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史抄(고구려사초) 정서방

孺留王(유류왕)

라디오에요 2010. 3. 25. 03:43

孺留王(유류왕)

辛巳七月東夫餘公主禮氏生孺留于柵城名曰類利者肖月之意也. 壬辰彈雀而誤中汲婦, 婦罵曰無父之子無禮如此, 於是自警, 學禮于叔父解素太子, 學射于屋智, 書數於句鄒, 藥農於都祖, 而精熟然後請禮氏同往父處, 禮氏知芻牟有召西奴而難容乃曰汝父去時藏物於七岺八谷石上松下曰搜此而來者來吾子也. 類利乃行山野尋之不得成, 病將死, 忽有聲自柱礎間出. 就而見之有斷刃挾在其間乃喜而進其母. 禮氏無可止之術議於解素. 解素曰嫂勿慮時至矣. 阿兄欲行母后大祭密遣松義而作聖母像, 吾見此人可作大事且其母亦柵城人也. 禮氏大憙與類利隨義而來解素授黃金百斤曰以此悅其民衆然後謁父可也, 乃與屋智句鄒都祖等問民疾苦治人疾病施以衣食洽得人心然後謁鄒牟而卽東宮位沸流溫祚皆不敢爭而唯陜夫仇都烏干等以爲國本不可動與. 召西奴退于牛壤. 溫祚謂其母曰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 有此四可從之義, 而不從而退將安往吾不敢從母. 召西奴然之乃復入宮鄒母謂上曰吾子雖多唯沸流溫祖最可. 汝其三分天下而治之可也. 上受命而卽位於鸞坮改元光名.
신사(B.C.40) 7월 동부여 공주 예씨가 책성에서 유류를 낳았다. 이름은 類利인데 달을 닮았다는 뜻이다. 임진년(B.C.29)년 참새를 쏘아 잘못하여 물 긷는 아낙을 맞추었는데, 아낙이 욕하여 말하기를 아비없는 자식이 무례함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경계하였다. 숙부 해소태자에게서 예를 배우고, 옥지에게서 활쏘기를 배우고, 구추에게서 글과 셈을 배우고, 도조에게서 의약과 농사에 대해 배워, 이로써 정숙하여진 연후에 (어머니) 예씨에게 같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예씨는 추모가 소서노와 함께 있어 용납되지 않을 것을 알고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갈 때 칠령팔곡의  소나무아래 돌 위에 물건을 감추었는데 (아버지 추모가) 말하기를 이것을 찾아서 오는 자가 나의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유리가 이내 산과 들을 (뒤지며)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병이 들어 장차 죽을 것 같았다. 문득 스스로 기둥과 주춧돌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서 그것을 보니 부러진 칼이 그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내 기뻐하여 그 어머니에게 나아갔다. 예씨는 막을 방법이 없음을 할고 해소에게 계책을 의논하였다. 해소가 말하기를 형수는 걱정하지 마라. 때가 이르렀다. 나의 형이 모후의 제사에 성모상을 만들려고 송의를 은밀히 보냈다, 나는 그 사람을 보러가서 큰일을 이룰 것이다 또한 그(송의) 어머니는 책성사람이다. 예씨가 크게 기뻐하여 유리와 함께 (송)의를 따랐는데 해소가 황금 백근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그 민중을 기쁘게 한 연후에 아버지(추모)를 볼 수 있다. 곧 옥지, 구추, 도조 등과 더불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듣고 질병을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흡족하에 베풀어 인심을 얻은 후에 추모를 만나 동궁의 위(자리)에 나아갔는데 비류와 온조는 감히 싸울 수 없고, 오로지 협부, 구도, 오간 등이 나라의 근본이라 함께 움직일 수 없었다. 소서노가 우양으로 떠나갔다. 온조가 그 모(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부인은 남편을 따름이 마땅하고, 자식은 부모를 따름이 마땅하고, 아우는 형을 따름이 마땅하고, 신하는 임금을 따름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네 가지의 따름이 옳음이 있다. 이로써 따르지 않고 물러남은 장차 편안히 갈 수 없음이니 내가 어찌 감히 어머니를 따르지 않으리오. 소서노가 그런 연후에 다시 궁으로 들어와 추모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자식들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바라건데 비류와 온조가 뛰어나므로 당신은 그 땅을 삼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게 옳다. 왕이 받아들여 명하였다. 이로써 난대에서 즉위하여 연호를 광명으로 고쳤다.

元年壬寅 九月阿爾妃生子都㘦. 十月封溫祚爲汗南王禮氏爲皇太后, 삭선된 부분(召西奴爲皇后阿爾妃溫公主亦爲皇后), 十二月黃龍王于仁殂烏伊代之以摩離爲卑離國王.
원년 임인(B.C.19)년 9월 아이비가 아들 도근(도절)을 낳았다. 10월 온조를 한남왕으로 봉하고 예씨를 황태후로 삼았다. (소서노을 황후로, 아이와 온공주를 역시 황후로 삼았다). 십이월 황룡왕 우인이 죽어 오이를 대신하게 하고, 마리를 비리왕으로 삼았다.

