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金海金氏族譜系(김해김씨 보계;가락국 왕세계)

라디오에요 2010. 1. 22. 21:21

金海金氏族譜系(김해김씨 보계;가락국 왕세계)

 

一世(1세), 始祖首露王(시조 수로왕),
姓金氏諱首露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建國于駕洛 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薨 春秋一百五十八
성은 김씨이고 휘는 수로로써 한나라(후한) 광무(1대 황제)의 건무(연호) 18년(서기 42년) 나라를 세워 가락이라 하였다. 헌제(14대 황제)의 건안 4년 기묘(199)년 3월 24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8세였다.

 

葬納陵在金海府內三百步龜旨峰東北隅子孫世世享祀今 上壬子遣官致祭 命建祠如崇德殿例官修祭祀始置殿監
장례는 김해부내의 구지봉 동북쪽으로 300보의 거리에 있는 납릉에 장사지내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 임금(철종) 임자(1852)년 예관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숭덕전(박혁거세왕을 모신 사당)의 예에 따라 사당을 지으라고 명하여, 예관이 제사를 지내고 비로소 전(사당)의 관리자를 두었다.

 

妃普州太后許氏諱皇玉漢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朔薨春秋一百五十七
왕비는 보주태후 허씨로서 휘는 황옥이고 한나라(후한) 영제의 중평6년 기사(189)년 3월 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였다.

 

葬龜旨峰子坐午向原南距王陵二里許每歲春秋自 朝家推擇日字香室磨鍊封香祝本府使及陵監迭相參祭
장례는 구지봉의 자좌(子坐)로서 오시방향(午向)의 언덕에 지냈으며, 왕릉과는 남쪽으로 2리정도 떨어져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조정에서 날짜를 가려서 택하여 향실[1]에서 향과 축문을 준비하여 올리고, 김해부사와 능의 관리가 교대로 제사에 참석하였다.
[1]조선시대에 제사에 쓰는 향(香)과 축문(祝文)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곳

 

二世(2세)
子 居登王(거등왕)
建安庚辰立蜀漢延熙十六年癸酉薨在位五十四年一云戊寅薨  妃諱慕貞父泉府卿申輔陵所未詳
건안 경진(200)년에 왕위에 올라, 촉한 연희 16년 계유(253)년에 돌아가셨으며 재위는 54년간이었다. 또는 무인(258)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왕비는 휘모정이며 천부경 신보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三世(3세)
子 馬品王(마품왕)
一云馬品延熙甲戌立晋元康庚戌薨在位三十七年一云己卯立 妃諱好仇父宗正監趙匡孫陵所未詳
또는 마품이라고도 한다. 연희 갑술(254)년 왕위에 올라, 진나라 원강 경술(290)년 돌아가시니 재위는 37년간이다. 또는 기묘(259)년에 왕위에 올랐다고도 한다. 왕비의 휘는 호구이며 부친은 종정감을 지낸 광손이다[1].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1]‘아버지는 종정감 조광손이다’ 인지 ‘아버지는 종정감 조광의 손자이다.’ 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전자일 것 같다. 후자라면 父宗正監趙匡之孫이라고 해야 한다. 만일 父의 글자가 없으면 ‘종정감을 지낸 조광의 손녀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2]여기서는 조광이라고 나오니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는 宗正監趙匡孫女(종정감을 지낸 조광의 손녀)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위 문장에서 父의 글자가 빠져야 한다.

 

四世(4세)
子 居叱彌王(거질미왕)
一云今勿元康辛亥立永和丙午薨在位五十六年  妃諱阿志阿干我躬孫陵所未詳
또는 금물이라고도 한다. 원강 신해(291)년에 왕위에 올라, 영화 병오(346)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56년간이었다. 왕비의 휘는 아지이며 아간을 지낸 아궁의 손녀이다[1].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1]我躬之孫이면 위의 해석이 맞으나 해석을 ‘아간을 지낸 아궁손이다.’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阿躬阿干孫女(아궁아간의 손녀이다.)라고 되어 있다.

 

五世(5세)
子 伊尸品王(이시품왕)
一云伊品永和丁未立義熙丁未四月薨在位六十一年 妃諱眞信父司農卿克忠 陵所未詳
또는 이품이라고도 한다. 영화 정미(347)년 왕위에 올라, 의희 정미(407)년 4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61년간이었다. 왕비의 휘는 진신이며 사농경을 지낸 극충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六世(6세)
子 坐知王(좌지왕)
一云金叱義熙丁未立宋義初庚申薨 在位十四年  妃諱福壽父大阿干道寧陵所未詳
또는 금질이라고도 한다. 의희 정미(407)년 왕위에 올라, 송나라 의초(永初?) 경신(420)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14년간이었다. 왕비의 휘는 복수이며 대아간을 지낸 도녕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七世(7세)
子 吹希王(취희왕)
一云金希義初辛酉立元嘉庚寅薨在位三十年  妃諱仁德父角干進思陵所未詳
또는 금희라고도 한다. 의초(永初?) 신유(421)년 왕위에 올라, 원가 경인(450)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0년간이었다. 왕비의 휘는 인덕이며 각간을 지낸 진사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八世(8세)
子 銍知王(질지왕)
一云金銍元嘉辛卯立齋永明辛未薨在位四十一年  妃諱邦媛父沙干金相陵所未詳
또는 금질이라고 하며 원가 신묘(451)년 왕위에 올라, 제(齊)나라 영명 신미(491)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41년간이었다. 왕비의 휘는 방원이며 사간을 지낸 김상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九世(9세)
子 鉗知王(겸지왕)
一云金鉗永明壬申立梁普通庚子薨在位二十九年 妃諱淑父角干出忠陵所未詳
또는 금겸이라고도 한다. 영명 임신(492)년 왕위에 올라, 양나라 보통 경자(520)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29년이었다. 왕비의 휘는 숙으로서 각간을 지낸 출충의 따님이다. 묘소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

 

十世(10세)
子 仇衡王(구형왕) <子 世宗, 武力, 武得>
一云仇亥普通辛丑立在位十二年蕭梁大通壬子降于新羅法興王十九年歷年凡四百九十一年 按山淸縣誌及王山寺古蹟縣東距二十里許累石爲丘四面皆七級階乃是仇衡王陵 正廟戊午因祈雨始顯靈自{白}營邑轉移京司 當宁癸亥八路子孫改築荒園■建陵寢講堂廊舍門樓陵在王山東麓庚坐<甲向同之原>  妃諱桂花父哛水伊
또는 구해라고도 한다. 보통 신축(521)년 왕위에 올라 재위 12년인 소양의 대통 (中大通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니 법흥왕 19년이며, 491년간 나라가 이어졌다. 산청현지와 왕산사의 고적을 살펴보니 현(산청현)의 동쪽으로 20리 쯤 떨어진 곳에 돌을 쌓고 4면에 7층의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구형왕릉이라고 한다. 정조 무오(1798)년에 기우제를 지낼 때 영험함이 나타나, 능의 관리(운영)가 읍에서 서울의 관아로 옮겨졌다. 지금 임금 계해(1803)년에 8도의 자손들이 황량한 동산의 축대를 다시 쌓고, 능침과 강당과 행랑채와 문 위의 다락집(門樓)을 세웠다. 능은 왕산의 동쪽 기슭의 경좌<이 언덕에서 서쪽을 보고 있다.>에 있다. 왕비의 휘는 계화로서 뿐수이[1]의 따님이다.
[1]삼국유사에는 分叱水爾叱女(분질수이질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