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칠지도명

라디오에요 2010. 4. 6. 07:27

칠지도명(七志刀銘)

1. 칠지도

◦ 칠지도

∙ 일본 국보로서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소장.

∙ 1874년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였던 스가 마사모토(菅政友)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

∙ 길이 74.9cm의 긴 몸체 좌우에 여섯 개의 가지가 엇갈리게 배열되어 몸체 부분을 포함하면

모두 일곱의 가지를 가진 창과 같은 형상의 철기

◦ 칠지도의 명문(銘文)

∙ 도신의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로 총 61자의 명문이 금으로 상감되어 있다.

∙ 전면에는 제작 연월일과 그 간지, 품명, 길상구 등이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 칠지도가

전달된 대상과 그 목적이 새겨져 있음.

◦ 칠지도에 대한 기록

《일본서기》“신공 52년 백제의 구저(久低)가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하여 각종의 귀한 보물을 가져왔다.”

∙ 《고사기》“응신천황(應神天皇) 시기에 백제국주(百濟國主) 조고왕(照古王)이 아지길사(阿知吉師)를 보내 큰 칼(橫刀)과 큰 거울(大鏡)을 보냈다.”

2.내용

<앞면>

(和)

(五)

태(화)

(오)

태화 4년에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鋼)

( )

(강)

백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병해(兵害)를 물리칠 수 있고

(供)

( )

( )

( )

( )

(공)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가 만든것 이다.

<뒷면>

(子)

선세(先世) 이래 아직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1 : 백제왕세자에게 기이한 것이 생겨

2 : 백제왕세자 기생이

(音,晉,德)

(음,진,덕)

1 : 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칼을)만들었으니

2 : 성진(聖晉)을 동진(東晋)으로 보고 동진이 백제를 통해 칠지도를 만들어 주었다는 주장

3 : 성스럽고 덕이 있는 까닭으로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까지 전해보이라

▶ 泰□四年

태화4년 : 명문의 첫머리에 오는 이 구절은 대부분의 칼(刀劍), 거울(鏡), 솥 등의 금문(金文)과 같이 제작연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글자의 남은 상태가 좋지 않다. 태(泰)는 확실하나, 두 번째 글자는 완전치 않아 태화(泰和), 태시(泰始), 태초(泰初) 등으로 판독되었고, 중국사서와 금문에 보이는 음통(音通)의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보아 태화(泰和 = 太和)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 五月十六日丙午正陽

5월 16일 병오일 정양 : 여기에 나오는 월·일·일진(月·日·日辰)이 실제 월·일·일진이라고 보는 입장과 단순한 길상구(吉祥句)로 보는 입장으로 나뉜다. 실제의 월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앞에 나오는 연호 비정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태화 4년에 관한 주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길상구로 보는 입장에서는 한(漢)·삼국(三國)·진대(晉代)의 경(鏡)·검(劍)·대구(帶鉤) 등의 명문에서 ‘五月丙午’가 상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5월 병오일은 금속기를 만들기 위한 불을 취함에 성하(盛夏 : 5월)의 병오일(丙午日)(병(丙)은 화(火)의 형(兄), 오(午)는 정남(正南))이 가장 적합한 날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5월 병오에 기(器)를 모두 주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五月丙午’를 일종의 길상구로 만들어 그러한 사상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제작시간에 해당하는 正陽은 하루 중 불의 기운이 가장 성한 때)로 볼 경우 일간지와 월일의 일치 여부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 造百練鐵

조백련강 : 이 구절에 근거하여 칠지도의 제작방법을 ‘단조(鍛造)’로 이해해 왔는데, 칠지도 모조품 제작시 칠지도의 본체와 날이 있는 가지(지인(枝刃)) 사이가 너무 좁아서 단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조(鑄造)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기도 하지만 주조철(鑄造鐵)에서는 녹이 층을 이루어 일어나는 데 반해 단조철(鍛造鐵)은 군데군데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점이나 칠지도 지인(枝刃)과 몸체 연결 부분 등을 볼 때 단조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김창호).

