에게 말했다.
“왕이 첩을 그대의 처(妻)로 명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고 취(娶)하지 않습니까? 원항같은 비천한 남편도 나는 왕명을 받들어 취했거늘 하물며 우리 상국(相國)이겠습니까?”
창조리가 말했다.
“나의 처가 비록 병약하나 또한 조강지처입니다. 어찌 버리고 그대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로써 내 처의 비(婢)를 삼는다면 그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바입니다.”
음씨가 말했다.
“군자는 명분(名分)이 아니라 도의(道義)로써 교제함이니, 도(道)가 진실로 나에게 있는데 비(婢)라 한들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창조리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실상은 서로 사모하는 정(情)이 있었다.
창조리의 처가 그 아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와병한지 여러 해이나 네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들이지 않았다. 지금 음씨는 옛 상국의 딸이고 재색을 아름답게 갖추어 가히 취해야 할 것이나 취하지 않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차 죽어서 네 아버지의 은혜를 갚으리라.”
말을 마치고서 곧 숨을 거두었다.

창조리(倉助利)가 이에 음씨(陰氏)를 취하여 처(妻)로 삼으니 왕이 주악(樂)과 향연(宴享)을 그 집에 내리고 백관들로 하여금 가서 축하하고 즐기게 했다.
음씨가 창조리에게 말했다.
“내 뱃속에 더러운 물건이 있으니 낳아서 죽여야만 바야흐로 그대와 더불어 동침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리가 말하길 “원항이 비록 죄가 있다하나 그 자식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하고 마침내 더불어 동침하였다.
음씨는 이에 약을 먹고서 그 태(胎)를 쏟아 버리며 “나는 태아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새 남편의 자식을 낳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을씨(乙氏)의 아버지 을보(乙寶)는 돌고(咄固)의 장인으로서 오래도록 폄척되어 등용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창조리가 극력 천거하며 그 재주가 좌보(左補)를 맡을 수 있다하자 왕이 그를 허락하였다. 음씨는 을보(乙寶)가 상처(喪妻)하고 짝이 없으므로 고씨(高氏)를 권하여 그에게 시집가도록 하였다.
고씨(高氏)가 을보(乙寶)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부부(夫妻)가 되어 을불(乙弗)의 생사를 모르니 살아도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을보가 말했다. “을불은 용의 턱에 호랑이의 두상이니 다른날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에 을불(乙弗)은 수실촌주(水室村主) 음모(陰牟)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있었다. 혹은 나무하고, 혹은 밭갈고, 혹은 짐을 지고, 방아 찧고. 물 길으며 낮으로써 밤이 되도록 계속하였다.
여름날에 초택(草澤)에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는데 음모(陰牟)의 소처(小妻)가 그 소리를 미워하여 을불로 하여금 자지 않고 못 가에 서서 돌을 던져 금하게 했다. 을불은 피로해서 잠이드는 바람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알지 못했다. 음모가 노하여 그를 매질하니 형용은 야위고 수척했으며 의복은 남루하여 다시는 파초?(蕉)때의 용모가 없었다.
을불이 나무에 기대어 탄식을 발하며 말하였다.
“내가 왕자의 존귀함으로 토호(土豪)의 손에 욕을 당해 곤액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는게 죽느니만 못하다.”
이에 못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재생(再生)이 그를 구해서 끌어내며 말했다.
“일시의 고통을 못이겨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마소서.”
하루는 밭사이에서 수확을 하는데 멀리 변경을 바라보니 기러기의 슬픈 울음소리에 추성(秋聲)이 바야흐로 완연하였다. 이에 을불은 짚더미 위에 쓰러져서 누운채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였다.
“서울(京)을 떠나고부터 이미 한 돌(一周)이 지났구나! 언제 다시 초랑과 상견하고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될런지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새 사자(新使者)의 일행이 나타났는데 위세가 당당하게 남쪽을 향해 지나갔다.
을불과 같은 밭에 있던 자들이 모두 그것을 부러워하며 말했다.
“어떤 복력(福力)이면 저런 사자(使者)가 될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능히 나를 잘 섬기는 자는 사자(使者)가 될 수 있다.”
무리들이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죄를 진 고용살이(罪傭)로 자생(自生) 할 수도 없는 주제에 어찌 감히 큰 소리를 치느냐?”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구 집의 죄인인가? 상모가 비상하여 귀인(貴人)이 될 지도 모르니 두렵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는 바로 상루(尙婁) 상국의 죄인이니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말했다.
“내 숙부가 엊그제 서울(京)로부터 왔는데, 상루는 이미 죽고 창공(倉公)이 상국이 되었다고 한다. 법을 집행하는 것이 대단히 엄하여 비록 왕의 총신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까닭에 원항(猿項)이 주살당해 죽었는데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 비록 상루에게 사사로운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새 상국은 법이 명백하니 어찌 송사해서 면죄하지 않는가?”
을불은 원항이 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다가, 상루가 이미 죽고 집법(執法)이 심히 엄하다는 말을 듣자 두려워했다.
을불이 문득 물었다.
“너는 초랑주(草娘主)의 안부를 아는가?
그가 말했다.
“초랑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서 후(后)가 되고 왕자 진(津)을 낳아서 총애가 바야흐로 융성하다고 한다. 네가 어째서 그것을 묻는가? 혹 네가 그 방(房)을 범한 것이냐? 그렇다면 죽음을 면하진 못하리라.”
을불은 비분(悲憤)함을 이길 수 없었으나 겉으로는 태연히 말했다.
“아니다. 나는 상국의 애마(愛馬)를 잘못 죽였기 때문에 상국이 노하여 나를 죽이려 했는데 초랑주(草娘主)가 구해준 까닭에 죽지 않고 여기로 유배되어 온 것이다.”
그 사람이 말했다.
“말을 죽인 죄는 한때의 잘못에 불과하다. 지금 이미 상국은 죽었으니 송사하면 벗어날 수 있으리라.”
을불이 말했다.
“재산이 없는데 어찌 소송을 하겠는가?”
그가 말했다.
“내 숙부는 의(義)를 좋아해서 결교(結交)하는데, 내가 너의 억울함을 말해줄 수 있다. 오늘밤 우리집으로 와서 숙부를 만나보면 일이 잘 될 것이다.”
을불이 물었다.
“너의 숙부는 서울(京)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내 숙부는 곧 을보(乙寶) 상공댁의 노(奴)이다. 돌고태자가 무죄하게 해를 입은 후로부터 을보상공은 어문(圄門)을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의 상국 창공(倉公)께서 천거하여 좌보(左補)의 책임을 맡기고, 또 고소후(高小后)를 아내로 맞이해 택주(宅主)를 삼게되자 비로소 화기가 생겨났는데 다만 을불태자의 생사를 모르는 것이 한(恨)이 돼서 우리 숙부로 하여금 주류천하(周流天下)하면서 그를 찾게하고 있다.”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서울로부터 올때 들으니 을불은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는데 너의 숙부는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설혹 달아난 것을 알았다해도 상공의 재산을 써가면서 사방을 유람하고자 하려는게 아닌가?”
그가 노하여 말했다.
“내 숙부는 의롭고 충직하다. 어찌 주군(主君)의 재산을 훔치는 자이랴! 너같은 자는 내 숙부에게 말해 줄 수 없다.”
을불이 말했다.
“을불이란 자는 금상(今上)의 죄인이니 그를 찾으면 반드시 주살될 터인데 을보상공이 과연 금상의 사허(赦許)를 얻어서 그를 찾고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너의 숙부 역시 죄를 못 면할 것이니 내가 어찌 너의 숙부에게 의지해서 송사를 하겠는가?”
그가 노하여 말했다.
“금상이 무도하게 안국군과 돌고태자를 죽여서 국인들이 그를 원망하고 있다. 우리는 을불태자를 세움으로써 두 군(君)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데 네가 어째서 을불태자를 죄인으로 삼는것이냐?”
무리들이 모두 말했다.
“만약 우리들 모두가 을불태자를 받들고자 한다면 너는 혼자 죄인이 됨으로써 인간의 류(人類)가 아닐 것이니 죽여서 분을 풀어도 가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을불을 때리려고하자 재생(再生)이 급히 말리면서 말했다.
“이는 곧 미친사람입니다. 말을 잘못 죽이고 멀리 옮겨왔는데 나는 이 사람의 숙부로써 또한 연좌되어 온 것입니다. 광병(狂病)이 오히려 증상이 없다가도 때로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니 죄라면 죽여도 가할 것이지만 어찌 정상인들이 그걸 따지겠습니까? 공들은 진실로 천하에 의기(義氣)로운 사람입니다. 나는 그를 하늘처럼 우러르나 이 한 미친사람이야 어찌 일찌기 의기(義氣)를 알아서 말하겠습니까? 의(義)로써 타이를 수는 있어도 다치게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그러려니 여겼다. 이에 제각기 팔을 품고(懷臂) 돌고태자의 현(賢)과 을불태자의 인(仁)을 말하였다. 을불은 스스로 생각하되 내 몸엔 인(仁)이라 칭할만한 것이 없는데 전간(田間)의 우민들조차 모두 그를 생각함이 이와 같다 여겨지니 불각중에 감동하여 눈물이 흘러 내렸다.
모두들 말하기를 “광인 또한 눈물을 흘리니 가히 양심이 있음을 알겠구나.”하고는 마침내 흩어졌다.
을불이 이에 재생에게 일러 말하였다.
“오늘일은 반드시 수선스럽게 전해질 것인즉 혹여 나를 아는 자가 있으리니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이제 상루는 이미 졸하고 초랑은 후(后)가 됐으니 형세가 일변했다. 담하(談河)는 입경(入京)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나는 다른 곳으로 달아나 화(禍)를 피할 것이니 너는 따르고 싶으면 따르고 아니면 따라오지 마라.”
재생(再生)이 말했다.
“신은 은주(恩主)의 명을 받아 태자의 신하가 됐습니다. 비록 물불속이라 해도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함께 도피하여 간고(艱苦)함이 이와 같은데 왜 도망쳐서 살지 않겠습니까? ”
마침내 밭을 버려두고 달아나서 촌락을 전전하며 낙랑(樂浪)의 경계로 피해 들어갔다. 남의 집 홍시(紅柿)를 훔쳐먹으면서 말했다.
“무릇 사람의 도둑이 됨은 다 우리네와 같은 것이니 어찌 죄라 할 수 있겠는가?”
재생이 말했다.
“막비왕토(莫非王土)라 했으니 이 또한 태자의 물건입니다. 비록 주인에게 고하지 않고서 먹으나 어찌 상습도적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비록 왕토(王土)라 하나 나는 지금 왕이 아니니 어떻게 창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왕이란 백성이 가진 것을 도적질 할 수 없다. 훗날 내가 귀하게 되면 마땅히 너를 여기에 봉해 줄 것이니 너는 곱절의 값으로 돌려줘야 할 것이다.”
재생이 노하여 말했다.
“분골하며 태자를 따르는 것은 다만 의기(義氣)일 따름이지 어찌 봉토를 바라겠습니까?”
을불은 이내 실언을 사과하고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지쳐 더 이상 한 발짝도 뗄 수 없게되자 개울 옆에서 쉬는데 한 아낙(婦)이 물을 긷다가 그를 보고는 딱하게 여겨 말했다.
“우리집에 빈방이 있으니 두 낭군(郎君)이 머물 수 있을 것 입니다.”
이에 그녀를 따라갔다.
아낙(婦)은 시골의 향미(鄕味)를 다해 그들을 넉넉히 대접하였다.
재생이 물었다.
“부인(婦)은 어찌 홀로 사십니까?”
여자가 말했다.
“나는 두 남편이 있는데 모두 사냥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호인(好人)들이니 걱정말고 있어도 됩니다.”
재생이 말했다.
“우리는 집을 나온지 이미 오래돼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예쁜 아즈미(嫂)를 보고 이미 진미로 배가 부르고나니 또 음심이 생깁니다. 아즈미(嫂)는 우리 두사람을 위해서 한번의 동침을 허락해 주렵니까?”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귀해지면 첩 생각이 난다고, 또한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어서 끌리는 이치는 면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마침내 판옥(板屋) 안에 호피(虎皮)를 깔고 누웠다.
두 사람이 연달아 몇 차례를 행하고 나자 여인은 은근해졌다.
을불이 말했다.
“만약 그대 남편이 오면 서로 용납하기가 즐겁지 않으리다.”
여자가 말했다.
“이곳 풍속은 순박해서 서로 처를 양보한다오. 두 남편이 알아도 질투하지 않으리니 안심하고 마음껏 즐겨도 됩니다.”
밤이 깊어서 두 장부가 호랑이를 묶어 돌아왔는데 모두 골격이 준수하고 수염이 덥수룩하였다.
을불을 보자 절을 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사냥을 나가서 미처 존가(尊駕)를 받들어 모실 수 없었으니 분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공의 상모를 보니 시골사람(鄕人)이 아닌데 어찌 원로에 고생을 하십니까?”
재생이 말했다.
“우리 군(君)은 서울(京中)사는 상공(上公)의 아들인데 재난(禍)으로 인해 밖을 떠돌다가 여기에 이르른 것이오.”
그중에 수염이 짧은 자가 말했다.
“나는 장막사(長莫思)라 합니다. 일찌기 안국군(安國君)을 따라 숙신(肅愼)을 정벌했을때 돌고태자 또한 종군하여 연전연승했는데 이 공(公)의 모습을 바라보니 그 때의 태자가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재생이 말했다.
“안국군과 돌고태자는 모두 간신의 참소로 해를 당하셨소!”
장막사(長莫思)는 놀라서 말했다.
“나는 산골로 돌아와서 서울일(京事)이나 세간사를 못들었는데 어찌 그와같이 원통한 일이 있습니까?“
이에 여인에게 명하여 소장한 보도(寶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는 돌고태자께서 호가(扈駕)의 공(功)이 가상하다며 내게 손수 내려주신 패도(佩刀)인 것입니다. 이제 이 공(公)을 보니 옛 감회를 이길 수가 없구려.”
수염이 긴 자가 말했다.
“나는 막사(莫思)의 종제 휴도(休都)라 합니다. 늘 돌고태자의 어지심(賢)을 듣고 매번 서울(京)로 나가 섬기고자 했는데 어찌 뜻을 접고 원통한 해를 입었단 말이오? 우리는 무예를 연마하는 자라 국가에 몸 바치고자 하는데 돌고태자가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쓰인단 말이오”
마침내 장막사와 더불어 강개한 탄식을 발하니 분기가 충천하여 안광이 형형히 빛나고 머리카락이 스스로 울었다.
을불은 가히 쓸만함을 알고 두 사람을 위로했다.
“진실로 의기지사(義氣之士)이고, 천생 호걸(豪傑)들이오. 스스로 용처(用處)를 갖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낙망(落望)해선 안되오. 돌고태자가 비록 붕(崩)했으나 을불태자는 오히려 상존하니 우리가 그를 왕으로 받든다면 다른날에 부귀(富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이에 네 사람은 화로를 둘러싸고 고기를 굽고 술을 권하며 세상일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막사(莫思)가 말했다.
“뜻하지 않게 오늘 이런 큰 손님을 맞아 예(禮)를 차릴 것이 없으니 어쩌랴?”
휴도가 말했다.
“태평(太平)의 두 딸이 예쁘니 뺏어서 데려옴이 어떤가?”
을불이 말했다.
“우리는 호색지도(好色之徒)가 아니니 아즈미(嫂)만 있으면 족하다. 어찌 하필 남의 딸을 빼앗겠는가?”
휴도가 말했다.
“이 여자는 우리가 더럽힌 바이니 귀인(貴人)에게 받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두 공(公)은 이미 나와 교합하였다. 네가 어찌 스스로를 깍아내리는가?”
막사가 말했다.
“목마르면 쉽게 마시는 법이다. 태평(太平)의 딸이 오면 어찌 너를 다시 돌아보랴! 태평 또한 의기(意氣)의 사람이니 만약 돌고태자의 일을 말하면 반드시 딸을 보내 주리라. 아우는 갔다오게. ”
휴도는 문을 나선지 얼마 되지않아 서둘러 돌아왔다.
“급하다. 급하다. 토갈(鞨) 추장이 칠,팔명을 이끌고 태평부부와 딸을 잡아가고 있다.”
막사는 그말을 듣자 창을 잡고 뛰쳐나갔다.
을불이 재생에게 말했다.
“주인에게 어려움이 있는데 객(客)이 좌시할 수는 없다.”
“그를 도와야겠습니다.”
이에 감춰두었던 활을 풀고 문을 나서니 백설이 분분히 휘날리는데 개짖는 소리가 골짜기에 어지러웠다. 막사와 휴도는 소리를 헤아려서 전진해 나아가 외쳤다.
“토갈(土鞨)이 엽호(獵戶)를 묶어감은 심히 무례하다. 풀어주지 않겠다면 일전(一戰)을 겨루자.”
추장이 대답했다.
“나는 태평의 딸을 맞이해서 처로 삼고자 함이니 서로 해치는 일은 없다.”
태평이 소리쳤다.
“두 딸이 따르기를 원치않는데 강제로 덮쳐서 잡아가는 것이다. 바라건대 장공(長公)은 나를 구하라.”
이에 서로간에 박전(搏戰)이 벌어졌는데 저쪽은 많고 이쪽은 적으므로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을불이 곧 화살 한대를 발사하여 추장을 거꾸러뜨리자 토갈의 무리가 놀라서 어지러워졌다. 재생 역시 활을 쏘아 토갈 한명을 거꾸러뜨렸다. 승세를 얻은 막사와 휴도가 토갈을 도륙했다. 나머지 토갈(鞨)들은 달아나고자 했으나 을불이 활을 쏴서 모두 쓰러뜨리니 토갈의 개(犬)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이에 태평(太平)및 그 처와 딸을 풀어주고 돌아왔다.
태평이 말했다.
“적이 반드시 무리를 모아 다시 올것이니 우리 역시 모든 엽호(獵戶)들을 불러모아 그를 대비해야 할것이오.”   -49p-
“적이 몇명이나 되는가?”
을불이 묻자 휴도가 대답했다.
“한 굴(一穴)에 삼, 사십명 정도인데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어서 노약자와 강한자가 반반입니다. 지금 살상된 자들은 모두 그 강장(强壯)한 자들입니다. 비록 약간의 남은 무리가 있다해도 어찌 감히 오겠습니까?”
막사가 말했다.
“토갈(鞨)의 풍속은 추장이 죽어서 대신할 수 없으면 다른 굴에서 추장을 맞이한다. 만약 다른 굴과 상통하게 되면 그 세력이 더욱 창궐할테니 이 밤으로 남은 여당을 소탕하고 그 여추장을 사로잡으면 가히 해묵은 원수도 갚고 후환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이 말했다.
“지금 토갈의 개(犬)가 이미 돌아갔고 한명도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여추장은 반드시 남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찾으리라. 우리들은 백피(白皮) 백모(白毛)를 뒤집어쓰고 눈속에 숨어 있다가 요격해서 먼저 그 개(犬)를 쏘고 또 그 장사를 쏘면 여추장도 생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장비를 차리고 나가 길목에서 기다리니 과연 여추장이 십여명의 토갈 무리와 개를 따르게 하고 왔다.
무리가 모두 일제히 활을 쏘아 그 개와 따르는 자들을 사살하니 여추장이 비명을 지르며 부르짖었다.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다만 내 남편 추장의 목을 끊어 가고자하는 것 뿐이다.”
막사가 말했다.
“네 남편이 감히 우리 엽호의 딸을 간음하려했기 때문에 베어 죽였다. 너는 그 머리를 취해서 제사지내고 다른 굴에서 남편을 맞으려함이 아니냐?”
여추장이 말했다.
“나 역시 내 남편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그를 만류했노라. 내 말을 듣지 않고서 죽었으니 내가 어찌 그를 애석해 하리오.”
막사가 말했다.
“네가 만약 내게 투항해서 내 처가 된다면 용서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네 일족(族)을 진멸하리라.”
여추장이 말했다.
“엽호(獵)와 토갈(鞨)의 상쟁이 오래 되었노라. 허나 오늘의 패배와 같은 일은 아직 없었으니 이는 거의 하늘이 우리 일족을 미워함이다. 너의 소위에 맡기겠다.”
막사는 이에 휴도와 함께 나아가 여추장이하 생구(生口) 8인을 사로잡았다.
여추장이 말했다.
“네가 우리를 살려주면 마땅히 노복이 되어서 보은하리라.”
막사가 말했다.
“너희들은 반복(反覆)이 무상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여추장이 말했다.
“네가 만약 내 남편이 되어서 내 굴(穴)을 지킨다면 누가 감히 반복(反覆)하겠는가?”
을불이 이에 막사를 권하여 토갈의 추장이 되게하고 그 여중(餘衆)을 통솔하여 수피(獸皮)작업을 감독하게 하였다.
을불은 태평의 두딸을 취하고 엽호의 우두머리(長)로 추대되어 날마다 호랑이 때리는 것을 일로 삼으며, 낙랑(樂浪)과 교통하여 무역하고, 호걸들과 교제를 맺으며 은밀히 중흥(中興)을 도모하였다. 이에 사방의 뜻을 가진 지사(志士)들이 그 땅으로 모여들었다.

