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史抄(고구려사초) 정서방

始祖 芻牟大帝紀(시조 추모대제기)

라디오에요 2010. 8. 7. 12:04

高句麗史抄(고구려사초)

 

高句麗史略 卷之一(고구려사략 권1)

 

始祖 芻牟大帝紀(시조 추모대제기)

 

辛巳 夏 與四豪(烏伊 摩離 陜父 芬奴)南來 乘玄武(方丈大龜) 而至普述(穆稜河口) 與三賢(再思 武骨 黙居)逐虎攘鞨 以開順奴(淹西汗▲) 是年禮后生光明
辛巳(신사) (BC40년) 여름, 四豪(사호, 烏伊(오이), 摩離(마려), 陜父(협보), 芬奴(분노))와 함께 남쪽으로 왔다. 玄武(현무, 方丈大龜(방장대구))를 타고 普述(보술, 穆稜河口(목릉하구))에 이르렀다. 三賢(삼현, 再思(재사), 武骨(무골), 黙居(묵거))과 함께 虎(호)를 쫓아내고 鞨(갈)을 물리쳐서, 順奴(순노, 淹西汗▲)를 열었다. 이 해 禮后(예후)는 光明(광명)을 낳았다.

 

壬午 春 與樂浪卒本定界 秋 納召西奴爲妃
壬午(임오) (BC39년) 봄, 樂浪(낙랑), 卒本(졸본)과 국경을 정하였다. 가을, 召西奴(소서노)를 맞아들여 妃(비)로 삼았다.

 

東明元年 甲申(二二九七) 二月 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献 順奴卒本之民推上爲皇帝 卽位於沸流谷西城山(勃利縣 二龍山) 國號高句麗 建元曰東明 命漢素造船鄭共製兵馬黎畜馬(皆漢人也) 末曷大擧入寇 上親征斬首千級 五月 訪松讓于沸流(湯原 與沸流谷異?) 以德義曉之 妄稱仙族而不屈 遂奪其珍宝妻子而來 七月 松讓入寇 破之 虜獲二千口 約貢而示縱 八月 鍊于汗濱(三姓) 皈者二千余人 十月 祀隧祭豊 扶餘鳩含麥而來 十一月 與黃龍定界 割箕丘(老岺)以東 羊吉以女妻烏伊 徵其民以築真珠城(珠河)

東明(동명) 元年(원년), 甲申(갑신, BC37년, 단기2297년) 2월, 卒本王(졸본왕) 延陀勃(연타발)이 죽었다. 召西奴(소서노)는 나라를 (추모에게) 바쳤다. 順奴(순노)와 卒本(졸본)의 백성들은 상을 추천하여 皇帝(황제)로 삼았다. 沸流谷(비류곡) 西城山(서성산, 勃利縣(발리현) 二龍山(이룡산))에서 즉위하였다. 國號(국호)는 高句麗(고구려), 연호를 만드니 東明(동명)이라 하였다. 漢素(한소)에게 명하여 배를 만들게 하였고, 鄭共(정공)은 병장기를 만들게 하였고, 馬黎(마려)는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모두 漢人(한인)들이다). 末曷(말갈)이 크게 일어나 침략하여 왔다. 상은 친히 정벌하여 머리 천여급을 베었다. 5월, 松讓(송양)을 沸流(비류,湯原(탕원), 沸流谷(비류곡)과 다르다?))에서 만났는데, 德義(덕의)로서 타일렀으나, 망령되게 仙族(선족)이라 칭하며 굴복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그의 진귀한 보물과 처자식을 빼앗아 왔다. 7월, 松讓(송양)이 쳐들어 와서 이를 깨뜨렸다. 2천여명을 노획하였고, 세공을 약속받고 七縱(칠종)의 뜻을 베풀었다. 8월, 汗濱(한빈, 三姓(삼성))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니, 래귀자들이 2천여명이나 되었다. 10월, 神隧(신수)에게 제사하였고, 풍년을 빌었다. 扶餘鳩(부여구)가 보리를 입에 물고 왔다. 11월, 黃龍(황룡)과 국경을 정하였는데, 箕丘(기구, 老岺(노령))의 동쪽 땅을 빼앗아 나누었다. 羊吉(양길)은 딸을 烏伊(오이)에게 시집보냈다. 그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真珠城(진주성, 珠河(주하))을 쌓았다.

