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칠지도명

라디오에요 2010. 4. 6. 10:11

▲연   대 - 372년(근초고왕 27년) /

               408년(전지왕 4년= 백제 泰和 4년) /

               369년(東晉 폐제 혁(奕) 太和 4년) / 268년(西晉 무왕 태시(泰始) 4년) /

               480년(북위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4년)

▲크   기 - 전체길이 약 74.9cm, 도신(刀身) 65cm

▲출토지 - 일본 나라현(奈良縣) 천리시(天理市) 석상신궁(石上神宮)

▲소재지 - 일본 나라현(奈良縣) 천리시(天理市) 석상신궁(石上神宮)

 

일본 나라현 천리시에 전해지는 특이한 형태의 칼이다.

백제에서 일본에 하사한 칼로 표면에 명문이 입사되어 있다.

총 61자로 해서에 가까운 서체로 예서와 행서가 혼용되어 있다.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물로 간직된 칠지도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내려준 것이다.

 

“이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의 어진 지시를 받들어 왜왕에게 만들어 주노라.”는 글이

표면에 새겨져 있다

 

당시 일본은 철기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이처럼 백제의 철기문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백제로 온 왜의 사신이 돌아갈 때 철정(철판) 40장을 받았고,

그 후에도 백제가 칼과 거울을 왜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은 철을 매개로 한 백제의 세력권 안에 들어 있었다.

 

 

칠지도는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 천리시[텐리시]의 석상(石上: 이소노카미)신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백제가 왜에게 칠지도를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칠지도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삼국시대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해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앞면은 '태□(泰□: 연호)' 4년 11월 16일에 칠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뒷면은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하여 이 칼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종래에 일본 학자들은 '태□'를 동진(東晋)의 연호 태화(泰和)로 이해하여

칼을 만든 해를 태화 4년, 즉 369년으로 이해하고,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칠지도 헌상기록과 연결시켜

372년에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복속의 표시로 칠지도를 헌상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한국 학자들은

'태□(泰□)'를 태화(泰和)로 판독할 수 없기 때문에 칠지도를 369년에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거나

비록 연호를 그대로 인정하여 369년에 칠지도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백제가 왜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보았다.

 

현재 칠지도 명문과 관련하여 한일 학자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는 핵심 내용은

칠지도의 제작연대와 백제 왕세자가 그것을 만들어 왜왕에게 준 이유 등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당시 백제와 왜와의 관계가 설명되어지기 때문이다.

칠지도는 길이 74cm의 대형 창 모양의 철기로

날 양쪽에 가지가 세 개씩 어긋나게 솟아 있고,

그 날 앞 뒤 넓적한 면에 금으로 상감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앞면>
1四年十一2月十3日丙午正陽造百45七支刀生6辟百兵789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101112131415生聖16故爲1718造傳192021

<앞면>
태화(泰和) 4년 11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었다.

(이 칼은) 모든 병해(兵害)를 물리칠 수 있고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ㆍㆍㆍ가 만든 것이다.

<뒷면>
선세(先世) 이래 아직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가 뜻하지 않게 성음(聖音)을 내었으므로

왜왕(倭王)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할 것이다.

- 김영심
-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칠지도의 다른 해석> 

(1) 조동원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世辟百兵宜供供侯王▨▨▨▨作」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 출전 : 『韓國金石文大系』(1981)]

 

(2) 이도학
四年月十日丙午正陽造百七支刀生辟百兵王▨▨▨▨作」
先世以來未有此生聖故爲造傳
-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3) 鈴木靖民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生辟百兵宜復供矦王▨▨▨▨作」
先世以来未有此刀百王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 출전 : 「石上神宮七支刀銘についての一試論」『坂本太郞頌壽紀念 日本史學論集』上(1983)

 

태화 4년

칠지도의 제작연대와 관련하여 논란이 지극히 많은 부분인데

판독상 태시, 태초, 태화의 세 가지 설로 정리할 수 있다.


1. 태시(泰始)

: 서진(西晉)의 태시 4년은 웅략천황(雄略天皇) 12년(268)에 해당하며,

6월 11일의 일진(日辰)이 병오(丙午)인 해도 바로 268년이다(菅政友, 高橋健自).

유송(劉宋)의 태시(泰始) 4년(468)으로 보기도 한다(宮崎市定).