때에 담하(談河)는 서울(京)로 들어가서 을씨(乙氏) 고씨(高氏)를 뵙고서 을불이 음모(陰牟)의 집에 있음을 보고하였다. 을씨와 고씨는 이에 백금을 그에게 줌으로써 은밀한 모의의 자금으로 삼게하였다.
담하가 음모의 집에 오니 을불은 이미 다른 곳으로 달아나 소재를 알수 없었다. 을보(乙寶)의 신하 송거(松巨) 역시 그 조카의 말을 듣고서 을불로 의심하여 음모의 집을 수탐하다가 마침내 담하와 만나게 되자 교우를 맺었다. 장사(壯士) 칠,팔인을 태을도(太乙徒)라 이름하여 각지를 분산방문케하며 “을불이 마땅한 왕이니 치갈은 무도하다(乙弗當王雉葛無道)”라고 희언(戱言)하게했다. 순월(旬月)사이에 천여곳을 몇차례 돌았다. 이 땅은 본래 안국군 달가의 구령(舊領)이었으니 촌주(村主)들이 오히려 옛 은정(舊恩)을 품고 태을도(太乙徒)와 더불어 잠통(潛通)하는 자가 많았으며 사자(使者)와는 통하지 않았다.
하루는 송거(松巨)가 수십명의 무리를 이끌고 남행하여 두우곡(斗牛谷)에 이르렀다가 토갈(鞨)의 무리와 사슴(鹿) 한 마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송거가 이를 말리며 말했다.
“사슴 한 마리가 무엇이 대단해서 다툰단 말인가? 주어도 될것이다.”
그의 무리가 말했다.
“사슴(鹿)이란 신물(神物)인데 어찌 줄 수가 있습니까?”
송거가 말했다.
“우리는 태자를 찾는 자들인데 태자를 못찾으니 비록 신물(神物)이 있다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마침내 내어주니 토갈(鞨)의 무리가 크게 기뻐하며 사례하여 말했다.
“우리 거처로 갈수 있다면 이를 나눠서 먹읍시다.”
송거가 허락하고 마침내 그 굴에 이르니 추장은 곧 장막사(長莫思)였다. 사슴을 보고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곧 신물(神物)이다. 우리 군(君)께 바쳐야 할것이니 너희들과 더불어 나누어 먹을수 없다.”
송거의 무리가 모두 대노하여 싸우려하자 송거가 만류하며 말했다.
“군주(君)가 있어서 이와같이 함이니 질서를 어지럽힐 수는 없다. 그 군주의 사람됨을 보아서 움직여도 늦지않다.”
이에 막사에게 이르되
“우리 또한 너희 군(君)을 배견코자하니 어떠한가?”
“좋다.”
막사가 대답하고 을불에게 이끌고가니 을불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그들을 보았다.
송거는 눈여겨 바라보면서 나아가 절하였다.
“신은 바로 을보(乙寶)상공댁의 노(奴) 송거(松巨)입니다. 오래도록 태자를 찾다가 이제야 비로소 만나뵐 수 있게 되었으니 거의 하늘의 도우심입니다.”
을불이 말했다.
“나는 태자가 아닌데 형(兄)은 어찌 잘못보시오?”
송거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비록 눈이 어둡다하나 어찌 자기 집(自家)의 태자를 모르겠습니까? 태자께서는 반드시 신(臣)이 반(反)하는게 아닐까하여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마땅히 마음을 밝혀서 죽으리니 신이 죽은 후에는 이 무리들을 써서 중흥(中興)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침내 검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려하자 재생이 붙잡으며 말했다.
“그대는 대사를 맡고서 어찌 성급히 자신을 그르치려 합니까? 천하에는 같은 모습의 사람이 있으니 우리 군(君)의 진짜(眞) 가짜(假)는 군(君) 스스로도 믿지 않는즉 그대의 반(反) 불반(不反) 또한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비록 반(反)했다해도 천하에 어찌 반(反)하지 않는 자가 없음을 알겠습니까? 우리 군(君)이 만약 태자와 같은 모습이라면 그대는 잠시 그를 받들어 군(君)으로 삼고 진태자(眞太子)가 나오기를 기다림이 어떠합니까?”
송거가 크게 깨닫고 말했다.
“그대의 말이 좋도다.”
마침내 함께 사슴(鹿)을 잡아 제천(祭天)함으로써 마음을 맹서하였다. 이에 태을(太乙)과 엽호(獵戶) 토갈(土鞨)이 합쳐지니 삼도(三徒)가 한 마음이 되어 을불을 받들었다.
담하(談河)가 뒤따라 이르러 을씨(乙氏)가 손수 쓴 서찰을 받들어 올렸는데 우탁(于卓) 초후(草后)가 모두 내응(內應)하여 일을 성취하고자한다 하였다.
을불이 탄식하며 말했다.
“초처(草妻) 또한 간사한 숙부(奸叔)의 처이니 내가 어찌 심복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담하가 말했다.
“성인(聖人)은 여색으로써 마음에 두지 않는다하니 비록 초후(草后)가 아니라도 어찌 거룩한 짝(聖配)이 없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낙랑(樂浪) 제군?(諸郡?)들이 모두 서로 사사로이 군주(君)를 세우는데 지금 최체(最彘)의 새 영주(領主)가 딸이 있어 매우 아름다우므로 좋은 사위를 맞아 나라를 전하고자한다 합니다. 태자께서 만약 결친(結親)하셔서 외원(援)을 얻는다면 대사를 이루기에 족합니다.”


을불이 이에 담하로 하여금 표범가죽과 큰 거울(大鏡)을 최체(最彘)의 영주 선길(善吉)에게 진헌케하고 전하여 말하였다.      -54p-
“과인은 대맥(大貊)의 왕손이오. 이제 장차 양국지간에 건국(建國)하려하니 바라건대 왕녀를 얻어 후(后)로 삼고자 하오.”
선길이 말했다.
“대맥(大貊)의 왕손이 어찌 그 나라를 배반(反)하고 스스로 서는가?”
담하가 치갈(雉葛)의 무도한 정상을 갖추어 진언하자 선길(善吉)이 말했다.
“너희 왕이 비록 무도하다 하나 창조리를 상국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패망하지 않으리라. 다만 나는 아들이 없고 딸이 있는데 딸이 아름다운 사위(佳壻)를 바라니 네 주인이 만약 아름답다면 마땅히 사위로 맞으리라. 사냥으로 회합(會獵)하여 상견함이 가할 것이다.”
을불은 기약한 날짜가 되자 재생, 담하의 무리와 함께 사냥할 지역에서 회동하였다.

