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현령(房玄齡,당)의「진서晉書」권108 재기8 <모용외 재기>입니다. - 모용외(慕容廆)는 5호 16국 시대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이자 실질적인 창업자로, 삼국지로 치면 조조-조비나 사마의(사마소)-사마염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우리 역사 특히 고구려사와 관련되는 인물로서 이 <모용외재기>가 기본적인 사료 중 하나이므로 풀어보았습니다.「진서」에서는 ‘재기(載記)’라는 독특한 항목을 두어 5호16국의 창업자와 공신들의 기사를 배치하고 있는데 내용상으로는 열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 원문은 국편위 고대사료집성(저본은 중화서국 점교본)에서 인용하고, 점교본의 교감기를 덧붙여서 풀었습니다. - 한문으로 된 옛글에서는 대체로 처음에는 성명을 다 적고 그 뒤에는 성을 생략하며 이름만 쓰는게 통례이나, 이걸 그대로 풀이하면 독해가 힘드므로 다시 일일이 성을 채워 넣어서 풀었었습니다. 그런데 비한족의 경우에는 성씨 사용의 관행이 서로 다르며, 성씨가 아닌데도 한족 사가들이 자기들의 관행에 비추어 추서한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사정이 얽혀있어서 제가 임의로 성씨를 채워넣으면 자칫 오해를 초래할 수 있으며 또 원문 그대로의 형태가 정보가치가 있으므로, 이 <모용외재기>에서는 최대한 원문을 살려서, 원문에 성명이 다 있으면 다 적고 이름만 있으면 이름만 적되 제 판단에 따라 ()를 써서 성씨를 추가했습니다. [예: (모용)외. (우문)실독관] 한족인물의 경우에도 일관성을 위해 똑같이 처리했습니다. 晉書卷一百八 載記第八 慕容廆字弈洛瓌, 昌黎 棘城 鮮卑人也. 其先有熊氏之苗裔, 世居北夷, 邑于紫蒙之野, 號曰東胡. 其後與匈奴並盛, 控弦之士二十餘萬, 風俗官號與匈奴略同. 秦漢之際爲匈奴所敗, 分保鮮卑山, 因以爲號. 曾祖莫護跋, 魏初率其諸部入居遼西, 從宣帝伐公孫氏有功, 拜率義王, 始建國於棘城之北. 時燕代多冠步搖冠, 莫護跋見而好之, 乃斂髮襲冠, 諸部因呼之爲步搖, 其後音訛, 遂爲慕容焉. 或云慕二儀之德, 繼三光之容, 遂以慕容爲氏. 祖木延, 左賢王. 父涉歸, 以全柳城之功, 進拜鮮卑單于, 遷邑於遼東北, 於是漸慕諸夏之風矣. 모용외(慕容廆)는 자(字)가 혁락괴(弈洛瓌)이고 창려(昌黎) 극성(棘城)의 선비인(鮮卑人)이다. 그 선조는 유웅씨(有熊氏)의 묘예(苗裔,후예)로 대대로 북이(北夷) 땅에서 거주하다 자몽지야(紫蒙之野)에서 읍락을 이루고 동호(東胡)라 칭했다. 그 뒤 흉노(匈奴)와 더불어 번성하여 공현지사(控弦之士,활 당기는 군사)가 20여 만에 이르렀으며, 풍속과 관호(官號,관직의 명칭)는 흉노와 대체로 같았다. 그러다 진(秦), 한(漢) 때에 흉노(匈奴)에게 패하여 나뉘어져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였으므로 (선비로) 불리게 되었다. (모용외의) 증조(曾祖)인 막호발(莫護跋)은 위(魏)나라 초 그의 여러 부(部)를 이끌고 요서(遼西)로 들어와 살았고, 선제(宣帝)(→사마의司馬懿)를 따라 공손씨(公孫氏)(→공손연)를 치며 공을 세워 솔의왕(率義王)으로 임명되고 극성(棘城) 북쪽에 처음으로 건국했다. 당시 연(燕), 대(代) 땅에서는 보요관(步搖冠)을 많이 쓰고 다녔는데, 막호발이 이를 보고 좋아하여 머리를 거두어묶고 이 관(冠)을 따라서 쓰고 다니니 여러 부(部) 사람들이 그를 보요(步搖)라 불렀고, 그 뒤에 음(音)이 와전되어 마침내 모용(慕容)이 되었다. 혹은 이의(二儀,하늘과 땅)의 덕을 흠모하고(慕) 삼광(三光,해,달,별)의 용모(容)를 계승했다 하여 마침내 모용(慕容)을 씨(氏)로 삼았다고도 한다. (모용외의) 조부인 목연(木延)은 좌현왕(左賢王)이었고, 부친인 섭귀(涉歸)는 유성(柳城)을 보전한 공으로 선비선우(鮮卑單于)로 올려 임명되고 요동(遼東) 북쪽으로 읍락을 옮겼다. 그러자 점차 제하(諸夏,중국)의 풍속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廆幼而魁岸, 美姿貌, 身長八尺, 雄傑有大度. 安北將軍張華雅有知人之鑒, 廆童冠時往謁之, [교1] 華甚嘆異, 謂曰:「君至長必爲命世之器, 匡難濟時者也.」 因以所服簪幘遺廆, 結殷勤而別. [교1] 廆童冠時往謁之 各本「童冠」作「童丱」, 宋本及御覽四七八引燕書·通志一八八並作「童冠」. 載記此段文字多同燕書. 今從宋本. (모용)외는 어려서부터 괴안(魁岸,몸집이 크고 우람함)하고 자모(姿貌,용모)가 아름다웠고 신장 8척으로 웅걸(雄傑)하며 도량이 컸다. (진晉나라의) 안북장군(安北將軍) 장화(張華)가 본디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知人之鑒)이 있었는데, (모용)외가 동관(童冠)의 나이 때에(→어릴 때) 그에게 인사하러 오자(廆童冠時往謁之) [교1] 장화가 매우 탄이(嘆異,찬탄하며 남다르게 여김)하며 말했다, “그대(君)는 장성하면 필시 명세지기(命世之器,한 시대의 빼어난 인물)가 되어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잡아 구제할 것이오.” 그리고는 착용하고 있던 비녀(簪)와 책(幘,두건)을 (벗어) 그에게 선물하며 은근(殷勤)한 (정을) 맺고는 헤어졌다. [교1] 廆童冠時往謁之 – (진서의) 각 본(本)에는 童冠(동관)이 童丱(동관)으로 적혀 있으나, (진서판본 중에서) 송본(宋本) 및 태평어람 권478에서 인용한「연서燕書」와「통지通志」권188에는 모두 童冠(동관)으로 적혀있으며, (진서) 재기(載記)의 이 대목 글이「연서燕書)와 대부분 같다. 이제 송본(宋本)에 따른다. (※ ‘童丱’을 송본 등에 따라 ‘童冠’으로 바꿔 표기했다는 뜻) 涉歸死, 其弟耐簒位, 將謀殺廆, 廆亡潛以避禍. 後國人殺耐, 迎廆立之. (모용)섭귀(涉歸)가 죽자 그의 동생인 (모용)내(耐)가 지위를 찬탈하였고, 장차 (모용)외(廆)를 죽이려 꾀하니 (모용)외는 달아나 숨어서 화를 피했다. 뒤에 국인(國人)들이 (모용)내를 죽이고 (모용)외를 맞이하여 즉위시켰다. ※ 섭귀가 죽은 것은「연서」와「자치통감」에 따르면 283년(진무제 태강 4년)이고(아래 cf 참조), 모용외가 숙부인 모용내(=모용산)를 몰아내고 처음 집권한 것은「자치통감」에 따르면 285년(태강 6년)입니다. 이 <모용외재기>의 맨 뒷부분에서 ‘재위한 지 49년 만인 333년에 죽었다.’고 했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모용외의 재위기간은 285-333년이 되어 이를 뒷받침합니다. [참고로, 모용황(모용외의 아들)의 경우는 실제 즉위한 해는 333년이나 유년칭원법에 따라 재위 원년은 그 다음해인 334년으로 쳐서 ‘재위한 지 15년 만인 348년에 죽었다’(즉, 334-348년)고 적고 있는데, 이와 달리 모용외는 묘호가 고조(高祖)이고 연나라에서 건국개조로 받들어진 인물이므로 실제즉위년과 재위 원년이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cf.「자치통감」권81 진기3, 태강 2년(281년) 10월의 선비족 섭귀의 창려 침범 기사(冬,十月,涉歸始寇昌黎.)에 대한 호삼성 주. - (사마광의) 자치통감고이에서 이르길, “(진서 무)제기에서는 (281년에 창려를 침범한 것이) ‘모용외’라 했으나(冬十月, 鮮卑慕容廆寇昌黎./진서 무제기), 범형(范亨)의「연서燕書」무선기(武宣紀,모용외=무선황제)에 의하면 모용외는 태시 5년(269년) 생이며 나이 15세 때에 부친인 섭귀가 죽었다 했으니 (섭귀가 죽은 것은) 태강 4년(283년)이다. (그러므로) 이 해(→281년)에 침범한 것은 응당 (모용외가 아니라) 섭귀일 것이다.” 하였다. (考異曰..帝紀云「慕容廆」, 按范亨燕書武宣紀,「廆泰始五年生, 年十五, 父單于涉歸卒」太康四年也. 此年入寇, 當是涉歸.) 初, 涉歸有憾於宇文鮮卑, 廆將修先君之怨, 表請討之. 武帝弗許. 廆怒, 入寇遼西, 殺略甚衆. 帝遣幽州諸軍討廆, 戰于肥如, 廆衆大敗. 自後復掠昌黎, 每歲不絶. 又率衆東伐扶餘, 扶餘王依慮自殺, 廆夷其國城, 驅萬餘人而歸. 東夷校尉何龕遣督護賈沈將迎立依慮之子爲王, 廆遣其將孫丁率騎邀之. 沈力戰斬丁, 遂復扶餘之國. 당초 (모용)섭귀는 우문선비(宇文鮮卑)(※)에 원한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장차 선군(先君)(→先父 즉, 모용섭귀)의 원한을 풀려고 (조정에) 표를 올려 (우문선비를) 치기를 청했다. 무제(武帝)(→진무제 사마염)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모용)외가 분노하여 요서(遼西)를 침범해 매우 많이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했다. 황제가 유주(幽州)의 제군(諸軍)을 보내 (모용)외를 쳐서 비여(肥如,유주 요서군 비여현)에서 싸웠고 (모용)외의 무리가 대패했다. 이때 이후로 다시 창려(昌黎,평주 창려군.※)를 노략질하여 매년 그치지 않았다. 또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부여(扶餘)를 치니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모용)외가 그 국성(國城,국도)을 평정하고 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몰아서 돌아왔다.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이 장차 독호(督護,관직명) 가침(賈沈)을 보내 의려(依慮)의 아들을 맞이해 왕으로 즉위시키려 하니 (모용)외가 그의 장수 손정(孫丁)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게 했다. (가)침이 힘껏 싸워 (손)정을 베고 마침내 부여국을 회복시켰다. ※ 우문선비(宇文鮮卑) / 자치통감 호삼성 주 - “우문부(宇文部)는 또한 선비(鮮卑)의 일종이다. 그 선조 중에 보회(普回)라는 대인이 있어 그가 사냥하다 옥새(玉璽) 삼뉴(三紐)를 얻었는데 그곳에 황제새(皇帝璽)라 적혀 있었다. 보회는 이를 하늘이 준 것이라 여겼고 그 풍속에서 천자(天子)를 우문(宇文)이라 일컬었으므로 국호를 우문(宇文)이라 하고 또한 이를 (성)씨(氏)로 삼았다.” (宇文部亦鮮卑種, 其先有大人曰普回, 因狩得玉璽三紐, 文曰皇帝璽. 