2. 태초(泰初)

: 조위(曺魏)의 태초 4년이라고 보고 있으나

실제로는 위(魏) 명제(明帝) 태화 4년(230)에 비정하기도 하고

서진(西晉)의 태시(泰始) 4년(268)에 비정하기도 한다(星野恒, 喜田貞吉).
 

3. 태화(泰和)

: ‘泰’자(字) 다음 글자는 ‘禾’ 변(邊)만이 확실한 상태이지만 福山敏男이 비정한 이래 태화로 읽으며,

태화를 동진 연호로 보는 입장과 백제 고유 연호로 보는 입장으로 나뉜다.
① 동진(東晉)의 태화(太和) 4년(369)설 :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 52년조의 기사와 결부시켜 볼 때

이 시기에 해당하는 연호는 동진의 태화이며, ‘泰’와 ‘太’는 통용이 가능하다.

(福山, 榧本, 西田, 三品, 栗原, 佐伯 등 대부분의 일본인 연구자와 李道學)
② 백제 연호설
ㄱ. 김석형 : 5세기의 어느 해.
ㄴ. 이병도

: 칠지도의 제작 연월일은 신공 52년 9월 16일로 이 해가 바로 태␥(泰␥) 4년(372)이며

3년 전인 근초고왕 24년(369)이 원년에 해당되는데,

근초고왕 24년은 근초고왕 부자가 완전히 마한(馬韓)을 통합한 해로 이 해에 새로 연호를 세웠던 것.
ㄷ. 이진희

: 북위(北魏) 태화(太和) 4년(480) 5월 11일이 병오일로서 간지가 일치.
ㄹ.
손영종

: 칠지도가 제작된 4〜5세기경 5월 13일이 병오일인 해는 408년(전지왕 4)과 501년(무녕왕 1)인데

전지왕이 즉위년에 태화로 건원한 것으로 보이므로 태화(泰和) 4년은 408년이며,

408년에 칠지도를 제작하여 왜에 전달한 것은 응신(應神) 20년으로 응신 20년을 120년 움직이면 409년.
ㅁ. 김창호

: 곤지(昆支)의 왕자 시절과 왜왕(倭王) 제(齊)의 재위 시기를 비교할 때 445년 또는 460년.
이상과 같이 연호 비정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것을 중국 연호로 보든 백제 고유의 연호로 보든

시기상으로는 4세기 후반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싶다.

왜냐하면 백제와 왜의 교섭이 366년부터 시작되었고

명문의 내용으로 볼 때 백제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서 국제정세 속에서 그 위치를 주목할만한 시기인

근초고왕대의 상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11월 16일 병오일의

: 여기에 나오는 월·일·일진(月·日·日辰)이 실제 월·일·일진이라고 보는 입장과 단순한 길상구(吉祥句)로 보는 입장으로 나뉜다.

실제의 월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앞에 나오는 연호 비정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태화 4년에 관한 주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길상구로 보는 입장에서는 한(漢)·삼국(三國)·진대(晉代)의 경(鏡)·검(劍)·대구(帶鉤) 등의 명문에서

‘五月丙午’가 상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5월 병오일은 금속기를 만들기 위한 불을 취함에

성하(盛夏 : 5월)의 병오일(丙午日 -  丙은 火의 형(兄), 午는 正南)이 가장 적합한 날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5월 병오에 기(器)를 모두 주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五月丙午’를 일종의 길상구로 만들어

그러한 사상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견해로 408년 11월 16일은 실제 칠지도 제작연도가 맞다.

 

▲한낮에

일중(日中)과 같은 의미로 태양이 정남방에 높이 떠오르는 시각인 낮 12시,

하루 중 화기(火氣)가 가장 성한 시간.
 

▲백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이 구절에 근거하여 칠지도의 제작방법을 ‘단조(鍛造)’로 이해해 왔는데,

칠지도 모조품 제작시 칠지도의 본체와 날이 있는 가지(지인, 枝刃) 사이가 너무 좁아서

단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조(鑄造)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기도 하지만

주조철(鑄造鐵)에서는 녹이 층을 이루어 일어나는 데 반해

단조철(鍛造鐵)은 군데군데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점이나

칠지도 지인(枝刃)과 몸체 연결 부분 등을 볼 때 단조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김창호).