선길은 그 딸 창포(菖蒲)와 더불어 말을 타고 왔는데 그 사냥한 것이 노루(獐) 다섯 마리였다.
을불이 창포(菖蒲)에게 말했다.
“내가 너의 아름다움을 아끼니 너는 내 처가 되어 주려는가?”
창포가 기뻐하며 말했다.
“나 또한 낭군을 아끼나 다만 우리 지방은 편벽되고 협소하니 낭군은 반드시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
을불이 말했다.
“용은 풍운을 얻으면 날아 오른다. 네가 만약 나를 아낀다면 가히 함께 왕천하(王天下)할 것이니 어찌 한 지방 뿐이겠는가?”
창포는 “네.” 하고 대답했다.
이에 말을 나란히 하여 서로 고삐를 끌며 가는데 홀연 누런고니(黃鵠)가 공중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을불이 우러러 활을 쏘며 말했다.
“저것으로 너를 맞이하는 페백(幣)을 삼겠다.”
그 고니(鵠)가 과연 마상(馬上)으로 떨어진 까닭에 그 땅을 곡락령(鵠落嶺)이라 했다.

창포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낭군은 진정 기재(奇才)입니다. 오늘밤 나의 거처로 와서 연회를 즐겨야 할 것입니다.”
을불이 그를 허락하고 무리를 이끌고 객사(館)에 들었다.
선길(善吉)은 노루를 요리하고 술상을 차리게해서는 춤을 추며 마셨다.
창포가 을불에게 춤을 청하자 을불이 말했다.
“나는 독무(獨舞)는 못하니 그대와 더불어 서로 붙잡고 출까?”
창포가 말했다.
“차례대로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을불이 이에 창포를 안고 온갖 방법으로 희롱을 하니 선길이 노하여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혼인도 안했으면서 어찌 이와같이 하느냐?”
창포가 말했다.
“비록 동침은 안했어도 폐물은 이미 받았으니 어찌 혼인이 아닙니까? 행여나 질투는 마세요.”
선길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창포의 어미가 그를 이끌어 달랬으나 어찌 할 수 없자 창포에게 말했다.
“네가 조금 젖(乳)하고 와야겠다.”
창포가 이에 을불에게 말했다.
“노왕(老王)을 젖(乳)해 주고 곧 돌아오리라.”
을불은 젖(乳)의 뜻을 몰라 창포의 어미에게 물으니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창포는 곧 손바닥으로 선길의 뺨을 치며 그를 꾸짖었다. 마침내는 선길을 안고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운반하는듯 했다. 이어서 서로 치고 받는듯한 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말하기를 “선길이 창포에게 매질 당하고 있다.” 라고 했다. 이윽고 얼마후에 환희에 찬 부르짖음이 들리자 모두들 말하기를 “선길이 창포에게 음(淫)했다.” 라고 했다. 그 풍속은 남녀의 구별이 없어 나이가 들어 장성하면 부녀와 모자 역시 상음(相淫)하는데 남자는 반드시 먼저 욕심을 품은 여자에게 수태(受笞)한 후에야 바야흐로 통하는 까닭에 매질을 당하는 것이다.
을불은 이를 듣고 즐겁지 않아 말했다.
“노왕이 만약 그 딸을 스스로 징(澄)할 것 같으면 그 딸이 내 처가 되는 것을 어찌 즐겨하겠는가?”


창포의 어미가 말했다.
“저것은 특별히 한때의 젖(乳)하는 것일 따름이고 오래갈 것이 아니니 노여워 말고 기다리십시오.”               -57p-
인하여 술을 권하니 을불이 크게 취하여 여러 추장의 처(酋妻)들과 서로 끌어 안고 희학질을 하였다. 그 풍속이 손님(客人)과 더불어 상통(相通)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모두들 즐거워하며 그에 응할 따름이었다. 창포의 어머니가 다시 들어간지 한참이 되어서야 창포가 얼굴에 참괴(慙)한 빛을 띠고 나와서 을불을 잡아끌며 그 침실로 들어가길 청하였다.
을불이 노하여 말했다.
“네가 노왕과 더불어 행음(淫)하고서 어찌 나를 보러 왔는가?”
창포가 말했다.
“일시(姑)나마 아직 혼신(婚神)에게 맹서(盟)를 안한 까닭에 내가 노왕의 잉첩(媵妾)이 됐을 따름입니다.”
“언제 맹서를 하는가?”
“내일 마땅히 맹서를 하리니 노여워 마시고 나를 따라오세요.”
을불이 마침내 창포를 따라서 들어가니 뭇 추장의 딸(酋女)들이 좌우에 벌려앉아서 서로 손뼉 장단을 침으로써(以手相拍) 전송하였다.
표범가죽이 늘어서고 침대머리에는 큰 거울(大鏡)과 누런고니(黃鵠)가 있고 12대촉(大燭)이 양두(羊頭)에 꽃혀 있었다.
옷을 벗으니 흘레붙는 두 마리 흰 개(跨兩白犬)가 되어 장난(戱)치고, 달려가 뛰어오르는 한쌍 사슴의 장막??(奔登雙鹿之帳??)..하며 음(淫)하였다. 행음(淫)을 마치면 다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위 내용은 원문에서 결락된 문구가 있는듯...)
이와같이 하기를 무릇 7일이었으나 결정이 되지 않았다. 을불이 노하여 말했다.
“너는 나를 속여서 머무르게 하려는 것인가?”
창포가 말했다.
“노왕(老王)에게 아우가 한사람 있는데 나를 취(娶)하고 싶어서 그대를 죽여 그대의 왕에게 바치자고 왕께 권하고 있습니다. 내가 방해해서 힘껏 저지는 했으나 사태가 심히 위급하니 그대는 도망치세요.”
을불이 놀라서 말했다.
“나는 너를 아껴서 왔거늘 마땅히 이 위급한 때에 네가 만약 나를 아낀다면 어찌 함께 달아나지 않는가?”
창포가 말했다.
“내가 만약 함께 달아난다면 노왕은 노해서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것이니 어찌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그대의 무리들을 힘써 보호하지 않으리오.”
그리하여 준마 5마리를 훔쳐서 내주니 을불이 재생(再生)등과 더불어 밤에 그 막사(幕)를 빠져나와서 달아났다. 선길이 이를 알고 추격하려 하자 창포가 말했다.
“이미 사위로 삼지도 않았으면서 또 무엇 때문에 쫓습니까?”
선길이 말했다.
“가히 연(燕:모용외)에게 바쳐서 무거운 상(重賞)을 받을 수 있으리라.”
창포가 말했다.
“을불은 천인(天人)이니 그대가 잡을 바 아닙니다.”
선길이 노하여 그 신하 칩여(蟄蜍)로 하여금 추격하게 했다. 을불이 그를 쏴 죽이고 달아났다. 돌아와서는 삼도(三徒)를 발(發)하여 최체(最彘)를 치려하자 송거가 간하였다.
“본래 결친(結親)하려 했다가 도리어 원수를 맺음은 중흥(中興)의 계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한 보답으로 베푸니만 못합니다.”


을불이 이에 물범가죽(水虎皮)과 자달피(紫獺皮)로 선길에게 예를 차려서 말을 전했다.                            -59p-
“7일 생관(甥館:사위로 머문)의 은혜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소인의 참소로 용납되지 않고 되돌아 옴에 이르르니 창포의 용음(容音)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선길은 쇠로하고 색을 탐하여 병으로 일어날 수 없었으니 창포가 일을 전결하고 있었다.
곧 백마(白馬)와 보옥(寶玉)으로써 답하여 가로되
“명랑했던 날(㫰日)의 일은 마치 해가 구름에 가린 것만 같습니다. 첩은 마땅히 노왕의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리거니와 낭군과 더불어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 악한 숙부도 이미 죽고 노왕 또한 전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으니 낭군은 전일을 한(恨)하지 마시고 바라건대 초심(初心)을 이루소서.”
을불이 주저하며 결정을 못하자 재생이 말했다.
“선길이 늙고 혼미(老昏)하여 그 아우에게 잘못된 바이나 지금 그 아우가 죽었으니 반드시 대신할 자가 있어 역시 창포를 취하고자 할 것인즉 그를 저지해야 합니다. 거짓으로 출렵(出獵)을 핑계대고서 그 지경에 돌입하여 추장을 베고 그 무리를 진압함이 어떻겠습니까?”
“옳다(善)!”
을불이 대답하고 이에 삼도(三徒)를 발하여 출렵(出獵)을 가탁(假託)하고 짐승을 쫓다가 그 지경으로 오입(誤入)해서는 그대로 돌진하였다.
그 때에 선길은 색(色)에 침닉되어 일어나지 못하므로 부족의 추장(部酋) 산대(山代)와 민문(珉文)이 음(陰)으로 불궤지심(不軌之心)을 품고,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선길(善吉)을 포위해서 그를 살해하고, 강제로 창포(菖蒲)를 취하여 처로 삼았다. 모든 추장들이 불평을 품고 서로 치고자 관망하다가 삼도(三徒)가 돌입해오자 모두들 창포가 부른 것이라 여기고 힘을 합해 산대(山代)와 민문(珉文)을 쳐서 주살하고 을불과 창포를 받들어 군주(君)로 삼았다.

을불(乙弗)이 이에 창포왕(菖蒲王)이라 칭하고 최체(最彘)의 6촌(村) 2성(城)과, 양화(陽化)의 2촌(村), 갈부(鞨部) 1촌(村)을 통일하고, 무리(衆) 5천 6백을 갖게 되었다.


때는 청토(靑兎, 乙卯, 295년, 烽上王 4년) 10월이었다.                                                                       -60p-
담하(談河)를 보내서 경도(京)로 들어가 은밀히 을씨(乙氏)와 초후(草后)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때에 초후는 왕의 총애를 오로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사치해서 도성 밖의 여러 산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대신원(大神院) 능원(菱院) 단왕궁(丹王宮)을 짓고 중수하며 왕과 더불어 왕래하였다. 정사는 모두 우평(于枰)과 상보(尙寶)와 창조리(倉助利)에게 위임하고서 그 다스림을 묻지 않았다.
창조리가 간하여 말했다.
“망국(亡國)의 길(道)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환락을 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음(貪樂不顧政)이 하나이고, 사람을 정으로 쓰고 재능으로 쓰지 않음(用人以情不以才)이 하나이며, 현자를 받들어 그 말을 쓰지 않음(擧賢而不用其言)이 하나입니다. 지금 세가지를 다 갖추었으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우평은 뇌물의 다소(多少)로써 사람을 쓰고 변장(邊將)들은 다만 배를 불리는 것을 일로 삼으니 언제 변이 생길지 모르는데 폐하는 근심함이 없이 호색(好色) 탐황(貪荒)하며 잡역(雜役)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신이 일찍이 주의(朱義)를 천거하여 납언(納言)으로 삼았으나 폐하께서는 그 직간을 괴롭게 여겨 양존(陽尊)으로 그 관(官)을 삼고는 그 말을 듣지 않다가 내치시니 주의(朱義)는 병을 칭탁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살피십시오,“
왕이 말했다.
“왕이란 다만 임현(任賢:현자에게 맡김)일 따름이다. 경과 두 장인(二舅)이 나라를 위한 어진 재상(爲國賢相)이니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또 인생(人生)은 행락(行樂)이로다. 경은 나를 잡다한 정무에 근심하다가 초췌해져서 끝나게 하고자 함인가? 금을 캐서 가짐에 위험을 돌보지 않는 자는 바위 사이로 깊이 들어갔다가 압사(壓死)하고 뒤에 오는 자가 남김없이 그것을 거둔다. 짐은 금을 잡다 죽는 것(執金而死)이 즐기다 망국하는 것(樂而亡國)보다 오히려 나은지 알지 못하겠노라.”
창조리는 그 간(諫)할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오면서 탄식하였다.
“내가 물러나야 함이로다.”
그 처 음씨(陰氏)가 말했다.
“내 형이 그대를 상(相)으로 천거한 것은 나라(國)를 위함이지 임금(君)을 위함이 아닙니다. 주상이 유도(有道)하면 섬기고, 무도(無道)하면 폐할 것이니 이가 곧 상국(相國)입니다. 그대는 내 남편이 되어서 어찌 졸부(拙夫)의 말을 합니까?”
창조리가 물었다.
“그를 폐하고 장차 누구를 세우는가?”
음씨가 말했다.
“을불태자는 약로대왕(藥盧大王)의 소탁(所託)이니 그를 찾아 세움이 가할 것입니다.”
창조리가 말했다.
“지금은 또한 이르도다. 내 관망하면서 서서히 도모하리라.”
음씨는 크게 기뻐하며 을씨(乙氏)와 내통하였다. 때에 을씨는 초후(草后)로 인해 다시 왕에게 총애를 얻었다. 왕이 말했다.
“내가 네 남편을 죽이고 네 아들을 내쫓았는데 너는 원망하지 않는가?”
을씨가 말했다.
“왕을 남편으로 삼았는데 어찌 용열한 남편을 생각하며, 그대의 어린 아들을 낳았는데 어찌 다 큰 아들 생각을 하겠습니까?”
왕은 그러려니 여기고 말하는 바를 많이 들어 주었다.
을씨는 이에 우탁(于卓)과 더불어 장사(將士)들과 교유하며 결탁하였다.
때에 안국군 달가(達賈)의 옛 신하 선옹(仙翁)은 마산(馬山)에 퇴거하여 재산을 쌓음이 누만(累萬)이었다. 아들 선방(仙方)으로 하여금 입경(入京)시켜 을씨를 알현하고 을불태자를 받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을씨는 크게 기뻐하며 침실로 이끌고 들어가 술을 따라 권하고 고기를 잘라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위국지낭(爲國智囊)이란 소문을 들은지가 오래인데 지금 너를 보내 내 모주(謀主)로 삼으니 거의 하늘의 도우심이다.”
을씨는 선방이 취하는 것을 보고 귀에 입을 붙여 말하였다.
“지금 이후로부터 너는 나의 심복(心腹)이 되고 나는 너의 두목(頭目)이 되어 한몸(一身)이고 한마음(同心)이 될지니 맹서가 없을 수 없다. 삽혈(歃血)의 맹서는 뜻이 교혈(交血)에 있음인데 너는 남자이고 나는 여자이니 혈기(血氣)를 직통(直通)하느니만 못하다.”
마침내 옷을 벗고 선방을 안으니 선방이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성모(聖母)를 증(烝)하오리까?”
을씨가 말했다.
“대사를 이루면 네 자손으로 하여금 후족(后族)을 삼고 내 자손은 왕족(王族)이 되어 천하를 함께 할텐데 구구하게 한 배꼽아래를 어찌 사양하는가?”