二年癸卯 正月再思太輔, 陜夫左輔主民大加. 扶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太子主宮大加, 屋智主穀大加, 仇鄒主刑大加, 都祖主樂大加, 松義主賓大加. 三月大閱水陸軍於河濱, 勞漢人來歸者千人. 九月與皇后觀稼西河如溫湯獲白獐而還. 十月神鸞又集新宮之庭, 皇后生女珍.
2년 계유(B.C.18)년 1월 재사를 태보로 삼고, 협부(협보)를 좌보 겸 주민대가로, 부분노를 우보 겸 주병대가로, 고루태자를 주궁대가로, 옥지를 주곡대가로, 구추를 주형대가로, 도조를 주락대가로, 송의를 주민대가로 삼았다. 3월 수군과 육군을 하빈에서 왕이 점검했다. 노역을 할 漢人 천명이 돌아왔다. 9월 황후와 더불어 서하에서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보고, (황후와 더불어) 온탕에서 흰 노루를 잡아 돌아왔다. 10월 신조 난새가 또 신궁의 뜰에 모였다. 황후가 딸 진(공주)를 낳았다.

三年甲辰 正月分國中爲五部以順奴絶(원문은 다른 한자)奴賜沸流治之都彌鄒忽(密山), 以勸奴桂婁賜溫祚治之都牛壤, 涓奴上治之兼統黃龍卑離荇人句茶諸國事, 五部置沛者于台使者評者等職. 三月納禾黍女于後宮. 五月與太后如海山求神仙, 皇后及溫公主馬公主再思公主從之歷(?)山鹽山而還. 東明神宮成. 七月以松讓女爲妃. 作離宮於鶻川凉谷之東西與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入朝以牛壤挾小請移都於尉那城(鏡泊湖東岸)許之, 上謂皇后曰溫祚年雖十七奏事明白勝於沸流南方無憂矣. 皇后曰沸流幼多疾病未得敎誨故徒善而已溫祚自幼勇壯馬黎敎之故如此當爲陛下之一臂, 上曰豈徒臂哉, 渠是我而我是渠也. 皇后大喜曰豈料聖恩如此哉. 溫祚歸國皇后欲往汗南曰妾容皃已衰慚愧老牝請赴汗舐犢, 上止之曰先帝以卿遺朕而禁殉者欲固邦本也. 卿若赴汗栚與誰爲國追念, 先帝無使朕孤依, 旧宗國無失民望, 皇后乃喜而止. 十月溫公主難産而崩春秋二十. 上哀慟之減食二日. 十二月阿爾后生女玄.
3년 갑진(B.C.17)년 정월 나라를 나누어 오부로 하고 순노부, 절노부는 비류에게 주어 그 도읍을 미추홀(밀산)으로 하고, 권노부, 계루부는 온조에게 주고 그 도읍을 우양으로 하고, 연노부는 왕이 다스리고 황룡국, 비리국, 행인국, 구다국, 모든 나라 일을 통합하여 겸하고 오부에는 패자, 우태, 사자, 평자 등의 직을 두게 하였다. 3월 화서녀를 후궁으로 거두었다. 5월 태후와 더불어 해산에 가서 신선을 구하러 갔다. 황후와 온공주, 마공주, 재사공주가 따라갔고 ?산과 염산에 갔다가 돌아왔다. 동명신궁이 완성되었다. 7월 송양의 딸은 비로 삼았다. 골천의 양곡에 동서로 이궁(다른 궁)을 지었는데 황후와 온공주가 살았다. 한남왕 온조가 입조하여 우양이 협소하다고 위나성(경박호 동안)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온조는 이제 나이 겨우 열일곱이나 명백(또렷)하게 상소를 올릴 줄 아니 비류보다 낫다. 비류의 남쪽은 걱정이 없다. 황후가 말하기를 비류는 어렸을 때 질병이 많아 배우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해 이런 까닭으로 착하기만 하다. 온조는 어렸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여 마려에게 교육을 받은 까닭에 이는 마땅히 폐하의 한 팔이다. 왕이 말하기를 어찌 팔만 되겠는가. 온조가 커지면 나도 커진다. 황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어찌 성은을 헤아려 따르지 않겠습니까. 온조가 자신의 나라(汗南)로 돌아간 후 왕후는 한남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말하기를 첩의 용모가 이미 쇠하여 부끄럽고(임신중이므로) 늙은 여자라고 책망하여 부탁하건데 임금의 명령과 사랑을 알리겠다. 왕이 그 말을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선제께서 경(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말, 여기서는 왕후)을 짐(임금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게 남기고 순장을 금하라는 것은 나라의 근본이 굳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경이 만약 나의 말(汗: 임금의 호령)을 전한다면 짐이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위하고 과거 일을 생각하겠는가. 선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짐은 외롭고 의지하고 싶다. 옛날의 종주국은 백성의 바람을 지나침이 없었다. 황후가 곧 웃음을 그쳤다. 10월 온공주가 난산 끝에 죽었다. 나이 20세였다. 상이 애통해하여 2일동안 식사를 줄였다. 12월 아이후가 딸 현을 낳았다.


