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말기, 선비족의 대인으로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檀石槐란 인물이 있다.
그가 선비의 각부족들을 통합하여, 대인으로 즉위하고 난후, 흉노,오환,정녕등의 다른 부족들도 앞을 다투어 그의 수하로 들어오게 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게 된다.
흉노에 버금가는 강력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후한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인물이 바로 檀石槐인 것이다.
선비의 세력확장에 크게 위협을 느낀 후한의 단제는 단석괴를 꺾기위해 원정군을 보내게 되나, 대패를 당하게 되고, 단제의 후계자였던 霊帝의 원정군 역시 단석괴가 이끄는 선비군에게 연전연패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한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던 선비군도, 한가지 큰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극심한 식량난이었다.
그래서 단석괴는 비옥한 토지를 구하기 위해, 秦水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秦水지역은 사방에 강이 흐르고 있어, 식량으로 삼을 수 있는 물고기가 아주 많았지만, 선비족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술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식량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단석괴는 한가지 묘안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현지의 있는 倭人을 사로잡아 물고기를 잡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국 단석괴의 이 묘책으로 인해 선비족은 비로소 식량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위의 이야기는 중국사서에 나오는 단석괴에 대한 기술중 하나인데,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倭人의 등장이다.
기록에 나오는 秦水라는 곳은 현 북조선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이야기 되는데, 그렇다면 왜인은 조선반도의 북부지역에도 거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도대체, 왜인의 거주지역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였을까?
중국측의 기록을 보면, 고대 왜인들의 거주지역이 매우 광대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중국사서 산해경에는 왜가 연에 복속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모든 중국사서가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은, 삼한지역에도 왜인이 살았으며, 왜의 풍습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고 적어놓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論衡』에서는、倭는 중국의 남쪽 오월지방과 관련이 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주의 성왕치세에 왜의 사절의 조공에 대한 기사와 함께 실려있다.
이 시기는 기원전 11세기로, 일본의 시대구분에서는 죠몬시대 말기에서 야요이 시대 초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미, 왜는 중국의 왕조와 통교를 하고 있었으며, 그들 왜인은 중국의 오월지방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성리학이 크게 발달했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기자조선에서 찾으며 소중화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당대 일본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오나라의 왕족으로부터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것 역시도, 일본 성리학자들의 중화와 자신을 연관시키는 일종의 소중화의식이었다.
일본의 뿌리는 오나라에서 출발한다는 믿음의 근저에는 바로, 『論衡』의 기록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는듯 하다.
그동안 임나일본부설을 철저히 부정해온 한국의 학계는 조선반도에는 일체의 왜의 영향이란 없었다라고 강변해왔으나, 최근 일각에서는 반도내 왜인의 존재가능성을 긍정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하지만, 기록에 대한 고찰을 통해 보면, 고대 왜인의 거주지역은 그 이상이다.
중국측의 기록에 따르면, 왜인들은 조선반도 전역, 그리고 중국대륙의 남북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민족이었다.
왜인은 일본인의 선조로써, 일본열도라는 지리적 범주속에 이해되기 쉽지만 실체는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왜인, 그들은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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