 

二年 乙酉 正月 徵黃龍馬三千匹 鍊于中川(拉林河) 羊吉憂惧死 二月 桓那國(吉林)女主桂婁來降 納爲夫人 四月 召后生子沸流 爲人多情而懦弱 六月 松讓懸鹿 漂都 以國來献 封爲多勿候(多勿故鄕之意 解慕漱之地也) 七月 黃龍男三千爲軍 女五千爲婢 冶工三十所兵船二百成 八月 烏伊等伐河北(今通河 木萌巴彦 以北地)鞨 平之 以其地爲湯西(鐵驪界)質山(綏化界)二郡 樹木塹天 獐鹿無盡 乃鍊兵而畋之 畜神馬五十匹於石河(七虎力河)  漢京房以易進 石顯殺之

2년, 乙酉(을유) (BC36년) 1월, 黃龍國(황룡국)의 말 3천필을 징발하여 中川(중천, 拉林河)에서 훈련하자, 羊吉(양길)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죽었다. 2월, 桓那國(환나국, 吉林) 女主(여주) 桂婁(계루)가 항복하여 오자, 맞아들여 夫人(부인)으로 삼았다. 4월, 召后(소후)는 沸流(비류)를 낳았다. (비류의) 사람됨은 정이 많고 懦弱(유약)하였다. 6월, 松讓(송양)은 懸鹿(현록)하여, 도읍이 떠내려 가니, 나라를 바쳐 왔다. 封(봉)하여 多勿候(다물후, 多勿은 故鄕의 뜻, 解慕漱의 땅이였다)로 삼았다. 7월, 黃龍國(황룡국)의 남자 3천명을 軍(군)으로 삼았고, 여자 5천명을 婢(비)로 삼았다. 冶工(야공, 대장간) 30개소와 兵船(병선) 200개가 완성되었다. 8월, 烏伊(오이)등은 河北(하북, 今通河 木萌巴彦 以北地)의 鞨(갈)을 쳐서 평정하였다. 그 땅을 湯西(탕서, 鐵驪界)와 質山(질산, 綏化界) 두 郡(군)으로 삼았다. 樹木(수목)이 塹天(참천, 천연의 해자)이 되었고, 노루와 사슴이 무진장 많았다. 이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사냥을 하였다. 石河(석하)에서 神馬(신마) 50필을 길렀다. 漢(한)나라의 京房(경방)은 易(역)으로서 나아갔으나, 石顯(석현)은 그를 죽였다.

 

*塹 해자 참, 낮을 점 (2) [명사] 도랑. 해자(垓字).
     天堑; 천연의 해자[요새]


三年 丙戌 三月 二龍見于鶻岺(西湖景) 相都 未營 十月 祀隧 群鳩播麥于神田 桂婁生子高婁 爲人尙義忠孝 陛為小后 十二月 宝得(黃龍主)女禾爲妃 召祖天于河濱(哈爾濱) 不來

3년, 丙戌(병술) (BC35년) 3월, 鶻岺(골령, 西湖景)에서 두 龍(룡)이 나타났다. 도읍을 골랐으나 만들지는 않았다. 10월, 神隧(신수)에게 제사하였다. 群鳩(군구, 비둘기떼)가 神田(신전)에다 보리를 뿌렸다. 桂婁(계루)는 아들 高婁(고루)를 낳았다. 사람됨은 의를 숭상하고 忠孝(충효)가 있었다. 陛(폐)하여 小后(소후)로 삼았다. 12월, 宝得(보득, 黃龍主)의 딸 禾(화)를 妃(비)로 삼았다. 祖天(조천)을 河濱(하빈, 哈爾濱)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四年 丁亥 正月 伐湯東(烏屯河上流地方)鞨十部落 逐于水(黑龍江)外 與樂浪主柴吉獵于河南(富錦) 七月 宮室成 茅茨土階 九月 禾妃生子乙豆智 以柴吉女柴花妻陜父

