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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파라군과 토해이사금에 관한 계보가 상장돈장에 있어 자료를 붙입니다.
黃貴大神(卵龍)---黃龍世神(月光)---聖帝神母(多婆神)---吐解尼今
*日光= 혁거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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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돈장에서는 日光+ 閼英-- 次雄大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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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 - 남해차웅 - 자충 - 유리 - 탈해의 계보를 말하는 것은 일본의 사서인 팔린통빙고의 자료입니다.
또한 팔린통빙고에서는 우리의 사서가 한 사람으로 보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장돈장의 계보를 살피면 다파라군이 혁거세의 조카를 비로 얻어 토해이사금을 낳았다는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혁거세의 아들 남해가 다파라군을 대보로 임명하였는데 신라사초에서 말하는 부군의 지위가 대보의 지위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해가 후사를 다파라군에게 넘겨주려 하자 사양하며, 유리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부인을 데리고 도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파라군이 유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듯이 유리는 토해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탈해이사금시기에 신라로 이민오는 백성들이 많았던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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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보든 작태자든 AD.10년이 절대연도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협보는 오히려 "仙桃聖母(天神)-日光大神" 혁거세의 아버지인 "天神"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여=고구려일 수 있으니까요. 혁거세의 아버지가 떳떳하다면 신라 기원란에 나와 있을 것인데 숨겨 놓았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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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삼국유사에서 탈해의 재위기간=23년을 믿으며 계산을 다시 하면.. 103년- 62살= AD.41년이 되면서, "壬寅= 42년"에 탈해가 신라로 들어 왔다는 연도는 신뢰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10년 vs 42년 협보와 탈해는 별개의 인물이 되는거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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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략과 사초에 나와 있는 개구리는 금와왕의 자식들간의 내분을 은유하는 문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 내분으로 대소가 패배하고 대불이 득세하게 됩니다. 또 다른 사료인 한단본기에 의하면 협보는 신라가 아닌 다파라에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탈해이사금기의 기사를 출생기사로 보게되면 파사가 임금이 된 해에 알지가 13세가 되므로 자연스럽지 않음이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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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료인 한단본기에 의하면 협보는 신라가 아닌 다파라에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환단고기를 다시 봐야겠군요. 김알지도 조금 생각해 봤습니다. A.D.155에사망이라면, 62살을 빼고 +1년= AD94년 태어났군요. 유리이사금때입니다. 신라사초를 믿는게 좋습니다. 고구려사초는 참고용으로 생각하면서 부담을 줄이면 되죠. 고구려사초를 인용할려면..따로 신라, 백제 사료만 따로 옮겨서 정리를 해야 하는게 좋습니다. 나이 같은게 나와 있어, 나와 있는 나이는 믿을만 하다고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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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 9년(AD 65년)에 '김알지' 기사가 나와 있으니까, 이건 김부식이 신라기년 조작하면서 붙여 놓을데가 마땅치 않으니까 어거지로 붙여 놓은거겠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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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の元号 target=_blank>http://bjkoro.net/woren/nianhao_houhan.html 永元 六年= AD94년. 김알지 태어난 해가 맞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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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돈장에 仙桃聖母(天神)-日光大神라고 하였으니 혁거세의 아버지가 天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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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神=소문'은 '소문'이라는 건 '소문국'을 말하는건가요? 상장돈장 계보도를 얼핏 보니까 아버지를 공유했더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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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神=소문'은 '소문'이라는 건 '소문국'을 말합니다. 아래에 아버지를 공유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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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적은 저의 글'[re] 新羅始祖王墓碑銘' 에 신라계보도를 편집해서 올려 놓았습니다.
