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于老(우로)의 정리

라디오에요 2009. 1. 20. 09:34

奈解紀(나해기)

十八年 七月 以骨正女紅帽爲后 沙飡孫光隨吳人米會入吳
18년(A.D.274) 7월 骨正(골정)의 딸 紅帽(홍모)를 후로 삼았다. 沙飡(사찬) 孫光(손광)이 오나라 사람 米會(미회)를 따라서 오나라로 들어갔다.

二十一年 三月 紅后生于老太子
21년(A.D.277) 3월 紅后(홍후)가 于老(우로)태자를 낳았다.

*于老(우로)가 태어난 해는 277년 3월, 나해 21년이다.
*紅后(홍후)= 紅帽(홍모)를 말한다.
*于老(우로)의 아버지는 奈解(나해)이며, 어머니는 紅帽(홍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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助賁紀(조분기)

二年 五月 甘文反 以于老太子爲大將軍 率謁明等往討之
2년(A.D.293) 5월 甘文(감문)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于老(우로)태자를 大將軍(대장군)으로 삼아 , 謁明(알명) 등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293- 277= 16+1= 17살, 17살에 대장군이 되다.

四年 七月 于老太子率雲良興文登 大破倭人于沙道 乘風縱火 焚其船楫 賊皆赴水死
4년(A.D.295) 7월 于老太子(우로태자)가 雲良(운량)과 興文(흥문)을 이끌고 沙道(사도)에서 왜인을 대파하였다.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그 배와 노를 태우니, 적들은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295 - 277= 18 +1 = 19살.

*縱 세로 종 (2) 놓다. 쏘다.
纵矢; 활용단어참조
纵火; 활용단어참조
*赴 다다를 부/갈 부 ㉠다다르다 ㉡향하여 가다 ㉢나아가다 ㉣달려가다 ㉤들어가다 ㉥넘어지다 ㉦알리다 ㉧부고하다(訃告--: 사람의 죽음을 알리다)

十五年 正月 于老太子伊伐飡兼知軍政 碧忠稟主 年綻十六 其母柿忠攝行事
15년(A.D.306) 1월 于老(우로)태자는 伊伐飡(이벌찬)과 軍政(군정)을 겸하여 맡았다. 碧忠(벽충)을 품주로 삼았다. 나이가 꽃피는 16살이었다. 그 어머니 柿忠(시충)이 정사를 攝行(섭행)하였다.

*306 - 277= 29 +1 = 30살.

*兼 겸할 겸, 1. 2 배의. 2. [동] 겸하다. 함께 지니다. 동시에 하다.
*知 알 지, (4) [동사]【문어】 주관(主管)하다. 관장하다. 맡아보다.
知县; 활용단어참조
知客; 활용단어참조

十六年 十月 句麗入寇比烈長岺 于老率二路將軍出擊之 我軍不利退保馬頭柵 夜甚寒士卒戰慄 于老躬燒柴葉而分暖解裘被傷卒 群心感激咸願死 戰賊追襲大敗 我軍乘勝欲長驅 于老曰 “彼衆我寡 可保而不可侵” 敵聞之乃退
16년(A.D.307) 10월 고구려가 비열(比烈), 장령(長岺)을 침범하였다. 우로(于老)태자가 2로(二路) 장군을 이끌고 출격(出擊)하였다. 아군이 불리해지자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밤에 너무 추워 사졸들이 추위에 떨었다. 우로가 몸소 울짱의 나무와 낙엽을 나누어 태워 따뜻하게 해주고, 갑옷을 벗어 다친 병사들을 덮어주었다. 무리들의 마음은 감격하여 모두 죽기를 원하였다. 적과 싸워 추습하여 대패시켰다. 아군이 승기를 타고 멀리 쫓아 갈려고 하자,  우로가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지키기만 하면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적들이 이를 듣고 곧 물러났다.

*307 - 277= 30 +1 = 31살.