4년, 丁亥(정해) (BC34년) 1월, 湯東(탕동, 烏屯河上流地方)과 鞨(갈) 10개 부락을 쳐서 水(수, 黑龍江)밖으로 쫓아 내었다. 樂浪主(낙랑주) 柴吉(시길)과 함께 河南(하남, 富錦)에서 사냥하였다. 7월, 宮室(궁실)이 완성되었다. 띠지붕과 흙계단으로 이루어졌다. 9월, 禾妃(화비)는 乙豆智(을두지)를 낳았다. 柴吉(시길)의 딸 柴花(시화)을 陜父(협보)에게 시집보냈다.

 

*茅茨土階(모자토계)= 띠지붕과 흙계단, 소박하고 검소한 거처.


五年 戊子 正月 召后生子溫祚 爲人英偉有智 上曰 “此真吾子也 沸流猶汝而溫順 此子猶我而豪爽” 后笑曰 “皆汝出也 何有真乎” 設漢舘以敎民 幸羅淵(拉▲) 拿荇騎 探其虛實

5년, 戊子(무자) (BC33년) 1월, 召后(소후)는 아들 溫祚(온조)를 낳았다. 사람됨은 英偉(영위)하였고, 지혜가 있었다. 상이 말하길, "이는 진짜 내 아들이구나. 沸流(비류)는 당신을 닮아 溫順(온순)하지만, 이 아들은 나를 닮아 豪爽(호상)하구나" 라고 하였다. 召后(소후)는 웃으면서 말하길, "모두 당신의 소생입니다. 어찌 진짜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漢舘(한관)을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다. 羅淵(라연, 拉▲)으로 행차하여, 荇人國(행인국)의 기병을 잡아서, 그들의 허실을 찾았다.

 

六年 乙丑 正月 桂后生女曼 五月 幸質陽(通江) 沿滸(中蘭河)作站 而攻祖天 遁于北棘(克山) 七月 芬奴定荇南(란安遠等地) 進駐滸原(與通錢) 天都也 黃龍修文而沈酒 荇人好仙而荒淫 十月 拔北棘天走海山(仙人山) 以荇人國爲荇東荇西荇南三郡

6년, 乙丑(을축) (BC32년) 1월, 桂后(계후)는 딸 曼(만)을 낳았다. 5월, 質陽(질양, 通江)으로 행차하였다. 

 

七年 庚寅 三月 定官秩一品公(三輔) 紫袖金花銀魚 二品大卿(主兵刑民宮穀) 紫衫金花銀魚 二品次卿(主神寅藥農畜) 紫衫銀花銀魚 三品小卿(大注簿 大將軍 大使者 大對盧) 紫衫銀花銅魚 四品上大夫(于台沛者将軍大仙人大評者) 緋衫銀花銅魚 五品中大夫(都尉仙人使者評者) 同而雉花等 四月 勸農 八月 虜句茶(海龍) 王閃尼(女主) 十月 親行隧祭(祭天) 置郊豕神鹿 十月 桂皇后以創毒崩 上慟哀之 作吾妻曲 后能騎射 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真珠山(珠河) 子高娄曼公主皆賢 是年召后始養蚕 得絹綴?織之 以為帝依

7년, 庚寅(병인) (BC31년) 3월,

 

八年 辛卯 正月 沿黑水(黑龍江)立亭 黃龍主宝得殂 于仁(從弟)立 八月 卑離(西扶餘)紫蒙(鮮卑)來貢 十月 不豫簡政

8년, 辛卯(계사) (BC30년) 1월, 黑水(흑수, 黑龍江)가에 정자를 세웠다. 黃龍主(황룡주) 宝得(보득)이 죽었다. 于仁(우인, 從弟)이 즉위하였다. 8월, 卑離國(비리국, 西扶餘)과 紫蒙國(자몽국, 鮮卑)이 와서 조공하였다. 10월, 몸이 편치 않아서, 정사를 간소히 하였다.


