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해 놓았던 유정님의 과거 글입니다.
저는 20대 젊은이에게 기대를 많이 걸고 있습니다.
예리한 시각과 남과 다른 시각으로 고대사의 비밀을 밣혀 줄 인물이 꼭 나타나리라 믿습니다.
위서론의 비난이 두렵다면 역사연구 관둬야죠. 그것을 다루기가 어렵다면 스스로 능력부족입니다.
권등성경의 후손을 찾는 날을 꿈꿉니다. 사서는 많습니다. 다만 찾지 않을 뿐입니다. 믿음의 힘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권등성경은 두가지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호태왕 탁본을 너무 믿었다는거와 삼국사기 기년을 믿었다는거죠.자신이 가진 사서와 달라 고민고민했겠죠.
그래서,유고집 기년과 약 30년의 연대편차가 납니다.
1922년(대정 11년), 일본에서 한 역사서 주석본이 일본왕실에 봉헌되고 또 출간되었습니다. 이름하여 남연서(南淵書). 여기에는 ‘小澤打魚·權藤成鄕 共校’라 하여 교주(校註)한 자들의 이름이 들어 있고, 저자는 ‘남연청안(南淵請安)’이라 했습니다.
남연청안(南淵請安)은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일본열도에 온 수나라의 사신 배세청(裴世淸)이 귀국시 학문승으로 동행하였다가(608년), 640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인물입니다.(아래 원문 ①, ② 참조) 이후 그는 일본에서 진행된 대화개신(大化改新)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인물로 사후 분서되어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저서만도 100여권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저서로 주장되는 이 남연서(南淵書)에는 그 당시 정국을 주도한 인물인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 후일의 天智天皇)와 남연청안간의 문답형식으로 진행된 그 이전 고대사에 대한 역사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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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 卷二二 推古天皇 十六年(608년) 九月
①이때 당(수나라)에 보낸 이는 학생 왜한직(倭漢直) 복인(福因), 통역 혜명(惠明), 고향한인(高向漢人) 현리(玄理), 신한인(新漢人) 대국(大圀, 학문승(學問僧) 신한인(新漢人) 일문(日文), 남연한인(南淵漢人) 청안(請安), 지하한인(志賀漢人) 혜은(惠隱), 신한인(新漢人) 광제(廣齊) 등 모두 8인이었다.
日本書紀 卷二二 推古天皇 十六年(608년) 九月
②(舒明 12년) 겨울 10월 을축삭 을해일(11일), 당에서 학문을 배우던 승려 청안(淸安), 학생 고향한인현리(高向漢人玄理)가 신라를 거쳐 이르렀다. 백제ㆍ신라의 조공사신이 함께 따라 왔는데, 그들에게 각각 관작(官爵) 1급(級)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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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본다면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서기나 고사기보다도 더 오래된 역사서가 세상에 출현한 것이니까요. 이름하여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가 될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충격적인 내용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대사, 특히 고구려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자구 해석상 논란이 대단히 많은 광개토호태왕비문이 결락 없이 온전한 형태로 확정될 수 있거나, 또는 그런 탁본이 발견된다면,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으며, 그저 꿈에서나 바라던 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연서 안에, 이 비문이 결락이 한 글자도 없는 완전한 형태로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비문의 글자수도 ‘壹千七百伍十玖字’라고 하여, 1,759자로 못박고 있었으니...
그러나 세상은 잠잠하였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33년(소화 8년) 어느 날, 동경제국대학 국사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흑판승미(黑板勝美, 구로이타 가쯔미)씨가 한 학생으로부터 이 남연서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대략“남연서에 실린 그 비문 진짭니까? 아니면 짜가...?”하는 정도의 질문이었을 겁니다.