*衆= 多, 많다.
*寡= 少,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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沾解尼今紀(첨해니금기)

四年 四月 倭獻土物 其太子求婚 于老戱之 ‘虜汝王爲鹽奴矣 何可婚乎’ 使怒歸和絶
4년(A.D.313) 4월 왜가 토산물을 바치고, 그 太子(태자)가 구혼하였다. 于老(우로)가 그 사신을 희롱하며 "너의 왕을 사로잡아 鹽奴(염노)로 만들겠다. 어찌 혼사가 가능하느냐" 라고 하였다.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화친이 끊어졌다.

* 313- 277= 36 +1= 37살.
* 癸酉(계유)= 3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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味鄒尼今紀(미추니금기)

七年 金兎 二月 乙弗殂 子斯由立 是爲釗也
7년 金兎= 辛卯(신묘) 331년,2월 乙弗(을불)이 죽었다. 아들 斯由(사유)가 즉위하였다. 이는 釗(쇠)이다.

(고구려본기 미천왕 32년 331년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32년(331년) 봄 2월 왕이 죽었다. 미천원에 장사를 지냈다. 호를 미천왕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사초도 2월달로 일치.

四月 倭使至鶴浦 請與元上太公相見 不肯入朝 先是于老戱謂倭使曰 早晩虜爾王爲爨奴婢 盖元上拂于尼今及阿后 視王后如奴婢 而輕侮之心偶發於倭使 倭使歸報其王 王怒命斬其使 更以他使來求見 浦吏知有匈計 而告勿見 于老曰 吾以一國之太公 豈畏小虜 遂單騎往之 倭責其侮辱 于老曰 戱言也 倭不信之 焚之而去 命舟師迢之 不得 命厚葬之 爵其幼子訖解 惑曰

于老勇而善將兵 然高尤好自矜 不得衆心 故悒 悒有反志 尼今之臣與倭使相通 而密謀制之云 恐有內訌 而外伐也 尼今親弔太公而慰命元 曰 “太公之子 吾當之子 太公之妻 吾當妻之” 命元泣曰 “自春不雨 中外行禱 妾與太公 將禱于山 夢見大火 而疑之 豈有如此匈事乎” 尼今曰 “皆朕不德之致也” 乃會群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曰 “政刑失則 禱雨無益 今太公遭變 天久不雨 寡人與爾百官 當受其罰” 尼今遂自撻 阿后聞之 親臨止之 命末仇康檍日骨乞淑連音 出五道暗祭 理方得失 問民疾苦 時阿后與乞淑嬖臣好山浸淫 連音妻蘭石與后嬖裙白歡好如夫婦 良夫曰 “上好淫下 則天不雨” 尼今欲自責者使后欲反省 而反命乞淑連音等出外 而自便縱淫 識者歎之

4월 왜의 사신이 鶴浦(학포)에 도착하였다. 元上太公(원상태공)에게 相見(상견)을 청하였으나, (우로는) 기어이 입조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于老(우로)는 왜의 사신에게 희롱하며 말하길 "조만간에 너희 왕을 잡아 부엌떼기 노비로 삼겠다" 라고 하였다. 元上(원상)은 尼今(니금)과 阿后(아후)를 멸시하였기에 왕후를 노비처럼 대하였는데다, 輕侮(경모)한 마음으로 인해 왜의 사신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였다. 왜의 사신이 돌아가 왜왕에게 보고하자 왜왕은 노하여 그 사신을 참수하기를 명하였고, 다른 사신이 다시 와서 접견을 청하였다. 浦吏(포리)가 흉계가 있음을 알고 만나지 말라고 고하였으나, 于老(우로)는 말하길 "나는 한 나라의 태공으로서 어찌 小虜(소로)를 두려워하겠느냐" 하였다. 마침내 單騎(단기)로 가니, 왜가 그 모욕을 책망하였다. 우로가 말하길 "농담이였다" 라고 하였다.왜는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를 불태우고 떠나갔다. 舟師(주사;水軍)에게 명하였으나 멀리 갔으므로 잡지 못하였다. 후하게 장례하도록 명하였다. 어린 아들인 訖解(흘해)에게 작위를 내렸다. 혹은 말하길, 于老(우로)는 용감하고...