= 舐犢 = 舐犢之愛 : 어미 소가 송아지를 사랑하여 혀로 핥아 준다는 뜻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여기서 미추홀(밀산)은 인천이 아니다. 미추홀이 누구에게 공격을 당했는지 백제서기에서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알 수 없게 했다는 것은 내부의 적으로부터 공격당했다는 것이다. 즉, 유리의 고구려가 아니면 대소의 동부여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비정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나의 생각은 유리가 비류와 온조가 추모왕의 유지대로 나라를 나누어 가니 그것을 인정해 주면서도 교묘하게 비류를 견제했던 것 같다. 위치상으로 密山은 동부여와 가까워 동부여가 군사를 이끌고 와 미추홀을 함락시킨 것으로 아닌지 의문스럽다. 다만 비류가 고구려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니 고구려가 공격한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서기
온조왕(B.C.18~A.D.28.재위기간 46년)
13년(B.C.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四年乙巳 正月如溫湯. 二月勸耕巡視城戍. 四月皇后生艴于溫湯. 七月與后東巡柴吉獻硨磲?宝盒玉馬珊瑚恭?.  八月沸流溫祚入朝以劉河爲蠶師敎蠶. 松氏生子都助. 九月納馬公主及鄭共女雉氏. 平氏生女鱒. 十二月扶芬奴句鄒北沃沮敦河平之.
4년 갑진(B.C.16)년 을사년 정월 온탕에 같이 갔다. 2월 밭갈기를 권장하고 성의 경비를 서는 자를 살펴보고 어루만졌다. 4월 황후가 불을 낳았다. 7월 후와 같이 동쪽을 돌면서 어루만졌다. 시길이 차거, 보합, 옥마, 산호(?)를 바쳤다. 8월 비류와 온조가 입조하였고 유하를 잠사로 삼고 누에치기를 가르쳤다. 송씨가 아들 도조를 낳았다. 9월 마공주와 정공의 딸 치씨를 거두었다. 평씨(한소의 딸?)가 딸 준을 낳았다. 십이월 부분노, 구추가 북옥저의 돈하를 평정하였다.


= 硨磲 : 보석과 같이 아름다운 돌
= 宝盒 : 보석 수납함
= 平氏(한소의 딸?)生女鱒 : 고구려가 흉노의 풍속인 취모제가 있었다는 이야기 인가?

五年丙午 正月以香公主妻高婁. 三月禾氏雉氏移于凉谷. 乙豆智娶紫蒙王涉臣女皐頭來. 以曼公主爲沸流妃. 買東海神馬七千匹置車騎府乙豆智將軍菸賈注簿. 五月互市漢人于溝婁城(雙山). 八月觀稼西河勸一口十羊五豕. 十月大閱滸口(呼蘭) 曼公主生沸流陽人.
5년 갑진(B.C.15)년 1월 향공주를 고루의 처로 삼았다. 삼월 화씨와 치씨가 양곡으로 이사했다. 을두지가 자몽국왕 섭신의 딸 고두에게 장가들어 돌아왔다. 만공주(계후의 딸)를 비류의 처로 삼았다. 동해의 신마의 7천필을 사고 차기부를 설치했다. 을두지를 장군 겸 어가주부로 삼았다. 5월 구루성(쌍산)에 한인과 교역하는 호시를 열었다. 8월 서하에서 아직 베지 않는 곡식을 보고 돌아보며, 한사람 당 10마리의 양과 5마리 돼지를 키우기를 권방하였다. 10월 호구(호란)에서 군사를 점검했다. 만공주가 비류의 자식 양인을 낳았다.


= 香公主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고구려사초에는 비류의 처라고 되어있는데 혹시 비류의 딸을 착오로 기재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든다.

六年丁未 三月皇后生子而夭. 四月增漢舘於西河汗濱招一技厚祿給其妻婢. 築豆谷行宮松妃居之. 七月伐盖馬國拔其都(開魯)虜其王命年貢羊五千牛馬各二百, 阿爾后生女眞.
6년 정미(B.C.14)년 황후가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4월 서하와 하빈에서 한관을 늘리고 한 가지 기술이라도 있으면 불러서 후하게 녹봉을 주었으며 처와 첩을 짝 지워주었다. 두곡에 궁을 지어 송비가 거주하게 했다. 7월 개마국을 쳐서 그 도읍(개로)을 빼앗고 그 왕을 사로잡아 매년 양 오천 마리와 소와 말 각 2백 마리를 바치도록 명령했다. 아이후가 딸 眞을 낳았다.

七年戊申 正月艴太子薨. 四月皇后如汗南, 以勾鄒爲玄免太守戒以守城. 五月松妃生解明于豆谷, 上如汗南迎皇后而歸, 禾氏生稻公主
7년 정미(B.C.13)년 정월 불태자가 죽었다. 4월 황후가 한남으로 갔다. 이로써 구추를 현토태수로 삼았고 경계하여 성을 지켰다. 5월 송비가 두곡에서 해명을 낳았다. 왕이 한남으로 가서 황후를 맞이하여 돌아왔다. 화씨가 도공주를 낳았다.


= 4월 황후가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한남으로 가자 유리가 자신의 심복인 구추를 현토태수로 삼았다는 내용인데 그 이전까지는 황후의 모사격인 을음이 태수로 있었는데 직위를 박탈하였다는 내용이다.

八年己酉 五月柴吉死子昌特立. 納翊公主.
8년 기유(B.C.12)년 5월 시길이 죽어 아들 창을 특별히 세웠다. 익공주를 거두었다.