미추기에 나오는 계보도이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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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면 혁거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지는 못했지만 어머니를 통하여 누구인지는 최소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밝히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혁거세의 부친을 도절로 생각합니다. 도절은 동부여에 가서 대소의 딸과 6년 정도를 살다가 고구려로 돌아와 죽었습니다. 만약에 도절이 왕위를 이었다면 동부여의 내란시 도절의 아들은 고구려로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도절이 죽은데다 이미 할머니(아이후)인 백제계와 할아버지(유리명왕)인 고구려계가 서로 갈라서 있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저 여담입니다. 자신들이 밝히지 못한 것을 후세가 무슨 근거로 밝히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도절태자의 무덤과 혁거세의 무덤을 찾아 밝혀 유전자 검사하는 수밖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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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돈장에서는 '탈해'의 처의 이름이 나와 있더군요. 희미해서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48P 밑으로도 계속해서 중복해서 나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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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운제부인의 부친이 '天神'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혁거세의 부친도 '天神'인데 처음엔 손녀을 처로 삼았다는 사실때문에 매우 기분 나빴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았지만 알고는 있었습니다. 만약에 처음부터 혁거세의 부친이 선도성모와 같이 남하했다면 자녀가 혁거세와 운제부인 두명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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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절태자은 조금 거시기하군요. 협보가 혁거세의 아버지로서 더 유력하지 않을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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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神이라는 명칭이 혁거세와 운제부인의 부친이외에도 월광성모와의 사이에도 자녀가 두분 더 있는 것으로 나오는군요. 혁거세의 부친을 천신이라고 보기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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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아마 4명으로 기억합니다. 손녀딸을 처로 삼는건 현대 시대의 나이로 계산해서 그래요. 13살에 시집가는게 태반입니다. 15~17살에 아이를 낳는게 여자들에게 있어서 몸건강상 제일 좋은 나이입니다. 현대적인 사고로 고대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되죠. 저희 큰댁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13살에 시집을 갔어요. 시집을 갔다기보다는 머슴으로 살던 큰댁 할아버지를 사위로 맞아들여... 9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저희는 대가족 집안으로 친,인척이 모이면 기본 30명~50명입니다. 저의 조카가 약 20명입니다. 15살-15살-15살= 45살 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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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 태백일사에 박혁거세의 출자입니다. 고구려국 본기 제6 高句麗國 本紀 弟六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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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神을 찾으려면 우선 선도성모를 찾는 일이 우선일것입니다. 선도성모 파소는 태백일사에서도 밝혔듯이 부여제실의 딸입니다. 아무래도 파소와 협보를 연결하는 문제는 어렵지요. 또한 고구려사초를 기준으로 보면 협보가 고구려를 떠난 시기가 대략 60대입니다. 그러므로 선도성모를 만나 자손을 낳고 다시 그 손녀와 사이에 자식을 낳았다고 하면 최소 90세까지 살아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는 설정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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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雜錄해동잡록, 신단실기(神壇實記),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사서와 밀양박씨 족보책을 참고로 하는 수밖에 없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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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ilyangpark.jeju.kr/sub2-1.html ▷ 박혁거세 朴赫居世 [BC 69~AD 4] 신라의 시조(재위 BC 57∼AD 4) 왕의 성은 박(朴)이요 휘(諱)는 혁거세이다. 성모(聖母)의 휘는 파소(婆蘇)인데 본래 한(漢) 선재(宣帝)의 공주로 선술(仙術)을 배워 동(東)으로 해상(海上)에서 노닐다가 경주 선도산에 이르렀다. 서기 기원전 69년에 큰알를 낳아 양산(楊山)기슭 나정(蘿井)숲에 두었다. 이때 고허촌장(高虛村長)이 멀리 서광이 뻗친 것을보니 마치 선인(仙人)이 엎드려 절하고있는 모습 같았다. 아윽고 알을 깨고 남아(男兒)를 얻으니 형체가 단정하였다.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나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다. 육촌(六村)사람들은 그 출생이 하도 기이하여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나이 열셋에 의젓함이 어른같아 육촌장들에게 추대되어 임금이 되었다. 왕호(王號)를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는데 때는 오봉(五鳳) 원년갑자(元年甲子) 기원전 57년 4월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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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의 처가도 밀양 박씨입니다. 마한은 이미 망한 나라인데 그렇다면 호공이 만났다는 마한왕은 누구일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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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에 시조 온조왕의 재위기간은 46년이죠. 이를 "온조 + 비류"로 나뉘어서 보고.. 그다음이 "다루왕"인데.. 