우노는 용감하고 장병을 잘 다루었으나, 그런 연유로 스스로 자랑하기를 좋아하기가 대단하여 군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근심하였는데, 근심이란 반란을 일으키려는 뜻이다. 니금의 신하와 왜의 사신이 서로 통하여 은밀히 그 음모를 제어하려는 뜻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마도 내홍(內訌, 내부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분쟁)이 있었으며 외세로부터 베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니금이 태공의 죽음에 친히 조문하고 명원(命元)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태공의 아들은 마땅히 나의 아들이며, 태공의 처는 마땅히 나의 처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명원이 울면서 말하기를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나라 안팎에서 기도하고 있으므로, 첩과 태공이 장차 산에 올라 기도를 하려 하였는데, 꿈에 큰 불이 나서 이를 의심하였습니다. 어찌 이와 같이 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하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모두 짐의 부덕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이게 하여 친히 정치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어 말하기를 “정치와 형벌의 잘못으로 비를 기도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익한 것이다. 지금 태공이 변란을 맞아 하늘에서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니 과인(寡人)과 너희 백관(百官)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니금이 스스로 매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후가 그 소리를 듣고 친히 임하여 매질을 그치도록 하였다. 말구(末仇), 강억(康檍), 일골(日骨), 걸숙(乞淑), 연음(連音)에게 명하여 5도로 나아가 몰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리방(理方, 관청명)으로 하여금 잘잘못을 살피고, 백성으로 질병과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아후와 걸숙과 사랑을 받는 신하 호산(好山)이 음란함에 빠져들었다. 연음의 처 난석(蘭石)과 후(后)의 사랑을 받는 군백(裙白)이 좋아하고 기뻐하며 부부처럼 지냈다. 양부(良夫)가 말하기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음란함을 좋아하므로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자책(自責)하고자 한 것은 후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는 것이지만, 걸숙과 연음 등이 명에 반(反)하여 밖으로 나가 스스로 제멋대로 편안하게 음란함을 즐겼다.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탄식하였다.

*肯 긍 [조동] 기꺼이 …하다. …하길 원하다. [어떤 요구나 요청 등을 받아들여 그에 따라 행동이나 동작을 취한다는 의도를 나타냄].
我这么热情地邀请他,他还是不肯来吗? - 내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그를 초대하는데 그는 여전히 오려고 하지 않습니까?

[조동사] 기꺼이 …(하려) 하다. [외부로부터의 요청·요구를 받아들여 그대로 행동·동작을 취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내며, 의지를 나타내는 ‘要’보다 소극적임]
我请他来, 他怎么也不肯来; 나는 그를 오라고 청하였는데, 그는 아무리 해도 오려고 하지 않는다

*元上太公= 于老
*331년- 313년= 18년후 왜가 보복.
*어린 아들인 訖解(흘해)가 3살때 일어난 일.
*331년- 277년 +1= 55살. 331년 우로 사망.

라디오 (2008-03-20 22:12:22) 
첨해 3년 249년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秋七月 作南堂於宮南 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
3년(249) 여름 4월에 왜인이 서불한 우로(于老)를 죽였다. 가을 7월에 궁궐의 남쪽에 남당(南堂)을 짓고<남당(南堂)을 혹은 도당(都堂)이라고도 하였다.> 양부(良夫)를 이찬으로 삼았다.

미추 7년 268년
七年 春夏不雨 會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又遣使五人 巡問百姓苦患
7년(268)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아놓고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왕이 친히 물었다. 또한 사자(使者) 다섯 명을 보내 두루 돌며 백성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를 물어보게 하였다.