九年庚戌 四月田(畋자의 오기)于箕山七日得眞珠於桂后陵返凉谷. 雉氏禾氏取遂上追至樹下作黃鳥詞. 八月素奴女可治妻羊太子. 皇后生萱公主.
9년 경술(B.C.11)년 4월 기산에서 7일간 사냥을 하다가 계후의 무덤에서 진주를 얻어 양곡으로 돌아왔는데 치씨와 화씨가 (서로) 가지려고 하다가 마침내 왕이 뒤따라가다 나무아래에 이르러 황조사를 지었다. 8월 소노(비리국왕)의 딸이 다스릴 만하여 양태자(황룡국 보득의 딸 화소비의 아들)의 처로 삼았다.


= 可治가 사람이름인 모르겠다.

十年辛亥 正月松妃生女穆. 涉臣請其子婚答以公主幼怒失和. 再思薨沸流太子太輔. 四月大鍊于南口以備盖馬紫蒙. 禾氏生子解術.
10년 신해(B.C.10)년 1월 송비가 여아 목을 낳았다. 섭신(자몽국왕)이 그 아들의 혼인을 청하였는데 공주가 어리다고 답하여 화목을 잃었다. 재사가 죽어 비류태자를 태보로 삼았다. 4월 남구에서 (군사)훈련을 하여 개마와 자몽국에 대비했다. 화씨가 아들 해술을 낳았다.

十一年壬子 四月涉臣反扶芬奴拔其上都(北?都)臣南奔, 臣鮮卑也. 稚氏生女鄭, 鵲氏生蛙.
11년 임자(B.C.9)년 4월 섭신이 반란을 일의켜 부분노가 그 도성을 치니 (섭)신이 남으로 달아았다. 섭신은 선비다. 치씨가 여아 정을 낳았고, 작씨가 와를 낳았다.

十二年癸丑 二月松妃生女殷. 皇后生藍公主.
12년 계축(B.C.8)년 2월 송비가 여아 은을 낳았다. 황후가 람공주를 낳았다.

十三年甲寅 正月阿爾后崩. 金蛙老王殂帶素立. 納漢公主以松妃爲后. 溫祚立東明廟.
13년 갑인(B.C.7) 1월 아이후가 죽었다. 금와왕이 죽어 대소가 즉위하였다. 한공주(한소의 딸 평씨의 딸)을 거두어 송비를 후로 삼았다. 온조가 동명묘를 세웠다.


= 금와가 죽은 것과 온조가 동명묘를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백제서기에 의하면 온조와 금와는 조부와 조손간이다.

十四年乙卯 正月都㘦如柵城娶帶素女. 七月溫祚立柵漢山下盖有南進之意也, 上謂皇后曰朕與卿西進溫祚與再思南進先帝之靈應有喜也, 時再思爲溫祚妃故也. 十月帶素欲得松江(通江)而率五万兵來侵遇大雪七日進退不能凍死者十八九不戰而退歸謂解素曰不聽汝言而致此.
14년(B.C. 6)을묘년 1월 도근(도절)이 책성에 가서 대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7월 온조가 한산의 아래에 한산아래에 목책을 세웠는데 아마도 남진의 뜻이 있었다. 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유리)과 경(황후)는 서쪽으로 나아가고, 온조와 재사는 남진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제(추모)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 이때는 재사가 비류의 妃가 되어있던 까닭이다. 10월 대소가 송강(통강)을 얻기를 바라여 병사 5만을 이끌고 와 침입했는데 우연히 7일 동안 큰 눈이 내려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전쟁을 하지 않고 물러났는데 돌아와서 해소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너의 말을 듣지 않아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렀다.


十九年庚申 八月託利斯卑逐郊豕至長屋澤(小興㲪?)中斷其脚筋, 上怒命坑二人, 而不豫皇后與巫謝之. 以淹포(원문:물수변+호랑이호)沛者武骨左輔, 高婁太子右輔.
19년(B.C. 1)경신년 8월 탁리와 임시로 차출된 노예가 돼지가 교외로 (달아나) 장옥택(소흥등?)에 이르러 (제물로 쓸) 돼지의 다리와 힘줄을 잘라 (상하게 하여), 왕이 노하여 그 두 명을 땅에 묻으라고 명하였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게 되자, 황후와 무당이 잘못을 빌고 사죄하였다. 이로써 엄포(또는 호)패자 무골을 좌보로, 고루태자를 우보로 삼았다.

二十年辛酉 正月都㘦太子自柵城歸未幾薨. 五月松后生豆公主, 沸流太子薨上與皇后擧哀減食. 以曼公主爲都助太子妃陜父太輔.
20년(A.D. 1)신유년 1월 도근(도절)태자가 책성에서 돌아오기 전에 죽었다. 5월 송후가 두공주를 낳았다. 비류태자가 죽었다. 왕이 황후와 더불어 발상하고 감식하였다. 이로써 만공주(계후의 딸, 비류태자의 처)를 도조태자에게 재가시키고 협부를 태보로 삼았다.
= 擧哀 : 상례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고 나서 상제가 머리를 풀고 슬피 울어 초상난 것을 알림. 또는 그런 절차. ≒발상(發喪)

