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書紀』卷九神功皇后攝政 四六年(丙寅 二四六)三月 乙亥朔 ◆四十六年 春三月 乙亥朔。遣斯摩宿禰于卓淳國。〈斯麻宿禰者。不知何姓人也。〉於是。卓淳王末錦旱岐告斯摩宿禰曰。甲子年七月中。百濟人久氐。彌州流。莫古。三人到於我土曰。百濟王樸方有日本貴國。而遣臣等令朝其貴國。故求道路以至于斯土。若能敎臣等令通道路。則我王必深德君王。時謂久氐等曰。本樸有貴國。然未曾有通。不知其道。唯海達浪嶮。則乘大船僅可得通若雖有路津。何鎰達耶。於是久氐等曰。然卽當今不得通也。不若更還之。備船舶而後通矣。仍曰。若有貴國使人來。必應告吾國。如此乃還。爰斯摩宿禰卽以■人爾波移與卓淳人過古二人。遣于百濟國慰勞其王。時百濟肖古王。深之歡喜而厚遇焉。仍以五色綵絹各一疋。及角弓箭。幷鐵■四十枚。幣爾波移。便復開寶藏。以示諸珍異曰。吾國多有是珍寶。欲貢貴國不知道路。有志無從。然猶今付使者。尋貢獻耳。於是爾波移奉事而還告志摩宿禰。便自卓淳還之也。
신공황후 46년, [일본서기 연대로는 246년] 봄 3월에 탁순국卓淳國에 사신을 보냈다. 탁순의 왕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이런 요지의 말을 전했다.
"갑자년 7월 중순에 백제인 구저, 미주류, 莫古(막고) 세 사람이 와서 '백제왕이 동방의 귀한 나라 일본에 다녀오라고 했는데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바다가 멀고 풍랑이 심하니 큰 배가 있어야 갈 수 있다고 하니 '배를 준비하겠다.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꼭 우리나라에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왜의 사신은 종자와 탁순인을 붙여 백제로 가게 했다. 백제의 초고왕은 매우 기뻐하며 보물을 나눠주고 일본에 조공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자, 일본서기는 신공 46년을 기년 조작하여, 246년에다 설정을 해 놨죠..
신공황후는 300년대 사람입니다.
삼국사기 기년 肖古王 : 재위 49년, 166년 ~ 214년.
백제왕기 기년 肖古王 : 재위 29년, 226년 ~ 254년. (백제본기보다 재위 20년이 적음)
내용에다가 時百濟肖古王。라고 246년은 肖古王 시절이라고 말하고 있죠.
근데 조작된 삼국사기는 166년 ~ 214년이니까 246년은 재위기간에 못 들어가죠.
그러니, 일본서기 편집자는 망가지지 않은 백제 사서를 갖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죠.
백제왕기는 246년이 들어가죠.
"저 기사에 나오는 사람 중 막고莫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조에 나오는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틀림없다. 따라서 저 일이 일어난 때는 364년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이 글은 초록불 블로그에서 본 내용이죠.
아주 예리한 시각입니다.
*甲子年= 364년.
문장 내의 甲子年을 믿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문제가 있지만.. 364년 근처가 된긴 합니다.
어려워서 꼭 찝지는 못합니다.
7, 神功 46年 => 應神 7年, 377年, 3月.
라디오는 377년으로 추정했지만, 이것도 짐작이죠..
246년은 초고왕때라는 것을 일본서기 저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이죠.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 369년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깃발은 모두 누른색[黃色]을 사용하였다.
*보기 2만명, 369년 백제는 치양전투에서 대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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