미추 7년에 기사가 있어서 그랬는지.. 김부식의 조작사건은 미스테리입니다.
라디오 (2008-03-20 23:07:41) 
삼국사기 열전에서 七年 癸酉, 大王出居于柚村, 味鄒王時 이 부분이 핵심사항으로..
7년 앞의 미추를 빼먹었고..癸酉는 313년, 大王은 성군으로서 추앙받는 '미추왕'을 뜻하죠.미추왕이 음란하다고는 하나 지혜롭고 정치를 잘 했습니다.柚村은 디지털 삼국사기 홈피에선 '우유촌'으로 잘못 해석한걸로 보이고.. 국로추사를 보면.. 백제가 2천명의 군사를 지원해 줍니다. 이 때 백제왕은 누구일까요? '비류왕'입니다.

○夏四月 倭遣使葛耶古 修聘於新羅 王使于老爲儐 與聘使戲談 早晩以汝王與妃俱爲奴婢 倭使歸告倭君 聞之大怒 命將軍于道朱君率兵五千 進攻新羅 欲雪向日之憤恥 羅王使于老爲先鋒出戰良久 倭將捕于老燒殺 王大驚失色 請救於濟 王遣將士二千 合勢大戰大破倭軍 盡燒其營 [見羅古志]
여름 4월 왜는 사신 葛耶古(갈나고)를 보내어 신라에 수빙하였다. 신라왕은 우로를 보내 접대하였다. 사신을 응대하면서 희롱하며 말하길, "조만간 너희 왕과 왕비를 노비로 삼겠다" 라고 하였다. 왜 사신이 돌아가 왜왕에게 고하자,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장군 于道朱君(우도주군)에게 명하여 병사 5천명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였다. 지난날의 분노와 수치를 설욕하기 위해서였다.
신라왕은 우로를 선봉으로 출전시켜 오래동안 잘 싸웠으나, 왜의 장군은 우로를 붙잡아 불태워 살해하였다. 왕은 대경실색하여 백제에 구원을 요청하니, 백제왕은 장사 2천명을 보내주어, 합세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진영을 불태워 버렸다. [견라고지]
라디오 (2008-03-20 23:16:41) 
이 기사는 상당히 신뢰성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국로추사'와 '팔린통빙고'는 전혀 계통이 틀린 사서인데도 팔린통빙고에는 짧게 '相結'이라는 구절이 나오므로 해서..
미추왕은 백제의 군사지원을 받았다고 판단합니다.

이때 미추왕과 비류왕은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비류왕 331년을 보실까요?

二十八年 春夏 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3)乃雨 年饑 人相食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신라 기사와 일치합니다.
우로의 사건은 4월달에 일어났고, 7월달에 비가 온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로 아들, 흘해는 3살이였습니다.
라디오 (2008-03-20 23:25:56) 
백제와 고구려의 기년은 많이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백제/고구려 기년은 기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특히나 중국사서와 연결이 되어 있어 조작이 힘들고... 2 :1 관계로..
신라기년 조작을 하기 위해서는 백제,고구려의 기년은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이왕 이후의 백제기년은 그대로 믿어도 됩니다.

구지왕을 김부식이 몰랐을리는 없고..아마 수서에 나오는 구태(구지왕) 기사가 맘에 안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죠. 구지왕은 백제 시조격인 우대왕과 비슷한 칭송을 듣는 후덕한 임금이였으니까요.
라디오 (2008-03-20 23:36:27) 
만일 이 우로 기사에 왜왕의 이름이 나왔다면..300년대의 일본서기 기년 파악에 절대적 기준점이 됩니다.어마어마한 일이죠. 안 나오니..물 건너갔죠. 다른 방법을 써야 합니다.
라디오 (2008-03-20 23:55:38) 
다른 얘기를 덧붙이자면.. 백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신라를 제어하기 위해, 왜와 결탁을 하였죠. 근초고왕때 통교를 했다는 통설을 믿어보더라도.. 300년대 이르러 왜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로 성장합니다. 그 소문은 백제에까지 전해지고.. 왜의 군사력을 빌렸겠죠. 하지만, 그 댓가는 만만치가 않았죠. 왜의 장군이나 귀족들이 들어와서 권력을 남용하고 내정간섭을 합니다.왕의 승계과정에도 개입하여 백제는 왜에 의해 휘둘리는 나라로 변했죠. 그것에 반발하는 신하나 백성들은 대거 고구려나 신라로 유민으로써 탈출하게 됩니다. 위기를 느낀 내물왕은 딸을 광개토왕에게 보내면서까지 고구려의 힘을 빌리죠. 광개토왕은 임기내내 왜때문에 골치를 썩었습니다.인덕천황은 30년간 전쟁을 하였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라디오 (2008-03-21 08:23:37) 
삼국사기를 볼때마다, 혜성이 나타난 일도 각각 백제와 신라가 다른 시기에 나타나 이상했던 경험이 있을겁니다. 기년을 일치시켜 보면 웃긴게 너무 많습니다.