二十一年壬戌 三月掌牲薛支遂逸豕至國內尉那岩(烏屯河古城南?),見山水深險?地宜五穀多麋鹿魚鼈勸上移都. 四月畋于尉中林(在尉那岩近地). 九月如國內相都而還有丈夫坐於沙勿澤(湍湖)畔石上請爲臣賜姓位氏名沙勿. 以玄公主爲鵲太子妃. 再思生多婁.
21년(A.D. 2)임술년 3월 제사 희생물을 담당하는 자 설지가 도망간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오둔하 고성남?)에 이르러 산수가 깊고 험하여 또한 오곡이 잘되고 고라니,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아 왕에게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4월 위중림(위나암 근처에 있다)에서 사냥하였다. 9월 같이 가서 국내를 자세히 살펴보고 도읍으로 돌아오다가 사물택(단호)의 물가의 돌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왕이 청하여 신하로 삼고 성을 위, 이름을 사물이라는 하사하였다. 현공주를 작태자(주몽과 작씨(시길의 딸)사이에 낳은 아들)의 비로 삼았다. 재사공주(주몽과 예씨의 소생, 온조의 비)가 다루를 낳았다.

二十二年癸亥 十月移居于尉那岩徵河北河南民築城是爲北都. 作朱留新宮於銀川岺下(鶴立). 十二月田于質山陰(綏化)五日不返太輔陜父諫之不聽罷爲司園小兄, 陜夫以瓢浮海入新羅.
22년(A.D. 3)계해년 10월 위나암으로 옮겨 살았는데 하북과 하남의 백성들을 불러 성을 짓게 하고 이곳을 북도로 삼았다. 은천령하(학립)에 주류신궁을 지었다. 12월 질산음(수화)에서 사냥을 했는데 5일동안 돌아오지 않아 태부 협부(협보)가 산하였으나 듣지 않고 그 직책을 파면하여 정원을 관리하는 소형(직책명)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협부가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로 들어갔다.

二十三年甲子 二月以解明太子爲正胤以珍公主爲妃置東宮, 僚及領地衛軍大赦國內, 上與皇后率東宮及妃如溫湯宴卒本戚臣沸流戚臣三十人. 松后生無恤太子于朱留宮有鶴盤回岺上.
23년(A.D. 4)갑자년 2월 해명태자를 정윤(후계자)로 삼고 진공주(유리와 아이후의 소생)를 비로 삼아 동궁에 두었는데, (졸본계열과) 동료가 되고 (졸본의) 영지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국내에 있는 죄수를 크게 사면했다. 왕과 황후가 동궁(해명태자)과 동궁비(진공주)를 데리고 온탕에 가서 졸본척신(소서노 계열)과 비류척신(송양계열) 30명과 잔치를 열었다. 송후가 학반회령 꼭대기에 있는 주류궁에서 무휼태자를 낳았다.


= 이 부분에 누락되어 있는 중요한 부분이 고구려사초에 있다. 바로 작태자(주몽과 작씨(낙랑왕 시길의 딸)의 소생)가 신라로 갔다는 내용이다. 박창화님의 두 유고를 종합하면 해명태자와 진공주의 결합으로 동궁이 강해져서 더 이상 작태자로서는 어떤 희망도 없게 되므로 신라로 떠나게 되는데 이 시기의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또 한가지 사실은 낙랑과 신라는 근접거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의 신라는 지금의 경주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고, 진한과 낙랑과 신라는 매우 가까운 거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사초 인용
◎二十三年甲子,二月,以<解明>爲東宮. 算十七. 母<宋>后夢鸞乘日而出. 性英明好勇,形 亦多肖. 上故以皇后女<珍>公主妻之, 大赦國中. <宋>后生<無恤>于<銀川>新宮. 朱光炤室,故名宮曰<朱留>, 白鶴盤回岺,上故名岺曰<鶴岺>. <鵲>太子浮海入<新羅>.
◎23년(단기2337년/AD4)갑자, 2월, <해명>이 동궁이 되었다. 보령 열일곱이었다. 모친 <송>후가 란새가 날아오르고 해가 뜨는 꿈을 꾸었었다. 성품은 영명하고 씩씩함을 좋아하고, 얼굴도 닮은 데가 많았다. 상은 그리하여 황후의 딸인 <진>공주를 (해명의) 처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다. <송>후는 <은천> 신궁에서 <무휼>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를 밝혀주었다 하여 궁의 이름을 <주류>라 불렀고, 흰 학이 고개를 선회하였다 하여 상이 고개 이름을 <학령>이라 불렀다. <작>태자는 <신라>로 흘러들어갔다.

二十四年乙丑 九月田于箕山得羽人爲司園小兄有畜戰神術大嘉之妻以鱒公主賜姓名羽澤, 以穆公主妻黙親居子也.
24년(A.D. 5)을축년 9월 기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날개를 달린 사람을 얻어 정원을 사원소형(정원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삼았는데 가축으로 전쟁하는 신기한 기술을 지니고 있어 준공주(유리와 평씨(한소의 딸)의 소생)를 처로 주고 성명을 하사하여 우택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목공주(유리와 송비의 소생)를 처로 주어 암묵적으로 친하여 아들처럼 살았다.