九年 壬辰 五月 柵城巫來 類利弹雀 十月 烏伊等伐北沃沮(猶太人自治州) 破十二部落 召后生馬公主 問禮后事

9년, 壬辰(임진) (BC29년) 5월, 柵城(책성)의 무당이 왔다. 類利(유리)가 참새를 쏘았다. 10월, 烏伊(오이)등은 北沃沮(북옥저, 猶太人自治州)를 쳐서, 12개 部落(부락)을 깨뜨렸다. 召后(소후)는 馬公主(마공주)를 낳았다. 禮后(예후)의 일에 대해 물었다.

 

十年 癸巳 二月 營西都(阿城)于鴨水(阿什) 以質朴爲主 九月 白鸞来集西都王臺 故名之曰鸞臺 上與召皇后居之 十一月 尉厭(芬奴弟)馬黎菸狗等伐北沃沮 拓地千餘里 以其生口八萬 置於杜訥原(伯杜訥之西北)之西 名曰梁貊谷(洮南大賚開通之間)
10년, 癸巳(계사) (BC28년) 2월, 鴨水(압수, 阿什(아집))에 西都(서도, 阿城(아성))을 만들었는데, 質朴(질박)을 主(주)로 하였다. 9월, 白鸞(백란)이 西都(서도)의 王臺(왕대)에 모여들었다. 그래서, 鸞臺(란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상은 召皇后(소황후)와 함께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11월, 尉厭(위염, 芬奴弟(부분노의 동생))과 馬黎(마려)와 菸狗(어구)등이 北沃沮(북옥저)를 쳐서 1,000여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그 生口(생구) 8만명을 杜訥原(두눌원, 伯都訥之西北(백도눌의 서북))의 서쪽에 두었는데, 梁貊谷(양맥곡, 洮南大賚開通之間)이라 이름하였다.

 

*質朴(질박)= ①꾸밈이 없고 고지식함 ②수수함


十一年 甲午 五月 幸梁貊谷 遇卑離主素奴相見 以其不敬拿來東都 松讓妄稱北扶余之仙宗 素奴妄稱嫡孫 拒垦其谷 故伐之 八月 烏伊拔不而城(洮南) 徙其大姓於湯東 以烏伊爲其假王 十二月 烏干(伊弟)馬黎等伐長岺(長岺)高顯(▲柳)  以毒氣軍多傷
11년, 甲午(갑오) (BC27년) 1월, 梁貊谷(양맥곡)에 행차하였다. 우연히 卑離主(비리왕) 素奴(소노)를 相見(상견)하였으나, 그가 不敬(불경)하여 東都(동도)로 잡아 왔다. 松讓(송양)은 망령되게 北扶余(북부여)의 仙宗(선종)이라고 칭하고, 素奴(소노)는 망령되게 嫡孫(적손)이라고 칭하였다. 그 계곡을 개간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므로, 그들을 쳤다. 8월, 烏伊(오이)는 不而城(불이성, 洮南)을 빼앗았다. 湯東(탕동)으로 그 大姓(대성)을 옮겼다. 烏伊(오이)를 그곳의 假王(가왕)으로 삼았다. 12월, 烏干(오간, 烏伊의 동생)과 馬黎(마려)등은 長岺(장령, 長岺)과 高顯(고현, ▲柳)을 쳤다. 毒氣(독기)로 군사들이 많이 상하였다.

 

*拿 잡을 나. ㉠잡다

*垦 개간할 간, (땅을)일구다, 개간하다. 개척하다.