이 때에 仙方(선방)은 나이 39살이고 乙氏(을씨)는 35살 이었으니 장양(壯陽) 장음(壯陰)이 맞닿자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

선방이 마침내 을씨의 배위에 올라 서로 합하고서 맹서하여 말했다. (295년 - 38살 = 仙方 257년생)
“천지신명(天地神明)은 우리 자웅(雌雄)을 비추사 약속컨대 을불태자를 받들어 왕을 삼고 공(功)을 이루면 세세토록 이와같이 서로 자웅(雌雄)을 지을 것을 맹서합니다.”
맹서를 마치고 행음(行淫)하니 을씨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내 마땅히 네 아들을 낳아서 가르쳐 장래(來)? 나를 위안케 할것이다.”
선방이 말했다.
“우상공(于相公)이 이를 알면 모의에 해로울까 두려우니 안됩니다.
하고 다시 범(犯)하자 을씨가 웃으며 말했다.                                                                          -64p-                                   

“네 꾀(謀)가 심히 치밀하니 내가 안심이로다. 내가 너와 더불어 상친(相親)함이 이와 같으니 너의 몸은 곧 내몸이다. 감히 사사로이 훼손함으로써 내 걱정을 더하지 말것이니라.”
선방이 말했다.
“신(臣)은 은혜를 받음이 이에 이르러 만번 죽어도 달콤할 뿐이니 후(后)께서는 살리고 죽이소서(生殺之).”
을씨가 이에 속곳내의(衵衣)를 그에게 내어주며 말했다.
“너의 몸안에 입어서 조석으로 잊지말거라.”
선방은 배사(拜謝)하고 물러나와서 술집(酒肆)을 잠행하며 무뢰배들과 교제하여 결탁하고 다시 안국군 달가의 옛 신하로서 전간(田間)에 흩어져있는 자들과 결속하여 서로간에 안팎(表裏)이 되었다.
달가(達賈)의 큰아들 자(柘)의 어머니 해문(解門)은 평산(平山)부호(富戶) 해숙(解熟)의 딸이다. 소시적에 미모로 뽑혀 중천왕(中川王)의 후궁(後宮)으로 들어갔는데 달가와 상통(相通)하여 자(柘)를 낳은 까닭에 스스로는 달가의 아들임을 알았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중천왕의 아들이 되었다. 중천왕이 붕하고 계속하여 약로대왕(藥盧大王)의 총애를 받아서 약로의 아들 저(楮)와 딸 표씨(標氏)를 낳았다.
왕(치갈?)은 태자 시절에 또한 해문(解門)및 표씨(標氏)와 통한 까닭에 해문을 후대하여 상(賞)을 내림이 매우 무거우니 집안이 매우 부유했으나 달가가 죄없이 피살된 것을 한(恨)하여 항상 은밀히 자(柘)에게 말했다.
“너는 달가의 아들이니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것이다.”
자(柘)는 이를 승낙하고 마침내 미친척(佯狂)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또한 무뢰배에 투신하여 음무(淫巫:음란한 무녀?)들을 많이 기르며, 민재(民財)를 끌어모아 수십개의 창고(倉)을 일으켰다.
우평(于枰)은 재물을 탐하고 호색(好色)하였다. 해문(解門)을 보니 나이는 비록 50이었으나 오히려 아름다움은 소녀(少女) 같았으며 궁중을 출입하며 왕의 총애를 얻고 그 집안은 재산이 많았다. 이에 따라가 유혹하며 말했다.
“나는 처(妻)가 세 사람 있으나 그대의 아름다움같은 이는 아직 없소. 그대를 제 4처로 삼고 싶은데 되겠소?”
해문이 대답했다.
“장군(將軍)은 초방(椒房)의 존친(尊親)이요, 첩은 선왕(先王)의 퇴물(退物)입니다. 만약 처(妻)가 될 수 있다면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장군은 인색해서 재물을 쓰지않는데 반해 나는 사치를 좋아해서 낭비하니 서로 용납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우평이 말했다.
“내 성격이 비록 인색하나 어찌 애처(愛妻)를 위해 재물을 아까워 하겠소?”
해문이 이에 우평을 이끌어서 목욕(浴)하며 또한 도발하다가 또한 게으름을 피우며 말했다.
“내 아버지 해숙(解熟)은 우리들의 입궁으로 인해 전곡(錢穀)을 많이 허비하고 죽어서, 장원(庄園)은 많이 황폐하고 하나 있는 아들 현(玄)은 오히려 어리므로 내가 아버지를 위해 원(院)을 조성하여 명복을 빌고자 합니다. 장군은 황금 백량(百兩)과 양 천마리(羊千頭), 오곡(五穀) 2백석(石)으로 나를 도와 주겠습니까?”
우평은 침음(沈吟)하다가 이윽고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는 공경(公卿)의 신하도 아닌데 어찌 큰 원(巨院)을 짓소?”
해문이 노하여 말했다.
“내가 비록 천한 사람(賤人)이나 세 왕을 차례로 섬겨서 지위(位)가 일품(一品)에 이르렀고, 내 아버지는 비록 공경(公卿)은 아니나 왕자의 할아비입니다. 작은 원(小院)이 가하겠습니까? 그대는 나를 처로 삼고 싶어 하면서 내 아버지를 박대하니 그대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손을 뿌리치고 나가니 우평은 크게 놀라서 쫓아가 안으며 말했다.
“내가 돕고싶지 않은게 아니라 다만 원(院)이 크면 인부가 많고, 인부가 많으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드는 까닭이오.”
해문이 말했다.
“그대는 초친(椒親)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한 처(妻)를 위해 그 아버지의 원(院)을 조영할 수 없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평이 말했다.
“내 마땅히 힘쓰겠소.”
해문이 이에 기뻐하며 욕중(浴中)에서 상통(相通)하여 그 음기(淫技)를 남김없이 발휘하니 우평이 크게 미혹(大惑)되어 감히 그 청구(請求)를 거절하지 못했다. 해문이 이에 자(柘)에게 일러 말했다.
“우평은 곧 네 아버지의 원수이니 내가 그에게 아양을 떤 것은 그 쌓은 재산을 빼앗으므로써 너를 돕고자하는 까닭이다.”
자(柘)가 말했다.
“다만 재산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그 도당(徒黨)들로 하여금 서로 시기해서 해치도록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마땅히 중간에서 이간을 붙이십시오.”
해문은 이를 허락했다.

선방(仙方)은 자(柘)가 큰 뜻(大志)을 가졌음을 알고 마침내 서로 친교를 맺고(交結) 무뢰배들로 하여금 사방에서 도적질(作賊)을 하게했다. 우평은 수하들을 독려하여 도둑들을 잡게 했다. 해문이 그 수하들을 반간(反間)하여 말했다.
“양민들을 잡는것을 사사로이 혐오하는 까닭으로 풀어준 그 도둑으로 하여금 잡는자를 두드려 패는 것이다.”??? (以私嫌捕良民者也使釋其盜而笞捕者 <= 도무지 무슨 뜻인지 해석이 안됩니다. 끙끙!!)
때문에 도둑들이 서울안(京中)에서 횡행함이 많았으나 붙잡지 않았다. 왕은 노하였다. 우평이 도둑 잘 잡는자를 얻고자 하니 해문이 선방을 천거했다. 선방은 이에 우평의 충노(忠奴)들을 잡아들이고 모두 사납게 매질(猛杖)해서 꾸며낸 자백을 좇게했다. 이에 우평의 무리들이 많이 우평을 원망하고 도리어 선방에게 붙었다. 선방은 그들 모두를 어루만져 자신을 위해 이용했다.
해문의 막내 여동생 포씨(蒲氏) 역시 약로대왕(藥盧大王)의 후궁으로써 왕이 태자때부터 잠통(潛通)하다가 이에 이르러서 제 3후(三后)가 되어 서궁(西宮)에 거처하고 있었다. 해문은 다시 선방을 천거하여 서궁(西宮)의 알자(謁者)로 삼았다. 포씨는 왕의 총애가 있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해문이 포씨를 권하여 선방과 더불어 밀통해서 임신을 하였다. 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68p-
“어떻게 임신 하였느냐?”
포씨가 말했다.
“선방이 가진 영약(靈藥)을 얻어 먹고서 잉태했습니다.”
왕이 이에 선방에게 황금 백량을 내리면서 그 약에 대해 물었다.
선방이 대답했다.
“신이 소시적에 산에 들어가 신선(神仙)을 찾았었는데 한 백두옹(白頭翁)이 있어 바위 위의 오디열매(椹實)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이것을 먹으면 남자는 가히 선도(仙道)를 얻을 수 있고, 여자는 가히 산도(産道)를 얻을 수 있으리라.“ 신이 그것을 따먹고 그 나머지를 따가지고 돌아왔으나 모두 잃어버리고 오직 한개 얻은 것이 오히려 남았으니 이는 실로 하늘의 도움입니다.”
왕이 이에 그 아들을 심(椹:오디?)이라 이름(名)하였는데 후에 선방의 아들이 되었다.
방회(方回), 대발(大發), 우선(于先), 우풍(于豊)은 모두 을불의 옛 스승으로써 을씨와 통모(通謀)하며 원조하였다.

담하가 돌아와서 형세가 점차 유리해짐을 보고하자 송거가 말했다.
“우리들은 밖에 있어 간고(艱苦)하고 저들은 도성에 있어 안락하니 모사(謀事)는 스스로 같지않음이 있는 것이나 만약 저들과 같이 왕이 크게 민망(民望)을 잃기만을 기다리면서 느릿느릿 도모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소금을 가지고 소의 뒤를 따라가면서 ”불알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먹으리라.“하는 것과 같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모용씨(慕容氏)를 설득해 우리 서변(西邊)을 침범케하고 우평(于枰)등이 출동해서 그를 막으면 선방(仙方)등이 안에서 난을 일으키고 우리들은 구원하러 간다 칭하고서 병력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가 왕을 죽이고 우리 군(君)을 세워서 모용씨와 더불어 화친하고 남으로 낙랑백제(樂浪百濟)로 내려가면 조업(祖業)이 가히 창성할 수 있다.”                                                -69p-
을불은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기고 담하에게 명하여 샛길로 하여 바다로 나가서 뱃길을 따라서 극성(棘城)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를 설득케했다.
“대국(大國)이 만약 신(臣) 을불(乙弗)을 위해서 병력을 빌려주어 공을 세운다면 마땅히 세세토록 번방(藩)이 되어 조공할 것입니다.”


모용외가 이를 허락하고 병력을 이끌고 서침(西侵)하였는데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서 약로대왕(藥盧大王)의 릉(陵)을 보고는 사졸들로 하여금 파내게 했다.
담하가 말했다.
“대왕은 의(義)로써 병력을 빌려주고서 어찌 우리 선왕(先王)의 릉(陵)을 파내어 원수를 지십니까?”
모용외가 말했다.
“네 나라가 반복(反覆)하는 까닭에 볼모(質)를 잡고자하는 것이다.”

릉(陵)을 파내는 날, 천기가 음산하더니 갑작스레 추워짐이 마치 엄동(嚴冬)과도 같았다. 때는 대룡(大龍, 병진 296년) 8월이었다.

병력을 출발할 때만해도 오히려 늦더위가 남아있었던 까닭에 사졸(士卒)들은 두꺼운 옷이 없었다. 하루 밤 사이에 얼어 죽은 자가 줄을 잇고(相繼) 또한 광내(壙內)에서 풍악(風樂)소리가 나니 사졸들은 두려워서 감히 능을 파헤치지 못했다. 모용외는 뒤(後)에 신(神)이 있다는 이유로해서 중지시키고 또 갑작스런 추위에 옷이 없는 까닭으로하여 퇴각해서 물러갔다.               
선방(仙方)등도 또한 외적(外敵)과는 더불어 통모(通謀)할 수 없다하여 움직이지 않은 까닭에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70p-


모용외는 우리가 내응(內應)하지 않은데다 헛되이 사졸(士卒)을 상한 까닭에 그를 꾸짖고 최체부(最彘部) 역시 점제(秥蟬)와 더불어 교위(校尉)에 소속(幷屬)될 것을 명령하였다.
창포(菖蒲)의 어머니는 본래 점제(秥蟬)로부터 왔는데, 점제(秥蟬)는 그 아들로써 창포를 아내로 취하고 싶어서 교위(校尉)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을불(乙弗)을 내쫓으려 했다. 교위가 이로인해 이유없이 질책하며 혹은 부당한 공납(貢)을 요구하니 을불은 실화(失和)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정성을 다했다.
때에 조정(朝廷)은 고노자(高奴子)를 신성(新城) 태수(太守)로 삼아 서북(西北)을 대비하였는데 모용외는 그 위엄과 명성(威聲)을 듣고는 다시는 재침(再侵)할 뜻이 없었다. 오로지 낙랑(樂浪)에만 마음을 두고 5부(五部)를 통합코자 하여 모든 신영주(新領主)들을 점제(秥蟬)로모이게하여 맹약(盟約)을 다시 정(定)하도록 했다.
을불은 가고싶지 않았으나 교위(校尉)가 사람을 시켜 재삼 독촉을 하므로 부득이 창포(菖蒲)와 더불어 재생(再生)등을 이끌고서 회맹에 갔다.
서부사자(西部使者) 역시 국경을 정하고자(定界)하여 이르렀는데 교위는 사자(使者)와 서로 통하고 을불을 포박해서 조정에 송치(送致)하였다.

