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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수원’이라면 현재의 수원시 중심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수원의 본모습은 이보다 훨씬 서쪽으로 옮겨 지금의 화성군, 그 중에서도 서해 바닷가로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수원은 앞서 말한 대로 지금으로부터 고작 200여 년 전의 조선 시대 정조 대왕의 역사에서 비롯 됐다. 수원이란 지명의 유래는 본래 내륙이 아닌 바닷가 갯마을에서 비롯되었다. 200년의 열 배가 넘는 2천여 년 전의 아득한 옛날, 현 화성군의 서쪽은 대부분 바다였으리라 짐작된다. 화성과 수원은 그 지형이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로 호수나 저수지 같은 물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 차츰 물이 빠져나가면서 작은 섬들은 산으로, 그리고 깊은 곳은 지금처럼 호수나 웅덩이로 변했을 것이다. 바닷물이 빠져 육지가 점점 넓혀져가던 그 즈음 온통‘물나라’[水國]로 보였을 포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보금자리를 틀고 그 마을이 점점 커져서 오늘의 수원이란 지명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을 말할 때 그 시발지로서 삼한 시대의 모수국(牟水國)을 떠올리곤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상(上) 205에 나오는, 마한 50여국 중의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이 옳다면 모수(牟水)는 화성군 중에서도 바다에 연한 남양면이나 송산면 아니면 서신면 쯤이 되리라 추정한다. 모수국(牟水國)의 정확한 고유어 발음은 대체로 물이 많은 곳, 곧 물나라란 뜻으로 쓰인 것 같다. 혹자에 따라서는 모수국(牟水國)을‘벌물’, ‘물벌’, 혹은‘물골’의 표기로 보기도 하나 그렇게 읽혔을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모수(牟水)에 접미한 국(國)은 지금처럼 국가 개념의‘나라’가 아니라 단순히‘온누리’라고 할 때의‘누리’[世]와 마찬가지로 지명에 쓰인 접미어이다. 말하자면 부족 국가 시대에 한 부족이 모여 살던 집단 마을을 지칭한 것이다. ‘牟’의 한자음은‘모’또는 속음(俗音)으로‘무’로 읽힌다(정확한 한자음은 mou / mau / mu). 자전에 의하면 ‘클·모’, 또는 ‘땅이름·모’로 풀이하고 있으나 차자표기법에서는 훈(訓)이 아닌 음으로 읽히는 차음자(借音字)이다. 모(牟)가 차음으로 쓰인 용례를 보면, 신라 지명의 모지현(牟支縣), 모산정(牟山亭)을 비롯하여 백제 인명의 모대왕(牟大王), 모도(牟都), 모태(牟太) 등을 들 수 있다. 현 고창의 삼국 시대의 이름이 모량부리(毛良夫里)였는데, 이는 삼한 시대의 모려비리(牟盧卑離)의 계승이다. 그렇다면 모려(牟盧)와 모량(牟良)이 같은 어사의 서로 다른 표기로서, 모(牟)나 모(毛)는 똑같이 모/무의 차음임을 알 수 있다. 물[水]은 (중세어로는‘물’) 본래 어두에 와서 다른 말을 수식할 때는 간혹 받침‘ㄹ’이 탈락하여‘무/모’또는‘미’로 쓰일 때가 있다. 예컨대 무자이[水尺], 무자위[水車], 무삼[水蔘], 무소[水牛], 무살미(‘물꼬’의 옛말), 무삶이, 무넘이>무너미/무네미[水踰], 무솔, 무좀[水筮] 등의‘무’와 미나리[芹葉], 미장이[泥水匠] 등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모수(牟水)의 모(牟)가‘ㄹ’받침이 탈락한 모/무의 표기라 짐작되며, 또 모수국(牟水國)은 본래 모량수국(牟襄水國)의 준말로 본다면, 모량(牟襄)이 탈락 이전의 어형을 표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수국(水國)은 모(牟) 또는 모량(牟襄)이 물(水)을 뜻하는 고유어임으로 여기에 한자어를 덧붙여 놓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牟) 또는 모량(牟襄)과 수국(水國)은 따로 분리해서 해독해야 옳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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