十二年 乙未 正月 親至長岺 觸氣而還 七月 親征西河(長春)拔之 本黃龍地 與長岺共反者也 使尉厭守之 幷伐長岺 九月 禾妃生羊太子 為小后 十月 摩離拔海山 虜祖天 上謂天曰 “黃龍文而淫 汝國仙而淫 文仙皆好道 過卽敗 食色皆好道 過卽傷 汝知之乎” 天叩頭請命 命居湖上養氣

12년, 乙未(을미) (BC26년) 1월, 친히 長岺(장령)에 이르렀으나, 毒氣(독기)에 접촉되었기에 돌아왔다. 7월, 친히 西河(서하, 長春)를 정벌하여 빼앗았다. 본래 黃龍國(황룡국)의 땅이였다. 長岺(장령)과 함께 같이 반란한 자들이였다. 9월, 禾妃(화비)는 羊太子(양태자)를 낳았고, 小后(소후)가 되었다. 10월, 摩離(마리)는 海山(해산)을 쳐서 빼앗고, 祖天(조천)을 사로잡았다. 상이 祖天(조천)에게 말하길, "黃龍國(황룡국)의 文(문)은 음란하고, 너희 나라의 仙(선)은 음란하다. 文(문)과 仙(선)은 모두 좋은 道(도)이지만, 지나치면 敗(패)하게 된다. 食(식)과 色(색)은 모두 좋은 道(도)이지만, 지나치면 傷(상)하게 된다. 너는 그것을 아는가?" 라고 하였다. 祖天(조천)은 머리를 조아리며 命(명)을 청하였다. 湖上(호상)에서 거주할 것을 명하고, 養氣(양기)하도록 하였다.

 

十三年 丙申 二月 烏伊拔高顯 五月 尉厭拔南口 以乙音為玄菟太守 以營南口 音召皇后外兄也 納造船大加漢素女平氏爲夫人 九月 播麥于西河 與平氏如溫湯(九臺) 十月 畋于杜訥原 置鯉宅十所(養鯉之沼兼造陶器 故以窯爲鯉宅) 召后與諸妃公主 習羹
13년, 丙申(병신) (BC25년) 2월, 烏伊(오이)가 高顯(고현)을 빼앗았다. 5월, 夫尉厭(부위염)은 南口(남구, 遼源)을 빼앗았다. 乙音(을음)을 玄菟太守(현도태수)로 삼아서, 南口(남구)를 운영하였다. 乙音(을음)은 召皇后(소황후)의 外兄(외형, 손위 처남)이며, 造船大加(조선대가) 漢素(한소)의 딸 平氏(평씨)을 夫人(부인)으로 삼았다. 9월, 西河(서하)에서 보리를 심었고, 平氏(평씨)와 함께 溫湯(온탕, 九臺)에 갔다. 10월, 杜訥原(두눌원)에서 사냥하였다. 鯉宅(리택) 10곳을 설치하였다(鯉을 養하는 沼, 겸하여 陶器를 만들었으므로 窯(요, 가마)를 鯉宅(리택)이라고 함). 召后(소후)는 여러 妃(비)와 公主(공주)와 함께 羹(갱, 국) 만들기를 익혔다.

 

十四年 丁酉 二月 祖天荇南沛者 八月 柳花太后崩于柵城 擧哀于東都 遣仇都松義吊賻 作像 立聖母神廟于南岺(龍瓜溝岺)
14년, 丁酉(정유) (BC24년) 2월, 祖天(조천)을 荇南沛者(행남패자)로 삼았다. 8월, 柳花太后(유화태후)가 柵城(책성)에서 죽었다. 東都(동도)에서 擧哀(거애)하였다. 仇都(구도)와 松義(송의)를 보내 吊賻(조부)하였다. 像(상)을 만들고, 南岺(남령, 龍瓜溝岺)에 聖母神廟(성모신묘)를 세웠다.


十五年 戊戌 五月 東巡至楽浪浮海 柴吉納女鵲 八月 閱神馬二千匹于汗濱 以馬黎敎溫祚 上與召后時徃聼之
15년, 戊戌(무술) (BC23년) 5월, 동쪽으로 순행하여 楽浪(낙랑)에 이르러 海(해)를 건너니, 柴吉(시길)은 딸 鵲(작)을 바쳤다. 8월, 神馬(신마) 2천필을 汗濱(한빈)에서 사열하였다. 馬黎(마려)로 하여금 溫祚(온조)를 가르치게 하였다. 상은 召后(소후, 소서노)와 함께 종종 가서 이를 경청하였다.

