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신편열전 국조태왕기
고구려사초 太祖皇帝紀(태조황제기)
*본기신편열전는 특이한 史書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비슷하게 간략하면서도, 고구려사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특이한 형식을 지니고 있죠.
*본기신편열전 국조태왕기에서 국조왕 3년 기사는 간지가 乙卯(을묘)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AD115년의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기사는 간지로 움직입니다.
본기신편열전 國祖太王紀(국조태왕기) 3년, AD115년
三年 乙卯 二月 築國西十城 以備漢寇 是年八月 國南大蝗
고구려본기 태조왕 3년, AD55년 (乙卯)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蝗害穀
3년(AD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를 대비하였다.
가을 8월에 나라의 남쪽에서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고구려본기 태조왕 62년, AD114년 (甲寅)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62년(AD114년) 봄 3월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은 남해를 순수하였다.
겨울 10월에 남해로부터 돌아왔다.
*乙卯(을묘)= AD55년 => AD115년
*고구려본기 태조왕 3년 8월 기사를 볼 것 같으면..
나라 남쪽에 황충이 들었다고만 나와 있으나..고구려사초에서는 나라 남쪽에 황충이 들었기 때문에 巡視(순시)를 떠나서.. 10월달에 돌아 오는 걸로 나와 있죠.
고구려사초 太祖皇帝紀(태조황제기) 4년, AD115년
八月 國南蝗 巡視而至南海 十月 還
= 8월, 나라 남쪽에 蝗(황)이 들어, 巡視(순시)하여 南海(남해)에 이르러, 10월에 돌아왔다.
이는 태조왕 62년 기사는 태조왕 3년과 같은 연도에 일어난 일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태조왕 3년 = 태조왕 62년.
그런데, 乙卯(을묘)= AD115년인데도,
태조왕 62년 기사의 연도는 AD114년으로 되어 있어, 1년 올라가 있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AD115년으로 되어 있어야 정상인데, 잘못되어 있는거죠.
동일한 기사가 분산 처리될 때마다 삼국사기 편찬자가 꺼내드는 단골 아이템이 있습니다.
일식 기사를 삽입하는 것입니다.
일식 기사는 외부 史書에서 퍼 옵니다.
자치통감에 AD114년에 일식이 일어 났을까요?
<자치통감 한기 AD114년>
孝殤皇帝 元初元年(甲寅,公元一一四年)
春,正月,甲子,改元。
二月,乙卯,日南地坼,長百餘里。
三月,癸亥,日有食之。
*영락없이 일식기사가 자치통감에 나와 있군요.
삼국사기 편찬자가 기사의 연도를 손을 쫌 볼 때 써 먹는 양념요법이라고나 할까요??
태조왕 62년 기사가 AD114년이라는 것을 강조할려고 쓰는 수법입니다.
본기신편열전과 고구려사초를 통해서, 실상은 두 기사 모두 乙卯(을묘)= AD115년에 일어난 기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史書는 이렇게 교묘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구려사초 太祖皇帝紀(태조황제기) 4년, AD115년
四年 乙卯 二月 重修西河(長春)南口(遼源)河城(通遼)安平(開原)長岺(鐵嶺)菟城(奉天)屯有(遼中)平郭(令安)河陽(遼陽窩堡)高顯(冊?通)南蘇(赫爾蘇)等城 以備西南 八月 國南蝗 巡視而至南海 十月 還 二月 加耶伐羅南 七月 祇味親征加耶 師步騎渡黃山河(漢江) 遇伏兵于林薄 被圍数匝 祇味奮鬪决圍而出 勇將長春郞戰死
4년 乙卯(을묘, AD115년) 2월, 西河(서하, 長春), 南口(남구, 遼源), 河城(하성, 通遼), 安平(안평, 開原), 長嶺(장령, 鐵嶺), 菟城(도성, 奉天), 屯有(둔유, 遼中), 平郭(평곽, 令安), 河陽(하양, 遼陽窩堡), 高顯(고현, 冊?通), 南蘇(남소, 赫爾蘇)등의 城(성)을 重修(중수)하여, 西南(서남)을 대비하였다. 8월, 나라 남쪽에 蝗(황)이 들어, 巡視(순시)하여 南海(남해)에 이르러, 10월에 돌아왔다. 2월, 加耶(가야)가 신라의 남쪽을 쳤다. 7월, 祗味(지미)가 加耶(가야)를 친히 정벌하였다. 步騎(보기)병을 이끌고 黃山河(황산하, 漢江)를 건넜는데, 수풀에서 伏兵(복병)을 만나, 포위당한게 수 겹이였다. 祗味(지미)는 奮鬪(분투)하여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勇將(용장) 長春郞(장춘랑)은 戰死(전사)하였다.
1년 <再思大王 영역> AD53년
3년 AD55년 8월 國南에 蝗이 듦 => AD115년
4년 AD56년
7년 AD59년 4월 孤岸淵 물고기 잡기 => AD119년
10년 AD62년 8월 동쪽 흰사슴사냥 => AD122년
16년 AD68년 8월 曷思王 都頭 => AD128년
20년 AD72년 2월 藻那 정벌 => AD132년
25년 태조25년 AD77년10월 부여가 사슴바침 => AD137년 (60년 편차)
46년 => 26년 (46년- 26년= 20년이 Jump했음) 태조46년 AD98년 이때부터 절대연도가 맞아 들어감. AD98년은 그대로 믿어도 됨.
50년 => 30년 AD102년
53년 => 33년 AD105년
55년 => 35년 AD107년
56년 => 36년 AD108년
57년 => 37년 AD109년
59년 => 39년 再思大王은 40년까지 재위 AD111년
62년 => 3년 AD115년 8월 南海를 巡守 <國祖王 영역>
64년 => 4년 AD116년
66년 => 6년 AD118년
69년 => 9년 AD121년
70년 => 10년 AD122년
71년 => 11년 AD123년
72년 => 12년 AD124년
80년 => 20년 AD132년
86년 => 26년 AD138년
90년 => 30년 AD142년
94년 => 34년 AD1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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