이에 사자(使者)가 호송하여 가니 곧 황마(黃馬, 戊午, 298년)의 초겨울이었다.
이해 9월에 서리(霜)와 우박(雹)이 내려 곡식을 죽이니 백성들은 굶주려서 서로 도둑질을 하였다. 왕은 궁실을 더욱 증영(增營)하느라 천하(天下)에 재목을 구하고 돌을 채취토록하니 운반하는 노역자들은 도로에서 추위와 허기에 지쳐 서로를 바라보고 백성들은 원성이 높았다.
을불이 탄식하여 말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는데 영웅은 소인배 오랑캐(小虜)에게 잡힌 바 되니 이 무슨 마(魔)인가?”
함리(檻吏)들이 그 말을 듣고 상의하기를 “우리가 을불태자의 뛰어남(賢)을 들어온지 오래인데 지금 그 영특한 용모(英皃)를 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죄인으로 대우할 수는 없다.”하고 그 칼(枷)과 형틀(械)을 늦춰주고는 그를 심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며칠이 지나 반왕잠(班王岑)에 이르렀다. 그 땅은 청옥(靑玉)이 많이 산출되는데 캐어서 궁실의 장식(粧飾)을 삼으므로 노역자(役者)가 수천명이고 공사를 감독하는 자 또한 수백명이며 운반하는 자들이 서울(京)에까지 잇달았다. 한 사람이 옥판(玉板) 두개를 지는데 결파(缺破:흠집없이 도착?)하면 상(賞)을 주었다. 운반을 호위하는 자(護運者)들이 오고가며 그들을 감독하니 술(酒)과 장식(漿食:국과밥?)을 파는 자들이 길에 시가(街)를 이루었다.
이날 천기가 한랭하고 또한 눈이 내리므로 옥을 깨뜨리는 자(破玉者)들이 속출하여 도중(途中)에서 서로 목놓아 울었다.(아마도 깨뜨리면 본인이 배상해야 하는 듯?) 때에 선방(仙方)의 무리(徒) 수십인도 또한 운반을 호위하는 자(護運者)들중에 있어서 그 우는자들을 보고는 도발하여 말했다.
“어째서 반(反)하지 않고 도둑이 되는가?”
이에 옥을 지는 자(負玉者)들이 난(亂)을 일으켜 그 사자(使者)를 죽이고, 을불이 장차 지나가리라는 말을 듣자 기다렸다가 습격하여 또한 호송사자(護送使者)를 죽이니 함리(檻吏)들은 모두 도둑들에게 붙어서 마침내 을불, 재생, 송거등을 풀어주어 도망치게 만들었다.
왕은 우풍(于豊), 방부(方夫)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진압케하고 을불을 잡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때 을불은 오히려 대설(大雪)로 인해 멀리 도주할 수가 없어서 물레방아(水碓) 집에 숨어서 장차 돼지(猪)를 불에 구워 먹으려 하고 있었다.
방부(方夫)가 군사를 이끌고 물레방아간 밖에 와서 멈추고는 연기가 나는 것을 보자 들어와서 을불을 보았다. 방부는 을불의 얼굴을 익히 알고있기에 비록 변하기는 했어도 속으로는 그를 알고 을불에게 눈을 맞춘채 말했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서 을불태자를 잡고자 여기에 이르렀는데 무죄한 사람들이 여기 있어서 군요(軍擾)를 입을까 두려우니 속히 멀리가서 피하길 바라오. 여기서 동북쪽으로 2십리를 가서 당자촌(棠子村)에 고박아(高朴兒)라는 의기(義氣)로운 사람이 있으니 그리 가면 될것이오.”
을불이 그 구해주고자 하는 뜻을 알고 사례하며 일어나자 방부가 말했다.
“날씨가 추운데 또한 허기져서 어찌 가겠소? 나에게 간직한 술(藏酒)과 찐 돼지고기(蒸豚)가 있으니 마시고 가시오.”
을불은 받아서 그것을 먹고 당자촌(棠子村)을 찾아 나섰다.
방부는 군대를 주둔시킨채 움직이지 않고 을불이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수색을 시작했다. 함리(檻吏)들을 찾아내자 이야기를 짜서 말했다.
“을불은 진짜 을불이 아니고 곧 가짜 을불인데 난민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마침내 한 시체의 머리를 베어서 왕에게 바쳤다.
왕이 말했다.
“진짜 을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탁(于卓)이 말했다.
“신이 진짜 을불을 아는데 이미 강에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어찌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차례로 다시 그를 수색하라.”
이에 천하에 령(令)을 내려 을불을 찾는자에게 천금(千金)의 상을 내린다하고 오부(五部)에 사자(使者)들을 파견(發)하니 선방(仙方)이 그 무리들로 하여금 뒤를 좇게 했다.

그때에 을불은 눈(雪)을 무릅쓰고 당자촌에 들어가 고박아(高朴兒)를 물어 찾으니 작은 산등성이 아래 정원(園)이 있는데 소나무 잣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산골짜기 물을 끌어들여 샘(泉)을 만들었으니 곧 은자(隱者)의 집(家)이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동자가 나와서 우러러 보며 말했다.
“장골 대한(大漢) 서너사람이 도적질을 하고자 오셨습니까?”
을불이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고박아선생의 풍도를 듣고서 왔다.”
동자가 웃으며 말했다.
“고박아는 단지 한 돗자리 짜는 늙은이인데 무슨 선생의 풍도가 있습니까? 그대들은 좀도둑이 아니고 우러러 남의 천하를 훔치려는 자들이 아닙니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동자의 말과 같다.”
동자는 처마 밑으로 맞아들이며 숯불갱(炭火之坑)에 이르러서 말했다.
“여기서 옷을 말릴 수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치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숯불은 불길이 치성한 것이 마치 오기를 기다려서 준비된 것만 같았다. 잠시 있자 고박아(高朴兒)가 포의야관(布衣野冠)에 작은 체구의 여윈 얼굴로 나와서 흔연히 맞아들이는데 마치 오랜 숙친(熟親)을 대하는 듯 했다. 당(堂)안으로 이끌어 차례로 예(禮)를 나누며 말했다.
“일전에 경도(京都)의 천한 사위 방부(方夫)로부터 이곳에 도착하는 귀인이 있게 될것이라는 전갈을 받았으나?? 집안에는 받들어 올릴만한 진미도 없고 또한 멀리나가 밖에서 영접할 수도 없었으니 엎드려 비옵건대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日作自京都賤壻方夫到此以爲有貴人來到而家無借奉之味又不能遠接于外伏乞寬恕)??
을불이 말했다.
“표류(漂流)하는 사람이 얻는 아름다움(得佳)은 곧 후의(厚意)이니 살아서 이곳에 도착한 것만도 행운이오! 어찌 감히 분외(分外)의 것을 바라겠소? 이로부터 선생을 받들어 풍교(風敎/威敎??)로써 모새(茅塞:미개한 지식)를 열고자하니 가련히 여기고 구원해 주면 다행이겠소.”
고박아가 말했다.
“산간의 비부(鄙夫)가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로부터 겨울이 깊어져 들판에 눈이 쌓이면 길(行路)이 불통(不通)되어 멀리 갈 수 없으니 가히 천한 장원(賤庄)에 머물러 화로를 끌어안고 술을 데우며 새끼를 꼬고 돗자리를 짜는것도 또한 일락(一樂)을 안에 갖고 있으니 더불어 동취(同趣?)하며 소일(消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딸 고씨(高氏)를 불러 술을 내오게하니 곧 방부(方夫)의 처(妻)였다. 아름답고 영이(穎異:총명과인)하며 사람을 접대함에 능숙하였다. 을불이 그 나이를 물으니 방년 19세로서 초후(草后)와 같은 나이였다. 을블은 초후(草后)를 추억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암연(黯然)히침울해져 눈물을 흘렸다. 고씨가 말했다.
“내 남편은 어릴적에 을불태자와 더불어 함께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습니다. 태자는 현명했으나 불행하게도 강에 투신하여 훙서(薨逝)했는데 세간에는 가짜 을불이 있어서 소란을 일으키니 주상이 근심하여 그 사람을 잡으라고 명했는데, 비록 그 사람을 잡는다해도 진짜 을불이 아닌데 어찌 잡을 필요가 있습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주상입니다.”
말을 마치자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리며 을불에게 술잔을 내미는데 두눈에 정을 담아 보냈다. 을불 또한 웃으면서 말했다.
“주상인즉 현명하고 을불은 어리석도다. 어찌 강에 투신함이 그리 빨랐는가!”
고씨가 다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밤에 천문을 관상(觀天象)하며 ‘왕성(王星)은 미미하고 태을(太乙)은 점차 밝아지니 혹 진짜 을불(乙弗)이 인간(人間)에 살아 있어 오래지 않아 천자(天子)가 되는 것이 아니냐’했는데 천자가 될 자(作天子者)가 어찌 용이하게 사람에게 잡히는 바 되겠습니까? 천명(天命)을 모르고서 망령되게 스스로 성질을 내고 있으니 참으로 미친 주상(主上)입니다.”
일좌(一座)가 모두 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제수(嫂)는 진실로 의사(義士)이다! 가히 우리네와 더불어 한 마음이로다.”
이에 서로 친숙하게 장난치다가 크게 취하여 책을 베고서 잠이 들었다.
고씨는 따로 을불을 이끌어서 안으로 들어와 특별히 비단 금침을 펼쳤다.
을불이 말했다.
“사람들 모두 취하여 밖에 누웠는데 어찌 나 혼자만 이와같겠소?”
고씨가 웃으며 말했다.
“용굴(龍窟)은 뱀굴(蛇窟)과 더불어 같이하지 않습니다.”
을불이 물었다.
“용굴(龍窟)이 어디에 있소?”
고씨는 웃으면서 자신을 가리켰다. 을불이 이에 고씨를 안고 잠자리로 들어가 서로 통하였다.
이날 밤에 큰 눈이 한길(丈)남짓이나 내려 원근(遠近)이 모두 길이 막히니 수포사자(搜捕使者) 역시 도중(途中)에서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왕은 속히 잡아오지 않는다고 그 사자(使者)에게 태형(笞)을 가하니 사자들이 모두 원망하여 말했다.
“강에 빠져 죽은 자를 장차 수부(水府:하백궁?)에서 잡아오란 말인가?”

혹은 을불(乙弗)을 자칭하며 죽기를 원하는 자가 서울 안(京中)에 또한 오,륙명이 있었다. 왕은 그들 모두를 친히 국문하고 거짓임을 알자 그 모두를 참하라고 명령했다. 창조리가 간하였다.
“인명(人命)은 지중(至重)합니다. 하민(下民)들이 왕법을 모르고 망령되이 을불(乙弗)을 칭하는 것은 을불의 뛰어남(賢)을 듣고서 허명(虛名)을 훔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인다면 그 이름(名)을 이루어주고 크게 인화(人和)를 잃게 되니 태형(笞)을 가하여 경계시키느니만 못합니다.”
왕은 듣지 않고 속히 그들을 참하라고 명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가 바로 선방(仙方)의 무리(徒)였으니 그 참(斬)하는 자들 역시 같은 무리였던 까닭에 몰래 놓아 주고서 허수아비(偶人)의 목을 끊어 바치며 말했다.
“형을 집행할 때는 모두 산 사람들이었는데 목을 끊은즉 모두 이런 허수아비(偶人)였습니다.”
왕은 크게 의혹(大疑)하였다.
그 때에 경도(京都)에도 큰 눈(大雪)이 내렸는데 도성사람들이 눈사람(雪人)을 만들어 “을불태자”라 하며 혹은 수레에 실어 시가를 지나가니 사람들(市人)이 다투어 절을하면서 “우리 천자(吾天子)”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를 잡고자 한즉 뿔뿔이 흩어져 간곳을 모르고 다만 수백개의 큰 눈사람(大雪人)을 궁안(宮中)에 잡아다 놓았다.
왕은 노하여 그것을 불사르도록 명했다.
역부(役夫) 수백명으로 하여금 각기 큰 횃불(大炬)을 들게하고 “을불은 마땅히 이 눈이 녹듯 꺼져라.”하고 빌게 했다. 그 중에 몇 사람이 크게 외쳤다.
“을불이 마땅한가? 을불은 마땅히 왕이다. 연태자(椽太子)가 마땅히 이 눈처럼 사라져라.”
그러자 사람들 모두가 따라서 함께 제창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 선창(先呼)한 자를 잡도록 명하자 사람들이 모두 횃불을 든 채 뿔뿔이 달아나므로 화연(火烟)이 궁안에 가득 차서 궁인(宮人)들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갑자스런 와중(忽閒)에 잘못하여 궁중에 실화(失火)하니 불길의 기세가 매우 급하였으나 불을 끄는 자가 없었다. 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그 잡는 것을 중지시켰다. 그 눈사람들을 보니 혹은 “椽太子(연태자)” “顔太子(안태자)”라 적혀있고, 혹은 “揷矢婁(삽시루)”라 써 놓았는데 팔을 자르거나 눈을 뚫고, 혹은 머리를 끊고 가슴을 파고 코를 깎거나 입을 지졌으며 또한 “主上可殺(주상을 죽일것이다)”라고도 써놓았다. 왕은 분하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장군(將軍) 우평(于枰)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고 바람이 갑작스레 휘몰아쳤다. 왕은 연후(緣后), 초후(草后), 우태후(于太后) 및 두 태자와 함께 겨우 신림(神林)의 원(院)으로 화(禍)를 피하고 궁중의 모든 비빈들과 왕자녀(王子女)의 생사는 아득히 알지 못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무슨 죄로 이런 재앙을 받는가?”
홀연 신림(神林)의 숲이 어지럽게 우는 가운데 한 장군(將軍)이 검을 휘두르며 호령하고 나오는 것이 보이는데 어김없이 바로 안국군 달가(達賈)였다. 왕은 크게 놀라 땅에 자빠지며 말했다.
“나 죽는다! 나 죽는다!”
우태후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무슨 경겁(驚怯)을 이리 심하게 하는가?”
그때 서궁(西宮)의 알자(謁者)가 포후(蒲后)와 왕자 심(椹) 및 홍(紅) 람(藍) 두 공주를 데리고 와서 아뢰었다.
“신이 병권(兵權)이 없는 까닭에 진화(鎭火)를 지휘하지 못하고 다만 거느린 궁노(宮奴)들과 더불어 겨우 서궁과 정궁(正宮)의 보화를 보전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때야 바야흐로 너의 충성을 알겠다!”
포후(蒲后)가 말했다.
“위두(衛頭)의 패거리들이 모두 난군(亂軍)과 더불어 도둑질을 하자 선방(仙方)이 그를 꾸짖었으나 금할 수가 없었으니 저들은 모두 위두이고 선방은 다만 일개 알자(謁者)일 따름이니 어찌 보국(保國)을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위두는 모두 우 장인(于舅)의 소임이다. 혹여 뇌물을 받고 도적들을 쓴 것인가?”
우태후가 말했다.
“어찌 도적을 쓸 장인이겠는가? 마땅히 이 급한 때에는 미천함으로써 사람을 저버릴 수 없으니 의당 선방을 위두로 삼아 이를 진압해야 할 것이다.”
왕은 그러히 여기고 즉시 선방을 배(拜)하여 위두(衛頭)로 삼았다.