정신을 번쩍 차린(?) 교수와 내노라하는 학자들 몇몇이 곧바로 비판에 들어갑니다. 신문에도 나고 하였으니 신경을 안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래 걸릴 것도 없이 결론은 위서(僞書). 그래서 이 책은 지금까지 명약관화한 위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위서라 하더라도 사실, 그 비문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책 내용 중에는,
臣昔奉攝政王[聖德太子, 교주]令旨, 西航. 當時謁慈師[惠慈 교주]於法興, 聞其說永樂太王碑, 枉路訪之高驪舊都. 碑高二丈, 南面聳立, 四周刻字, 通計壹千七百伍十玖字. 往往有苔蝕, 難讀者. 古樸可撫. 臣低徊其下, 細抄寫其文. 翫其義. 乃知永樂大王初, 高驪未與我和, 居然相持爲我一大勁敵也.[南淵書 中卷, 貢博第卄四]
라고 하여, 신라도(新羅道)를 통해 수나라로 들어갈 때, 그전에 이미 일본에 와 있던 고구려승 혜자(惠慈)로부터 이 ‘永樂太王碑’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행로 중에, ‘枉路訪之高驪舊都’라고 하여, 일부러 길을 돌아서 집안현을 방문하여 남연청안 자신이 직접 비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글자수를 확정하고, 세세하게 베껴왔다(細抄寫其文)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대목은, 이 남연서를 共校한 권등성경(權藤成卿)이라는 인물에 대한 것입니다. 이 사람(1868~1937년)은 그 생몰연대를 통해서도 알다시피 격동의 일제시대를 살다간 인물로, 저서도 제법 남긴 당대의 사상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남연서가 위서라면, 이 사람의 사상도 온통 엉터리일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이 남연서와 그 저자 남연청안을 언급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의 사상의 원류와 바탕을 바로 이 남연청안에 두고 있다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등성경(權藤成卿)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좀 길고 복잡한 편입니다. “農本主義者、アナキスト(아나키스트)、漢學者、復古主義者、東洋的無政府主義者、ファシスト(파시스트)、制度學者、皇典學者、ニヒリスト(니힐리스트)” 물론 이러한 평가 단어들이 이 인물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에 의해 세상에 나온 남연서(南淵書)에 담긴 사상, 또는 그에 의해 세상에 전파된 ‘東亜連邦構想’은 지금도 일본에서 ‘東亜連邦’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세력을 얻고 있으며, 이미 昭和維新이 일어난 당대의 ‘ひそかな バイブル(비밀스런 바이블)’로 채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위서로 판정난 책. 그러면 더 이상 들여다 볼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본학자들이랑 국내학자들이 1933년 이후 이 책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온전히 초사(抄寫)된 비문은 도대체 어떠한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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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권등성경(權藤成卿, 곤도 세이쿄우)의 저서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일본농제사담(日本農制史談)]을 제외하고는 전부 국가전자도서관에서 원문들을 보거나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일제시대 저작물들 중, 이 전자도서관에 신세지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단 검색어 선정에 유의해야 하며,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남연서(南淵書)와 훈역남연서(訓譯南淵書)의 차이는 전자가 손으로 쓴 것을 영인한 것이며, 후자가 활자본인데, 이것은 당시 일본어로 교주한 것이라 보기에는 순한문으로 된 전자가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자는 영인된 상태가 별로여서 잘 안보이는 글자들도 있습니다. [팔린통빙고(八隣通聘攷)]는 남연서를 펴낸 다음에, 권등성경이 설립한 ‘自治學會’회원들이 남연서를 당시 일본어로 완전히 풀어서 번역하고 설명을 가한 책입니다. 이것 역시 영인본과 활자본 두 종류가 있습니다.
[남연서(南淵書)] 上·中·下卷. 東京. 小澤打魚·權藤成卿 共校. 1922.10. 影印版.
[훈역남연서(訓譯南淵書)] 上·中·下卷. 小澤打魚·權藤成卿 校註增訂. 東京 : 大地社. 昭和7年(1932년). 活字本.
[팔린통빙고(八隣通聘攷)] 全五卷. 代々幡町(東京府). 昭和六年(1931년) 影印本.
[팔린통빙고(八隣通聘攷)] 全五卷. 東京 : 平野書房. 昭和8年(1933년). 活字本.
[황민자치본의(皇民自治本議)] 東京 : 小鳥文六, 大正9(1920년).
[자치민범(自治民範)] 東京 : 平凡社, 昭和2(1927년).