普回以爲天授, 其俗謂天子曰宇文, 故國號宇文, 倂以爲氏.) ※ 창려(昌黎) –「진서」지리지에 의하면 한나라 때 유주 요동속국에 속했으나(「후한서」군국지의 유주 요동속국 창요昌遼) 위나라 때에 창려군이 신설되어 평주에 소속되었습니다. 대릉하 중류 지역인 지금의 의현(義縣) 부근(조양의 동쪽)으로 비정됩니다. ※ 부여의 멸망과 복국 -「진서」권97 동이열전 부여국전에 의하면,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부여가 일시 망한 것은 285년(태강 6년)이고, 진나라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라를 회복한 것은 그 이듬해인 286년의 일입니다. 한편 이 사건을 묘사한「자치통감」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是歲,慕容刪爲其下所殺,部衆復迎涉歸子廆而立之. 涉歸與宇文部素有隙,廆請討之,朝廷弗許. 廆怒,入寇遼西,殺略甚衆. 帝遣幽州軍討廆,戰於肥如,廆衆大敗. 自是每歲犯邊,又東擊扶餘,扶餘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 廆夷其國城,驅萬餘人而歸. 七年(丙午,二八六)春,正月,甲寅朔,日有食之. 魏舒稱疾,固請遜位,以劇陽子罷. 舒所爲,必先行而後言,遜位之際,莫有知者. 衛瓘與舒書曰:“每與足下共論此事,日日未果,可謂‘瞻之在前,忽焉在後’矣.” 夏,慕容廆寇遼東,故扶餘王依慮子依羅求帥見人還復舊國,請援於東夷校尉何龕,龕遣督護賈沈將兵送之. 廆遣其將孫丁帥騎邀之於路,沈力戰,斬丁,遂復扶餘. (자치통감 권81 진기3) 이 해(→태강 6년,285년), 모용산(慕容刪)[자치통감에서는「연서」에 의거해 모용내(慕容耐)가 아닌 모용산(慕容刪)으로 표기했음. 통감고이]이 그의 수하에게 죽고 부중들이 다시 (모용)섭귀의 아들 (모용)외를 맞이하여 즉위시켰다. (모용)섭귀는 우문부(宇文部)와 더불어 평소 틈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그를 치기를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모용)외가 분노하여 요서(遼西)를 침입하고 매우 많이 살략했다. 황제가 유주(幽州)의 군대를 보내 (모용)외를 치니 비여(肥如)에서 싸워 (모용)외의 무리를 대패시켰다. 이 뒤로 매년 변경을 침범하였고 또한 동쪽으로 부여(扶餘)를 공격하니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자제(子弟)들은 달아나 옥저(沃沮)에 의지했다.(保) (모용)외는 그(→부여의) 국성(國城)을 평정하고 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몰아서 돌아왔다. 태강 7년(286년)…(중략)…여름, 모용외(慕容廆)가 요동(遼東)을 침범했다. 옛 부여왕 의려(依慮)의 아들 의라(依羅)가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예전 나라를 회복하기를 구하고 동이교위 하감(何龕)에게 도움을 청하니 (하)감이 독호(督護) 가침(賈沈)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그의 장수 손정(孫丁)을 보내 기병을 이끌고 도중에서 이를 요격했는데, (가)침이 힘껏 싸워 (손)정을 베고 마침내 부여를 회복시켰다. 廆謀於其衆曰:「吾先公以來世奉中國, 且華裔理殊, 强弱固別, 豈能與晉競乎? 何爲不和以害吾百姓邪!」 乃遣使來降. 帝嘉之, 拜爲鮮卑都督. 廆致敬於東夷府, 巾衣詣門, 抗士大夫之禮. 何龕嚴兵引見, 廆乃改服戎衣而入. 人問其故, 廆曰:「主人不以禮, 賓復何爲哉!」 龕聞而慚之, 彌加敬憚. 時東胡 宇文 鮮卑 段部以廆威德日廣, 懼有呑幷之計, 因爲寇掠, 往來不絶. 廆卑辭厚幣以撫之. (모용)외가 그의 무리들과 모의하며 말했다, “나는 선공(先公) 이래 대대로 중국을 받들었으며 또한 화예(華裔,중화와 오랑캐)가 서로 다스림이 다르고 강약(强弱)이 실로 차이나니 어찌 진나라와 더불어 다투겠는가? 어찌 이롭지 못한 짓을 하여 내 백성들을 해롭게 하겠는가!” 그리고는 사자를 보내 항복했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으로 임명했다. (모용)외는 동이(교위)부(東夷府)에서 치경(致敬,경의를 표함)하며 건의(巾衣,두건과 의복)를 입고는 (동이부의) 문에 이르러 사대부(士大夫)에 필적하는 예를 행했다. (동이교위) 하감(何龕)이 군대를 엄비한 채 그를 인견하니 이에 (모용)외가 융의(戎衣,군복)로 갈아 입고 들어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융의로 갈아입은 까닭)을 묻자 (모용)외가 말했다, “주인이 예의로써 대하지 않는데 손님 또한 어찌 예의를 차리겠소!” 하감이 이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더욱 경탄(敬憚,공경하며 두려워함.경외)했다. 당시 동호(東胡)의 우문(宇文)과 선비(鮮卑)족인 단부(段部)는(※) (모용)외의 위덕(威德)이 날로 빛나므로 (자신들을) 탄병(呑幷,병탄)할 계획이 있을까 두려워하였고 이로 인해 (모용외를) 구략(寇掠), 왕래(往來)하며 그치지 않았다. (모용)외는 겸손한 언사와 후한 폐물로 그들을 달랬다. ※ ‘동호 우문 선비 단부’가 쭉 나열되어있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야할지 애매합니다. 단부(段部)는 당시 우문부, 모용부 등과 함께 병존하던 선비족의 일파이며 동호는 오환, 선비의 옛 명칭이므로 (선비와 유사한) 일종의 통칭으로 보고 그냥 대충 위에서처럼 풀었습니다. 太康十年(289), 廆又遷于徒河之靑山. 廆以大棘城卽帝顓頊之墟也, 元康四年(294)乃移居之.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永寧(301-302)中, 燕垂大水, 廆開倉振給, 幽方獲濟. 天子聞而嘉之, 褒賜命服. (진무제) 태강(太康) 10년(289년), (모용)외가 다시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옮겼다. (모용)외는 대극성(大棘城)이 제(帝) 전욱(顓頊)(→전욱 고양씨)의 옛 터라고 여겼으므로 (혜제惠帝) 원강(元康) 4년(294년)에는 그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가르치고 법제(法制)를 상국(上國)(→진나라)과 같게 하였다. (진혜제) 영녕(永寧) 연간(301년)에 연(燕) 땅에 큰 물이 나자 (모용)외가 창고를 열어 식량을 베풀어 유주 땅이 구제되었다. 천자가 이를 듣고 가상히 여겨 명복(命服,관복)을 포사(褒賜,칭찬하며 하사함)했다. ※ 도하(徒河) -「진서」지리지에는 보이지 않고,「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유주 요동속국 도하현’입니다. 소릉하 지역으로 지금의 금주시 부근으로 비정되며 앞서 나온 창려의 남쪽입니다. 太安 (302-303)初, 宇文莫圭遣弟屈雲寇邊城, 雲別帥大素延攻掠諸部, 廆親擊敗之. 素延怒, 率衆十萬圍棘城, 衆咸懼, 人無距志. 廆曰:「素延雖犬羊蟻聚, 然軍無法制, 已在吾計中矣. 諸君但爲力戰, 無所憂也.」 乃躬貫甲冑, 馳出擊之, 素延大敗, 追奔百里, 俘斬萬餘人. (혜제) 태안(太安: 302-303년) 초, 우문막규(宇文莫圭)가 동생 굴운(屈雲)을 보내 변경 성(城)을 침범하고 (굴)운의 별수(別帥=別將) 대소연(大素延)(※)이 여러 부(部)를 공략하자 (모용)외가 친히 공격하여 격파했다. (대?)소연(素延)이 분노하여 무리 10만을 이끌고 극성(棘城)을 포위하니 (모용외의) 무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사람들 중에 맞서려는 뜻을 가진 이가 없었다. (모용)외가 말했다, “소연(素延)이 비록 개나 양, 개미떼처럼 많이 모였으나 군(軍)에 법제(法制)가 없고 이미 우리의 계책 속으로 떨어졌도다. 제군들은 다만 힘껏 싸우면 될 뿐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는 몸소 갑주(甲冑)를 입고 (성밖으로) 말달려 나가 공격해 소연(素延)을 대파하고 달아나는 적들을 백리에 걸쳐 뒤쫓으며 만여 명을 참획했다. ※ 雲別帥大素延 – 진서 중화서국본과 고대사료집성 표점에서는 ‘素延’을 고유명사로 표기하였으므로 (雲別帥大素延攻掠諸部) ‘雲의 別帥大 素延’이 되는데, 그보다는 大素延(대소연)이 이름인 것으로 보아 ‘雲의 別帥(=別將) 大素延’으로 풀이하는게 더 자연스러운 듯 합니다. 한편,「자치통감」권84 진기6 태안 원년(302년) 조에서는 같은 사건을 기술하며 ‘굴운의 별수(別帥) 소노연(素怒延)’으로 쓰고 (鮮卑宇文單于莫圭部衆強盛,遣其弟屈雲攻慕容廆,廆擊其別帥素怒延,破之.),「자치통감고이」에서 “(진서) 재기를 보면 素延(소연)으로 적고 그 아래에서는 ‘素延怒, 率衆圍棘城’이라 적었으나, (범형范亨의) 연서(燕書) 기,전들을 보면 모두 素怒延(소노연)으로 쓰고 있다. 그런 즉 (소연이 아닌) 노연(怒延)이 그의 이름이다.” (按, 載記作「素延」, 下云「素延怒, 率衆圍棘城」. 按燕書紀傳皆謂之「素怒延」, 然則怒延是其名也. / 자치통감고이.호삼성 주에서 인용)라고 하여, 연서 기술에 따라 ‘소연(素延)’이 아닌 ‘소노연(素怒延)’으로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라 ‘(대)소연’, ‘소노연’으로 차이가 있고 자치통감에서는 소노연이 옳다고 본 것인데, 어쨌든 이 진서 기술 자체는 ‘별수대 소연’이 아닌 ‘별수 대소연’으로 표기한 게 맞다고 생각됩니다. 永嘉 (307-313)初, 廆自稱鮮卑大單于. 遼東太守龐本以私憾殺東夷校尉李臻, 附塞鮮卑 素連·木津等託爲臻報讎, 實欲因而爲亂, 遂攻陷諸縣, 殺掠士庶. 太守袁謙頻戰失利, 校尉封釋懼而請和. 連歲寇掠, 百姓失業, 流亡歸附者日月相繼. 廆子翰言於廆曰:「求諸侯莫如勤王, 自古有爲之君靡不杖此以成事業者也. 今連·津跋扈, 王師覆敗, 蒼生屠膾, 豈甚此乎! 豎子外以龐本爲名, 內實幸而爲寇. 封使君以誅本請和, 而毒害滋深. 遼東傾沒, 垂已二周, 中原兵亂, 州師屢敗, 勤王杖義, 今其時也. 單于宜明九伐之威, 救倒懸之命, 數連·津之罪, 合義兵以誅之. 上則興復遼邦, 下則幷呑二部, 忠義彰於本朝, 私利歸于我國, 此則吾鴻漸之始也, 終可以得志於諸侯.」 