선방이 말했다.
“신에게 위두는 과분하나 이 대란(大亂)에 일개 새 위두(新衛頭)가 무슨 가치가 있어 능히 제군(諸軍)을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도두낭장(都頭郎將)을 얻어 12위두(十二衛頭)와 궁외위장(宮外衛將)들을 감독하고자 합니다.”
왕이 그를 허락하고 용검(龍劍)을 내렸다.
선방이 그 궁노(宮奴)를 불러 영(令)을 전하고 융복(戎服)차림으로 말에올라 출발하니 위의(威儀)가 새로웠다. 우태후가 감탄하여 말했다.
“장재(將材), 유재(有才)라 하더니 저게 그 사람이다!”
잠시후 선방은 한 위두(衛頭)의 목을 베어서 바치며 상주했다.
“이 사람은 방화와 도둑질을 했습니다. 태보(太輔) 우평(于枰) 또한 난군(亂軍)에 피살된 바이니 옛 위두(舊衛頭)로는 일을 정리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모든 위두를 파직하고 신(臣)의 사람으로 씀이 어떠하십니까?”
왕이 말했다.
“그대가 상주한 바대로 하라.”
선방이 이에 그 무리 열 두명에게 위두(衛頭)를 제수하고 요새(要塞)를 나누어 지키며 방화를 금지시키고, 창조리와 상보를 불러 입궁시키며, 정궁(正宮)과 서궁(西宮)을 소제하여 왕을 받들어 모시고 위로하였다.
불은 오히려 아직도 꺼지지 않았건만 왕은 놀라 쓰러진데다 상한(傷寒)으로 정사를 볼 수 없었다. 우태후가 상보와 더불어 공의(共議)하여 정사를 행하며 창조리에게 명하여 군민(軍民)을 진무(鎭撫)하도록 하였다.
소실된 궁전이 32좌(坐)요, 보물(寶物)과 인축(人畜)의 손실 또한 허다하였다.
왕은 그 불타고 남은 잔해를 보자 더 이상 궁(宮)에 뜻이 없어 모두 다 쓸어버리라 하며 “나가서 상보의 집에 거하리라.”라 하고 “내 처의 집이 심히 아늑하다.”라고 하였다.
그 때에 초후(草后)는 임신한지 이미 두 달째였다. 왕이 그녀와 더불어 온탕(溫湯)에 가서 출산하고자하니 부씨(芙氏)가 간했다.
“인심이 흉흉하여 산장(山莊)에 나가 계실 수 없습니다.”
마침내 상보의 집에서 군신(群臣)의 조례를 받으니 군신들이 모두 진창에 섰다. 상보의 노(奴)가 군신들에게서 마두전(馬頭錢)을 거둬들여 재화를 챙기는 것이 심히 많았다.
창조리가 상보에게 말했다.
“공은 후(后)의 아버지로써 노(奴)가 조신(朝臣)들에게 재물을 거두는 것을 치죄(討)하였소?”
상보가 말했다.
“내가 치죄할 바가 아닙니다. 왕이 하사한 노(奴)이니 내가 어찌 그를 금하겠습니까?”
창조리가 탄식하여 말했다.
“큰 기강(大綱)이 무너지니 나라를 보전할 수 없도다.”
이 해 봄에 왕은 초후(草后), 부씨(芙氏)와 더불어 봉산행궁(烽山行宮)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왕의 태궁(胎宮)이었다.

을불(乙弗)은 모든 신하들을 5부(五部)에 분산 파견하여 동지(同志)들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조불(祖弗), 동부의 소우(蕭友), 남부의 오맥남(烏陌南)이 가장 먼저 모의를 통하였다.
오맥남(烏陌南)이란 자는 창조리의 사위로서 공신 오이(烏伊)의 후손이었다. 맥남은 음씨와 더불어 창조리에게 왕을 폐하여 두로(杜魯)의 고사(古事)를 행할것을 권하였다. 창조리가 자못 마음이 움직여 은밀히 조불(祖弗)과 소우(蕭友)에게 물으니 모두 찬성하였다. 오히려 서부(西部)와 중부(中部)에서 응하는 자가 없어서 그를 기다렸다.
을불은 동촌(東村)사람 재모(再牟)와 더불어 소금장사(販鹽)를 하며 은밀히 다녔는데 압록(鴨綠)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동(江東)의 사수촌(思收村)에 닿아 인가에 묵었다. 그 집의 노파가 소금을 청구하므로 한 말(斗)남짓을 주었다. 노파가 적다고하며 꾸짖고 욕하자 을불이 말했다.
“말 소금이 적다면 섬 소금 역시 응당 적을 것이니 무슨 수로 네 욕심을 틀어 막겠는가?”
노파가 노하여 앙심을 품고 몰래 신을 소금속에 넣어두었다. 을불이 알지 못하고 소금을 지고 길을 나섰는데 노파가 쫓아와서 신을 찾아내며 그를 무고하여 재(宰)에 고소하였다. 재(宰)는 신발이 소금속에 있었으므로 노파에게 판결을 주고 을불에게는 태형을 가하여 내쫓았다. 이에 걸식을 하며 돌아가니 형용은 말라죽은 고목같고 옷은 남루하여 사람들이 그 왕손(王孫)이 됨을 알지 못했다.
방부(方夫)는 을불을 받들고자하여 입경(入京)했다가 당자촌(棠子村)에 이르렀는데 재모(再牟)와 더불어 소금장사 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니 재모가 말했다.
“압록재(宰)에게 죄수로 갇힌바 되어 서로 헤어졌습니다.”
방부가 압록의 재소(宰所)에 이르러 그를 찾았으나 볼 수 없었고 강가에서 수색하다가 마침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서로 끌어안고 울고나자 을불이 기뻐하며 말했다.
“염노(鹽奴)의 옷차림이 오히려 복이 되었으니 일시의 고초야 족히 말할게 무엇인가?”
마침내 더불어서 마산(馬山)을 거쳐 지나가니 바야흐로 단오(端午)를 맞이하여 모든 촌락의 장춘녀(長春女:다 큰 봄처녀?)들이 시냇가에서 유희하는데 꿀물(蜜水)을 많이 갖고 있었다. 을불이 목이 말라 마시기를 청했다. 모든 여자들이 을불의 새까만 얼굴(炭面)과 염노차림에 키가 커서 비쩍 마른 몰골을 보고는 꾸짖어 말했다.
“대가집(大宅)의 모임에 어찌 감히 염노(鹽奴)가 마실 것을 구하느냐?”
그 때에 선방(仙方)의 처 토대(ꟙ大) 역시 그 중에 있었는데 뭇 여자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목마르면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어찌 귀천을 논하는가?”
이에 큰 바가지로 퍼서 주니 토대(ꟙ大)의 두 딸 또한 앵두(櫻桃)를 그에게 주었다.
을불이 감사를 표하며 그를 시험코자하여 말했다.
“우리는 멀리서부터 와서 목이 마르고 굶주렸소, 소소한 앵두로는 배창자를 채우기에 부족하니 바라건대 밥을 얻어 먹읍시다.”
뭇 여자들이 토대를 말리며 “대노(待奴?) 후노(厚奴?)가 대개 꺼리는게(버르장머리가) 없으니 일찍 쫓아버림만 못합니다.”하고 몽둥이로 내쫓으려했다. 토대가 말했다.
“그 안색을 보니 진정 굶주린 사람이다.”
이에 밥을 짓고 어육(魚肉)을 갖추어 차려주었다. 을불이 방부와 더불어 배부르게 먹고나서 사례하여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보답할 것이 없으나 다른날에 귀하게 되면 마땅히 갚으리다.”
사람들이 모두 웃으며 말했다.
“염노(鹽奴)가 귀하니 누군들 귀하지 않을꼬?”
토대의 어린 딸은 나이가 거지(居知) 9살이었으나 재색(才色)을 이미 갖추었다. 홀로 말하기를
“이 아즈반(叔) 또한 을파소(乙巴素)처럼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상국(相國)이 되면 마땅히 그대를 취하여 처(妻)로 삼으리라.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말아야 할것이다.”
모든 여자들이 노하여 말했다.
“노(奴)가 감이 은혜를 저버리고 욕(辱)을 하느냐?”
토대가 말했다.
“사람은 제각기 스스로 믿는 것을 가져서 말함이니 어찌 욕(辱)이 되겠는가?”
그리고 을불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딸아이는 오히려 어리니 마땅히 상(相)이 되기를 기다려서 받드리다.”
을불이 이에 사례하고 떠났다.
토대는 암중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필시 을불태자이다.’하고 돌아가 선옹(仙翁)에게 고하였다.


애초에 仙翁(선옹)의 아버지 주선(周仙)은 주공근(周公瑾:주유)의 서손(庶孫)으로서 나이 18세에 (오의 사신?) 호위(胡衛)를 따라 이르렀는데 용모가 절미(絶美)한 까닭에 (말썽이 생겨) 행로(行路)가 경색 차단되고 급기야 복주되어 유형(誅流)을 받기에 이르렀다. 때에 집법령(執法令) 朱通(주통)은 그 미모를 아끼어 집에 은닉하고 용양신(龍陽臣)으로 삼았는데 朱通(주통)의 처 우씨(于氏)가 몰래 주선(周仙)과 상통(相通)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선옹(仙翁)이었다. 명민(明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고금(古今)에 박식하였다.
朱通(주통)의 모든 아들들이 다 귀하게 되었으나 仙翁(선옹)은 홀로 오(吳)나라 사람의 출생이라하여 기용되지 않았다. 안국군 달가가 그 재주를 알고 불러서 기실(記室)을 삼고 그 계책을 써서 양맥(梁貊)과 숙신(肅愼)을 평정하였는데 돌아와서는 경하(京下)에 학원(?)을 열으니 가르침을 받은 자제(子弟)들이 수천명이었다.
늘 달가를 권하여 먼저 기선을 잡아 간흉을 제압할 것을 권하였으나 달가는 의(義)를 중시하여 차마 그 말을 쓰지 못했다. 선옹이 이에 퇴거하여 마산(馬山)에 숨어지내며 해마다 소(牛)와 양(羊) 수천마리를 쳐서 번식시키며 하천에서 금(金)을 캐어내니 재화를 모은 것이 수만(數萬)이었다. 스스로 우태후(于太后)의 옛 신하(舊臣)의 얼축(蘖畜/糵畜?:물주?)이 됨으로써 태수(太守)와 매우 깊이 결탁하였다. 태수는 그가 비상한 위인임을 알고 그 부락(部落)을 다스리도록 명하여 공적을 크게 드러내게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 보았다.
仙翁(선옹)은 을불을 받들고자하여 재산을 흩어 선비들을 결집(結士)하고 아들 선방(仙方)을 입경(入京)시켜 일을 주관케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을불이 촌락을 지나갔다는 말을 듣고는 뒤를 쫓아서 해령(蟹岺)에 미치자 을불은 방부와 더불어 나무아래에 불을 피우고 노숙(露宿)하고 있었다.
仙翁(선옹)이 나아가 배알하며 함께 그 장원을 돌아갈 것을 청하자 을불이 말했다.
“나는 곧 미친사람일 따름이오.”
仙翁(선옹)이 말했다.
“세상이 모두 눈알(目)이 없으나 신은 홀로 눈동자(瞳)가 있으니 왕손은 의심하지 마소서. 신은 바로 안국군의 신하 仙翁(선옹)입니다. 태자를 받들어 옛 주인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을불은 곧 그가 선방(仙方)의 아버지임을 알고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변복(變服)하여 목양자(牧羊子:목동)가 되고 방부를 서부(西部)로 보내어 여러 대인(大人)들에게 유세(遊說)하도록 하였다.