다루왕 다음왕이 삭제되었다고 봅니다. 다루왕의 50년 재위기간을 믿지 못하는거죠. 그다음 "기루왕"의 재위기간도 52년으로 무척 깁니다. 이 역시 어느 왕이 삭제되었다고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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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기년 혁거세 21년(AD54년) 동옥저(東沃沮)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대충,수정한 기년으로 다시 고구려사초를 보면.. 낙랑의 도읍이 옥저라고 했습니다. 이 무렵 최리의 낙랑국이 망하죠. ◎ 十三年更子, 四月, <乙豆智>薨. <松屋句>太輔, <麻勁>左輔, <烏娄>右輔. 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堂弟<于刀>等, 率衆千余․牛馬萬余頭, 而来謁. 以<尙須>為大畜大加. <買溝谷>卽<水谷城>也. ○ 13년{단기2373년/AD40}경자, 4월, <을두지>가 죽었다. <송옥구>를 태보로, <마경>을 좌보로, <오루>를 우보로 삼았다. 7월, <매구곡>사람 <상수>가 친동생인 <위수>와 종제인 <우도> 등과 함께 1,000여 명의 사람들과 소와 말 만여 마리를 끌고 와서 알현하였다. <상수>를 ‘큰짐승대가’로 삼았다. <매구곡>은 곧 <수곡성>이다. *이 때 買溝谷(매구곡)은 "옥저"를 말합니다. "《위지(魏志)》 관구검전(丘儉傳) 및 《자치통감》에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고 하였고, 주(註)에 ‘북옥저(北沃沮)는 일명 매구루(買溝婁)다.’고 하였다. 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군사가 분산되어 거의... " ◎ 二十年丁未, 三月, <楽浪>反, 上親征其都<沃沮>拔之. <崔理>北走<南沃沮>. <蚕支落>部<戴升>反, 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譎無比, 徃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 ○ 20년{단기2380년/AD47}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여, 상이 친히 그 도읍인 <옥저>를 빼앗았다. <최리>는 <남옥저>로 패주하였다. <잠지락>부의 <대승>이 배반하고 <한{漢}>에 붙었다. 본래 <개마>국의 신하였었는데, 간교하고 속임수가 비할 데 없어, <적성>・<잠지락>・<하간>을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었다. ◎ 二十七年甲寅, 四月, <好童>太子, 将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 與<理>女交好. {其}女, 為之破鼓角而迎. 王, 師大軍, 自<沃沮>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皈. 以其地為<竹岺郡>. <樂浪>, 自<柴吉>, 四世八十餘年, 而國除. 七月, <大解>太子薨. ○ 27년{단기2387년/AD54}갑인, 4월, <호동>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을 순수하며 사냥하다가, 미행하여 <최리>의 새 도읍지에 이르러 <최리>의 딸과 좋아지냈다. 그녀는 <호동>을 위해 고각을 망가뜨리고 {<호동>을 성 안으로} 받아들였다. 왕이 <옥저>에서부터 대군을 이끌고 배로 물을 건너 들어가서 그 도읍을 빼앗고 <최리> 내외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그 땅은 <죽령군>이 되었다. <낙랑>은 <시길>로부터 4대 80여년에 나라를 문 닫게 된 것이었다. 7월, <대해>태자가 죽었다. ◎ 二十九年丙辰, 七月, <楽浪>餘衆與<東沃沮>反. 遣将軍<菸卑神>伐<東沃沮>, 拔之, 為<海西郡>. 置<楽浪>余衆于<桓阿>. ○ 29년(단기2389년/AD56)병진, 7월, <낙랑>의 남은 무리들이 <동옥저>와 함께 반란하였다. 장군 <어비신>을 보내서 <동옥저>를 빼앗아 <해서군>으로 만들었다. <낙랑>의 남은 무리들을 <환아>에서 살게 했다. *신라본기 혁거세 기사에서 "동옥저"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을 한 것은 "나라가 위급해서 일 것입니다" AD56년에 완전히 나라가 망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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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다루왕과 기루왕의 기년자체를 모두 믿는 것은 아닙니다만 신라본기 탈해왕의 기사는 백제 다루왕의 기사와 연결이 된다는 점때문에 온조왕과 다루왕사이가 공백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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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구려사초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항은 "최리의 낙랑국은 "옥저-매구"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항을 놓치고 있습니다. 고구려사초를 부정할려고만 하니 속 내용을 모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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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해왕기사에 낙랑이 신라의 도읍을 침입해 오는 기사가 있으니 무척 헷갈립니다. 일단은 라디오님의 말씀을 수긍합니다. 무엇이 위사인지를 판별해내야 하는 데 그것이 어렵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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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왕 원년(서기 4) 가을 7월에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 그러니까, 남해왕은 국인의 추대로 왕이 된 것이지.. 혁거세의 맏아들은 아닌거죠. 자기입으로 말하잖아요. 혁거세는 살해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추모왕도 병으로 죽었다는 말은 추모경에서 안 나옵니다. 추모왕 역시 살해당했다고 봅니다. 소서노도 마찬가지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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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기에 나오는 계보도에서는 "남해"는 日光의 2번째 부인인 月光의 손녀딸인 운제의 사위가 됩니다. 정통 태자도 아닌 손녀딸의 "사위"일 뿐이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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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후가 딸 운제를 낳을려면 30년이상 보장되어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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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엔 미추기의 계보도를 보고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만, 남해는 혁거세의 아들이 맞습니다.
일광대신(알영성모) - 차웅대신(운제성모) - 아리성모(유리이사금) - 파사이사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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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기의 계보도를 풀어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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