廆從之. 是日, 率騎討連·津, 大敗斬之, 二部悉降, 徙之棘城, 立遼東郡而歸. (회제懷帝) 영가(永嘉: 307-313년) 초,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했다. 요동태수(遼東太守) 방본(龐本)이 사적인 원한으로 동이교위(東夷校尉) 이진(李臻)을 죽이자, 부새(附塞,요새 부근,변경)의 선비족인 소련(素連), 목진(木津) 등이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고 겉으로 칭탁하며 실제로는 이를 틈타 난을 일으키고자 하여 마침내 (요동군의) 여러 현(縣)들을 공격해 함락하고 사서(士庶,사족士族과 서민)들을 살략했다. (요동)태수 원겸(袁謙)이 여러 번 싸웠으나 이롭지 못하니(패배하니) (동이)교위 봉석(封釋)이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했다. 해마다 침범해 노략질하니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유망하다가 (모용외에게) 귀부하는 자가 잇달았다. (모용)외의 아들 (모용)한(翰)이 (모용)외에게 말했다, “제후(諸侯)를 구원하는 것(→소련,목진을 돕는 것을 비유)은 근왕(勤王)(→요동군(중국)을 돕는 것을 비유)하느니만 못합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 중에는 이것(→근왕)에 의거하지 않고 대업을 이룬 자는 없습니다. 지금 (소)련, (목)진이 발호(跋扈)하여 왕사(王師,왕의 군대,관군)가 복패(覆敗,뒤집어지고 패함)하고 창생(蒼生,만백성)들이 도회(屠膾,도륙,유린)당하니 어찌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수자(豎子,풋내기,잔챙이 정도의 비칭)들이 겉으로는 방본(龐本)(주살)을 명분으로 삼으나 내심 실제로는 침범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봉사군(封使君)(→봉석)이 (방)본을 죽이고서 화친을 청했으나 그 해독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요동이 무너진 지 거의 2주(周)(→만 2년)에 이르렀고 중원(中原)에 병란이 일어 주(州)의 군대가 여러 번 패했으니 지금이 바로 근왕장의(勤王杖義,근왕하며 의義에 의거함)할 때입니다. 선우께서는 의당 구벌(九伐,아홉가지 죄에 대한 징벌.정벌)의 위엄을 표명하여 위기에 처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고, (소)련, (목)진의 죄를 열거하며(or 꾸짖어) 의병(義兵)을 합쳐 주벌하셔야 합니다. 위로는 요(遼) 땅을 복구하고 아래로는 (소련, 목진의) 2부(部)를 병탄하고, 본조(本朝)(→진나라)에 충의를 밝히면서도 사사로이는 우리나라에 이로움이 귀속되니, 이는 즉 우리가 홍점(鴻漸,큰 기러기가 아래로부터 차차 위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차례로 벼슬이 올라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자신들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뜻하는 듯)함의 시작이며, 끝내는 제후들 사이에서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모용)외가 이를 따랐다. 바로 이 날, 기병을 이끌고 (소)련, (목)진을 쳐서 대패시키고 베었고, 2부(部)가 모두 항복하자 이들을 극성(棘城)으로 옮기고, 요동군(遼東郡)을 (다시) 세운 뒤에 돌아왔다. 懷帝蒙塵于平陽, 王浚承制以廆爲散騎常侍·冠軍將軍·前鋒大都督·大單于, 廆不受. 建興 (313-316)中, 愍帝遣使拜廆鎭軍將軍·昌黎遼東二國公. 建武 (317-318)初, 元帝承制拜廆假節·散騎常侍·都督遼左雜夷流人諸軍事·龍驤將軍·大單于·昌黎公, 廆讓而不受. 征虜將軍魯昌說廆曰:「今兩京傾沒, 天子蒙塵, 琅邪承制江東, 實人命所係. 明公雄據海朔, 跨總一方, 而諸部猶怙衆稱兵, 未遵道化者, 蓋以官非王命, 又自以爲强. 今宜通使琅邪, 勸承大統, 然後敷宣帝命, 以伐有罪, 誰敢不從!」 廆善之, 乃遣其長史王濟浮海勸進. 及帝卽尊位, 遣謁者陶遼重申前命, 授廆將軍·單于, 廆固辭公封. 회제(懷帝)가 몽진(蒙塵)하여 평양(平陽)에 있어(※) 왕준(王浚)이 승제(承制)하여(→황제의 명의로써) (모용)외를 산기상시(散騎常侍), 관군장군(冠軍將軍), 전봉대도독(前鋒大都督), 대선우(大單于)로 임명했으나 (모용)외는 받지 않았다. ※ 흉노족인 유연(劉淵)이 304년에 자립해 한(漢)나라를 세웠고(뒤에 조趙로 국명을 바꾸었고 그 뒤 석륵의 조나라(後趙)와 구별해 보통 前趙로 부릅니다), 그 아들인 유총(劉聰) 때인 311년(영가 5년)에 진나라 수도인 낙양을 함락하고 회제를 포로로 잡아 한나라 수도인 평양으로 끌고 갑니다. 회제가 평양으로 몽진했다는 것은 이 일을 가리킵니다. (서진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 건흥(建興) 연간(313-317년)에 민제(愍帝)가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진군장군(鎭軍將軍), 창려요동2국공(昌黎遼東二國公)으로 임명했다. (동진 원제元帝) 건무(建武:317년) 초, 원제(元帝)(→동진을 세운 낭야왕 사마예司馬睿)가 승제(承制)하여 (모용)외를 가절(假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요좌잡이유인제군사(都督遼左雜夷流人諸軍事)(→요좌=요동의 여러 夷와 유망인들을 관할하는 도독), 용양장군(龍驤將軍), 대선우(大單于), 창려공(昌黎公)으로 임명하였으나 (모용)외는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정로장군(征虜將軍) 노창(魯昌)이 (모용)외를 설득하며 말했다, “이제 두 경도(→낙양과 장안)가 무너지고 천자가 몽진하여 낭야(琅邪)(→낭야왕 사마예)가 강동(江東)에서 승제(承制)하니 실로 뭇 사람들의 목숨이 그에게 매어있소. 명공(明公)은 해삭(海朔)에 웅거하여 한쪽 방면을 차지하여 총괄하고 있소. 그런데 여러 부(部)가 여전히 무릿수를 믿고 칭병(稱兵,거병)하며 도화(道化)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대의) 관직이 (정식) 왕명(王命)에 의한 것이 아니고 또 (그들) 스스로 강성하다 여기기 때문일 것이오. 이제 의당 낭야(琅邪)에게 사자를 보내 대통(大統)을 잇도록(→황제에 즉위하도록) 권해야 하오. 그 연후에 황제의 명을 선포하고 이로써 죄있는 자들을 친다면 어느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소!” (모용)외가 이를 옳게 여기고는 그의 장사(長史,속관명) 왕제(王濟)를 보내 바다를 건너 가게 하여 (낭야왕이 제위에) 오르도록 권했다. 그러다 원제가 존위에 오르게 되자 알자(謁者,관직명) 도요(陶遼)를 보내 다시 예전의 명을 전하고 (모용)외에게 장군, 선우의 직을 주었으나 (모용)외는 공(公)으로 봉해지는 것은 고사(固辭)했다. 時二京傾覆, 幽冀淪陷, 廆刑政修明, 虛懷引納, 流亡士庶多襁負歸之. 廆乃立郡以統流人, 冀州人爲冀陽郡, 豫州人爲成周郡, 靑州人爲營丘郡, 幷州人爲唐國郡. 於是推擧賢才, 委以庶政, 以河東 裴嶷·代郡 魯昌·北平 陽耽爲謀主, 北海 逢羨·廣平 游邃·北平 西方虔[교2]· 渤海 封抽·西河 宋奭·河東 裴開爲股肱, 渤海 封弈·平原 宋該·安定 皇甫岌·蘭陵 繆愷以文章才儁任居樞要, 會稽 朱左車·太山 胡毋翼·魯國 孔纂以舊德淸重引爲賓友, 平原 劉讚儒學該通, 引爲東庠祭酒, 其世子皝率國胄束脩受業焉. 廆覽政之暇, 親臨聽之, 於是路有頌聲, 禮讓興矣. [교2] 西方虔 元和姓纂「虔」作「武」. 按: 唐人避諱亦偶用形近之字. 魏書四九崔秉·六三王肅弟秉, 北史並改作「康」. 魏書四七盧玄族人「叔虔」, 北史作「叔彪」, 北齊書四二又作「叔武」, 與此「西方虔」同例, 其人本皆名「虎」,「虔」「武」皆避唐諱改. 당시 두 경도(→낙양과 장안)가 무너지고 유주, 기주가 함락되었는데 (모용)외가 형정(刑政)을 밝게 닦고 마음을 (겸허히) 비우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맞으니 유망(流亡)하던 많은 사서(士庶,사족과 서민)들이 포대기로 업고 등으로 지고 와서 그에게 귀부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군(郡)을 세워 유인(流人,유망민)들을 다스리게 하니, 기주인(冀州人)들은 기양군(冀陽郡), 예주인(豫州人)들은 성주군(成周郡), 청주인(靑州人)들은 영구군(營丘郡), 병주인(幷州人)들은 당국군(唐國郡)에 속하게 했다. 그리고는 현재(賢才)를 추거(推擧)해 서정(庶政,제반 정무)을 맡기니, 하동(河東)의 배억(裴嶷), 대군(代郡)의 노창(魯昌), 북평(北平)의 양탐(陽耽)을 모주(謀主,주요 참모)로 삼고, 북해(北海)의 봉선(逢羨), 광평(廣平)의 유수(游邃), 북평(北平)의 서방건(西方虔)[교2], 발해(渤海)의 봉추(封抽), 서하(西河)의 송석(宋奭), 하동(河東)의 배개(裴開)를 고굉(股肱,신임하는 중신重臣)으로 삼고, 발해(渤海)의 봉혁(封弈), 평원(平原)의 송해(宋該), 안정(安定)의 황보급(皇甫岌), 난릉(蘭陵)의 무개(繆愷)는 문장(文章)의 재주가 있다 하여 추요(樞要,중요)한 직책에 임명하고, 회계(會稽)의 주좌거(朱左車), 태산(太山)의 호무익(胡毋翼), 노국(魯國)의 공찬(孔纂)은 구덕청중(舊德淸重,오랜 덕이 있고 청렴하고 진중함)하다 하여 불러서 빈우(賓友)로 삼고, 평원(平原)의 유찬(劉讚)은 유학(儒學)에 능통하다 하여 불러서 동상좨주(東庠祭酒)로 삼았다. 그의 세자(世子) (모용)황(皝)이 국주(國胄,제왕이나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속수(束脩)하여(→束脩는 스승에게 바치는 예물인데 여기서는 유찬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뜻인 듯) 수업(受業)하고 (모용)외가 정무를 보다 틈이 있으면 친히 임하여 이를 들었다. 이리하여 도로 위에 송성(頌聲,공덕을 기리는 말)이 있게 되고 예양(禮讓,예의를 지키고 사양함)(의 기풍)이 흥했다. [교2] 西方虔(서방건) – (당나라 때 지어진)「원화성찬」에서는 虔(건)을 武(무)로 적었다. 