二十六年丁卯 四月松后生解邑朱.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鱒公主生子眞.
26년(A.D. 7)정묘년 4월 송후가 해읍주를 낳았다. 온조가 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소의 여덟 형제가 왕위를 다투면서 서로를 죽였다. 준공주가 아들 眞을 낳았다.


= 외손자까지 낳은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택이라는 사람에 대한 유리왕의 신임이 남달랐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남당 박창화 선생인의 고구려사초에는 유리명왕이백제가 마한을 정벌하는데 군사를 지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또한 고구려가 3년간 군사를 지원해 준 댓가로 고구려내에 존재하는 백제의 지분과 맞바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구려사초
◎二十六年丁卯,四月,<解邑朱>生. <溫祚>移居<漢山>. <帶素>兄弟八人爭立相殺. 遣兵及粮于<溫祚>以助伐<韓>,三年繼之.
◎26년(단기2340년/AD7)정묘, 4월, <해읍주>가 태어났다. <온조>가 <한산>으로 거쳐를 옮겼다. <대소>의 형제 여덟이 왕위를 다투면서 서로를 죽였다. <온조>에게 병사와 식량을 보내주어 <한>을 정벌하는 것을 도왔는데, 3년을 계속하였다.

二十七年戊辰 三月東宮解明太子立槍於礪津東原走馬飛躍觸死, 是年二十一. 初太子好勇烏伊獻强弓太子折之曰非我有力也弓不勁矣, 烏伊大慙, 上在北都聞之大怒曰黃龍王國之元勳也, 豈可如是, 命賜刃自裁旣而悔之葬于東原而立廟號曰槍原, 國人哀之曰勇子必死. 是年新羅以女妻陜夫云. 溫祚遷都于漢山. 都助太子薨.
27년(A.D. 8)무진년 3월 동궁 해명태자가 여진 동원에서 창을 세워놓고 달리는 말에서 날아서 뛰어내려 죽었다. 이때 나이 21세였다. 처음에 태자는 힘쓰기를 좋아하여 오이가 강궁을 바치자 태자가 강궁을 부러뜨리며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튼튼하기 못하다. 오이가 크게 수치스러워하였다. 왕이 북도에서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화내며 말하기를 황룡왕은 나라의 으뜸 공신이다,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칼을 내려 명하기를 스스로 헤아리라고 했으나 (그러는 동안에 해명이 자살하여) 후회하여 동원에서 장사를 지냈고 묘를 세웠는데 창원이라고 불렀다. 나라사람들이 슬퍼하여 용감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이해에 신라가 왕녀를 협부의 처로 삼았다고 한다. 온조가 한산으로 천도를 했다. 도조태자가 죽었다.


= 이 부분은 고구려사초가 훨씬 자세하다. 하지만 신라의 왕녀와 결혼한 사람이 협부와 작태자로 상이하게 되어있는데 나이를 따졌을 때 협부가 석탈해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조태자의 죽음에 관한 사항이 자세하게 나오니 고구려사초를 다시 한번 인용한다. 만공주는 계후의 딸로써 비류태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도조태자에게 재가를 했다. 형인 도조태자보다는 동생인 해명태자의 처가가 훨씬 영향력이 있다. 작태자가 서기전19년생이니 삼국사기 신라본기와는 16년차이가 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년이 맞다면 작태자와 석탈해는 동일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신라본기에도 문제가 있다. 대보라는 직책은 왕 다음의 직책인데 겨우 15세이고, 신라의 왕녀와 결혼한 것도 13세가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사초
◎二十七年戊辰,三月,賜<解明>死,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 弓授<解明>,<解明>折之曰:"非我有力也,弓自不勁." <烏伊>大慙. 皇后奏曰:"<解明>不愛其妻,而侮辱國老. 陛下何不責之." 上乃召<解明>,責之曰:"不愛<珍>女違父母也. 侮辱國老輕社稷也. 交通後宮淫亂之兆也. 寧其生不若死." <解明>悲憤立槍於<礪津(八虎力河支流)>而死. 國人愛其好勇而死. <新羅>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安圖)>. 七月,<都助>太子薨,年二十四,<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宋讓>,妄自誇張累被叱責,見<解明>之死,慾爲東宮,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 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27년(단기2341년/AD8)무진, 3월, <해명>에게 자진하라 했다. 이때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황룡>왕<오이>가 보궁을 <해명>에게 건네자, <해명>이 이를 부러뜨리고 나서는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고 활이 튼튼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이>는 크게 참담하였다. 황후가 "<해명>은 자기 처를 아끼지도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왜 <해명>을 나무라지 않으십니까?" 하고 아뢰니, 상은 <해명>을 불러 책망하길 "<진>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함은 사직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며, 후궁과 서로 오감은 음란할 조짐이다. 사람들을 편안케 하려면 죽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해명>은 비참하고 억울하여 창을 <려진>(땅)에 세워놓고는 (창 위로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용감하게 자진함을 좋게 여겼다. <신라>는 <작>태자에게 왕녀를 처로 삼아주었다. <온조>가 <한산(안도)>으로 천도하였다. 7월, <도조>태자가 죽었다. (<도조>는) <해명>의 동복형이었는데, 성품은 외할아버지인 <송양>을 닮았다.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 차례 질책을 받았었는데도, <해명>이 죽는 것을 보고나서, 자신이 동궁이 되었으면 싶어, 자기 처인 <만>공주에게 상께 청해보라고 하였다. <만>공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행실이나 바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청을 할 것인가? 번민이 스스로 불타올라 덥다." 말하더니,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용감해도 죽고, 나약해도 죽음뿐이었다."고 말하였다.