▶ (出)(辟)百兵

(출)(피)백병 : 처음 글자는 出, 生, 世, 豈자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원한 일본에게 백제가 만들어서 보냈다’는 의미에서 과거형인 生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미래형인 出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百은 ‘일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모든’,‘다수’라는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나아가 모든 병해를 막을 수 있다’라고 해석된다. ‘出辟’을 ‘豈避(개피)’·로 볼 경우‘어찌 백병을 피하겠는가’라는 해석이 되는데, 이 경우 백병을 백제의 병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 宜(供)供侯王

의(공)공후왕 : 위와 같이 만들었고 위와 같은 효험을 가지고 있으니,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적합하다는 뜻이다. 후왕은 뒷면의 명문에 의해 칠지도를 받는 왜왕임은 분명하지만, 칠지도를 주는 백제에 대해 어떤 위치였던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백제가 천자(天子)와 같은 입장에서 왜를 제후(諸侯)와 같이 표현했다고 보는 입장(백제 하사설)과 금문에 쓰이는 상투적인 길상구(吉祥句)로서 상하관계는 무의미하다고 보는 입장(백제 증여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왜왕에게 바쳤다고 하는 입장(백제 헌상설), 후왕의 上王으로서 주체가 백제의 왕이 아닌 동진의 왕이라고 보는 입장(동진 하사설) 등이 있다.

▶ □□□□(作)

□□□□(작) : 제작지 또는 제작자를 나타내는 부분인데 3자인지 4자인지도 분명치 않다. 대체로 4자로 보고 있다. 4자로 판독하고 있는 산미행구(山尾幸久)에 따르면 첫 글자는 ‘大羊’으로 길상의 뜻이라고 한다.

▶ 先世以來未有比刀

선세이래미유차도 : 뒷면의 첫 구절인 이 문장은 '이러한 모양의 칼은 일찍이 없었다.'로 해석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왕이 왜왕에게 전달함에 있어 그 특별성과 칠지도 자체의 우수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문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백제 하사설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는 이 부분을 단순한 길상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 百(濟)

백(제) : 일본에서는 백제를 낮추어 부르기 위해 濟를 滋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칠지도의 배후에 어떤 나라가 있던 간에 칠지도를 제작한 백제가 자국의 국호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 王世(子)

왕세(자) :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대부분 王世子로 보고 이를 백제하사설의 강력한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칠지도를 만들었기에, 백제왕이 왜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寄生

기생 : 인명으로 볼 것인지, 서술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로 나뉘어진다. 인명으로 볼 경우 “백제 왕세자 기생에 의해서 칠지도가 주어졌다”라고 해석이 되고, 서술로 볼 경우 “기대어 삶”으로 해석이 되어 동진이 배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백제 하사설을 부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기이하게 생겨남”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 聖音

성음 :‘성스러운 소식’으로 해석하는 경우 백제 하사설을 수용하게 되고, 성음 대신 “聖晋”으로 해석하는 경우 백제 하사설을 부인하면서 동시에 동진 하사설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된다. 또한 불교와 관련지어 부처의 소리나 석가의 가르침 등 불교적 용어로 간주하여 칠지도가 불교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 故爲倭王旨造

고위왜왕지조 : 일본학계에서는 爲자를 “~를 위하여”로 해석하여 헌상설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명령자는 동진의 황제로, 그 명을 받아 백제에서 만들어 보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왜왕을 위하여 백제왕이 명령을 내려 하사한 것이라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즉 왜왕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왜왕이 된 고로’ 등으로 해석하여 상국으로서의 백제가 하국인 왜에게 신임의 징표로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旨’는 인명으로 보거나 ‘敎旨’등의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데, 인명으로 볼 경우 상대국의 왕명을 거론하는 명문 형식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보게 된다. 敎旨로 볼 경우 백제왕이 천황에게 칠지도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받고 만들어 받치게 되었다는 주장이 된다. 혹은 ‘왜왕이 된 뜻으로’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당시 旨라는 이름으로 행세한 왜왕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막연히 왜왕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 경우이다.

▶ 傳示後世

전시후세 : 칠지도가 헌상품이냐 하사품이냐의 근거로 거론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둘째 글자가 잘 보이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傳示後世’로 판독이 되어 “후세에 전하여 보이다”의 의미라고 보는 것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형이냐 명령형이냐 하는 데서는 입장의 차이가 나타난다. 백제 헌상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후세에 전하여 보이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로 보고, 백제 또는 동진하사설의 입장에서는 제왕이 신하에게 훈시하는 관계적 용어로 하행문서(下行文書) 양식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이것은 단지 “기념으로 한다”는 정형구로 금석문의 길상구·상용구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하행문서 양식이라고 하거나 하사설의 근거로 삼기는 곤란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山尾·佐伯).

 

3.칠지도에 관한 각국의 주장

① 일본의 연구

칠지도 명문을 최초로 확인한 것은 스가였으나, 일본학계에 그 존재와 의미를 처음으로 공표한 것은 호시노 히사시였다. 1891년에「칠지도고(七枝刀考)」를 발표한 그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주지에게서 받은 실측도를 통해『일본서기(日本書記)』신공(神功) 52년의 기사(記事)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쳤다(獻上)'고 전하는 칠지도와 같은 물건으로 추측하였다.