살펴보건대, 당나라 사람들은 피휘하며 쓰임새와 모양이 비슷한 글자로 고쳐 썼다. (북제 때에 지어진)「위서魏書」권49의 崔秉(최병)과 권63의 王肅(왕숙)의 동생 秉(병)을 (당나라 때 지어진)「북사北史」에서는 모두 康(강)으로 고쳐적었다. (※당나라 때 피휘하며 秉 → 康 으로 바꿔 표기했다는 말)「위서」권47의 盧玄(노현)의 족인(族人)인 叔虔(숙건)(※)을「북사」에서는 叔彪(숙표)로 적고 (당나라 때 지어진)「북제서」에서는 또 叔武(숙무)로 적었고 (※당나라 때 피휘하여 虎 → 武, 彪 따위로 바꿔 표기했다는 말. 당고조 이연의 할아버지 이름인 虎를 피휘한 듯합니다.) 여기의 西方虔(서방건)도 같은 경우이다. 그 사람들은 본래 모두 이름이 虎(호)이고, 虔(건)이나 武(무)는 모두 당나라 때 피휘하여 그렇게 고친 것이다. ※「위서」의 원래 판본에는 叔虔(숙건)으로 되어있으나, 본래 이름이 叔虔 이라면 당나라 때의 북사, 북제서 등에서 피휘해서 武, 彪 등으로 고쳐적을 이유가 없으므로 叔虎(숙호)가 와전된 것으로 보고(위서 교감기) 중화서국본에서는 본문을 叔虎로 고쳐놓았습니다. 그리고 [교2]에서는 문맥상 叔虎를 叔虔으로 잘못 인용한 듯 합니다. 두 교감기가 뒤섞여서 설명이 좀 복잡한데 어쨌든 이런 말입니다. ‘본래 이름은 西方虎(서방호)이나, 당나라 때 虎 자를 피휘하며 진서에서 西方虔(서방건)으로 바꿔 적었을 것이다.’ 時平州刺史·東夷校尉崔毖自以爲南州士望, 意存懷集, 而流亡者莫有赴之. 毖意廆拘留, 乃陰結高句麗及宇文·段國等, 謀滅廆以分其地. 太興 (318-321)初, 三國伐廆, 廆曰:「彼信崔毖虛說, 邀一時之利, 烏合而來耳. 旣無統一, 莫相歸伏, 吾今破之必矣. 然彼軍初合, 其鋒甚銳, 幸我速戰. 若逆擊之, 落其計矣. 靖以待之, 必懷疑貳, 迭相猜防. 一則疑吾與毖譎而覆之, 二則自疑三國之中與吾有韓 魏之謀者, 待其人情沮惑, 然後取之必矣.」 於是三國攻棘城, 廆閉門不戰, 遣使送牛酒以犒宇文, 大言於衆曰:「崔毖昨有使至.」於是二國果疑宇文同於廆也, 引兵而歸. 宇文悉獨官曰:「二國雖歸, 吾當獨兼其國, 何用人爲!」 盡衆逼城, 連營三十里. 廆簡銳士配皝, 推鋒於前, 翰領精騎爲奇兵, 從旁出, 直衝其營, 廆方陣而進. 悉獨官自恃其衆, 不設備, 見廆軍之至, 方率兵距之. 前鋒始交, 翰已入其營, 縱火焚之, 其衆皆震擾, 不知所爲, 遂大敗, 悉獨官僅以身免, 盡俘其衆. 於其營候獲皇帝玉璽三紐, 遣長史裴嶷送于建鄴. 崔毖懼廆之仇己也, 使兄子燾僞賀廆. 會三國使亦至請和, 曰:「非我本意也, 崔平州敎我耳.」 廆將燾示以攻圍之處, 臨之以兵, 曰:「汝叔父敎三國滅我, 何以詐來賀我乎?」 燾懼, 首服. 廆乃遣燾歸說毖曰:「降者上策, 走者下策也.」 以兵隨之. 毖與數十騎棄家室奔于高句麗, 廆悉降其衆, 徙燾及高瞻等于棘城, 待以賓禮. 明年, 高句麗寇遼東, 廆遣衆擊敗之. 당시 평주자사(平州刺史) 동이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는 스스로 남주(南州) 선비들 사이에서 신망이 있다 여기고 (유민들을) 품어서 모을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유망(流亡)하는 자들 중에 그에게로 오는 자가 없었다. (최)비는 (모용)외가 (그들을) 구류(拘留)한 탓이라 생각하고는 이에 고구려(高句麗)와 우문(宇文), 단국(段國) 등과 은밀히 연결해 (모용)외를 (쳐서) 멸하고 그의 땅을 나누어가지려 꾀했다. (동진 원제) 태흥(太興: 318-321년) 초, 세 나라(→고구려,우문,단국)가 (모용)외를 쳤다. (모용)외가 말했다, “저들은 최비(崔毖)의 헛소리를 믿고 한때의 이익을 노려 까마귀가 모이듯이 하여(烏合) 쳐들어왔을 뿐이다. (저들은) 통일되어 있지 않은데다 서로 귀복(歸伏)하지 않으니 우리가 지금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은 군(軍)이 이제 막 합쳐져 그 예봉이 매우 날카로워 우리가 속전(速戰)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만약 (지금 바로) 역격(逆擊)한다면 저들의 계책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편안히 기다리면 필시 의심과 두마음을 품게 되어 번갈아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우리와 (최)비가 함께 휼계를 꾸며 자신들을 무너뜨릴까 의심할 것이고, 둘째로는 세 나라 중 한 나라와 우리에게 한나라, 위나라의 모책과 같은 것이 있을까 의심할 것이니, 저들의 마음이 저혹(沮惑,어그러지고 미혹됨)되기를 기다려 그 연후에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싸우지 않고는, 사자를 보내 쇠고기와 술로써 우문(宇文)(의 군사들)을 호궤하고 무리들에게 “최비(崔毖)의 사자가 저번에 왔었다.”라고 크게 떠벌렸다. 그러자 두 나라(→고구려와 단국)가 과연 우문(宇文)이 (모용)외와 한 편인 것으로 의심하고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실독관(宇文悉獨官)이 말했다,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우리는 응당 단독으로라도 그 나라(→모용외)를 겸병할 것이다. 다른 나라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모든 군사로써 (극)성을 핍박하고 30리에 걸쳐 영(營)을 늘어세웠다. (모용)외는 정예군사(銳士)를 가려뽑아 (모용)황(皝)에게 배속하여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게 하고, (모용)한(翰)에게는 정예기병(精騎)을 거느리게 하여 기병(奇兵,기습군,正兵의 반대)으로 삼아 곁을 따라(우회해) 출병해 곧바로 그(→우문실독관의) 영(營)을 찌르도록 하고, (모용)외(廆) 자신은 방진(方陣)을 치고 진격하였다. (우문)실독관(悉獨官)은 그들의 무릿수를 믿고 방비하지 않다가 (모용)외의 군대가 이르는 것을 보고 바야흐로 군을 이끌고 이에 맞섰다. 전봉(前鋒,선두부대,선봉)이 이제 막 교전을 시작했을 때 (모용)한(의 奇兵)이 자신의 영(營)으로 치고 들어와 불을 놓고 영(營)을 불태우자 그 무리들이 모두 놀라고 어지러워져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 마침내 대패하였다. (우문)실독관은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그의 무리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의 영후(營候)에서 황제(皇帝)의 옥새(玉璽) 삼뉴(三紐)를 노획하고는 이를 장사(長史) 배억(裴嶷)을 시켜 건업(建鄴)으로 보냈다. 최비(崔毖)는 (모용)외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형자(兄子,형의 아들.조카) (최)도(燾)를 (모용)외에게 보내 거짓으로 (승전을) 축하했다. 때마침 세 나라의 사자들 또한 (모용외에게) 이르러 화친을 청하며, “(쳐들어 온 것은) 우리의 본의가 아니고, 최평주(崔平州)(→평주자사 최비)가 (그리하도록) 우리를 가르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데리고 공격하며 포위한 곳을 보여주고는 군사들을 벌여놓고 그에게 말했다, “너희 숙부(叔父)(→최비)가 나를 멸하라고 세 나라를 가르쳐놓고는, 어찌 속임수를 쓰며 내게 와서는 축하하는가?” (최)도가 두려워하며 수복(首服,자복,자백)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최)도를 보내주며 돌아가서 (최)비에게 전하라 하며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 뒤따라 군대를 보내자 (최)비는 가실(家室,가족)을 버린 채 수십 기(騎)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났다. (모용)외는 그의 무리를 모두 항복시키고 (최)도와 고첨(高瞻) 등을 극성(棘城)으로 옮기고는 빈객으로 예우했다. 이듬해,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침범하자 (모용)외가 무리를 보내 이를 공격해 격파했다. ※ 고구려 등의 모용외 공격과 최비의 고구려로의 도주 -「진서」권6 원제기에서는 “[태흥 2년(319년) 12월] 선비족 모용외가 요동을 습격하자 동이교위,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고구려로 달아났다”(鮮卑慕容廆襲遼東, 東夷校尉, 平州刺史崔毖奔高句驪.)고 하고 “태흥 3년(320년) 3월, 모용외가 옥새 삼뉴를 봉송했다.”(三月, 慕容廆奉送玉璽三紐.)고 하였습니다. 즉, 최비가 고구려로 달아난 시점이 319년 12월이므로 위 문단에 나오는 이전 사건들은 모두 219년 12월 이전이나 그 무렵의 일입니다.「삼국사기」권17 (고구려 미천왕 20년)에서도 같은데,「자치통감」권91 진기13에서는 이 사건들을 모두 동진 원제 태흥2년(319년) 12월 조에 수록해놓았습니다. < 최비의 사주로 고구려, 우문, 단부의 3국이 연합해 모용외 공격 → 모용외의 이간책으로 고구려, 단부는 회군 → 모용외가 우문선비 격파 →옥새 삼뉴 등을 노획하고 배억을 사자로 하여 이를 건업으로 보냄 → 최비는 고구려로 도주 (319년 12월) → 앞서 보낸 배억이 건업에 도착 (320년 3월) > 裴嶷至自建鄴, 帝遣使者拜廆監平州諸軍事·安北將軍·平州刺史, 增邑二千戶. 尋加使持節·都督幽州東夷諸軍事[교3]· 車騎將軍·平州牧, 進封遼東郡公, 邑一萬戶, 常侍·單于並如故, 丹書鐵券, 承制海東, 命備官司, 置平州守宰. [교3] 都督幽州東夷諸軍事 周校:「幽州」, 元帝紀作「幽·平二州」. 按: 官爲平州牧, 所督州例必有平州. 御覽一二一引前燕錄·通鑑九一皆作「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此「幽」字下當脫「平二」二字. 배억(裴嶷)이 건업(建鄴)으로부터 돌아올 때 황제가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감평주제군사(監平州諸軍事), 안북장군(安北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임명하고 식읍을 2천 호(戶) 늘려주었다. 