때에 초후(草后)는 왕녀(王女)를 낳고 장차 귀경(歸京)하려 했는데 왕은 궁실이 아직 중수되지 않은 까닭으로 나라 안(國內)의 남녀(男女)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도록 했다. 이 해는 흉년(荒)이라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다시 부역에 시달리자 백성들이 많이 집을 버리고 떠돌아 다니니 세상이 흉흉(洶洶)하였다.
창조리가 간하여 말했다.
“천재(天災)가 닥쳐와 한 해 농사(年穀)가 흉작을 이루매 여민(黎民)들이 의지할 바를 잃고 건장한 자는 사방을 떠돌며 노약자는 물구덩과 산골짝(溝壑)을 전전하니 이는 진실로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걱정(畏天憂民)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가다듬어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은 오히려 이런 생각을 않고 기갈에 지친 사람들을 토목의 노역에 내몰아 괴롭히니 백성의 부모된 뜻과는 심히 어그러집니다. 하물며 또한 모용씨가 강경하여 우리의 피폐를 틈타 침공하려 하고있으니 그 사직(社稷)에 어쩌려고 하십니까?”
왕이 노하여 말했다.
“임금(君)이란 백성의 우러러 바라봄(瞻望)이다. 궁실이 장려하지 않으면 동자(童)에게도 위엄을 보일 수 없는 까닭에 하늘이 불을 내려 옛 궁실의 피폐함을 허물고 면목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경은 국상(國相)으로서 마땅히 불일의 공(不日之功)을 독려해야 하거늘 오히려 불평하는 무리와 함께 짐의 몸을 비방하려 하는가? 무지한 백성들무리가 을불을 칭찬하고 짐을 원망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은 을불과 서로 상통(相通)하여 백성들의 칭찬을 얻고자 한다는데 지금 과연 그러하도다!”
창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치화(化)가 아니며,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않으면 충성(忠)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상국의 빈자리를 채웠는데 비겁(不敢)하게 말하지 않고 어찌 칭찬에 용감(敢)하겠습니까?” ??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가? 과인을 범하고자 하는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창조리는 왕이 고칠 뜻이 없음을 알고 또한 해(害)가 머지않아 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맥남(烏陌南), 조불(祖弗), 소우(蕭友)등과 더불어 은밀히 을불(乙弗)을 영립(迎立)할 모의를 세웠다.
때에 우탁(于卓), 을보(乙寶), 자(柘), 선방(仙方)등은 암암리에 서로 결탁하고 서로간에 을불의 소재를 감추어서 만일의 변고에 처하여 그 공(功)의 으뜸(首)이 되고자했다. 창조리 또한 암암리에 그 무리를 발하여 물색하며 찾아다녔다.
그때 을불은 선옹(仙翁)의 집에 있었는데 선옹은 또한 그 아들 선방에게도 감추고 말하지 않았으며 집안 사람들 역시 그가 왕손(王孫)이 됨을 몰랐다. 유독 선방의 처(妻) 토대(兎大)만이 알고있어서 그를 대우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때에 을불의 나이 이미 22세로 신장이 8척이고 용의 수염(龍髥)에 호랑이의 눈동자(虎瞳)요, 원숭이의 팔(猿臂)에 외뿔소의 어깨??(兕角?)였으니 삼가 근심하는 초췌한 모습(謹懼憔悴)은 마른 학(瘦鶴)을 닮았고, 얼굴을 펴고 웃으면 봄바람이 호탕(春風浩蕩)하였다. 모든 비녀(婢)들이 그와 친하고싶어서 그에게 장난을 치니 뭇 노(奴)들이 그를 질투하여 말했다.
“용렬한 장한(長漢)이 비녀(婢)를 훔치는데는 능하구나!”
토대(兎大)가 그들을 꾸짖어 말했다.
“저 공(公)은 옹(翁)의 외족(外族)이다. 너희들이 감히 맞설 상대가 아니다.”
을불이 웃으며 말했다.
“외족노(外族奴)가 비녀(婢)를 희롱할 수 있는데 타족노(他族奴)는 희롱할 수 없겠는가?”
이에 품고 희롱하던 비녀(婢)를 그 노(奴)에게 밀어주었다. 노(奴)가 그녀를 안고 희롱하려하자 비녀(婢)가 뿌리치고 가면서 말했다.
“나는 외족노(外族奴)는 좋아해도 이런 미친 노(此狂奴)는 싫다.”
그 노(奴)가 을불에게 을러 말했다.
“네가 키가 크고 자지(莖)가 큰 까닭에 비녀(婢)들이 그것을 좋아하니 마땅히 네 자지(莖)를 뽑아서 갚아 주리라.”
토대가 그를 꾸짖어 말했다.
“네가 어찌 감히 장자(長者)에게 욕하느냐, 명하여 곤장을 칠 것이다.”
을불이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한 마디 실수를 족히 책망할게 뭐 있습니까? 내가 마땅히 삼가할 것입니다,”
마침내 비녀(婢)들을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니 비녀(婢)들이 모두 그 노(奴)를 원망했다.
兎大(토대)가 을불을 보니 비녀들을 멀리하고 무료(無聊)하고 조용히 지내므로 그 앞에 나아가 옷의 터진 곳을 꿰매주며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두 딸은 모두 어려서 잠자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첩이 듣건대 영웅은 호색하지만 감히 비녀(婢)를 받들어서 나아가지 않는 것은 훗날의 누(累)가 될까 두려운 것이외다.”
을불이 웃으며 兎大(토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속말에 ‘딸을 기다려서 어미가 행한다(待女行母)’하니 어미가 만약 나를 가엾게 여긴다면 어찌 은밀하게 한번의 잠자리를 베풀지 않습니까?”
兎大(토대)가 웃음을 머금으며 은근함을 보이자 을불이 마침내 안고 희롱하다가 산정(山亭)으로 이끌고 들어가서 그녀와 통하였다.
이로부터 날이 없이 서로 통정하는데 그 집이 산을 의지하여 세워졌으므로 정자(亭)는 그 꼭대기에 있어서 멀리서도 바라다 보였다. 노(奴)중에 그것을 본 자가 있어서 질투하던 노(奴)로 하여금 선옹(仙翁)에게 고하게 했다. 선옹은 꾸짖으며 그를 물러가게 했다. 노(奴)가 일곱 번을 고하였으나 일곱 번 꾸지람을 당하였다.
노(奴)가 노하여 말했다.
“우리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주인은 외숙(外叔)을 위해 거짓을 취하고 오히려 우리를
욕하니 가히 이때로써 주인을 멸하고 재산을 나눠야 할 것이다.“
비녀(婢)가 그 밀모(密謀)를 엿듣고서 선옹에게 고하였다. 선옹은 이에 비녀(婢)로 하여금 술을 보내서 그들을 위로하고 말을 전하게했다.
“내일 마땅히 외족노(外族奴)를 죽일 것이다. 너희들 세 사람은 정원(園)안에 구덩이를 만들어야 할것이니 은밀히 하라.”
세 사람이 크게 기뻐하고 은밀히 밤을 새워 구덩이를 파고는 지쳤는데 그 나오고자 할 때를 기다렸다가 돌을 굴려 메워버렸다. 곧 모든 노(奴)를 경계시켜 말했다.
“집안(宅中)에 수신(樹神)이 있어서 너희들의 정사(正邪)를 아니 모반(反)하는 자는 죽인다.”
이에 모든 노(奴)들이 전율하며 감히 난(亂)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해 9월, 왕은 초후(草后)와 더불어 봉산행궁(烽山行宮)에 있었는데 매일 밤 산 위에서 귀신의 곡(哭)하는 소리가 있어 왕은 모골이 송연하여 그를 두려워했다.
이미 행궁을 버리고 환도(還都)해서는 공사를 매우 급하게 독촉하므로 장병(將士)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
태사(太史) 연봉(椽逢)이 상주하여 말했다.
“근자에 객성(客星)이 달(月)을 범하니 필시 외적이 있어서 후비(后妃)와 내통하고 반역을 꾀하는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내 처(妻)의 누가 외적과 더불어 상통하는 것을 응하겠는가?”
초후가 말했다.
“연봉이 우리 부부를 이간하고자 하여 지어낸 것입니다. 이는 무근지설(無根之說)이니 가히 황지(荒地)로 유배시켜야 할 것이오.”
왕이 이에 草后(초후)의 형 상도(尙道)를 태사(太史)로 삼고 연봉(椽逢)을 해빈(海濱)으로 귀양보냈다. 때에 서부사자(西部使者) 우린(于璘)은 방부(方夫)의 모반상을 상주하고자 장차 입경(入京)하는데 도중에 연봉과 만나게 되었다. 우린과 연봉은 본래 돈독한 사이였다. 연봉이 말했다.
“주상이 충신을 많이 의심하여 소원한 꼴을 당하니 화(禍)가 장차 멀지 않았소. 나아가 충성하여 주살을 당하는 것 보다 관망하면서 변고에 응하는 것이 낫소.”
우린(于璘)은 그말을 그럴듯이 여기고 마침내 돌이켜서 방부와 결탁하고 혼인을 약속하였다.
12월에 천둥이 치고 땅이 흔들리므로 우태후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네가 허물없는 사람을 죽이고 백성을 부역시키니 두렵건대 혹 하늘이 노하신 것인가?”
왕이 노하여 말했다.
“너 또한 조리(助利)의 패거리와 통모(通謀)했는가?”
태후가 이에 상도(尙道)에게 물었다.
“태사는 어떻소?”
상도가 말했다.
“하늘의 방뢰(放雷)는 사람의 방귀(放?)와 같으며 땅의 진복(震腹)은 사람의 설사(泄瀉)와 같습니다. 방귀와 설사는 모두 그때의 따듯함(暖)과 추움(冷) 막힘(滯)과 트임(通)으로 인한것이며 정해진 때가 없는 것이니 족히 두려워할게 아닙니다.”
왕은 이에 기꺼워하며 말했다.
“진정 좋은 태사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크게 지진이 일어나는데 때에 왕은 상보(尙寶)의 집에 있었으니 그 집의 정당(正堂)이 무너져 내렸다. 왕은 비로소 송연한 마음을 가지고 말했다.
“태사의 말이 두렵건대 혹 틀린것인가?”
상도가 말했다.
“신의 집이 협소하고 오래되어 많이 썩었습니다. 이런곳에서 조례를 받는 것이 옳지않은 까닭에 또한 아버지와 의논하여 개축하고자 했으나 왕궁이 아직 보수되지 않은 까닭으로 공사를 겹칠 수 없어 기다렸습니다. 지금 그 썪은 나무가 부러졌으되 인축(人畜)의 상함이 없었으니 거의 하늘이 조속히 수리하고자 함인듯 합니다.”
왕은 그런가 여기고 역졸(役卒)을 나누도록 명하여 상보의 집을 수리하게 하였다.


금신(金神)의 원춘(元春)에 왕은 우탁(于卓)의 집으로 어소를 옮기고 조회를 받으니 곧 돌고궁(咄固宮)이었다.
을불이 도피했을때부터 수왕(樹王)이 말라죽고 꽃이 피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서 다시 소생하자 옛 노(舊奴)의 무리들이 암암리에 기뻐하며 “을불당왕(乙弗當王)”이라 함으로써 그를 축도하였다. 을씨(乙氏)는 왕이 들을까 두려워서 그를 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때에 왕의 포매(胞妹) 탐씨(耽氏)는 이미 장성하여 아름다웠다. 왕이 그를 행(幸)하여 총애가 바야흐로 융성하였으니 탐씨(耽氏)는 곧 돌고(咄固)의 딸이었다. 힘써 그 아버지가 무죄하게 간신의 참소를 입은 것을 말하니 왕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원항이 나를 그르쳤다. 내가 어찌 진실로 네 아버지를 미워했겠느냐.”
마침내 명을 내려 돌고의 작위를 복원하고 그 묘(墓)에 제사를 지냈다. 을씨가 이에 사은하여 말했다.
“폐하께서 첩의 옛 남편을 가엾게 여겨주신 까닭에 고목이 다시 살아나서 옛 노(舊奴)들이 그를 받들고 있습니다. 신의 아들 을불은 이미 강속에서 죽었으니 황송하오나 초혼하여 그를 위로하겠습니다.”
우태후 또한 말했다.
“골육을 이간한 것은 간신의 성토였다. 을불이 비록 살았어도 사면해야 할것인데 하물며 이미 죽은자임이겠는가?”
왕은 마침내 명을 내려 그 혼을 불러 위로하도록 하였다. 을씨가 이에 선방(仙方), 자(柘)등과 더불어 포대(布袋)를 만들어 곡식을 넣고 빈민들에게 분배하여 “을불곡(乙弗穀)”이라한 것이 수만포였으니 경외(京外)의 인민들이 모여든자가 십만으로 셈할 수 있었다. 왕은 변(變)이 있을까 의심하여 중지하도록 명령했으나 인민들은 해산하여 떠나는 것을 따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포곡(布穀)이 나온 곳을 추궁하고 자(柘)등을 정원에서 국문코자 하니 땅이 홀연 다시 크게 요동치고 왕은 능히 앉아있을 수 없어 전(殿)을 내려와 수왕(樹王)에게 달려가서 의지했다.
자(柘)와 모두가 왕을 부축하며 무죄(無罪)함을 호소하고 초후와 탐씨가 모두 출령(出令)이 불일(不一)한 까닭에 이러한 지진이 있다고 말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모두를 사면하자 지진이 그쳤다. 이로부터 남이 을불의 모반이라 말하는 것이 있으면 왕은 모두 믿지 않고 옥에 가둘 것을 명했으므로 왕의 근신(近臣)들 또한 을불이 조만간 들어와 왕이 될것임을 알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2월부터 7월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들어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도로는 끊어져 막히고 떠도는 말들이 사방에서 나왔다.
을불이 고열(苦熱)이 있어 선방(仙方)의 두 딸과 더불어 시내(川上)에 나가 목욕하였는데 이를 태수(太守)에게 고한 사람이 있었다. 태수가 장차 을불을 잡으려고 오자 을불은 두 딸(二女)을 데리고 냇가의 갈대숲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날은 저물고 뱃속은 비었는데 모기와 등에가 교대로 덤벼들었다. 선옹이 횃불을 들고서 그를 찾아내자 곧장 을불과 토대(兎大) 및 그 두 딸을 산의 오두막집으로 옮기고 선옹 스스로 창검을 잡고서 지키는 자가 되었다.며칠이 지나서 마침내 와전된 것임을 알자 그만두었다.
그때에 재생(再生)과 장막사(長莫思)등은 남부사자(南部使者) 오맥남(烏陌南)과 더불어 정병 3천을 이끌고 궁역(宮役)을 감리(監理)한다는 말로 칭탁하고 날짜를 정해서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고자 했다. 조불(祖弗) 소우(蕭友)등은 먼저 맞이하여 자신의 공(功)으로 삼고자하여 사잇길로 잠행하며 비류하(沸流河)의 강가에 이르렀다. 그들이 배를 타려하는데 그때 을불은 장차 당자촌(棠子村)에 가고자하여 노정과 소식을 탐문하며 배 위에 서 있었다. 소우(蕭友)가 보고서 의심하며 말했다.
“저 사람의 형모가 비록 초췌하나 행동거지가 예사롭지 않고 풍채가 돌고태자와 흡사하니 필시 을불태자이다.”
이에 좇아가서 절하며 말했다.
“신등은 국왕이 무도한 까닭에 음(陰)으로 폐립을 모의한바, 왕손은 조행검약(操行儉約)하며 인자애인(仁慈愛人)하므로 가히 조업(祖業)을 이을 수 있는 까닭에 맞으러 왔습니다.”
을불이 굳이 감추며 부정하자 소우등은 마침내 그를 이끌고 선옹의 장원에 이르러서 탐문했다. 선옹 역시 웃으며 말했다.
“이는 우리집의 노(奴)입니다. 공들이 모두 잘못 안 것입니다.”
소우(蕭友)등이 의심쩍어하며 결정을 못 내리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방부(方夫)와 선방(仙方) 또한 말을 몰아 당도하니 마침내 일의 고비가 장차 박두했음을 알게되었다.
선옹은 토대에게 명하여 을불을 목욕시키고 어의(御衣)를 받들어 올렸다. 을불이 마침내 태자의 복장을 차려입고 소우(蕭友), 조불(祖弗)등의 배알(拜謁)을 받고 군신(君臣)의 예를 행한후 자리에 앉아 밤을 새워 잔치를 하고 새벽에 파하였다.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출발할 수가 없자 선옹이 말했다.
“인사(人事)는 순천(順天)이니 가히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명을내려 방부(方夫)는 당자촌(棠子村)의 장정(壯丁) 30인을 발하고. 선방(仙方)은 마산촌(馬山村)의 장정 30인을 발하여 초후(草后)에게 양(羊)을 진상한다고 탁언(託言)하며 출행하니 바로 8월 보름에 맞아 떨어졌다.
하얀 달이 마치 낯과 같이 비추니 낮에는 쉬고 밤에는 행군해서 경도에 입성하여 오맥남(烏陌南)의 집에 묵었다. 오맥남의 처는 창조리의 딸이었다. 조불(祖弗)이 맥남을 권하여 말했다.
“선방은 이미 그 처로 신왕(新王)을 모시게 했으니 그대도 의당 스스로 도모하십시오.”
맥남이 이에 그 처 창씨(倉氏)로 하여금 을불의 잠자리로 들어가게했다. 을불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자 마침내 창씨를 품고 칠일(七日) 칠야(七夜) 연이어 행(幸)하였다. 누운채로 나오지않고 오직 소식만을 기다리니 얼굴은 흙빛이 되고 밥을 먹어도 단맛을 몰랐다.
창씨가 말했다.
“들은즉 그대는 밖에 있으면서 근신(近臣)의 처와 많이 통했다고 하는데 일조에 왕이 되면 모두 가히 입궁시키겠지만 첩은 비록 오늘 총애를 받아도 다른 날에 버려질지 어찌 알겠습니까?”
을불이 그를 위로하여 말했다.
“네 아버지 창공(倉公)이 나를 받드는데 어찌 너를 등지겠는가. 마땅히 너를 후(后)로 삼아서 네 아들을 세우리로다.”
창씨가 그 말을 창조리에게 고하자 창조리는 웃으며 말했다,
“신왕(新王)의 나에 대한 아부가 심하도다! 너는 그 총애를 믿어서 뜻을 잃는(恃寵失旨)일은 말아야 할 것이니 도리어 화(禍)의 근본이다.”
창씨가 이에 삼가 신절(臣節)을 지키면서 감히 친근하게 장난치지 않음이 여전하므로 을불은 그 예절이 있음을 알고 또한 빈객처럼 대하였다.


