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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卑弥呼の没年を248年頃とする誤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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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の謎を解く鍵は、卑弥呼が没した年と、台与が即位した年にあります。
ところが、学界の常識では、残念なことに、そこのところがハッキリしてい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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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志倭人伝」の終わりには、魏朝による親魏倭王卑弥呼に関する記録らしい、
年代を明記した記事が載っています。
だから、その記事を見れば、卑弥呼が247年(正始8)に死んだことが分かるのです。
参考までに、それらの記事の概略を記してみましょう。
239年 6月 卑弥呼の使者難升米らが、帯方郡に朝見を願い出る。
太守劉夏は、役人を遣わして、都まで送らせる。
12月 卑弥呼を親魏倭王とし、帯方郡の太守の手を通して金印を授ける旨の
詔書が出る。
このときの卑弥呼への贈り物の中に、銅鏡100枚が含まれている。
卑弥呼の使者2人は、銀印を授かる。
240年 劉夏と交替した帯方郡太守弓遵が、卑弥呼に金印を届ける使者を派遣する。
243年 卑弥呼が、再び、掖邪狗ら8人を魏に遣わして朝貢する。
卑弥呼の使者8人は、いずれも銀印を授かる。
245年 帯方郡太守の手を通して難升米に黄幢を授ける旨の詔書が出る。
247年 (1)韓族討伐戦で戦死した弓遵の後釜に、
帯方郡太守として、王キ(斤頁)が着任する。
(2)卑弥呼は、帯方郡に使者を派遣し、
狗奴国の男王との交戦の状況を説明させる。
(3)帯方郡太守王キは、張政らを遣わして、詔書と黄幢を難升米に授け、
檄文によって告諭する。
248年 (4)この頃卑弥呼が死んだ。直径100歩余りの塚を作り、
100人余りの奴隷を殉葬する。
(5)あらためて男王を立てたが、国中が服従せず、殺し合いになり、
1000人以上殺す。
(6)そこで、卑弥呼の血縁の台与という13歳の少女を王にすると、
国がようやく治まる。
張政らは、檄文によって、台与に告諭する。
(7)台与は、掖邪狗ら20人を遣わして、帰国する張政らを送らせ、
さらに、その20人の使者を魏の宮殿へ行かせて、朝貢させる。
(1)から(7)までの出来事が、全て247年に起こったとは考えにくいので、
歴史学研究会編『日本史年表』(同前)では、(1)から(3)までが247年の出来事とし、
(5)から(7)までが248年の出来事としています。
ただし、その境目に位置する卑弥呼の死については、248年と決めてしまわず、
「この頃、卑弥呼死す」と、曖昧に記しています。
悪いことに、この年表を見て、卑弥呼の没年を248年と誤解する向きが、少なくないようです。
(後述するように、そのため卑弥呼の死と日食を結びつける研究が台無しになっています)
1-3히미코의 몰년을 248년경으로 하는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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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서기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히미코가 잠긴 해와 대여가 즉위 한 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 학계의 상식에서는, 유감스럽게, 거기의 곳이 분명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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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왜인전」의 마지막에는, 위조에 의한 친위 야마토왕히미코에 관한 기록한 것같은,
연대를 명기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사를 보면, 히미코가 247년(정시 8)에 죽은 것을 압니다.
참고까지, 그러한 기사의 개략을 적어 봅시다.
239년 6월 히미코의 사자난승미 등이, 대방군에 배알을 신청한다.
태수류하는, 공무원을 보내고, 수도까지 보내게 한다.
12월 히미코를 친위 야마토왕으로 해, 대방군의 태수가 손을 통해 금표를 하사하는 취지의 조서가 나온다.
이 때의 히미코에게의 선물안에, 청동제의 거울 100매가 포함되어 있다.
히미코의 사자 2명은, 은표를 내려 주신다.
240년류하와 교체한 대방군 태수궁준이, 히미코에게 금표를 보내는 사자를 파견한다.
243년 히미코가, 다시, 액사구등 8명을 위에 보내 조공 한다.
히미코의 사자 8명은, 모두 은표를 내려 주신다.
245년 대방군 태수가 손을 통해 난승미에 황당을 하사하는 취지의 조서가 나온다.
247년(1) 한족토벌전에서 전사한 궁준의 후임에게,
대방군 태수로서 왕키(근 페이지)가 착임 한다.
(2) 히미코는, 대방군에 사자를 파견해,
구나노쿠니의 남왕과의 교전의 상황을 설명시킨다.
(3) 대방군 태수왕키는, 장정등을 보내고,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 하사해
격문에 의해서 고유 한다.