뒤이어 (321년 12월) 사지절(使持節), 도독유주동이제군사(都督幽州東夷諸軍事)[교3], 거기장군(車騎將軍), 평주목(平州牧)의 직을 더하고 요동군공(遼東郡公)으로 올려 봉하고 식읍을 1만 호로 하고 (산기)상시, (대)선우는 모두 예전대로 유지했으며, 단서철권(丹書鐵券,제후왕이나 공신에게 내리던 신표의 일종)을 주어 해동(海東)에서 승제(承制)하고 관사(官司,백관 ; 관부)를 갖추도록 명하고 평주(平州)의 수재(守宰,지방장관)를 두도록 하였다. [교3] 都督幽州東夷諸軍事 (도독유주동이제군사) – 주교(周校)(→주가록周家祿의 진서 교감기)에서 (이 대목의) 幽州(유주)가 (진서 권6) 원제기에는 幽平二州(유평이주)로 적혀있다(아래 cf 참고)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모용외의) 관직이 평주목(平州牧)이니 도독하는 주(州)의 예에 필시 평주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태평)어람 권121에 인용된 전연록(前燕錄)과 (자치)통감 권91에서 모두 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로 적었으니, 여기의 幽(유) 아래에 응당 平二(평이) 두 글자가 탈락되었을 것이다. (※ 중화서국 교감기에서는 위 본문을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의 형태로 추정한 것이며 이는 ‘유주, 평주의 2주와 동이의 제반 군무에 관한 도독’이란 뜻입니다.) cf. 진서 권6 원제기 十二月, 以慕容廆爲持節, 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平州牧, 封遼東郡公. [태흥 4년(321년)] 12월, 모용외(慕容廆)를 지절(持節), 도독유평이주제군사(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 평주목(平州牧)으로 임명하고 요동군공(遼東郡公)으로 봉했다. 段末波初統其國, 而不修備, 廆遣皝襲之, 入令支, 收其名馬寶物而還. (段部 선비의) 단말파(段末波)가 처음 그 나라를 통치하게 되어 잘 방비되어 있지 않자 (모용)외가 (모용)황(皝)을 보내 이를 습격하게 하니, (단말파의 땅인) 영지(令支)를 침입해 그(→단말파)의 명마(名馬)와 보물(寶物)을 거둔 뒤에 돌아왔다. ※ 영지(令支) – 진서 지리지에는 나오지 않고,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요서군 영지현. 石勒遣使通和, 廆距之, 送其使於建鄴. 勒怒, 遣宇文乞得龜擊廆, 廆遣皝距之. 以裴嶷爲右部都督, 率索頭爲右翼, 命其少子仁自平郭趣柏林爲左翼, 攻乞得龜, 克之, 悉虜其衆. 乘勝拔其國城, 收其資用億計, 徙其人數萬戶以歸. 석륵(石勒)이 사자를 보내 통화(通和,교류하며 화친함)하자 (모용)외가 이를 거절하고는 그의 사자를 (붙잡아) 건업(建鄴)으로 보냈다. 석륵이 분노하여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를 보내 (모용)외를 공격하자 (모용)외는 (모용)황을 보내 이를 막았다. 배억(裴嶷)을 우부도독(右部都督)으로 삼아 삭두(索頭)(※)를 이끌고 우익(右翼)이 되게 하고, 그의 소자(少子,막내아들) (모용)인(仁)에게 명해 평곽(平郭)으로부터 백림(柏林)으로 나아가 좌익(左翼)이 되게 하여, (우문)걸득귀를 공격해 이기고 그의 무리를 모두 붙잡았다. 승세를 타고 그 국성(國城)을 함락하고 억을 헤아리는 (매우 많은) 자용(資用)을 거두고 그 인민들 수만 호(戶)를 (붙잡아서) 옮기며 돌아왔다. ※ 삭두 & 탁발선비 - 여기서 삭두(索頭)는 뒤에 북위(北魏)를 세운 탁발(拓跋 or 託跋) 선비족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이는 남북조시대의 남조 국가들이 북조인 북위를 부르던 멸칭으로 삭두로(索頭虜)나 삭로(索虜)라고도 합니다.(삭두=변발)「송서」권95 삭로(=북위)전에 의하면, 탁발선비는 진나라 초에는 운중군에 거주하였는데 병주자사 사마등(司馬騰)이 진양에서 흉노에게 포위되자 삭두선우 의타(猗駞)[환제(桓帝)로 추존.위서(魏書)]가 이를 구원해주었고, 뒤에 회제 영가 3년(309년) 그의 동생인 (의)로(盧)[목제(穆帝). 진서, 송서 등에서는 ‘의’가 성이고 ‘로’가 이름인 것처럼 기술해놓았으나, 실제로는 ‘의로’가 이름이며 풀네임은 ‘탁발의로’인 셈.]가 안문군으로 와서 병주자사 유곤(劉琨)에게 (안문군) 누번현 등 다섯 현을 요구하여 그곳에 거주하게 됩니다.[진서 회제기에서는 ‘영가5년(311년) 11월에 의로(猗盧)가 태원군을 침범하자 평북장군 유곤이 이를 제압하지 못하여 다섯 현의 백성들을 신흥으로 옮겨 거주하게 했다’(十一月, 猗盧寇太原, 平北將軍劉琨不能制, 徙五縣百姓於新興, 以其地居之.)고 하고 위서에서는 목제3년(310년=영가4년)에 진나라 회제에 의해 대선우, 대공(代公)으로 임명되었고, 유곤에게 구주(句注) 형북(陘北) 땅을 요구하자 유곤이 마읍(馬邑), 음관(陰館), 누번(樓煩), 번치(繁畤), 곽(崞) 5현(모두 안문군 소속임) 기존 백성들을 형남(陘南)으로 옮기고 그 땅을 목제에게 바쳤다고 기술하여,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음.] 곧이어 대군공(代郡公)[진서 회제기에 의하면 회제 영가6년 8월의 일], 민제 초[진서 민제기에 의하면 민제 건흥 3년(315년)]에는 대왕(代王)으로 임명되며 상산군까지 식읍으로 받습니다. 그러다 국내에 대란이 일어 의로가 죽고 또 그의 아들이 유약해서 부락이 분산되었다고 했습니다. [진서 민제기에서는 “건흥4년 3월, 대왕(代王) (의)로가 죽고 그 무리들이 유곤에게 귀속되었다.”(四年春三月, 代王猗盧薨, 其衆歸于劉琨.)라고 함] <모용외재기>의 이 대목이 바로 이 무렵의 일로서, 우문부를 좌우에서 협공하기 위해 남아있던 그 일부 부락과 공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成帝卽位, 加廆侍中, 位特進. 咸和五年(330), 又加開府儀同三司, 固辭不受.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모용)외에게 시중(侍中)의 직을 더하고 특진(特進)의 지위를 주었고, 함화(咸和) 5년(330년)에는 또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했으나 고사하며 받지 않았다. ※ 동진의 3번째 황제인 성제(成帝)가 즉위한 것은 325년 윤8월입니다. 廆嘗從容言曰:「獄者, 人命之所懸也, 不可以不愼. 賢人君子, 國家之基也, 不可以不敬. 稼穡者, 國之本也, 不可以不急. 酒色便佞, 亂德之甚也, 不可以不戒.」 乃著家令數千言以申其旨. (모용)외가 일찍이 종용(從容)히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옥(獄,형옥)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현인(賢人), 군자(君子)는 국가의 기초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가색(稼穡,파종과 수확.농사)은 나라의 근본이니 (중요하게 다루어) 긴급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색편녕(酒色便佞,술,여자 및 좋은 말로 아첨떠는 것)은 덕을 몹시 어지럽히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는 수천 자(字)로 된 가령(家令)을 지어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遣使與太尉陶侃箋曰: 明公使君轂下: 振德曜威, 撫寧方夏, 勞心文武, 士馬無恙, 欽高仰止, 注情彌久. 王塗嶮遠, 隔以燕越, 每瞻江湄, 延首遐外. 天降艱難, 禍害屢臻, 舊都不守, 奄爲虜庭, 使皇輿遷幸, 假勢吳楚. 大晉啓基, 祚流萬世, 天命未改, 玄象著明, 是以義烈之士深懷憤踴. 猥以功薄, 受國殊寵, 上不能掃除羣羯, 下不能身赴國難, 仍縱賊臣, 屢逼京輦. 王敦唱禍於前, 蘇峻肆毒於後, 凶暴過於董卓, 惡逆甚於傕氾, 普天率土, 誰不同忿! 深怪文武之士, 過荷朝榮, 不能滅中原之寇, 刷天下之恥. 君侯植根江陽, 發曜荊衡, 杖葉公之權, 有包胥之志, 而令白公·伍員殆得極其暴, 竊爲丘明恥之. 區區楚國子重之徒, 猶恥君弱·羣臣不及先大夫, 厲己戒衆, 以服陳鄭, 越之種蠡尙能弼佐句踐, 取威黃池, 況今吳土英賢比肩, 而不輔翼聖主, 陵江北伐. 以義聲之直, 討逆暴之羯, 檄命舊邦之士, 招懷存本之人, 豈不若因風振落, 頓坂走輪哉! 且孫氏之初, 以長沙之衆摧破董卓, 志匡漢室. 雖中遇寇害, 雅志不遂, 原其心誠, 乃忽身命. 及權據揚越, 外杖周張, 內馮顧陸, 距魏赤壁, 克取襄陽. 自玆以降, 世主相襲, 咸能侵逼徐豫, 令魏朝旰食. 不知今之江表爲賢儁匿智, 藏其勇略邪? 將呂蒙·凌統高蹤曠世哉? 況今凶羯虐暴, 中州人士逼迫勢促, 其顚沛之危, 甚於累卵. 假號之强, 衆心所去, 敵有釁矣, 易可震蕩. 王郞·袁術雖自詐僞, 皆基淺根微, 禍不旋踵, 此皆君侯之所聞見者矣. 王司徒淸虛寡欲, 善於全己, 昔曹參亦崇此道, 著畫一之稱也. 庾公居元舅之尊, 處申伯之任, 超然高蹈, 明智之權. 廆於寇難之際, 受大晉累世之恩, 自恨絶域, 無益聖朝, 徒係心萬里, 望風懷憤. 今海內之望, 足爲楚漢輕重者, 惟在君侯. 若勠力盡心, 悉五州之衆, 據兗豫之郊, 使向義之士倒戈釋甲, 則羯寇必滅, 國恥必除. 廆在一方, 敢不竭命. 孤軍輕進, 不足使勒畏首畏尾, 則懷舊之士欲爲內應, 無由自發故也. 故遠陳寫, 言不宣盡. 태위(太尉) 도간(陶侃)에게 전(箋)을 보내 말했다, “명공(明公) 사군(使君) 곡하(轂下,귀하). 덕을 떨치고 위엄을 빛내며 방하(方夏,중국의 사방)를 무녕(撫寧,안무하고 편안케함)하고 노심(勞心)하며 문무(文武)를 행하여 사마(士馬,병마兵馬)들이 무양(無恙,무탈)하니 흠앙하고 우러르며 정을 기울인지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왕도(王塗)(→보통 王道와 같은 말인데 여기서는 천자가 있는 곳 즉 ‘건업으로 가는 길’을 말하는 듯)가 험원(嶮遠)하고 연(燕), 월(越)로 떨어져 있어 매번 강변을 쳐다볼 때마다 고개를 늘어뜨리고 멀리 바라봅니다. 