= 참고문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남해 차차웅 (A.D. 4~24 재위기간 21년)
5년(A.D.8), 봄 정월,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A.D.10) 가을 7월,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二十九年庚午 六月赤蛙攻黑蛙于茅川(葦沙河)鏖之, 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與其子多婁來朝上命巫禱多婁福五日歸上親送於汗南公主揮淚而去. 新羅以陜夫爲太輔. 穆公主改嫁乙芳.
29년(A.D. 10)경오년 6월, 모천(위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여 무찔렀는데, 사람들이 대소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공주가 그 아들 다루와 더불어 조정에 와서 상이 무당에게 명하여 다루에게 복을 기원했다. 5일후에 돌아갔는데 왕이 손수 한남까지 배웅하였는데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협부(협보)가 신라의 태보가 되었다. 목공주가 을방에게 개가했다.


= 고구려사초에는 작태자가 대보(태보)에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사초
◎二十九年庚午,六月,赤蛙攻黑蛙于茅川(□沙河), □之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來朝而去. <鵲>太子爲<新羅>太輔.
◎29년(단기2343년/AD10)경오, 6월, <모천(□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는데, □의 사람들은 <대소>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공주가 궁에 왔다가 돌아갔다. <작>태자가 <신라>의 태보가 되었다.

三十一年壬申 七月漢人田譚與索頭相爭, 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召西奴之侄子)擊譚殺之譚不遜故也. 又有嚴尤者來寇, 紫蒙勾鄒自將擊之虜其將卒二千余,馬伏無數印顆十二拓地七百余里. 十月乙豆智妃皐頭薨以陽公主乙豆智妃.
31년(A.D.12)임신년 7월 한인 전담이 색두와 싸웠는데, 구추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구추는 연비(소서노의 조카)를 보내었는데 전담을 쳐서 그를 죽였는데 불손했던 까닭이다. 또 엄우라는 자가 있어 쳐들어와서 노략질 하므로, 자몽(국)과 구추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엄우를) 쳐서 그 장졸 2천여 명을 포로로 잡고, 숨겨진 말이 수없이 많았고 인과(흙덩이로 만든 도장)가 12개, 땅도 칠백여리를 넓혔다. 10월 을두지의 비 고두가 죽었다. 이 때문에 양공주를 을두지의 비로 삼았다.


= 이 때 당시 구추의 직책은 고구려 현토태수이고 그 이전에는 을음이 현토태수였다. 을음은 백제서기(우태의 모 을씨의 소생)와 고구려사략(소서노의 외형)에 약간은 상이하게 나오지만 연비는 을음의 아들로 추정된다.


= 자몽국은 선비족으로 서부여의 모체가 되므로 중국25사에 후한서와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나오는 나라이므로 관심을 가져야 할 나라이다. 비류국의 송양, 비리국의 소노 또한  북부여의 후손임을 자칭하고 있는데 자몽국 마저 부여의 후손이라 자칭하고 있음은 선비족과 우리민족은 예전에는 같은 땅에 살던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자몽국왕 섭신은 딸 고두를 을두지(추모와 화비(황룡국 보득의 딸)의 소생)에게 주어 화친을 하였으나, 섭신의 아들의 혼사로 유리에게 딸을 달라고 하였으나 딸이 어리다는 이유로 혼담을 거절하여 화친을 잃었으나 이 시기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 참고문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1년(A.D.12), 한 나라 왕망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 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다. 한 나라 주와 군에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貊)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요동과 현토의)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묻게 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부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이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이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목을 베어 한 나라 서울로 보냈다.[양[한서]와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騶)를 꾀어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망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개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한 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三年甲戌 正月以無恤太子爲正胤, 敎以弓馬用兵之術. 七月鱗公主妻高婁太子. 八月命烏伊摩離各領二萬兵討鮮卑梁貊(원본은 다른자이나 동일자로 추정), 十月烏伊拔勾麗城(林西)虜涉臣而歸紫蒙十二國悉平, 摩離拔貊窟貝沙(海拉爾南屯)>而還. 九月上與藍公主如溫湯. 帶弗弑帶素而自立.
33년(A.D.14)갑술년 1월 무휼을 후계자로 삼고, 궁마와 군사를 부리는 법을 가르쳤다. 7월 두공주를 고루태자의 처로 삼았다. 8월 오이와 마리의 각 영지에서 군사 이만을 거느리고 선비와 양맥을 토벌하였다. 10월 오이가 구려성(임서)을 빼앗아 섭신을 포로로 사로잡고 자몽 12국을 모두 평정하여 귀복하였다. 마리도 맥인들이 모여 사는 패사(해랍이남둔)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9월 상이 람공주(유리와 아이후의 소생)와 온탕에 갔다.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三十七年戊寅 四月解術溺死礪津不得其尸沸流人祭須得之葬于王骨岺(八虎力下畔向陽山), 賜須金十斤田十頃, 解術禾氏出也性如婦女, 慕解明及珍公主而死. 七月黃龍王烏伊薨, 宝得子毛獜代之烏伊之女婿也. 烏伊柵城褥薩烏文之子也. 慷慨有大志事東明爲元勳, 以解明事傷心至是又見解術事得疾, 累夢解明羊吉而驚劇而終年八十三.
37년(A.D.18)무인년 4월 해술이 려진에서 익사하여 그 시체를 찾지 못했다, 비류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아서 왕골령(팔호력하반향양산)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는 금 열 근과 밭 십 경을 주었다. 해술은 화씨의 자로 성품이 부녀자 같았으며, 해명을 사모했던 진공주(해명의 처)도 따라 죽었다. 7월 황룡왕 오이가 죽어, 보득의 아들 모린이 섰는데, 오이의 딸의 남편이다. 오이는 책성욕살(태수) 오문의 자이다. 동명의 으뜸 공신으로 큰 뜻이 있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슬퍼하고 한탄하였는데, 이 때문에 해명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이에 또 해술의 일을 보고 병을 얻었다. 해명과 양길의 꿈이 누적되어 심하게 놀라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 慷慨 : 1. 의분이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함, 2. 뜻을 잃은 모양, 3. 의기가 넘치고 감격하기 쉬운 성질
= 이 해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유리명왕이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다음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내용이다.