248년(4) 요즘 히미코가 죽었다. 직경 100보 넘치는 총을 만들어,
100명 남짓의 노예를 순장 한다.
(5) 재차 남왕을 세웠지만, 국중이 복종하지 않고, 살인이 되어,
1000명 이상 죽인다.
(6) 거기서, 히미코의 혈연의 대여라고 하는 13세의 소녀를 왕으로 하면,
나라가 간신히 다스려진다.
장정등은, 격문에 의해서, 대여에 고유 한다.
(7) 대여는, 액사구등 20명을 보내고, 귀국하는 장정등을 보내게 해
게다가 그 20명의 사자를 위의 궁전에 가게 해서, 조공 시킨다.
(1) (으)로부터(7)까지의 사건이, 모두 247년에 일어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사학 연구회편 「일본사 연표」(전과 동일)에서는, (1)로부터(3)까지가 247년의 사건으로 해,
(5) (으)로부터(7)까지가 248년의 사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경계선에 위치하는 히미코의 죽음으로 붙어서는, 248년으로 결정해 버리지 않고,
「요즘, 히미코사스」라고, 애매하게 적고 있습니다.
나쁜 것에, 이 연표를 보고, 히미코의 몰년을 248년으로 오해하는 방향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후술 하도록(듯이), 그 때문에 히미코의 죽음과 일식을 묶는 연구가 엉망이 되어 있습니다)
ところで、もしあなたが、「魏志倭人伝」を書くとすれば、誰を一番大きく扱いますか。
当然、親魏倭王卑弥呼であって、張政を倭国に派遣した帯方郡太守王キではないはずです。
魏朝の記録係も、「魏志倭人伝」を書いた陳寿も、無論そうしています。
だからこそ、卑弥呼の死亡記事に、大規模に作られた塚の直径は100歩余りもあり、
100人余りもの奴隷が殉葬された、と書き添えているわけです。
それゆえ、247年(正始8)という年代は、王キが着任した年に主眼があるのではなく、
卑弥呼が死んだ年を表すために記されたものであることは、いうまでもありません。
また、「黄幢を授ける旨の詔書」が軽々しく出されないいことと、なぜ「詔書と黄幢を難升米に授けた」かを考えてみれば、(2)は247年の出来事ではないことが分かります。
なぜなら、「詔書と黄幢を難升米に授けた」のは、卑弥呼が、帯方郡に使者を派遣し、
狗奴国の男王との交戦の状況を説明させたからです。
245年に、帯方郡太守の手を通して難升米に黄幢を授ける旨の詔書が出たのは、
卑弥呼が、それ以前に帯方郡に使者を派遣し、狗奴国の男王との交戦の状況を説明させたからです。
「黄幢を授ける旨の詔書」が出るということが、わずか2年後の247年に繰り返されることはありえません。だから、卑弥呼が狗奴国との交戦の状況を説明させたのも247年の出来事ではないわけです。
245年、すなわち、難升米に授ける詔書と黄幢が帯方郡太守のもとに届いた年、弓遵は、「嶺東のワイ(シ歳)が高句麗の支配下に入ったことから、軍をおこしてこれを攻めた」
と、「魏志ワイ伝」にあります。
さらに、「魏志韓伝」によると、弓遵は、帯方郡の兵営を攻撃した韓族討伐戦において戦死しています。
それゆえ、詔書と黄幢が届いたとき、弓遵は帯方郡を留守にしていたか、あるいは、すでに戦死していたのです。
難升米に黄幢を授けるのが247年にずれ込んだのは、そのためです。
以上で明らかになった通り、(2)は247年の出来事に関する記録ではなく、届けるのが2年遅れた、難升米への詔書と黄幢について、それが下された理由を説明している文なのです。
そこで、「倭国伝」(学習研究社)の書下し文、「卑弥呼以(すでに)死し、大いに冢(つか)をつくる、径百余歩なり。殉葬する者奴婢百余人なり」を採用すれば、
上の年表は次のように修正できます。
(2)卑弥呼は、帯方郡に使者を派遣し、
狗奴国の男王との交戦の状況を説明させる。
245年 (2)に応えて、帯方郡太守の手を通して難升米に黄幢を授ける旨の詔書が出る。
247年 (1)韓族討伐戦で戦死した弓遵の後釜に、
帯方郡太守として、王キ(斤頁)が着任する。
(3)帯方郡太守王キは、張政らを遣わして、詔書と黄幢を難升米に授け、
檄文によって告諭する。
このように、(2)の位置を入れ替えて、難升米に黄幢を授ける旨の詔書が出た理由を明らかにすれば、「魏志倭人伝」の年代付きの記事の意味がよく通り、
卑弥呼は247年に死んだことがはっきりしてきます。
けれども、(2)の位置を入れ替えるという修正は、後に述べる「春秋の筆法」でも持ち出さない限り、恣意的な操作としか受け取れず、我田引水と映るに違いありません。
しかし、おいおい分かるように、卑弥呼の没年=247年、台与の即位=248年
と割り切ることが日本書紀の謎を解く鍵になるのです。次に紹介する「倭の女王の交替と日食および岩戸隠れ」も、この鍵がなければ理解できないのです
그런데, 만약 당신이, 「위지왜인전」을 쓴다고 하면, 누구를 제일 크게 취급합니까.