하늘이 간난(艱難)을 내려 화해(禍害,재앙)가 여러 번 닥치니 옛 도읍을 지키지 못하고 졸지에 노정(虜庭,오랑캐의 궁정)이 되어버려, 황여(皇輿,승여,어가)가 천행(遷幸,임금이 궁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김)하여 오(吳), 초(楚)의 세력을 빌리게 하였습니다.(假勢吳楚) 대진(大晉)(→진나라)이 기업을 열고 만세에 전해져(祚流萬世) 그 천명(天命)이 아직 바뀌지 않았음이(→아직 망할 때가 아님이) 현상(玄象,천상天象)을 볼 때 분명하니 이 때문에 의열지사(義烈之士)들이 매우 분용(憤踴.분격)합니다. (신은) 외람되게 공(功)이 적은데도 나라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으나 위로는 뭇 갈(羯)족들을 쓸어버리지 못하고 아래로는 국난(國難)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지 못하고 도리어 적신(賊臣)을 내버려두어 여러 번 경련(京輦,수도)을 핍박하게 하였습니다. 왕돈(王敦)이 앞서서 화(禍)를 불러일으키고 소준(蘇峻)이 뒤에 해독을 부려(※①) 그 흉포(凶暴)함이 (후한 때의) 동탁(董卓)보다 더하고 그 악역(惡逆)함이 각(傕), 범(氾)(→이각, 곽사;곽범郭氾은 곽사郭汜의 다른 표기)보다 심했으니 보천솔토(普天率土,온세상)의 어느 누가 함께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문무(文武)의 선비들이 조정의 영총을 과분하게 받고도 중원(中原)의 적(寇)을 멸하여 천하의 치욕을 씻어내지 못하니 심히 괴이한 일입니다. ※① 왕돈의 반란은 원제 말년인 영창(永昌) 원년(322년), 소준(蘇峻)의 반란은 성제 함화(咸和) 2년(327년) 군후(君侯)께서는 강양(江陽,강북 땅)에 뿌리내려(※②) 형(荊), 형(衡) 땅에서 이름을 드러내며 빛나고 (춘추시대 초나라의) 섭공(葉公)(→심제량沈諸梁)의 권세를 지니고 포서(包胥)(→신포서申包胥)의 뜻을 품었으나 백공(白公)(→오자서와 함께 오나라로 망명했던 초평왕의 손자 승勝), 오운(伍員)(→오자서伍子胥)으로 하여금 그 난폭함을 마음껏 펼치도록 하였으니 제 생각으로는 이는 (좌씨전을 지은) (좌)구명(丘明)이 수치스럽게 여길 일입니다. 구구한 초국(楚國)의 자중(子重) 같은 부류도 오히려 임금이 약하고 뭇 신하들이 선대부(先大夫)에 미치지 못함을 수치스럽게 여기어 자신을 독려하고 무리들을 깨우쳐 진(陳)나라, 정(鄭)나라를 항복시켰고, 월(越)나라의 종(種), 려(蠡)(→문종文種, 범려范蠡)는 도리어 구천(句踐)을 필좌(弼佐,보좌)해 황지(黃池)에서 위세를 떨쳤는데(取威黃池)(※③), 하물며 지금 오(吳) 땅의 영현(英賢)들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나 성주(聖主)를 보익(輔翼,보좌)하여 강북(江北)을 짓밟지 못하고 있습니다. 곧장 의(義)로써 소리높여 반역하고 난폭한 갈(羯)을 토벌하고 구방(舊邦,옛 나라;옛 도읍)의 선비들에 명을 전하고 근본을 보존하고 있는 사람들(存本之人)을 불러서 품는다면 어찌 바람이 불어 낙엽이 떨어지고 비탈진 길을 수레가 내달릴 듯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손씨(孫氏)(→후한의 손견孫堅)는 당초 장사(長沙)의 무리로(※손견이 당시에 장사태수였음) 동탁(董卓)을 최파(摧破,격파)하여 한실(漢室)을 도울 뜻을 품었습니다. 비록 도중에 도적에게 해를 입어 그 아름다운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의 심성(心誠,일편단심,성심?)에서 기인하였으므로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②「진서」권66 도간전에 의하면, 도간은 본래 위촉오가 정립했던 삼국시대에는 오나라의 파양 사람인데 진나라가 오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장강 북쪽에 해당하는 여강군 심양현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현리, 군리로 시작해 점차 승진한 케이스입니다. ※③ 取威黃池 –「사기」권41 월왕구천세가에 의하면 황지(黃池,지금의 하남성 봉구封丘)는 오왕 부차가 회맹한 곳입니다. 바로 이때에 빈틈을 노려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습격해 오나라를 꺾었고 그 뒤에 월왕 구천이 회맹한 곳은 서주(徐州)입니다. 그러다 권(權)(→손권)은 양(揚), 월(越) 땅에 의거하여 밖으로는 주(周)씨, 장(張)씨에 의지하고 안으로는 고(顧)씨, 육(陸)씨에 힘입어 적벽(赤壁)에서 위나라에 맞서서 이기고 양양(襄陽)을 차지했습니다. 이 이후로 세주(世主)가 (임금의 지위를) 서로 이어받으며 모두 서주(徐州), 예주(豫州)를 침핍(侵逼)하여 위나라로 하여금 늦어서야 밥을 먹도록(旰食)(→편안히 쉬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강표(江表,중원에서 볼 때 장강 건너 바깥쪽.즉 강남)에서는 어찌하여(爲) 현준(賢儁)과 익지(匿智,숨은 지자?)들이 용략(勇略)을 감추며 (예전 오나라의) 여몽(呂蒙), 능통(凌統)의 높은 행적을 받들지 (않고?) 세월을 허비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흉악한 갈(羯)은 사납고 포악하여 중주(中州)의 인사(人士)들이 매우 핍박당하니 그들이 전패(顚沛,엎어지고 자빠짐)하는 위태로움은 계란이 쌓여있는 것(累卵)보다 더 심합니다. (갈羯이) 명호를 가짜로 칭하며(假號) 강압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버렸고 적(敵)에게 허물이 있으니 (그들을) 진탕(震蕩,뒤흔듬)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왕망 말) 왕랑(王郞)과 (후한 말) 원술(袁術)이 비록 속임수를 썼으나(詐僞)(→황제를 참칭했으나) 이들은 모두 그 기반이 얕고 근본이 미미하여 미처 발꿈치를 돌리기도 전에(곧바로) 화(禍)가 닥쳤으니(禍不旋踵), 이는 모두 군후(君侯)께서도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왕사도(王司徒)(→사도 왕도王導)는 청허과욕(淸虛寡欲,마음이 맑고 욕심이 적음)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는 것을 잘하니 예전의 조참(曹參)이 또한 이 도(道)를 존중하여 ‘획일(畫一)’의 칭송을 얻었습니다.(※④) 유공(庾公)(→유량庾亮)은 원구(元舅,국구)의 존엄에 거(居)하고 (옛 주나라 때의) 신백(申伯)의 임무에 처(處)하여 초연히 고도(高蹈,멀리 떠남,은거함)하려 했으니(※⑤) 이는 밝고 지혜로운 권변입니다. 저 (모용)외는 구난(寇難,적의 침범으로 인한 재난)의 때를 맞이하여 대진(大晉)(→진나라)으로부터 누대에 걸친 은혜를 받고도 스스로 한스럽게도 절역(絶域)에 떨어져 성조(聖朝)(→진나라 조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다만 만리 밖에서 근심하면서(係心) 풍모를 우러르며 분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해내(海內)의 바람으로 볼 때 초(楚), 한(漢)의 경중(輕重)이 될만한 자는 오로지 군후(君侯)입니다. 만약 힘을 합치고 마음을 다하여 다섯 주(州)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 연주(兗州), 예주(豫州) 교외를 점거하여 의로운 선비들(向義之士)이 (갈구에 거역해) 창을 거꾸로 잡고 갑옷을 벗게 한다면 갈구(羯寇)(※왜구倭寇와 같은 용례)는 반드시 멸해져 나라의 수치가 제거될 것입니다. 저 (모용)외는 한쪽 구석에 있어 감히 (적극적으로 석륵을 공격하며) 목숨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외로운 군으로 경솔히 진격해봐야 (석)륵(勒)으로 하여금 외수외미(畏首畏尾,머리와 꼬리가 모두 두려워함)하게 만들기에는 족하지 않은 즉, 옛 마음을 품은 선비들이 내응하고자 하여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멀리서 뜻을 진술하며 글을 지은 것이나 (하고싶은 말을) 이루 다 펼치지는 못하였습니다.” ※④ 畫一之稱(획일지칭) -「한서」권89 순리전에 의하면, 한나라 초 백성들이 ‘획일’(畫一)이라는 노래를 지어 소하, 조참의 덕정을 칭송하였습니다. ※⑤ 유량(庾亮)은 명제의 황후인 명목황후 유씨의 오빠로, 당시 황제인 성제(成帝)의 외삼촌입니다.「진서」성제기, 유량전에 의하면, 왕돈, 소준의 반란이 평정된 뒤 유량은 산천으로 들어가 은거하려 하였으나 성제가 이를 막았고, 외직으로 나갈 것을 자청하자 함화 4년(329년)에 평서장군 도독양주지선성강서제군사(都督揚州之宣城江西諸軍事,양주의 선성군 및 장강 서쪽의 군무를 관장하는 도독)로 임명되어 무호(蕪湖)를 진수하게 됩니다. 廆使者遭風沒海. 其後廆更寫前箋, 幷齎其東夷校尉封抽·行遼東相韓矯等三十餘人疏上侃府曰: (모용)외의 사자가 (진나라로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침몰했다. 그 뒤 (모용)외가 다시 예전의 전(箋)(→바로 윗글)을 베끼고는, 이와 함께 그의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 행(行) 요동상(遼東相) 한교(韓矯) 등 30여 명이 지은 소(疏)를 지니고 가게 하여 (도)간(陶侃)의 부(府)에 올리니, (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自古有國有家, 鮮不極盛而衰. 自大晉龍興, 克平崏會, 神武之略, 邁蹤前史. 惠皇之末, 后黨構難, 禍結京畿, 釁成公族, 遂使羯寇乘虛, 傾覆諸夏, 舊都淪滅, 山陵毁掘, 人神悲悼, 幽明發憤. 昔獫狁之强, 匈奴之盛, 未有如今日羯寇之暴, 跨躡華裔, 盜稱尊號者也. 天祚有晉, 挺授英傑. 車騎將軍慕容廆自弱冠涖國, 忠於王室, 明允恭肅, 志在立勳. 屬海內分崩, 皇輿遷幸, 元皇中興, 初唱大業, 肅祖繼統, 蕩平江外. 廆雖限以山海, 隔以羯寇, 翹首引領, 係心京師, 常假寤寐, 欲憂國忘身. 貢篚相尋, 連舟載路, 戎不稅駕, 動成義擧. 今羯寇滔天, 怙其醜類, 樹基趙魏, 跨略燕齊. 