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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순창설씨(慶州, 淳昌薛氏)
<氏族의 연원>
시조는 설호진(薛虎珍), 혹은 거백(居伯)이라고도 했다.
신라 개국공신(開國功臣) 6부촌장의 한 분이다. 법흥왕 3년 무신공(武信公)으로 시호(諡號)되었고 무열왕 때 장무왕(壯武王)에 추봉되었다.
그는 당시 진한(辰韓) 땅이던 지금의 경북 월성군(月城郡) 천북면(川北面) 화산(花山) 물천(勿川) 동산리(東山里), 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을 다스리던 촌장이다.
기원전 57년 금산가리(金山加利, 지금의 경북 月城郡 甘浦邑 陽南 陽北面 일대), 무산대수(茂山大樹, 月城郡 見谷面 일대), 觜山珍支(慶州市 進峴洞, 月城郡 外東邑 일대), 돌산고허(突山高墟, 慶州市 拜洞, 慶南 蔚州郡 斗西 斗東面 일대), 閼川陽山(慶州市 東方, 仁旺, 九黃, 路東, 路西, 東部, 城東, 城乾洞 일대) 촌장과 함께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 난생(卵生)의 전설을 지닌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초대 임금으로 추대, 신라(新羅)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이후 신라3대 유리왕(儒理王)이 이들의 공로를 기려 성(姓)을 하사, 설(薛)씨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본관을 14세 설곡(薛嚳)이 경주(慶州)로 삼았는데 신라 진흥왕 때라고 한다. 그뒤 36세 설자승(薛子升)이 순화(淳化, 지금의 淳昌)백에 봉해져 순창(淳昌)으로 개관되었는데 그때가 고려 인종2년이었다.
그래서 경주(慶州)가 원적(原籍)이 되고 순창(淳昌)이 본적(本籍)이 된다고 '설씨이천년사(薛氏二千年史)'에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순창(淳昌)이 곧 경주(慶州)이고 경주(慶州)가 바로 순창(淳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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