 

*추모경下 동명 15년
五月 上東巡至楽浪浮海 納柴吉女鵲氏爲夫人 盖陜夫之請也
5월, 상은 동쪽으로 순행하여 楽浪(낙랑)에 이르러 海(해)를 건너서, 柴吉(시길)의 딸 鵲氏(작씨)을 맞아들여 夫人(부인)으로 삼았다. 모두 陜夫(협보)의 요청이였다.

 

十六年 己亥 正月 多勿候松讓薨 平氏生女漢

16년, 己亥(기해) (BC22년) 1월, 多勿候(다물후) 松讓(송양)이 죽었다. 平氏(평씨)가 딸 漢(한)을 낳았다.


十七年 庚午 八月 行聖母祭 解素(柳花所生 金蛙子)送禮后及類利

17년, 庚午(경오) (BC21년) 8월, 聖母祭(성모제)를 거행하였다. 解素(해소, 柳花 소생으로 金蛙의 아들)는 禮后(예후)와 類利(유리)를 보냈다.

 

十八年 辛丑 五月 御馬巨婁死 六月 禾后崩 春秋三十三 葬于桂后塚西 十月 上與禮后類利 謁神隧 召皇后退居牛壤(穆稜姑?)

18년, 辛丑(신축) (BC20년) 5월, 御馬(어마) 巨婁(거루)가 죽었다. 6월, 禾后(화후)가 죽으니, 춘추 33살이였다. 桂后(계후)의 무덤 서쪽에 장사했다. 10월, 상은 禮后(예후), 類利(유리)와 함께 神隧(신수)에게 제사하였다. 召皇后(소황후)는 牛壤(우양, 穆稜姑?(목릉고?))으로 퇴거하였다.

 

*牛壤(우양)의 주석부분을 穆稜姑?로 정정.


十九年 壬寅 正月 以類利爲東宮 二月 鵲氏生鵲太子 四月 上崩於西都 東宮卽位 仙記曰 “上不樂居位 傳釼璽于東宮"  九月 乘龍上天 遺棄玉鞭処為龍山陵 禮后生女再思

19년, 壬寅(임인) (BC19년) 1월, 類利(유리)를 東宮(동궁)으로 삼았다. 2월, 鵲氏(작씨)는 鵲太子(작태자)를 낳았다. 4월, 상이 西都(서도)에서 죽었다. 東宮(동궁)이 즉위하였다. 仙記(선기)에서 말하길, "상은 왕의 자리가 즐겁지 않아서 보검과 옥새를 東宮(동궁)에게 전해주었다" 고 하였다. 9월,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옥채찍을 버리고 남긴 곳이 龍山陵(용산릉)이 되었다. 禮后(예후)는 딸 再思(재사)를 낳았다.

 

論曰 "東明以不世出之英主 年未四十 席卷東土 開七百年之基 可謂聖矣 後之阿骨打忽必烈亦有所不及処矣 但其尙屬未開之初 后妃之制未爽 貽弊於後 急於創業 未克其壽 惜矣"

論(론)하길, "東明(동명)은 不世出(불세출)의 英主(영주)로서 나이 40살이 되기도 전에 東土(동토)을 席卷(석권)하여 700년의 기초를 열었으니, 가히 성인이라 할만하다. 후세의 阿骨打(아골타(금나라 시조))나 忽必烈(홀필렬(원나라 쿠빌라이))도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다만 그 풍속이 未開(미개)의 初(초)에 속하여, 后妃(후비)의 제도가 맑지 않아 후세까지 폐단을 끼쳤고, 創業(창업)에 급하여 그 수명을 다 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尙= 풍습,풍조

*貽(이)= ㉠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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