廆雖率義衆, 誅討大逆, 然管仲相齊, 猶曰寵不足以御下, 況廆輔翼王室, 有匡覇之功, 而位卑爵輕, 九命未加, 非所以寵異藩翰, 敦獎殊勳者也. 方今詔命隔絶, 王路嶮遠, 貢使往來, 動彌年載. 今燕之舊壤, 北周沙漠, 東盡樂浪, 西曁代山, 南極冀方, 而悉爲虜庭, 非復國家之域. 將佐等以爲宜遠遵周室, 近準漢初, 進封廆爲燕王, 行大將軍事, 上以總統諸部, 下以割損賊境. 使冀州之人望風向化, 廆得祗承詔命, 率合諸國, 奉辭夷逆, 以成桓文之功, 苟利社稷, 專之可也. 而廆固執謙光, 守節彌高, 每詔所加, 讓動積年, 非將佐等所能敦逼. 今區區所陳, 不欲苟相崇重, 而愚情至心, 實爲國計. “예로부터 국(國)이 있고 가(家)가 있은 이래 극히 번성하지 않은 채 쇠망한 일은 드뭅니다. 대진(大晉)(→진나라)이 용흥(龍興,흥기)한 뒤로 민(崏), 회(會) 땅(→촉나라와 오나라)을 평정하여 그 신무(神武)한 책략은 전사(前史)를 뛰어넘었으나, 혜황제(惠皇帝) 말에 (황)후(后) (가씨賈氏) 일당이 난(難)을 얽어 경기(京畿)에서 화(禍)를 일으키고 공족(公族)들 사이에 불화를 만들어, 마침내 갈구(羯寇)가 그 빈 틈을 타 제하(諸夏,중국)를 뒤집어 예전 도읍을 윤멸(淪滅)하고 산릉(山陵)을 훼굴(毁掘)하여 사람과 신령이 비도(悲悼,애도)하고 유명(幽明,저승과 이승)이 발분(發憤)케 하였습니다. 옛날 험윤(獫狁)이 강성하고 흉노(匈奴)가 번성하였으나, 지금의 갈구(羯寇)처럼 흉포하게 화예(華裔,중화와 오랑캐)를 짓밟고 존호(尊號,제위)를 훔쳐서 칭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진서」권105 석륵재기下에 의하면, 함화 5년(330년)에 석륵이 조(趙)(→후조) 천왕(天王)을 칭하고 황제의 사무를 행하였고 곧이어 제위에 오름. 하늘이 진나라를 보우하여 영걸(英傑)을 뽑아 내려주었으니, 거기장군(車騎將軍) 모용외(慕容廆)는 약관의 나이 때부터 나라에 임하여 왕실에 충성하고 명윤공숙(明允恭肅,밝고 참되며 공손하고 엄숙함)하며 훈공을 세우는데 뜻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해내(海內)가 분열되어 무너지고 황여(皇輿)가 (강남으로) 천행(遷幸)하고 원황제(元皇帝)가 중흥하여 처음 대업(大業)을 열고 숙조(肅祖)(→명제의 묘호가 숙종임)가 대통을 이어 장강 바깥(江外)을 탕평(蕩平)하게 되자, 모용외는 비록 산해(山海)와 갈구(羯寇)에 의해 막혀있으나 머리를 들고 목을 뺀 채 (간절히) 경사(京師,경도京都)를 염려하고 늘 잠못이루며 우국망신(憂國忘身,몸을 잊고 간절히 나라를 걱정함)하려 하였습니다. 공물이 (끊이지않고) 이어져 (조공하러 가는) 배가 잇달아 길에 가득하였고 융(戎,군사,전쟁)을 그치지 않고 의거(義擧)하였습니다. 이제 갈구(羯寇)가 도천(滔天,번성)하여 자신의 추악한 많은 무리들을 믿고서 조(趙), 위(魏) 땅에 기반하고 연(燕), 제(齊) 땅을 침략하였습니다. 비록 (모용)외가 의로운 무리들을 이끌고 대역(大逆)(→갈구)을 주토(誅討)하였으나, (옛날에) 관중(管仲)은 제나라의 재상(相)이었음에도 도리어 그가 받은 총애가 아랫사람들을 부리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모용)외는 왕실을 보익(輔翼)해 패업을 도운 공이 있으나 그 지위가 낮고 작위가 가볍고 구명(九命)이 더해지지 않았으니, 이는 번한(藩翰,번신)을 총이(寵異,특별히 총애함)하고 뛰어난 훈공을 세운 자를 돈독히 장려하는 바가 아닙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조명(詔命)이 격절되고 왕로(王路)가 험하고 멀어 조공하는 사자가 왕래하는데에 걸핏하면 1년이 걸립니다.(動彌年載)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옛 영토는 북쪽으로 사막(沙漠)에 미치고 동쪽으로 낙랑(樂浪)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대산(代山)에 이르고 남쪽으로 기(冀)(주) 구석에 달했으나 이제는 모두 노정(虜庭)이 되어버렸고 다시 국가(國家)의 영역이 아닙니다. (저희 모용외의) 장좌(將佐,장령과 좌리)들은 ‘의당 멀리로는 주실(周室)(→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고 가까이로는 한나라 초(의 제도)에 준하여 (모용)외를 연왕(燕王)으로 올려 봉하고 대장군의 사무를 대행하게 하여(行大將軍事) 위로는 여러 부(部)를 총통하고 아래로는 적(賊)의 지경을 할손(割損)한다면, 기주인(冀州人)들로 하여금 풍모를 우러르고 교화에 귀순하게 하고 (모용)외가 다만 조명(詔命)을 봉승해 여러 나라를 합쳐서 이끌고 말씀을 받들어 역적을 멸할 수 있게 되어 제환공, 진문공의 공을 이룰 것이니, 실로 사직(社稷)에 이로운 일이라면 (진나라의 정식임명없이 임의로) 전행(專行)하여도 가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용)외는 겸광(謙光,자기를 낮추어 그 덕이 스스로 빛남)을 고집하며 수절(守節)함이 더욱 높아서 매번 (임명하는) 조령이 더해질 때마다 사양한지 몇 년 째이니, 장좌(將佐)들이 (임의로 연왕에 오르도록) 돈핍(敦逼,정중히 독촉함)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구구히 진술하는 것은 (우리끼리) 서로 숭중(崇重,떠받들며 높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희의 어리석은 생각이나마 지극한 성심으로써 실로 국계(國計,국가대계)를 위함입니다.” 侃報抽等書, 其略曰:「車騎將軍憂國忘身, 貢篚載路, 羯賊求和, 執使送之, 西討段國, 北伐塞外, 遠綏索頭, 荒服以獻. 惟北部未賓, 屢遣征伐. 又知東方官號, 高下齊班, 進無統攝之權, 退無等差之降, 欲進車騎爲燕王, 一二具之. 夫功成進爵, 古之成制也. 車騎雖未能爲官摧勒, 然忠義竭誠. 今騰牋上聽, 可不·遲速, 當任天臺也.」 朝議未定. 八年, 廆卒, 乃止. 時年六十五, 在位四十九年. 帝遣使者策贈大將軍·開府儀同三司, 諡曰襄. 及儁僭號, 僞諡武宣皇帝. (도)간(陶侃)이 (봉)추(封抽) 등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거기장군(車騎將軍)(→모용외)이 우국망신(憂國忘身,몸을 잊고 간절히 나라를 걱정함)하며 (진나라에) 공물을 보내 길에 가득하였고, 갈적(羯賊)(→갈구.석륵)이 화친을 청하였을 때는 사자를 붙잡아 (우리에게) 보냈고, 서쪽으로 단국(段國)을 치고 북쪽으로 새외(塞外)를 정벌해 멀리 삭두(索頭)를 평정하니 황복(荒服) 땅에서 (와서 공물을) 헌상하였으나, 오직 북부(北部)(→석륵?)가 아직 복종하지 않아 여러 번 군사를 보내 정벌하였소. 또한 동방(東方)의 관호(官號)에서 위아래가 (차이없이) 대등하여, 나아가서는(進) 통섭(統攝)하는 권한이 없고 물러나서는(退) 차등에 따라 복종함이 없으므로(無等差之降) 거기장군을 연왕(燕王)으로 올리고자 하여 이에 관해 (그대들이) 일일이 진술했음을 잘 알았소. 무릇 공을 세우면 작위를 올리는 것은 고대의 완성된 제도요. 거기(車騎)(→거기장군 모용외)가 비록 관(官)(→국가,진나라)을 위해 (석)륵(石勒)을 꺾지는 못했으나 충의(忠義)로써 성심을 다하였소. 이제 전(牋)을 올려 황상께서 보게 할 것이니, (연왕으로 삼을 것인지의) 가부(可不)와 더디게 할 것인지 속히 할 것인지 여부는 천대(天臺,상서대)에 맡길 것이오.” 조정의 의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함화) 8년(333년)에 (모용)외가 죽자 (의논을) 그만두었다. (모용외가 죽었을 때) 당시 나이는 65세, (모용선비부의 수장으로) 재위(在位)한 것은 49년이다. (※ 모용외 생몰 269-333년 ; 재위 285-333년) 황제가 사자를 보내 대장군(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양(襄)이라 하였다. (→요동양공) 그러다 (뒤에) (모용)준(儁)이 제호를 참칭하게 되자 (모용외에게) 거짓 시호를 내려 무선황제(武宣皇帝)라 하였다. ※ 모용외의 죽음 / 진서 성제기 乙未, [一三]車騎將軍、遼東公慕容廆卒, 子皝嗣位. [一三]乙未 擧正:上文正月辛亥朔, 本月無乙未. (함화 8년 5월), 을미일 [중화서국본 교감기 一三] 거기장군, 요동공 모용외가 죽고 아들 (모용)황이 지위를 이었다. [一三] (청나라 때 장증張熷의) 독사거정(讀史擧正)에 의하면 앞의 글에서 (함화 8년) 정월은 신해일이 초하루라 했으므로 이 달(→5월)에는 을미일이 없다. 裴嶷字文冀, 河東聞喜人也. 父昶, 司隸校尉. 嶷淸方有幹略, 累遷至中書侍郞, 轉給事黃門郞·滎陽太守. 屬天下亂, 嶷兄武先爲玄菟太守, 嶷遂求爲昌黎太守. 至郡, 久之, 武卒, 嶷被徵, 乃將武子開送喪俱南. 旣達遼西, 道路梗塞, 乃與開投廆. 時諸流寓之士見廆草創, 並懷去就. 嶷首定名分, 爲羣士啓行. 廆甚悅, 以嶷爲長史, 委以軍國之謀. 배억(裴嶷)은 자(字)가 문기(文冀)이고 하동(河東)(군) 문희(聞喜)(현) 사람이다. 부친인 (배)창(昶)은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냈다. (배)억은 청방(淸方,청렴하고 정직함)하며 간략(幹略,재간과 모략)이 있었고, 여러 번 관위가 올라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이르고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郞), 형양태수(滎陽太守)로 전임했다. 그러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배)억의 형 (배)무(武)가 앞서 현도태수(玄菟太守)가 되었으므로 이에 (배)억이 (스스로) 청하여 창려태수(昌黎太守)가 되었다. (창려)군(郡)에 부임하고 오래지 않아 (배)무가 죽고 (배)억은 (수도로) 징소되니 이에 (배)무의 아들 (배)개(開)를 데리고 (배무의) 상여를 호송하며 함께 남쪽으로 왔다. 요서(遼西)에 도달한 뒤에 도로가 막히자 이에 (배)개와 함께 (모용)외에게 투탁했다. 당시 유랑하며 객지생활하던 여러 선비들(流寓之士)이 (모용)외가 초창(草創,처음 시작함)하는 것을 보고 아울러 거취(去就)할 마음(→떠나려는 마음)을 품었는데, (배)억이 앞장서서 명분(名分)을 정하고 (모용외를 따르도록) 뭇 선비들을 위해 계행(啓行,앞장서서 인도함)하였다. (모용)외가 매우 기뻐하며 (배)억을 장사(長史,속관명)로 삼고 그에게 군국(軍國)의 모책 세우는 일을 맡겼다. 