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신라)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 AD40년 ==> AD105년 근처로 이동시켜야 한다.

라디오에요 2010. 1. 14. 07:59

 

 

 

                                                                              東史輯略(동사집략)

http://yoksa.aks.ac.kr/jsp/aa/VolumeList.jsp?aa10up=kh2_je_a_vsu_B3B^38_000&aa10no=kh2_je_a_vsu_B3B^38_001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 AD40년.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AD40년) 가을 9월,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1, 華麗·不耐二縣人連謀

= 華麗縣(화려현)과 不耐縣(불내현) 2현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였다.

 

貊國(맥국)이란 나라는 대개 100년대 초기에 등장하는 나라이죠.

위의 신라본기 자체 기년으로야 AD40년에 일어난 일로 되어 있으나, 이 사건은 신라기년 조정으로 연대가 내려가야 할 기사입니다.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신라의 북쪽 지방에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중간에 위치한 貊國(맥국)이 방어를 해 주자, 신라가 고마워하며 친교를 맺는 상황입니다.

 

100년~ 140년 사이는 전쟁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탈해이사금은 재위 기간내내 외침을 받으며 힘들어 하죠.

--------------------------------------------------------------

 

2, 率騎兵犯北境

= 騎兵(기병)을 이끌고 北境(북경)을 침범하였다.

 

*여기서 北境(북경)은 어느 나라의 北境(북경)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http://blog.daum.net/gusan0579/6909573?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gusan0579%2F6909573

 

두 사람의 논쟁의 글을 통해서는 '신라의 북쪽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죠.

 

이는 신라의 북쪽 국경이 될 수도 있고, 貊國(맥국)의 북쪽 국경이 될 수 있습니다. 北境 앞에 나라이름이 빠져 버림으로 인해서, 양쪽 어느 나라에 다 해당될 수 있죠.

貊國(맥국)의 북쪽 국경이라 주장해도 막을 방법은 없고,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라의 북쪽 국경이라 인식하고 있죠.

어째거나.. 貊國(맥국)이 중간에서 막아 주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란거죠.

------------------------------------------------------------------------------

 

3,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 貊國(맥국)의 渠帥(거수)가 兵(병)으로서 曲河(곡하)의 서쪽을 막아 패배시켰다. 왕은 기뻐하며, 貊國(맥국)과 友好(우호)를 맺었다.

 

*要 = ㉨기다리다, 잠복()하여 노리다. ㉭막다, 금하다(--), 말리다.

(11) 잠복하여 노리다.
    [예문] 將要而殺之〈孟子〉

 

*특이하게도 要이란 글자를 적힌 걸로 봐서는, '要= 잠복하여 노리다' 라고 사전에 나와 있듯이,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가 기습을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

玄菟郡
【武帝置。[各隹]陽東北四千里。六城、戸一千五百九十四、口四萬三千一百六十三。】
      高句驪 遼山、遼水出。【山海經曰:「遼水出白平東。」郭璞曰:「出塞外衛白平山。遼山、小遼水所出。」】
  西蓋馬
  上殷台
  高顯 故屬遼東。
  候城 故屬遼東。
  遼陽 故屬遼東。[東觀書安帝即位之年、分三縣來屬。】

<후한서 군국지>

 

*故屬遼東 의 해석을 故= 옛날.

= 옛날에 요동에 속하였다.

 

*후한서 군국지에서 東觀書安帝即位之年、分三縣來屬

 

-----------------------------------------------------------

孝和皇帝下元興元年(乙巳,公元一零五年)

春,高句驪王宮入遼東塞,寇略六縣。夏,四月,庚午,赦天下,改元。

秋,九月,遼東太守耿夔擊高句驪,破之。冬,十二月,辛未,帝崩於章德前殿。初,帝失皇子,前後十數,後生者輒隱秘養於民間,群臣無知者。及帝崩,鄧皇后乃收皇子於民間。長子勝,有痼疾;少子隆,生始百餘日,迎立以為皇太子,是夜,即皇帝位。尊皇后曰皇太后,太后臨朝。是時新遭大憂,法禁未設,宮中亡大珠一篋;太后念欲考問,必有不辜,乃親閱宮人,觀察顏色,即時首服。又,和帝幸人吉成御者共枉吉成以巫蠱事,下掖庭考訊,辭證明白。太后以吉成先帝左右,待之有恩,平日常無惡言,今反若此,不合人情;更自呼見實核,果御者所為,莫不歎服以為聖明。

北匈奴重遣使詣敦煌貢獻,辭以國貧未能備禮,願請大使,當遣子入侍。太后亦不答其使,加賜而已。

雒陽令廣漢王渙,居身平正,能以明察發擿奸伏,外行猛政,內懷慈仁。凡所平斷,人莫不悅服,京師以為有神。是歲卒官,百姓市道,莫不咨嗟流涕。渙喪西歸,道經弘農,民庶皆設般木案於路,吏問其故,鹹言:「平常持米到雒,為吏卒所鈔,恆亡其半,自王君在事,不見侵枉,故來報恩。」雒陽民為立祠、作詩,每祭,輒弦歌而薦之。太后詔曰:「夫忠良之吏,國家之所以為治也,求之甚勤,得之至寡,今以渙子石為郎中,以勸勞勤。」

<자치통감>

--------------------------------------------------------------------------------------------

 

*자치통감에서 AD105년에

春,高句驪王宮入遼東塞,寇略六縣。 봄에 고구려의 宮이 요동새로 들어가, 6현을 구략하지요.