비류왕 13년 316년
十三年 春 旱 大星西流 夏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13년(316) 봄에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에 서울[王都]의 우물물이 넘치더니 검은 용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첨해 7년 253년+ 63년= 316년
七年 夏四月 龍見宮東池 金城南臥柳自起 自五月至七月 不雨 禱祀祖廟及名山 乃雨 年饑 多盜賊
7년(253) 여름 4월에 용이 궁궐의 동쪽 연못에 나타났다. 금성(金城) 남쪽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 5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으므로 조묘(祖廟)와 명산에 빌며 제사지냈더니 비가 왔다. 이 해에 흉년이 들고 도적이 많았다.
라디오 (2008-03-21 08:36:44) 
이미 얘기한 일치하는 연도입니다.

비류 28년 331년
二十八年 春夏 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乃雨 年饑 人相食
28년(331)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풀과 나무가 마르고 강물이 말랐다.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이 해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미추 7년 268년+ 63년= 331년.
七年 春夏不雨 會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又遣使五人 巡問百姓苦患
7년(268)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여러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아놓고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왕이 친히 물었다. 또한 사자(使者) 다섯 명을 보내 두루 돌며 백성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를 물어보게 하였다.
라디오 (2008-03-21 08:49:04) 
비류 33년 336년
三十三年 春正月辛巳 彗星見于奎
33년(336) 봄 정월 신사에 혜성이 규(奎)에 나타났다.

미추기 12년 336년
十二年 火猿 三月 麗遣其臣于莘于晉貢物 請伐燕 時有大星流其西北 故恐其侵入也
12년 丙申 3월 고구려가 신하 우신을 진나라에 보내 공물을 바치며, 연나라를 벌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때 큰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가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연나라의 침입을 두려워하였다.

고국원왕 6년 336년
六年 春三月 大星流西北 遣使如晉貢方物
6년(336) 봄 3월에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갔다.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라디오 (2008-03-21 15:15:30) 
우로살해사건을 331년으로 일단 믿어 본다면,
일본서기에서 응신 or 신공 둘중에 하나가 될겁니다.
어느쪽일까요?

沾解尼今紀(첨해니금기)

四年 四月 倭獻土物 其太子求婚 于老戱之 ‘虜汝王爲鹽奴矣 何可婚乎’ 使怒歸和絶
4년(A.D.313) 4월 왜가 토산물을 바치고, 그 太子(태자)가 구혼하였다. 于老(우로)가 그 사신을 희롱하며 "너의 왕을 사로잡아 鹽奴(염노)로 만들겠다. 어찌 혼사가 가능하느냐" 라고 하였다.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가 화친이 끊어졌다.

첨해 4년, 313년에 왜의 太子가 혼인을 청했다니까..
태자의 나이가 17살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여아같은 경우는 10살,13살도 비일비재합니다만.. 대충 15~20살로 짐작하는거죠.
대충 296년정도에 태자가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시 유추해서 접근을 해보는거죠.
라디오 (2008-03-22 13:29:38) 
국로추사에서 "여름 4월 왜는 사신 葛耶古(갈나고)를 보내어 신라에 수빙하였다."

葛耶古(갈나고)=>'갈야고' 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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