及悉獨官寇逼城下, 外內騷動, 廆問策於嶷, 嶷曰:「悉獨官雖擁大衆, 軍無號令, 衆無部陣, 若簡精兵乘其無備, 則成擒耳.」 廆從之, 遂陷寇營. 廆威德於此甚振, 將遣使獻捷於建鄴, 妙簡行人, 令嶷將命. 그러다 (우문)실독관(悉獨官)이 성 아래를 핍박하여 안팎이 동요하니 (모용)외가 (배)억에게 그에 관한 책략을 물었다. (배)억이 말했다, “실독관(悉獨官)이 비록 많은 군사를 끼고 있으나 군(軍)에 호령(號令)이 없고 그 무리들에게 부진(部陣,정제된 대오)이 없으니 만약 정병(精兵)을 가려뽑아 그들이 방비하지 않음을 틈탄다면 (실독관을 격파하여) 능히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모용)외가 이를 따라 마침내 적의 영(營)을 무너뜨렸다. (모용)외의 위덕(威德)이 이로써 매우 떨쳐졌고, 장차 건업(建鄴)에 사자를 보내 전리품을 헌상하려 하여 (사자로서) 길떠날 사람을 가려 뽑으니 이에 (배)억으로 하여금 명을 받들도록 하였다. 初, 朝廷以廆僻在荒遠, 猶以邊裔之豪處之. 嶷旣使至, 盛言廆威略, 又知四海英賢並爲其用, 擧朝改觀焉. 嶷將還, 帝試留嶷以觀之, 嶷辭曰:「臣世荷朝恩, 濯纓華省, 因事遠寄, 投迹荒遐. 今遭開泰, 得覩朝廷, 復賜恩詔, 卽留京輦, 於臣之私, 誠爲厚幸. 顧以皇居播遷, 山陵幽辱, 慕容龍驤將軍越在遐表, 乃心王室, 慷慨之誠, 義感天地, 方掃平中壤, 奉迎皇輿, 故遣使臣, 萬里表誠. 今若留臣, 必謂國家遺其僻陋, 孤其丹心, 使懷義懈怠. 是以微臣區區忘身爲國, 貪還反命耳.」 帝曰:「卿言是也.」 乃遣嶷還. 廆後謂羣僚曰:「裴長史名重中朝, 而降屈于此, 豈非天以授孤也.」 出爲遼東相, 轉樂浪太守. 당초 조정(朝廷)에서는 (모용)외가 황량하고 먼 땅에 궁벽하게 있으나, 도리어 변예(邊裔,변경)의 호(豪,호걸 또는 호족)들이 그에게 가서 머무르고 (배)억이 사자로 온 뒤로 (모용)외의 위략(威略)을 매우 풍성하게 말하고 또한 사해(四海,천하)의 영현(英賢)들이 아울러 그에게 부려지고 있음을 알게 되어 온 조정 사람들이 그를 달리 보게 되었다. (배)억이 장차 돌아가려 하자 황제가 시험삼아 (배)억을 머물게 하여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관찰했다. (배)억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이 대대로 조정의 은혜를 입어 갓끈을 씻으며 영화로운 관직에 올랐다가(濯纓華省) 사고(事)로 인해 멀리서 기거하며 황량하고 먼 땅에 투적(投迹,투신,투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개태(開泰,태평)한 때를 만나 조정(朝廷)을 뵐 수 있게 되고 다시 은혜로운 조령을 받아 경련(京輦,경도,경사)에 머물라 하시니 신에게 사사로이는 실로 후한 은총입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황제의 거처가 파천(播遷)하고 산릉(山陵)이 모욕을 당하니, 모용(慕容) 용양장군(龍驤將軍)(→용양장군 모용외)이 먼 변경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왕실(王室)을 염려하여 성심으로 강개(慷慨)하고 천지를 감동시킬만한 의로움으로 바야흐로 중양(中壤,중토,중원)을 쓸어서 평정하여 황여(皇輿,승여,어가)를 봉영(奉迎)하려 하여 이 때문에 신을 사자로 보내 만리 길을 와서 성심을 표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신을 (돌려보내지 않고) 머물게 하신다면 (모용외는) 필시 국가(國家)가 자신의 벽루(僻陋)한 이(→배억 자신을 말함)를 남겨두어 그의 단심(丹心)을 저버린다 여기어, 의로운 마음을 게을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미한 신이 구구(區區)하게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청하니 (모용외에게로) 돌아가 반명(反命,복명,보고)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에 (배)억을 돌려보냈다. (모용)외가 뒤에 뭇 신료들에게 말했다, “배장사(裴長史)(→장사 배억)의 명성이 중조(中朝,중앙조정)에서 무거우면서도 여기에서 몸을 굽히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내게 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바깥으로) 나가 요동상(遼東相)이 되었다가 낙랑태수(樂浪太守)로 전임했다. 高瞻字子前, 渤海蓨人也. 少而英爽有俊才, 身長八尺二寸. 光熙 (306)中, 調補尙書郞. 屬永嘉之亂, 還鄕里, 乃與父老議曰:「今皇綱不振, 兵革雲擾, 此郡沃壤, 憑固河海, 若兵荒歲儉, 必爲寇庭, 非謂圖安之所. 王彭祖先在幽薊, 據燕代之資, 兵强國富, 可以託也. 諸君以爲何如?」 衆咸善之. 乃與叔父隱率數千家北徙幽州. 旣而以王浚政令無恒, 乃依崔毖, 隨毖如遼東. 고첨(高瞻)은 자(字)가 자전(子前)이고 발해(渤海)(군) 조(蓨)(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상(英爽,빼어나고 호방함)하며 준재(俊才)가 있었고 신장이 8척 2촌이었다. (진 혜제) 광희(光熙,306년) 중에 상서랑(尙書郞)에 보임되었다. 그러다 영가(永嘉)의 난이 일어나자 향리(鄕里)로 돌아가서는 (고향의) 부로(父老,노인)들과 더불어 의논하며 말했다, “지금 황기(皇綱)가 떨치지 못하고 병혁(兵革,전란)으로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이 군(郡)(→발해군)은 땅이 비옥하고 하수와 바다에 의지해 굳게 지키나 만약 병황(兵荒,전쟁으로 인한 기근 등의 재앙)으로 해마다 흉작이 들면 (이곳은) 필시 도적들(寇)의 정(庭)이 될 것이니 편안히 거처할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왕팽조(王彭祖)(→왕준王浚)가 앞서 유주 계(薊) 땅에 있으며 연(燕), 대(代)의 물자에 의거하여 군사는 강하는 나라는 부유하니 가히 의탁할 만합니다. 여러분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뭇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숙부(叔父) (고)은(隱)과 함께 수천 가(家)를 이끌고 북쪽으로 유주(幽州)로 옮겼다. 그 얼마 뒤에는 왕준(王浚)의 정령(政令)에 일정함이 없으므로(변덕스러우므로) 이에 최비(崔毖)에게 의탁하고 (최)비를 따라 요동(遼東)으로 갔다. ※ 왕준(王浚) –「진서」권39 왕준전에 의하면, 왕준은 태원군 진양현 사람으로 자(字)가 팽조(彭祖)이며 삼국지 배송지 주에 종종 나오는「위서」를 지은 왕침(王沈)의 아들입니다. 진나라 혜제 때 황후 가씨의 심복으로 유주도독에 임명되어 계(薊)를 다스렸는데,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진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유주, 기주 일부를 기반으로 하여 우문선비와 친교하며 자립을 꾀했으나 결국 314년에 석륵에게 유주가 함락당하면서 살해됩니다. 毖之與三國謀伐廆也, 瞻固諫以爲不可, 毖不從. 及毖奔敗, 瞻隨衆降于廆. 廆署爲將軍, 瞻稱疾不起. 廆敬其姿器, 數臨候之, 撫其心曰:「君之疾在此, 不在餘也. 今天子播越, 四海分崩, 蒼生紛擾, 莫知所係, 孤思與諸君匡復帝室, 翦鯨豕于二京, 迎天子於吳會, 廓淸八表, 侔勳古烈, 此孤之心也, 孤之願也. 君中州大族, 冠冕之餘, 宜痛心疾首, 枕戈待旦, 柰何以華夷之異, 有懷介然. 且大禹出于西羌, 文王生于東夷, 但問志略何如耳, 豈以殊俗不可降心乎!」 瞻仍辭疾篤, 廆深不平之. 瞻又與宋該有隙, 該陰勸廆除之. 瞻聞其言, 彌不自安, 遂以憂死. (최)비가 세 나라(→고구려,우문부,단부)와 함께 (모용)외 토벌을 꾀하니 (고)첨은 불가하다고 굳게 간언하였으나 (최)비가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 (최)비가 패하여 (고구려로) 달아나게 되자 (고)첨은 무리들을 따라 (모용)외에게 항복했다. (모용)외가 (그를) 장군(將軍)으로 서임했으나 (고)첨은 병이 있다 칭하며 받지 않았다. (모용)외는 그의 자기(姿器,자질과 그릇)를 공경하여 여러 차례 찾아가 병문안하고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대의 병은 이곳에 있지 다른데 있지 않소. 지금 천자(天子)가 파월(播越,파천)하고 사해(四海)가 나뉘고 무너져 창생(蒼生,만백성)들이 어지러워져 어디에 의지할 지 모르고 있소. 나는 제군들과 함께 제실(帝室)을 바로잡아서 복구하고 두 경도(→낙양,장안)에서 경시(鯨豕)(→고래와 돼지.여기선 석륵 등을 비하해서 한 말)를 제거하여 오회(吳會)에서 천자를 맞이해오고 팔표(八表,팔방)를 깨끗이하여 옛 열렬한 이들과 같은 공훈을 세우려 하니, 이것이 나의 마음이고 나의 바람이오. 그대는 중주(中州,중토)의 대족(大族)으로 관면(冠冕,관족冠族)의 후손(餘)이라 의당 (나라걱정으로) 마음과 머리가 아프고 (적을 토멸할 각오로) 침과대단(枕戈待旦,창을 베고 누워 아침을 기다림)할 것이니, 어찌 화(華)와 이(夷)에 서로 차이가 있고 품는 마음에 다를 바가 있겠소. 게다가 대우(大禹)(→우임금)는 서강(西羌)에서 나오고 문왕(文王)은 동이(東夷)에서 태어났으니, (출신은 상관없이) 다만 지략(志略)이 어떠하냐만 물을 뿐(따질 뿐) 어찌 풍속이 다르다고 하여 항심(降心,사람들의 마음을 귀부시킴?)할 수 없겠소!” (그러나) (고)첨은 여전히 병이 깊다고 말하며 사양하니 (모용)외는 매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첨은 또한 송해(宋該)와 더불어 서로 불화가 있어 (송)해가 은밀히 (모용)외에게 그(→고첨)를 제거하도록 권했다. (고)첨이 그 말을 전해듣고 더욱 스스로 불안해하였으니 마침내 근심하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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