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都切太子(도절태자)

라디오에요 2009. 1. 23. 08:54

본기신편열전 都切太子(도절태자)
都切太子母阿爾后 召西奴生優台女也 類利太子娶之 生都切及女五人 而十三年崩 十四年扶餘請都切爲質 王以其無母不肯之 群臣力請遣之 中途得疾不發 扶余怒發兵來侵 而掠都切去 帶素以其女妻之 生一子于扶余而歸 辛酉 正月 薨

都切太子(도절태자)의 어머니는 阿爾后(아이후)이며, 召西奴(소서노)가 낳은 優台(우태)의 딸이다. 類利太子(유리태자)는 그녀를 맞아들여, 都切(도절)과 딸 5명을 낳았다. 그리고나서 유리 13년(BC7년)에 (아이후는) 세상을 떠났다. 유리 14년(BC6년)에 부여가 도절을 인질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은 도절이 어머니 없는 자식이라고 보내지 아니하였다. 군신들은 압력을 넣으며 그를 보내기를 청하였다. 중도에 병이 나서 떠나지 못하였다. 扶余(부여)는 화가 나서, 병사를 일으켜 래침하여 도절을 빼앗아 떠나갔다. 帶素(대소)는 그의 딸을 都切(도절)의 처로 삼았다. 부여에서 아들 한명을 낳고 돌아왔다. 辛酉(신유) AD1년 1월에 (도절은) 세상을 떠났다.
---------------------------------------------------------------------------------------

고구려본기 유리왕 14년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恚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 人多凍死 乃去
14년(서기전 6) 봄 정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으므로 대소가 성을 냈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고구려본기 유리왕 20년
二十年 春正月 太子都切卒
20년(서기 1) 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죽었다.
-----------------------------------------------------------------

고구려사초 光明大帝紀 20년
◎ 二十年 辛酉 正月 都切太子自柵城皈 未幾薨 帶素自愧其失 而還都切 而留其女 故都切悲傷不起
五月 沸流薨 年三十七 上減食以慰皇后 以阿爾女真公主妻沸流子昜人 曼公主改嫁于都助 陜父太輔 太輔大房良薨 年八十二 賜其妻掩?公主年穀

 

20년 신유 (AD1년) 1월 都切太子(도절태자)는 柵城(책성)으로부터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帶素(대소)는 자신의 실수를 자괴하며 都切(도절)을 돌려 보냈으나, 그의 딸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都切(도절)은 슬퍼하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5월 沸流(비류)가 죽었다. 나이는 37살이였다. 상은 음식을 줄이며 황후를 위로하였다. 阿爾(아이)의 딸 真公主(진공주)는 沸流(비류)의 아들 昜人(양인)의 처가 되었다. 曼公主(만공주)는 都助(도조)에게 개가하였다. 陜父(협보)를 太輔(태보)로 삼았다. 太輔(태보) 大房良(대방량)이 죽으니, 나이 82살이였다. 그의 처 掩?公主(엄?공주)에게 년곡을 하사하였다.

----------------------------------------------------------------------------

*未幾=미기=얼마 지나지 않아서, 얼마 안 있다가.

이 말은 관용어로 많이 쓰이는 표현입니다.
柵城은 대소가 소유한 부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절태자가 고구려에 와서 죽은 것이죠.
도절이 부여에서 딸(or 아들)을 두었다고 했으므로.. 대소가 딸(or 아들)을 돌려 보내주지 않아 홧병으로 죽은 걸로 인식합니다.
해석의 오류가 났습니다.

*都切에서 "切" 같은 글자는 원문에서 "土刀"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글자는 '고려대장경 사전'(http://211.46.71.249/handic/)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체자가 총 4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土刀= 切 같은 글자입니다.

*悲傷=비상= 마음이 슬프고 쓰라림.
*穅 겨 강, 掩엄 vs 穅강. 확신을 못하겠군요.

*원문 확인: 6페이지,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07.pdf
-----------------------------------------------------------
*동일한 연대에 기록된 소서노의 죽음.
BC6년, 소서노의 손자 도절태자가 부여가 떠나냐 마냐의 논쟁이 벌어졌을 때, 소서노는 죽음을 맞이 하게 되죠.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BC6년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이 기사는 김부식이 은유법으로 소서노의 죽음에 대해 숨겨 놓았을거라고 생각을 했었죠.
그게 아닙니다.

똑같이 백제왕기에 동일한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백제 사료 자체가 소서노의 죽음에 대해 숨겨 놓았다'

이렇게 판단합니다.


라디오 (2008-04-12 12:38:51) 
都切太子自柵城皈 未幾薨
都切太子自柵城皈(而)未幾薨

사서이다보니까.. 문장사이에 而가 생략된거예요.

"도절태자가 책성에서 돌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라디오 (2008-04-13 10:40:03)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뭔가 하면..
도절태자라든지 개별 기사가 정확히 해석되어야만 나중에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오류가 적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개별 기사는 개별 기사대로 정확히 해석해 놓고, 다시 종합적으로 전체 윤곽을 조감해 보고 다시 또 개별 기사로 들어가는 식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분석해 봐야..
고구려 기년이고..백제 기년을 나중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기년 복원을 위한 준비과정의 한 예인 셈이죠.
라디오 (2008-04-13 10:47:28) 
순서를 꺼꾸로 해 놨군요.

1,주몽(예씨)- 유리(아이)- 도절(파소, 선도성모)- 혁거세
2,금와- 우태(소서노)- 아이(유리)- 도절(파소, 선도성모)- 혁거세
3,해부루- 금와(?)- 대소(?)- 파소(도절)- 혁거세

이렇게 해야 이해가 쉽죠..
라디오 (2008-04-13 11:02:18) 
光明大帝紀 20년 기사에도 중요한 힌트가 나와 있죠.

"AD1년 5월 비류가 죽었다. 나이는 37살이였다."

비류는 대개 소서노의 첫째 아들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온조가 먼저 등극하고 나중에 비류가 등극하죠. 즉, 둘째 아들 온조가 먼저 왕이 되고 나중에 비류가 됩니다.
사실, 사서마다 다르게 나오는거도 있으나 그런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이렇게 믿어 보는거죠.

비류 나이= 37살에 사망을 믿어 보는 상태에서 AD1년이 과연 정확한 연도일까요?
라디오 (2008-04-15 20:10:25) 
帶素以兵五萬來侵- 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다.
扶余怒發兵來侵- 扶余(부여)는 화가 나서, 병사를 일으켜 래침하였다.

*來侵=래침은 많이 나오는 표현입니다.

'동사+동사' 식으로 2개의 동사가 나란히 있는 형식으로 '래침하였다'로 해석하지 않을 때는 고구려본기에서 해석한 대로
'침략하여 왔다'가 적합한 해석입니다.
뒤의 동사를 먼저 해석해 줍니다.
라디오 (2008-04-15 20:18:06) 
그 다음 문장,

以阿爾女真公主妻沸流子昜人
=> 沸流子昜人妻阿爾女真公主 (원래 문장)

이 문장은 목적어가 앞으로 위치하면서 도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맨 앞에다 어조사 以를 써 준 것이죠.
원래문장을 해석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비류의 아들 양인은 아이의 딸 진공주를 처로 삼았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丹後地方  (0) 2009.01.23
고구려사초 기년  (0) 2009.01.23
장수 16년 429년 선왕의 존호를 높이다.  (0) 2009.01.23
加利, 星山  (0) 2009.01.23
삼국시대  (0) 2009.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