호시노는 칠지도의 실물 모양이『일본서기』의 기술과 일치한다고 보아,『일본서기』에서와 같이 칠지도(七枝刀)로 명명했지만, 1894년경 두 번째 조사에 임했던 스가는 재직시보다 더 강하게 연마하여 명문에 칠지도(七枝刀)라고 새겨진 것을 확인하고, 처음에는 여섯 개의 가지를 보고 육차도(六叉刀)라 했던 것을 칠지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칠지도라는 명칭의 정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여러 사람에 의해 몇 차례의 실물조사가 행해져 명문 판독상의 진전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비교적 안정된 판독은 후쿠다 도시오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1946년부터 3년에 걸쳐 세 차례의 정밀한 실물조사를 진행하여 새로운 문자의 판독과 함께 명문 판독의 대강을 확정하였다. 그가 앞면에서 '후왕(侯王)', 뒷면에서 '백제(百濟)'와 '왜왕(倭王)'의 문자를 새롭게 판독했던 것은 칠지도 명문 연구상 중요한 업적이었으며, 이전에 비해 정밀하고 합리적인 해석문을 제시했다. 또한 앞면 첫머리의 연호(年號)는 태화(泰和)로 읽혀지지만 중국의 연호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음이 서로 통하는 태화(太和)가 태화(泰和)로 새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즉 칠지도에 새겨진 '태화 4년(泰和四年)'은 중국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 4년(太和四年)'으로, 곧 369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백제와 왜왕을 새롭게 판독하였던 성과를 더해『일본서기』신공 52년(372년)에 백제가 왜에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을 바쳤다는 내용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칠지도 명문(369년)과 『일본서기』(372년) 사이에 연대의 차이는 있지만 전자가 백제에서 칠지도가 만들어진 해를 나타낸다면, 후자는 칠지도가 왜에 전해진 연대를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결국 백제가 칠지도를 왜왕에게 바친 이유도『일본서기』가 전하는 것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신공 49년(369년)에 왜(倭)가 가야(가라 칠국(加羅七國))를 정복하여 백제에 주자, 신공 52년(372년)에 백제는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칠지도(七枝刀, 七支刀)를 왜에 바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전에 없었던 정밀한 판독작업이 뒷받침됨으로써 근년까지 일본학계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가 왜에 칠지도를 바쳤다는 소위 '헌상설(獻上說)'의 전형을 이루게 되었다. => 백제 헌상설

물론 현재 일본의 모든 연구자가 이러한 해석을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칠지도 명문이 백제와 왜 사이의 상하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백제와 왜의 초기 외교관계를 보여주는 기념비로 보아야 한다는 '대등설(對等說)'이 제시되기도 하였고, 칠지도를 보낸 직접적인 주체가 '백제 왕세자'임에 주목하여 백제 개로왕 14년(468년)에 왕세자였던 문주왕이 국정을 전담하는 상좌평에 취임한 기념으로 제작하여 왜에 증여한 것으로 해석하는 '증여설(贈與說)'도 제시되고 있다. => 백제 증여설

임나일본부설의 요점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군사정벌 하여 임나일본부라는 통치 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가야 ․ 신라 ․ 백제 등의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남선경영론 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제가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낸 식민가관 중에서, 한국사가 고대부터 이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설명하는 타율성 이론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 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가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하여 편찬된 책으로, 원사료 편찬 과정에서 상당한 조작이 있었다고 보이고, 특히 5세기 이전 기록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광개토왕릉비문>이라 <<송서>><외국전>의 문헌 기록은 과장되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만일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 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 지역 고분 발굴 자료들을 보면 4세기 이전 이 지역의 독특한 유물 문화가 5,6세기까지도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사실이 문화 유물에 반영된 바가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의 문헌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입증된다.