秋,九月,遼東太守耿夔擊高句驪,破之 가을 9월달에는 요동태수 耿夔(경기)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걸로 나와 있죠.

 

---------------------------------------------------------------------------------------------

◎ 三十三年 乙巳, 正月, <扶余>献丈二黃虎․丈一白熊毛色明無尾. 使御苑大壯虎, 字之以取種.  三月, 鎭北将軍<麻樂>重修<盖馬>諸城, 率<貊>騎, 伐<遼東>取<白岩>・<長岺>・<菟城>・<汶城>・<章武>・<屯有>等六城, <漢>人大驚慌忙, 以<耿夔>為守而来戰. <宮>太子, 與使者<穆度婁>, 率輕騎深入敵陣, 左右衝突而大破之.  <羅>・<濟>復和.
○ 33년 (AD105) 을사, 1월, <부여>가 두 길이나 되는 누런 호랑이와 털의 색깔이 밝고 꼬리가 없는 한 길 되는 흰 곰을 바쳤다. 크고 우람한 호랑이를 어원에서 길러서 새끼를 내게 하였다.  3월, 진북장군 <마락>이 <개마>의 여러 성을 고쳐 쌓고, <맥>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백암>・<장령>・<도성>・<문성>・<장무>・<둔유> 등 6 성을 빼앗았다. <한>인들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고, <경기>가 수장{守将}이 되어 나와서 싸웠다. <궁>태자가 사자 <목도루>와 함께 날랜 기병을 이끌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좌충우돌 들이쳐서 크게 파하였다.  <신라>와 <백제>가 다시 화친했다.

 

*고구려사초에서는 3월달에 마락장군이 6城을 공격했고, 耿夔(경기)가 반격을 할때 宮太子(궁태자)가 싸운 걸로 나오는데, 자치통감을 참고로 하면, 耿夔(경기)가 반격을 가하는 때는 9월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사초는 3월달 기사로서 한꺼번에 몰아져 있지만, 자치통감이 더 신뢰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안제가 즉위한 106년에 현도군을 개편하게 되는데, 전해 105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으므로, 한군현에 변화를 줄 수 밖에 없는거죠.

-------------------------------------------------------------

http://zh.wikisource.org/wiki/%E7%9B%9B%E4%BA%AC%E7%96%86%E5%9F%9F%E8%80%83/%E5%8D%B71

 

盛京疆域考

 

候城 同前漢原志 故屬遼東 東觀漢紀 安帝即位之年 分高顯候城遼陽屬玄菟 本志於高顯等三縣 亦書云 故屬遼東 然則遼東郡屬之 候城其為衍文 無疑

 

分高顯候城遼陽屬玄菟 고현,후성,요양은 106년에 현도에 속하는게 맞죠.

-------------------------------------------------------------------------

○ 광무제 건무 6년(30년)에 변방의 군을 줄임에 동부 도위가 이로 말미암아 혁파되었다. 그 뒤에 현에 있던 거수(渠帥)들로 현후(縣侯)로 삼으니, 불내(不耐)ㆍ화려(華麗)ㆍ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모두 자칭 삼로(三老)라 하였으니, 이는 옛날 현국(縣國)으로 있었을 때의 제도이다. 옥저는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핍박을 받다가 드디어 구려에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구려에서는 다시 그곳 사람 가운데서 대인(大人)을 뽑아서 사자(使者)로 삼고는 그로 하여금 거수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租稅)를 책임지게 하여, 맥(貊)ㆍ포(布)ㆍ어(魚)ㆍ염(鹽) 및 바다에서 나는 생산물을 천 리 길에 져다가 바치게 하고, 또 미녀(美女)를 보내도록 하여 비첩(婢妾)으로 삼아 마치 종처럼 대우하였다. 《상동》

<해동역사 옥저>

 

다시 신라본기 기사로 돌아 와서 보면,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7년, AD40년.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AD40년) 가을 9월,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耿夔(경기)가 반격을 가하는 때는 자치통감로서 9월달로 나오니까.. 화려현과 불내현이 움직이는 때도 9월달로 서로 일치하므로,

같은 105년에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