2. 유리명왕(B.C.19~A.D.18.재위기간 37년)
37년(A.D.18)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三十八年己卯 正月北都大震移于東都. 默居太輔.
38년(A.D.19) 기묘년 1월 북쪽 도성에 큰 지진이 있어 동쪽 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묵거를 태보로 삼았다.


= 이해에 백제의 백성이 귀순하여 온 사건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보충한다.


3.대무신왕(A.D.18~A.D.44.재위기간 27년)
2년(A.D.19)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三十九年庚辰 三月立東明神廟于龍山中岺(勃利廟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多婁正胤冠刃以蘚苩兩公主妻之. 九月田于骨句川(黑河者?遜河), 東宮得神馬狀如巨婁. 上大喜曰天賜巨婁於汝東明之業可復興也. 十月東扶餘來獻赤烏一頭二身, 倂合兆云.
39년(A.D.20)경진년 3월 용산중령(발리묘령)에 동명신묘를 세웠다. 재사공주와 다루가 조정에 들어와서 (백제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관모와 보검을 내렸다. 이런 까닭에 선과 백공주 둘을 다루의 처로 주었다. 9월 골구천(흑하는 손하를 일컫는다)에서 사냥했는데, 동궁이 거루를 닮은 신마를 얻으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거루를 너에게 내린 것은 동명(지업)이 다시 일어날 징조로다 라고 하였다. 10월 동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두 나라가) 병합될 조짐이라고 하였다.

四十年辛巳二月 卑離王魔離薨年八十四, 子義鹿代之, 其母古王素奴女也.
40년(A.D.21)신사년 2월 비리왕 마리가 죽었는데 나이84세다, 아들 의록이 대신 들어섰는데, 모친은  옛 왕 소노의 딸이었다.

四十二年癸未十一月 帶弗來侵, 東宮以逸待勞伏兵出奇大破, 其軍於鶴盤岺下(鶴立同)其兵棄馬登山而走皆被, 伏兵取擒歸者百一, 上大悅而撫東宮曰芻牟復來.
42년(A.D.23)계미년 11월 대불이 쳐들어 왔다. 동궁(무휼)이 직접 숨어 기다리다가 복병을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가하여 그(대불)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그(대불의) 병사들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모두 달아났다. 복병들이 생포하고 돌아간 자는 100명중 한명 정도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동궁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추모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 위와 동일한 기사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32년기에 나온다. 10년의 차이가 난다. 무휼이 A.D.4년에 태어났으므로 이해에 20살이 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10살 소년이 기묘한 계책으로 물리쳤다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2. 유리명왕(B.C.19~A.D.18.재위기간 37년)
32년(A.D.13) 겨울 11월, 부여가 침범해왔다. 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대적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四十三年甲申二月 上與后及太后壽(본문은 약자)東都行東明大祭. 墨居薨年八十二.
43년(A.D.24)갑신년 2월 왕과 왕후가 태후의 장수를 빌러 동도로 가서 동명의 큰 제사를 지냈다. 묵거가 죽었는데 나이가 82세였다.

四十四年乙酉二月 高婁太子太輔, 宋義右輔, 乙豆智左輔主兵大加.
44년(A.D.25)을유년 2월 고루태자를 태보로, 송의를 우보로, 을두지는 좌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四十七年戊子 八月太后崩春秋八十五, 葬於豆谷東原. 十月皇后與上謁太后陵而還豆谷離宮. 上先崩皇后繼崩, 葬于禮太后陵內 上春秋六十八后八十三. 東宮受宝卽位
47년(A.D.28)무자년 8월 (예)태후가 춘추 85세로 죽었다, 두곡 동원(동쪽 평원)에 장사를 지냈다. 10월 황후와 왕이가 태후릉을 찾아뵙고 두곡이궁으로 돌아왔다. 왕이 먼저 죽고 황후가 따라 죽었는데 예태후릉 경내에 장사를 지냈다. 왕의 춘추 68세였고, 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동궁이 보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