당연, 친위 야마토왕히미코이며, 장정을 야마토국에 파견한 대방군 태수왕키는 아닐 것입니다.
위조의 기록계도, 「위지왜인전」을 쓴 진수도, 물론 그렇게 해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미코의 사망기사에, 대규모로 만들어진 총의 직경은 100보나머지도 있어,
100명남짓 것 노예가 순장 되었다, 라고 첨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7년(정시 8)이라고 하는 연대는, 왕키가 착임 한 해에 주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히미코가 죽은 해를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된 것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황당을 하사하는 취지의 조서」가 경솔하게 나오지 않는 있어 일과 왜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 하사했다」인지를 생각해 보면, (2)는 247년의 사건은 아닌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 하사했다」 것은, 히미코가, 대방군에 사자를 파견해, 구나노쿠니의 남왕과의 교전의 상황을 설명시켰기 때문에입니다.
245년에, 대방군 태수가 손을 통해 난승미에 황당을 하사하는 취지의 조서가 나온 것은,
히미코가, 그 이전에 대방군에 사자를 파견해, 구나노쿠니의 남왕과의 교전의 상황을 설명시켰기 때문에입니다.
「황당을 하사하는 취지의 조서」가 나오는 것이, 불과 2년 후의 247년에 반복해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히미코가 구나노쿠니와의 교전의 상황을 설명시켰던 것도 247년의 사건은 아닌 것입니다.
245년, 즉, 난승미에 하사하는 조서와 황당이 대방군 태수의 앞으로 닿은 해, 궁준은, 「영동의 와이(시 나이)가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부터, 군을 부흥이라고 이것을 공격했다」라고 「위지와이전」에 있습니다.
게다가 「위지한전」에 의하면, 궁준은, 대방군의 병영을 공격한 한족토벌전에 있어 전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서와 황당이 닿았을 때, 궁준은 대방군을 부재중으로 하고 있었는지, 혹은, 벌써 전사하고 있었습니다.
난승미에 황당을 하사하는 것이 247년으로 늦어진 것은, 기타째입니다.
이상으로 밝혀진 대로, (2)는 247년의 사건에 관한 기록이 아니고, 보내는 것이 2년 늦은, 난승미에의 조서와 황당에 대해서, 그것이 내려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거기서, 「야마토국전」(학습연구사)의 책내림문, 「히미코이(벌써) 사 해, 많이 총(개인지)을 만드는, 경백여보 되어. 순장 하는 사람 노비백 다른 사람이든지」를 채용하면,
위의 연표는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습니다.
(2) 히미코는, 대방군에 사자를 파견해,
구나노쿠니의 남왕과의 교전의 상황을 설명시킨다.
245년(2)에 응하고, 대방군 태수가 손을 통해 난승미에 황당을 하사하는 취지의 조서가 나온다.
247년(1) 한족토벌전에서 전사한 궁준의 후임에게,
대방군 태수로서 왕키(근 페이지)가 착임 한다.
(3) 대방군 태수왕키는, 장정등을 보내고, 조서와 황당을 난승미에 하사해
격문에 의해서 고유 한다.
이와 같이, (2)의 위치를 바꿔 넣고, 난승미에 황당을 하사하는 취지의 조서가 나온 이유를 분명히 하면, 「위지왜인전」의 연대 첨부의 기사의 의미가 잘 통해, 히미코는 247년에 죽었던 것이 뚜렷해집니다.
그러나, (2)의 위치를 바꿔 넣는다고 하는 수정은, 후에 말하는 「춘추의 필법」에서도 꺼내지 않는 이상 자의적인 조작으로 밖에 받아 들이지 않고, 아전인수와 비칠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이봐 이봐 알 수 있도록(듯이), 히미코의 몰년=247년, 대여의 즉위= 248년이라고 결론 짓는 것이 일본 서기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됩니다. 다음에 소개하는「야마토의 여왕의 교체와 일식 및 동굴(문) 숨어」도, 이 열쇠가 없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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