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徴実に似た出来事
実はこの徴実と同じようなことが1903年にすでに起こっていた。王健群氏によれば、栄禧は1903年『古高句麗永楽太王墓碑文攷』の中で、光諸八年の壬午(1882)に、山東の平民の[一の下に丌]丹山(きたんさん)に石摺りをしに行かせ、完璧な拓本を手に入れた(王健群氏による要旨)、と書いているという。そしてさらに第3面第1行の欠落部を次のように補ったという。
官兵移師百残、囲其城。百残王惧、復遣使献五尺珊瑚二、朱紅宝石筆床一、他倍前。質其子勾拏。(王健群著『好太王碑の研究』)
栄禧が補ったのは栄禧自身が、栄禧の研究に基づいて推定したものに過ぎなかった。徴実の内容は栄禧のものとはまったく異なるが、桂延寿は栄禧の『古高句麗永楽太王墓碑文攷』をみて、欠落部の造文を思い立ったのかもしれない。
推定した欠落部がたとえ史実に近かったとしても、歴史家として絶対してはいけないことを栄禧はしてしまった。ましてやそれが史実とまったく異なっていたとすれば、その責任は重大である。栄禧が徴実を生んだといえるかもしれない
징실로 닮은 사건
실은 이 징실과 같은 일이 1903년에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왕건군씨에 의하면, 영희는 1903년「古高句麗永楽太王墓碑文攷」 중에서, 광제 8년의 임오(1882)에, 산동의 평민[一아래에 丌]단산(きたんさん)에게 탁본을 하러 가게 해, 완벽한 탁본을 손에 넣었다(왕건군씨에 의한 요지), 라고 쓰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이 제3면 제 1행의 결락부를 다음과 같이 보충했다고 한다.
官兵移師百残、囲其城。百残王惧、復遣使献五尺珊瑚二、朱紅宝石筆床一、他倍前。質其子勾拏。(王健群著『好太王碑の研究』)
관병 이사백잔, 위기성. 백잔왕구, 복견사헌오척산호이, 주홍보석필상일, 타배전. 질기자구나. (왕건군저「好太王碑の研究」)
영희가 보충한 것은 영희자신이, 영희의 연구에 근거해 추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징실의 내용은 영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桂延寿는 영희의「古高句麗永楽太王墓碑文攷」을 보고, 결핍부의 조문을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추정한 결핍부가 비록 사실에 가까웠다고 해도, 역사가로서 절대 해선 안 되는 것을 영희는 해 버렸다. 하물며 그것이 사실과 완전히 차이가 났다고 하면, 그 책임은 중대하다. 영희가 징실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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