[군민공치론(君民共治論)] 東京 : 文藝春秋社, 昭和7(1932년).
[일본진재흉근고(日本震災凶饉攷)] 東京 : 文藝春秋社, 昭和7(1932년).
[자치민정리(自治民政理)] 東京 : 學藝社, 昭和11(1936년).
[농촌자구론(農村自救論)] 東京 : 文藝春秋社, 昭和7年(1932년).
[일본농제사담(日本農制史談)] 純眞社. 昭和6年(1931년).
그 외 권등성경에 대한 인물·사상 탐구서로,
[權藤成卿] 滝沢誠(다키자와 마코토)著. 東京 : 紀伊國屋書店, 1971. 펜리칸(ぺりかん) 출판.
[権藤成卿 : その人と思想 昭和維新運動の思想的源流] 滝沢誠著. 東京 : 펜리칸(ぺりかん)社, 1996.
[權藤成卿論 : 農本主義とアジア的共同性] 久保隆(쿠보 다카시)著. 東京 : JCA出版, 1981.
등과 몇 편의 논문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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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서에 실린 비문에 관한한 단순히 말하면, 두 가지 경우밖에 없지 않나요? 지금은 결락되어 보이지 않는 비문의 글자들이, 그래도 판독되던 시기에 옮겨적혔던가, 아니면 이미 결락되어 보이지 않는데 임의로, 즉 자의로 집어넣었던가...
후자의 경우라면, 명백한 위서요 학문의 양심을 위배한 것이지요. 연구서니 뭐니 언급할 성질의 것도 아니지요. 굳이 결락된 부분을 그렇게 읽고 싶다면, 주석을 통하던, 따로 글을 발표해서 주장을 하던 '연구서'를 내면 되는 것이지만, 제가 소개한 비문은 그런 형식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물며 윗부분에 이미 제가 소개하였듯이 이 비문이 채록된 경위를 남연서 스스로가 밝히고 있습니다. 남연청안 본인이 직접 가서 보았노라고, 그래서 초사했노라고.
그래서 이 서적은 위서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있는 것이고, 일본학계는 이미 위서로 판정내렸다는 이야길 하였는데...
그런데 남연서 말미에 밝히는 대목에 의하면, 이 책은 그동안 적어도 두 번의 필사의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권등성경까지 이르면 적어도 세 번의 필사는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세상에 나올 때 쯤, 첨삭과 산입이 있어 인위적`임의적 수정이 가하여 졌다면, 만에 하나 진서라 하더라도 면밀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겠지요.
영락17년조 말미의 '王知倭不屈. 遂議和, 引師旋城' 부분을 언급한 이유는 '倭'가 그만큼 대단했고, 결국 패하지 않았으며, 고구려가 오히려 화의를 청하고 돌아갔다고 하여, 결락된 부분을 '채워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님이 17년조 전쟁대상을 왜로 보든 관계없이, 소개한 17년조 메꿔진 부분을 포함해 전체 문맥을 다시 한 번 보시지요.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掃盡倭. 倭還侵平壤]. 王師與之合戰, 斬殺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王知]倭(판독은 倭가 아니라 城)[不]屈(판독은 屈이 아니라 城). [遂議和, 引師旋]城. []안은 현 결락으로 처리되는 글자들
고구려가 5만명을 보내 '掃盡倭' 라 하여 다 쓸어버렸다는데, 왜는 다시 평양을 침공하고 거기서 전면전(合戰)을 벌이고, 그래서 고구려가 얻은 군자기계나 갑옷이 무수하데, 고구려는 군사를 돌이켜 다시 돌아오며, 그 중도에 성 2개를 부수는데, 왜가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화의를 청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상당히 어색한 대목이지 않습니까. 결락된 부분엔 어떻든 왜(倭)가 자리를 차지하면서, 왜가 결국은 고구려의 화의를 이끌어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락17년조의 전쟁대상을 왜로 보는가 마는가의 문제가 아니지요. 저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이 비가 재발견된 이후의 개작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면 이 남연서는 위서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현재 판단을 유보합니다. 남연서 전체문맥 분석을 통해 판단을 내리고 싶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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