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臨尼今紀(기림니금기) 1年~7年

基臨尼今紀(기림니금기) 1년, AD364년

라디오에요 2010. 5. 16. 06:27

 

 

基臨尼今紀(기림니금기)

元年 十二月 大赦天下
원년(AD364년) 12월, 天下(천하)를 크게 사면하였다.

 

以印觀署調爲市典評吏 印嘗以綿換署豆 歸有大鳶攬其綿 而墮其歸路 印以其已賣歸于署 署曰 “鳶攫而歸之 天也 不可受” 印乃歸豆 亦不受 曰 “已賣之物 非吾有也 不可受” 二人相讓 棄而去 市人義之 亦無取者 故乃納于樹王 帝聞之曰 “如此之人可以評市” 乃授之
印觀(인관)과 署調(서조)를 市典評吏(시전평리)로 삼았다. 印觀(인관)은 일찍이 솜을 署調(서조)의 콩과 바꾸었다. (署調(서조)가) 돌아가는 길에 큰 솔개가 있어, 그의 솜을 낚아채어, 印觀(인관)의 歸路(귀로)에 떨어뜨렸다. 印觀(인관)은 그것을 이미 팔았기에 署調(서조)에게 돌려 주었다. 署調(서조)가 말하기를 “솔개가 솜을 낚아채어 그대에게 돌려준 것은 하늘의 뜻이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印觀(인관)이 이에 콩을 돌려주자 역시 받지 않았다. 署調(서조)가 말하기를 “이미 판 물건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여 (물건을) 버리고 떠나갔다. 市人(시인)들이 그것을 의롭게 여겼고 또한 취하는 자가 없으므로 곧 樹王(수왕)에게 바쳤다, 帝(제)가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들은 評市(평시)할만하구나” 라고 하며, 이내 (관직을) 내려주었다.

 

*明心寶鑑(명심보감) 廉義篇(염의편)에 나오는 印觀(인관)과 署調(서조)의 이야기.

동사강목에는 儒禮泥師今(유례이사금) 말년에 나오며, 삼국사절요에도 나옴.

 

*신라본기 기림이사금 원년, AD298년.

基臨一云基立尼師今立 助賁尼師今之孫也 父乞淑伊 助賁之孫也 性寬厚 人皆稱之

기림 이사금(基臨尼師今)<[기림(基臨)을] 또는 기립(基立)이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로 아버지는 이찬 걸숙(乞淑)이다. <또는 걸숙을 조분왕의 손자라고도 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厚)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AD364년- AD298년= 66년 편차.

 

 

*삼국사절요 권4
무오년(戊午年; 298년), 신라 유례왕 15년, 기림왕 원년, 고구려 봉상왕 7년, 백제 책계왕 13년, 분서왕 원년 진(晉)나라 원강 8년
봄 2월, 신라 서울에 큰 안개(大霧)가 끼어 5일 동안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9월, 고구려에서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치니 백성들이 굶주렸다.

○맥인(貊人)이 백제를 침범하니, 백제왕 책계(責稽)가 나아가 방어하다가 적병(敵兵)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장자(長子) 분서(汾西)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표(儀表)가 빼어나고 곧아서 왕이 사랑하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겨울 10월, 백제에서 죄수를 대사(大赦)하였다.

○고구려왕이 궁실(宮室)을 증축(增築)하여 온갖 사치를 다하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괴로와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간곡히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10월, 고구려왕이 돌고(咄固)의 아들 을불(乙弗)을 죽이려고 백방으로 찾았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신라에 인관(印觀)․서조(署調)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인관이 저자에서 면포(綿布)를 팔기에 서조가 곡식을 주고 면포를 사서 돌아오는 도중에 홀연히 소리개가 나타나 그 면포를 낚아채서 인관의 집에 떨어뜨렸다. 이에 인관이 면포를 가지고 저자에 가서 서조에게 이르기를, "소리개가 너의 면포를 낚아채 우릴 집에 떨어뜨렸기에 이제 너에게 면포를 돌려준다.?" 하니, 서조가 말하기를, "소리개가 면포를 낚아채 너에게 준 것은 하늘에서 한 일이니 내가 어찌 받겠는가??" 하였다. 인관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에게 곡식을 돌려주겠다.?" 하니, 서조가 말하기를, "내가 저자에서 너에게 곡식을 준 지 이미 이틀이나 되었으니 곡식은 너에게 속한 것이다.? " 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으니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다가 그 물건을 저자에 버리고 돌아갔다. 장시관(掌市官)이 이 사실을 위에 보고하니 왕이 두 사람에게 모두 벼슬을 내렸다.
○12월, 신라왕 유례(儒禮)가 훙(薨)하고, 기림(基臨)이 즉위하였다. 기림은 조분왕(助賁王)의 손자요, 걸숙(乞淑)의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