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고구려)

본기신편열전 解術太子(해술태자)

라디오에요 2010. 3. 18. 16:45

 

  

본기신편열전 解術太子(해술태자)
解術太子禾太后出也 性溫仁至孝 有如婦女 解明沒 明王亦以解術爲太子 慰禾太后之心 群臣以其無人君之狀 諫止之 禾氏之黨不快 設解術養士執兵 解術曰 "雖以解明之勇都切之仁不容於父王 况我母微而行薄 安敢望太子乎" 遂不聽 及無恤爲太子 而執兵權 手下之人日歸于無恤 解術初與解明相好 有如夫婦 恨其不爲男女 至是無恤尊大解術 年長而伏其下恥之 而往礪津 祭解明 而投水死 其歌曰 "明乎 明乎 何處去 術也 術也 此處來 吾亦從汝水中去 願到天上 作夫婦" 明王聞之 哀慟曰 "朕不慈三兒自斃 何以見人耶" 乃求其尸 不得七日 沸流人祭須能知水性 探得于下流 以聞 王乃以太子禮葬于解明之側 賜祭須金十斤田十頃

 

解術太子(해술태자)는 禾太后(화태후)의 소생이다. 성격은 온화하고 인자하고 지극히 효성스러우니 마치 婦女(부녀)와 같았다. 解明(해명)이 죽자, 明王(명왕, 유리왕) 역시 解術(해술)을 太子(태자)로 삼아서, 禾太后(화태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군신들은 그가 人君(인군)의 모습이 없다며, 이를 그만두라 간하니, 禾氏(화씨)의 무리들은 不快(불쾌)하여, 解術(해술)에게 사졸들을 길러서 병권을 장악하라고 설득하였다. 解術(해술)이 말하길, "비록 解明(해명)의 용감함과 都切(도절)의 인자함으로도 父王(부왕)에게 수용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저희 어머님은 미천하여 핍박을 당할테니, 어찌 감히 太子(태자)를 바라겠소이까?" 라고 하며, 결국 듣지 않았다. 곧 無恤(무휼)이 太子(태자)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니, 手下(수하)의 사람들이 나날이 無恤(무휼)에게 돌아갔다. 解術(해술)은 처음에 解明(해명)과 서로 좋아하여, 夫婦(부부)와 같아서, 그들이 男女(남녀)가 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이때 이르러 無恤(무휼)은 解術(해술)을 尊大(존대)하였으나, 나이가 많아서 그의 밑에 들어가기를 수치스러워하였다. 그리하여 礪津(려진)에 가서, 解明(해명)에게 제사지내고, 물에 뛰어들어 죽으니, 그 노래가 "解明(해명)아! 解明(해명)아! 어디로 갔느냐? 解術(해술)이 解術(해술)이 여기에 왔다! 나도 너를 따라 물속으로 가련다. 天上(천상)에서 만나거든, 夫婦(부부)가 되자꾸나." 라고 하였다. 明王(명왕)이 이를 듣고 애통해 하며 말하길 "짐이 자애롭지 못해 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어찌 사람들을 볼 수 있을꼬" 라고 하였다. 곧 그 시체를 찾았으나, 7일동안 찾지 못하다가, 沸流人(비류인) 祭須(제수)가 물의 성질을 알 수 있어서, 下流(하류)에서 찾으니, 이를 듣고, 왕은 곧 太子(태자)의 禮(례)로서 解明(해명)의 곁에 장사지냈다. 祭須(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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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留紀(유류기) 10년, BC10년.
十年 辛亥 四月 禾氏生子解術
10년 辛亥(신해, BC10년) 4월, 禾氏(화씨)는 아들 解術(해술)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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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초 光明大帝紀(광명대제기) 10년, BC10년.
十年 辛亥 正月 沸流太輔
10년 辛亥(신해, BC10년) 1월, 沸流(비류)를 太輔(태보)로 삼았다.

四月 鍊于南口 解術生
4월, 南口(남구)에서 훈련하였다. 解術(해술)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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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術(해술)은 禾氏(화씨)가 낳은 아들로서, 유리왕 10년, BC10년에 태어났다. -(孺留紀(유류기)와 光明大帝紀(광명대제기))

 

고구려사초 光明大帝紀(광명대제기) 37년
◎ 三十七年 戊寅 四月 觧術溺死礪津 祭須尋其尸 葬王骨岺 七月 烏伊薨 宝得子毛獜立 伊之婿也
○ 37년(AD18년) 무인 4월, 觧術(해술)이 礪津(려진)에서 溺死(익사)하였다. 祭須(제수)가 그 시신을 찾았으며, 王骨岺(왕골령)에 장사하였다. 7월, 烏伊(오이)가 죽고, 宝得(보득)의 아들 毛獜(모린)이 섰다. 烏伊(오이)의 사위이다.

 

*유리왕 37년, AD18년에 解術(해술)이 礪津(려진)에서 물에 빠져 죽었으니..

37년- 10년= 27년.+ 1살= 28살.  (BC10년- AD18년= 28살)

 

解術(해술)은 28살에 죽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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