② 북한의 연구

북한의 김석형은 중국에 '태화(泰和)'라는 연호가 없었으므로 백제의 독자적 연호로 볼 것을 주장하면서 '후왕(侯王)'은 백제왕에 대한 왜왕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백제왕이 4~5세기경에 이소노카미 신궁 일대를 영역으로 하는 백제계 분국의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1966년에 발표된 이 연구는 일본학계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른바 분국론(分國論)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분국론이란 삼한과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의 각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성립시킨 정치체들이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본국에 대해 분국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손영종은 김석형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명문에서 판독되는 날짜의 간지(日干支)를 통해 '태화(泰和)'가 백제의 연호라는 주장을 보강하였다. 일본의 연구처럼 '태화(泰和)'를 '태화(太和)'로 볼 때, 태화(太和) 4년(369년) 5월 13일은 임신(壬申)이며, 5월 16일은 을미(乙未)이므로 어느 쪽도 명문의 병오(丙午)와는 일치하지 않으므로, 중국의 연호가 아니라 백제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연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태화(泰和)'는 백제의 전지왕(琠支王)이 즉위하면서 사용한 연호로 태화(전지왕) 4년(408년) 5월 13일의 일간지가 병오로 명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판독자가 5월 16일이라 하는데도 5월 13일로 본 것은 다수의 불확실한 판독을 추종하는 것보다 병오라고 확실하게 판독되는 날짜의 간지에 비중을 두어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墨書銘)에 고구려 왕의 신하였던 진(鎭)이 '후왕(侯王)'으로 쓰여 있으며, 5세기 중엽에 백제와 왜가 중국에서 받은 장군호를 비교할 때, 안동장군(安東將軍)의 왜왕은 진동장군(鎭東將軍)의 백제왕에 비해 한품계 아래였으므로, 칠지도 명문의 '후왕'은 백제왕에 종속하고 있었던 왜왕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 백제 하사설

③ 우리나라의 연구

우리나라의 연구는 1973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칠지도의 정교한 복제품이 도입되면서부터 활발해졌는데, 대체로 북한과 같은 하사설(下賜說)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병도는 통일신라 이전의 금석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없으므로 태화(泰和)는 백제의 연호이며,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연구를 수용하여 뒷면의 '백제왕세자기생(百濟王世子奇生)'을 백제의 왕세자인 기생(奇生)으로 읽었다. 기생(奇生)은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이름 귀수(貴須)와 일치하므로 '백제왕세자'는 근구수왕을 가리키고, 태화는 근구수왕의 아버지 근초고왕이 재위 24년(369년)부터 사용한 연호라고 해석하였다.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는 태화(泰和) = 태화(太和)로 보면서 472년에 백제가 북위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과 5세기 후엽에 백제가 국내적으로 후왕제(侯王制)를 실시하고 있었던 점을 들어, 태화(太和) 4년은 동진의 연호(372년)가 아니라 북위(北魏)의 연호(480년)로 파악하였다. => 백제 하사설

※ 동진 하사설

- ‘侯王’과 ‘倭王’의 문제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가운데 栗原朋信(토모노부)은 결론적으로 칠지도의 동진하사설을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명문에 敬語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문장이 하행문서의 형식으로 상위자가 하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上田正昭(우에다 마사아키)(백제 하사설)와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이 칼은 백제의 궁상을 도와준 왜왕의 공로를 높여서,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 황제가 백제를 통하여 왜왕 지에게 보낸 것이다”라고 백제왕의 칠지도 하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그는 후면의 명문 가운데 ‘聖音’을 ‘聖晋’으로 판독하면서 동진을 백제와 왜의 양국 사이에 개입시켜 놓고 칠지도 하사의 주체를 동진으로 본 것이다.

◎참고 - 판독

①김영심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生辟百兵宜供供矦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竒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②이도학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辟百兵宜▨供矦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濨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後世」

[출전 : 「百濟 七支刀 銘文의 再解釋」『韓國學報』60(1990)]

③김창호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辟百兵宜復供矦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출전 : 「百濟 七支刀 銘文의 재검토-日本學界의 任那日本府說에 대한 反論(3)-」『歷史敎育論集』13·14(1990)]

④김정학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生辟百兵宜供供矦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濨▨世▨奇生/聖音故爲倭王造/傳不▨世」

[출전 : 「石上神宮所藏 七支刀의 眞僞에 對하여」『百濟硏究』17(1986)]

⑤허흥식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世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출전 : 『韓國金石全文』古代篇(1984)]

⑥鈴木靖民(스즈키 야스타미)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生辟百兵宜復供矦王/▨▨▨▨作」

先世以来未有此刀/百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출전 : 「石上神宮七支刀銘についての一試論」『坂本太郞頌壽紀念 日本史學論集』上(1983)]

⑦조동원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世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출전 : 『韓國金石文大系』(1981)]

⑧김정배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傳示後世」

[출전 : 「七支刀 硏究의 새로운 方向」『東洋學』10(1980)]

⑧황수영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世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伝示後世」

[출전 : 『韓國金石遺文』(1976)]

⑨이병도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生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출전 : 「百濟七支刀考」『震檀學報』38(1974)]

⑩上田正昭(우에다 마사아키)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鋼七支刀/生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来未有此刀/百済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伝示後世」

[출전 : 「石上神宮と七支刀」『日本なかの朝鮮文化』9(1971)]

◉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2004,『고대로부터의 통신』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 http://gsm.nricp.go.kr/

*다른분의 논문을 참고하였음.

출처 : 미디어나라센군
글쓴이 : 센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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