9월, 왕이 장차 후산(侯山)의 북쪽(陰)에서 사슴(鹿)을 제사하고자하니 구공(舅公) 상보(尙寶)와 장군 우자(于刺), 상국 창조리(倉助利)가 따랐다. 왕이 연후(椽后), 초후(草后), 탐씨(耽氏), 을씨(乙氏)와 더불어 우태후(于太后)를 받들고 어가를 출발하여 후산행궁에 이르렀다.
조불(祖弗), 소우(蕭友)등은 자(柘), 을보(乙寶), 창멱(倉覓), 우풍(于豊)등과 함께 병력을 출동하여 서울(京)안팎을 진압하고, 선방(仙方)은 군사로써 행궁을 정숙히하고, 오맥남(烏陌南), 재생(再生), 장막사(長莫思), 방부(方夫)등은 그 사사로운 기병들을 거느리고 사냥터(獵場)에 산재하며 상황에 응변(應變)토록 하였다.
을불이 마침내 휴도(休都), 송거(松巨)등과 함께 미복차림으로 계곡을 따라서 후산(侯山)의 북쪽(陰)으로 나왔다. 갈대 잎을 따서 관(冠)에 꽂으며 말했다.
“이것으로 신호를 삼아야 할 것이오.”
창조리가 이에 갈대잎을 관(冠)에 꽂으며 말했다.
“나와 마음을 같이하는 자는 나를 따라서 갈대잎을 관에 꽂아라.”
오맥남등이 일시에 그것을 꽂고는 을불을 받들어 말위에 태우고 백신의(白神衣)와 자주왕관(紫朱王冠)을 더하니 무리들이 모두 환호하며 만세(萬歲)를 외쳤다.
왕이 행궁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물었다.
“상국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선방이 대답했다.
“우리가 현주(賢主)를 맞아 세우고 무도함을 폐하는 것입니다.”
곧 검을 휘두르며 군사를 호령하니 왕은 도망갈 바를 모르고 초후(草后)의 곁에서 머리만 내민채 말했다.
“네 아버지와 네 아저씨가 차마 날 폐하려고 하는가?”
초후가 선방을 꾸짖으며 말했다.
“네 어찌 감히 배은하고 반역하느냐?”
선방이 말했다.
“신은 반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을불태자를 받들고 후(后)를 받들고자 하옵니다.”
초후(草后)는 곡(哭)을 하며 말했다.
“나는 이미 구왕(仇王)의 딸을 낳았다. 을불이 비록 온대도 어찌 상면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왕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왕은 두 태자와 우태후, 연후와 더불어 달아났다.???
군신(群臣)들이 을불을 들어올린채 행궁으로 들어와서 왕 및 두 태자를 당(堂)에서 끌어내려 꿇어앉게 했다. 을불이 말했다.
“전왕(前王)이 무도하나 또한 나의 숙부이니 죽일 수 없다. 태후 및 여러 후(后)는 모두 여자이니 만약 그를 범(犯)한 자가 있어도 나의 신하가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왕은 이에 부복하여 사죄하고 을불에게 새보(璽寶)를 바치며 말했다.
“이로부터 마땅히 대왕의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군신(群臣)들이 모두 외쳤다.
“신왕만세(新王萬歲)”
을불은 마침내 새보(璽寶)를 받고 대맥대왕(大貊大王)이 됨으로써 5부(部) 37국(國)의 조하(朝賀)를 받게되었다.
명을내려 구왕(舊王) 및 두 태자를 별실에 가두게하자 두 태자는 놀라고 겁에 질려 스스로 자살하였다. 왕 또한 놀라고 두려워서 스스로 목을 찌르려 했는데 수졸(守卒)이 그를 잡아 말리고 엄하게 지켰다. 때에 우태후(于太后)는 왕앞에 달려와서 엎드리며 말했다.
“원컨대 폐하는 우리 모자를 용서하소서.”
신왕은 그를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태후는 걱정하지 마시오.”
을씨(乙氏) 또한 신왕을 안고 울며 “오늘 서로 보게된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하고 다시 초후(草后)를 이끌어 앞에 세우며 말했다.
“오늘의 일은 모두 이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니 너는 실절(失節)했다하여 그를 버리지 말고 처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왕이 이에 초후를 안고 교대로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군중(軍中)에서는 초후(草后)가 정사를 어지럽혔으니 죽여야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선방이 명을 내려 금지시켰다.
난군(亂軍)이 다시 상보(尙寶)와 우자(于刺), 우덕(于德)등을 묶어서 죽일 것을 청하자 신왕이 말했다.
“가히 뒷차에 실어서 그를 의논할 것이다.”
마침내 군(軍)을 이끌고 입경(入京)하니 을보(乙寶), 우탁(于卓), 자(柘)등이 도상에 부복하여 맞이했다. 신왕은 모두에게 말을 하사하여 따르도록 명하였다. 정궁(正宮)으로 들어가 거처하고 군신들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치갈왕(雉葛王) 9년 금신(金神)의 9월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백성들중에 20세이하의 부역하는 남녀(男女) 및 형제(兄弟) 부자(父子)가 되는 자들은 3분의 2를 놓아주고 그 장정중에 궁실보수를 자원하는 자 천명을 택하여 궁실을 짓도록했다. 백성들이 대부분 돌아가지 않고 머무르며 말했다.
“내 임금(吾君)을 위해 집을 짓겠다.”
신왕(新王)은 명을내려 그 모두를 후하게 대접하고 수고를 위로하였다.
상도(尙道)의 처 이씨(梨氏)를 선방의 아들 선곽(仙槨)의 처로 삼았다.


원년 9월, 대왕은 공신(功臣) 창조리, 조불, 소우, 오맥남, 자, 선방, 방부, 재생, 담하, 송거, 장막사, 휴도등의 12인을 그 고향(鄕)에 봉(封)하고 노비(奴婢)를 하사함에 차등을 두었다.
돌고(咄固)를 존효(尊孝)하여 태왕(太王)을 삼고 어머니(母) 고씨(高氏)와 을씨(乙氏)를 태후(太后)로 삼고, 을씨의 사부(私夫) 우탁(于卓)을 태공(太公)으로 삼고, 아버지(父) 을보(乙寶)를 노태공(老太公)으로 삼았다.
초후(草后)를 정후(正后)로 삼고, 누이(妹) 단씨(丹氏)와 탐씨(耽氏)를 부후(副后)로 삼았다. 태평(太平)의 딸 평씨(平氏)와 휴도의 처 녹씨(鹿氏), 방부의 처 고씨(高氏), 선방의 처 토대(兎大), 오맥남의 처 창씨(倉氏)에게 모두 부인(夫人)의 작위를 내리고 노비(奴婢)를 하사함에 차등을 두었다. 전왕의 후(后) 연안씨(緣眼氏)를 재생의 처로 삼고, 해포씨(解蒲氏)를 선방의 처로 삼고, 다씨(多氏)를 담하의 처로 삼았다.
재생(再生)과 담하(談河)를 좌우주부(左右主簿)로 삼아 정사(政事)를 결정하도록 하고, 휴도(休都)와 방부(方夫)를 좌우위장(左右衛將)으로 삼아 군사(軍事)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창조리는 왕의 뜻을 몰라 병을 칭탁하고 사퇴하며 말했다.
“신이 무재(無才)함으로써 선왕을 섬김에 불충하였고, 국정을 어지럽힌 까닭에 새 조정(新朝)에 서기가 부족하오니 원컨대 해골을 얻어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선방이 은밀히 상주하여 말했다.
“폐하께서 새로 서서 중흥의 대공을 생각지 않으시고 밖에서 따라다닌 작은 공을 중용한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질 않습니다.”
대왕이 이에 창조리의 집을 방문하고 조리를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숙부(叔父)가 나를 버리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위하겠습니까?”
창조리가 말했다.
“신은 이미 늙었으니 청컨대 삼보(三輔)를 세워 함께 일하고자 합니다.”
왕이 이에 창조리를 태보(太輔)로 삼고, 우탁을 좌보(左輔)로 삼고, 을로(乙盧)를 우보(右輔)로 삼았다. 왕자 자(柘)를 대주부(大主簿)로 삼고, 선방과 오맥남을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으로 삼고, 조불과 소우를 전후위장군(前後衛將軍)으로 삼고, 휴도, 방부, 송거를 마장군(馬將軍)으로 삼았다. 장막사를 남부우대(南部于臺)로 삼고, 우린(于璘)을 서부우대(西部于臺)로 삼고, 우풍(于豊)을 중부우대(中部于臺)로 삼았다.
이에 모든 무리의 정세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대왕은 초후와 더불어 상보의 집에 행차하여 현씨(玄氏)와 부씨(芙氏)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현씨가 말했다.
“첩은 나이가 이미 늙었는데 상보가 공신에게 득죄하니 의지할 바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왕은 그를 용서하소서.”
대왕은 말했다.
“상보는 내 후(后)의 아버지입니다. 조만간 상(相)으로 삼을 것이나 지금은 잠시 중의를 좇아서 죄안(罪案)에 올린것입니다. 조모(祖母)는 걱정하지 마시오.”
현씨가 이에 사은하고 물러갔다.
부씨(芙氏) 또한 초후를 안고 울며 말했다.
“우리가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여 왕을 축원한 것은 함께 귀해지고자 함이었습니다. 어찌 오늘날 남편이 하옥되고 형제가 모두 밖으로 유배당하고자하는 뜻이었겠습니까?”
대왕이 말했다.
“ 부협(芙莢)과 부린(芙獜)의 죄는 비록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나 장모를 위하여 사면하리다. 심려말고 눈물을 거두시오.”
부씨가 말했다.
“형제가 만약 살아난다면 어찌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이로부터 날씨가 추워지니 속히 풀려나기를 바라옵니다. 또 재생과 담하는 모두 우리집의 가노(家奴)였는데 이제 주부(主簿)의 직책에 있어 우리 남편의 죄를 논하니 어찌 배은망덕이 아니겠습니까?”
대왕이 말했다.
“재생이 밖으로는 공론을 좇고있으나 안으로는 기실 그를 보호하고 있으니 장모는 의심하지 마시오.”
이날 밤에 대왕은 부씨와 더불어 상통하였는데 혹은 이르기를 대왕이 태자시절에 이미 먼저 상통했으며 이에 이르러 다시 통한 것이라고도 한다. 부씨는 유미(柔美)하고 교태롭게 아부를 잘 하므로 치갈(雉葛)의 시절에도 총애가 쇠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대왕의 총첩이 되니 내정(內政)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일이 많았다.


10월, 선옹(仙翁)과 고박아(高朴兒), 태평(太平)을 우탁의 집에서 찬치하여 대접하고 선옹을 마산공(馬山公)으로 삼고, 고박아를 당산공(棠山公)으로 삼고, 태평을 양화공(陽花公)으로 삼았다.
누런 안개(黃霧)가 닷새동안 사방을 가득메웠다. 대왕이 태사 우선(于先)에게 물었다.
“짐의 잘못이련가?”
우선이 말했다.
“안개의 기운(霧氣)은 아래로부터 위로 오르니 조짐이 후(后)를 범(犯)함에 있습니다. 두렵건대 군신(群臣)들이 초후(草后)를 전왕의 요물(妖物)이라 함으로써 폐하고자함이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