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
為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宮死,於伯固立。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西安平,於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降,屬遼東。熹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於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怒為兄而不得立,與渭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駁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고구려전)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오래전부터 논란이 있던 부분입니다.
熹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熹平(희평)은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의 연호로서, 172년~177년입니다.
伯固는 고구려 新大王의 이름으로 재위 15년, 165년 ~ 179년입니다.
伯固乞屬玄菟。
= 伯固는 玄菟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乞은 '구하다, 요청하다'의 뜻이지요.
그런데, 다음구절에 公孫度(공손탁)이 나오면서 문제가 됩니다.
公孫度之雄海東也 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 公孫度[註038]의 세력이 海東에 웅거하자, 伯固는 大加 優居와 主簿 然人 등을 파견하여 [公孫]度를 도와 富山[註039]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보통 공손탁이 현도태수가 된 시기는 189년으로 학자들이 판단합니다.
자치통감에는 190년으로 되어 있다는군요.
공손탁이 실질적으로 189년에 현도태수가 된 이후에 요동왕을 자처하며 왕노릇을 했으니..
170년대와는 무려 20년의 편차가 발생하여 시대적 모순이 생기는거죠.
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또한, 伯固는 優居와 然人등을 보내 공손탁을 도와 富山賊까지 격파를 합니다.
그런데,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에는 공손탁에 대한 기사는 적혀 있지 않아서, 삼국지와는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閒,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一]掠得樂浪太守妻子。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數百級,伯固降服,乞屬玄菟雲。
注[一]郡國志西安平、帶方,縣,並屬遼東郡。
(후한서 고구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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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백제의 사라진 왕, 구지왕 기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제왕기 仇知王(구지왕)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40.pdf (19p~ )
諱伯古 己婁王第七子 而盖婁王之異母弟也 寬仁有聖德 國人敬慕之曰“仇臺王復來矣” 時盖婁王同母弟皆持寵 擅威不得人心 盖婁王深疾之 臨崩謂其后沙氏曰 “吾弟雖多唯?伯古最賢 吾死而汝子皆幼 若諸弟得志 必不利於汝子 未若迎伯古以爲汝繼夫” 沙氏乃以深夜密納宮中 是夜雪深丈餘 諸王弟皆不能知
휘는 伯古(백고), 己婁王(기루왕)의 7번째 아들이며, 盖婁王(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성덕이 있으니 나라사람들이 그를 敬慕(경모)하며 말하길 "仇臺王(구대왕)이 다시 왔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盖婁王(개루왕)의 同母(동모) 동생들이 모두 왕의 은총을 믿고 위세를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盖婁王(개루왕)이 이를 심히 걱정하여, 죽음에 임하여 그의 后(후) 沙氏(사씨)에게 말하기를,“내 아우들이 비록 많으나 오로지 伯古(백고)가 제일 현명하다. 내가 죽고 나면 너의 아들은 모두 어린데다, 만약 여러 아우들이 뜻을 이루면 필시 너의 아들들에게 불리할터이니, 伯古(백고)를 맞아 들여 너의 繼夫(새남편)로 삼음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후 沙氏(사씨)가 이내 깊은 밤에 몰래 伯古(백고)를 궁안으로 맞아드렸다. 이날 밤 눈이 수 장넘게 내려서, 여러 왕의 동생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155년에 구지왕은 태어남.
*구지왕 39년= AD226년, 72살로 사망.
元年 戊辰 十二月 以沙氏爲后 立母屹氏爲太后 王潛邸時納舍人賈杞妻苩氏 生子仁及女苩花 甚有寵 至是命復歸賈杞 命杞子其子女.
1년(AD188) 무진 12월 沙氏(사씨)를 왕후로 삼고, 어머니 屹氏(흘씨)를 태후로 삼았다. 왕이 潛邸(잠저)했을 때 舍人(사인) 賈杞(가기)의 처 苩氏(백씨)를 맞아들였는데, 백씨가 아들 苩仁(백인)과 딸 苩花(백화)를 낳았다. 총애가 깊어져 이때에 이르러 賈杞(가기)에게 복귀를 명하였고, 杞(가기)의 아들을 자녀로 하도록 명하였다.
*구지왕의 원년은 AD188년.
二年 己巳 二月 遣使于新羅 遼東太守公孫度王遣使請和 王亦遣胞弟大知獻方物.
2년(AD189) 기사 2월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遼東太守(요동태수) 公孫度王(공손탁왕)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왕 역시 胞弟(포제:동복 동생) 大知(대지)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三年 庚午 三月 公孫度王以女宝婁歸王曰 “聞王未有室家 故敢以賤息往 奉巾櫛 幸勿棄焉” 王乃以白馬三雙爲幣以娶焉. 十月 王助遼富山之軍 大獲捷利.
3년(AD190) 경오 3월 公孫度王(공손탁왕)이 딸 宝婁(보루)를 구지왕에게 시집보내며 말하기를 “왕이 室家(실가)가 없다고 들었는데 고로 감히 천한 자식을 보내니 아내로 삼고 행여나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내 백마 3쌍을 폐물로 삼고 宝婁(보루)를 취하였다. 10월 왕이 遼富山(요부산)의 군대를 도와 많은 전리품과 이득을 얻었다.
*捷 첩 ㉣노획물(鹵獲物), 전리품(戰利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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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러니하게도 백제 구지왕의 이름은 伯古(백고)였습니다.
고구려 新大王의 이름 역시 伯固(백고)로 古 vs 固 로 한자가 조금 틀릴 뿐이고 발음이 같습니다.
十月 王助遼富山之軍 大獲捷利.
10월 왕은 遼富山(요부산)의 군대를 도와 많은 전리품과 이득을 얻었다.
여기서 遼富山은 遼山+ 富山의 합성어로 생각되는군요.
문맥상으로는 백제 구지왕은 공손탁의 딸과 혼인을 한 사이이므로 공손탁을 도와 부산을 격파하였다고 나와 있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구지왕은 반대로 부산의 군대를 도왔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삼국지 저자 진수는 伯固(백고, 신대왕)의 기사에 시대가 맞지 않는 公孫度의 기사를 넣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는 伯固(백고)= 新大王(신대왕)과 伯古(백고)= 仇知王(구지왕)의 이름이 비슷하여, 新大王(신대왕)의 기사에 백제 仇知王(구지왕)의 기사를 넣어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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