 

▲ 칠지도

: ‘七支’라는 말의 뜻, 칠지도의 성격에 대해서 독특한 견해를 제시한 藪田은

칠지도는 칠정도(七政刀)로 칠정(七政)은 칠성(七星), 즉 일(日)·월(月)·오성(五星)이라고 보았으며

上田도 이 견해를 지지하여 칠지도는 벽사도적(辟邪刀的) 성격의 주도(呪刀)라고 규정지었다.

또 칠지도는 실용무기가 아니라 칠자경(七子鏡)과 함께 성기(聖器)·주구(呪具) 종류라고 한 견해나(三品)

칠지도의 형태를 볼 때, 의기적(儀器的) 성격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편 한역불전(漢譯佛典)에 칠지라는 용어가 다양하게 보이는 것에 착안해 칠각지(七覺支),

즉 깨달음을 얻는 7가지 사항 또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돕는 7가지의 수행방식이거나

신체(身體)와 구설(口舌)의 7가지의 죄과(罪過)가 아닐까 추정을 하고서

칠지도의 제작은 불교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村山正雄).

 

그러나 이에 대해 칠지도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신앙과도 관계가 깊은 것으로

村山이 지적한 두 번째의 칠지는 불교보다도 도교에서 말하는 신체·구설(口舌)의 7죄업(罪業),

즉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 등 신체동작으로서 나타나는 3가지의 죄과와

망어(妄語)·기어(綺語)·악구(惡口)·양설(兩舌) 등 언어표현으로서 나타나는 4가지의 죄과라고 보기도 한다

(山尾幸久).
 

▲모든 병해(兵害)를 물리칠 수 있고

벽병(辟兵) : 이 용어는 漢代에 선진도가작(先秦道家作)이라 가탁한 『문자(文子)』에 처음 나타나고

진대(晉代) 『포박자(抱朴子)』에는 벽병의 방법이 상술되어 있다.

‘병(兵)’은 원래는 병기(兵器)의 뜻이었으나 여기서는 병해(兵害)의 의미로 그 뜻이 확대된 듯하며,

벽 앞의 글자는 出, 世, 可 등 여러 가지로 읽히지만 의미상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본다.

 

▲후왕(侯王)에게 주기 알맞다 

: 한(漢) · 위(魏) · 육조(六朝)의 금석문에서 다수 발견되는 일종의 길상구에 불과하다는 견해와

백제국제하(百濟國制下)에 있어서의 일종의 관작·신분질서로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백제왕 아래 각지에 배치된 왕(王) · 후(侯) · 태수제(太守制)의 일환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후왕 앞의 두 글자에 대해서는 대체로 ‘供供’으로 판독을 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바치다’  ‘보내다’  ‘주다(공급)’  ‘공용(供用)하다’ 등 동사로 해석하는 입장과

(이병도는 당시 여러 후왕들에게 이 칠지도를 분급(分給)해 준다는 복수 동사격으로 봄)

 ‘많은’ · ‘공공(恭恭)한(공손한, 예의바른)’ 등 형용사로 보는 입장이 있다.

 

한편 손영종은 ‘㑟’(儐‘)供’으로 판독을 하여 빈이란 주인이 손님대접을 한다는 뜻으로

이 문구는 “후왕을 우대하여 공급, 공여한다”는 의미라고 보았다.

 

▲ㆍㆍㆍ가 만든 것이다

제작지 또는 제작자를 나타내는 부분인데 3자인지 4자인지도 분명치 않다. 대체로 4자로 보고 있다.

4자로 판독하고 있는 山尾幸久에 따르면 첫 글자는 ‘大羊’으로 길상의 뜻이라고 한다.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가 뜻하지 않게 성음(聖音)이 생긴 까닭에

각양각색의 의견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앞 문구만 보더라도 榧本이나 이도학 같은 경우는

‘百濟王世’까지로 구두를 지어 ‘百濟王 治世時’의 의미로 보고 있다.

 

‘百濟王世子’까지로 보는 경우도 ‘백제왕과 세자’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三品),

『진서(晉書)』 효무제기(孝武帝紀) 태원(太元) 11년조의 ‘百濟王世子餘暉’의 예에서 볼 때

‘백제왕의 세자’의 의미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奇生聖音(晉)’에 대한 해석은 더욱 다양하다.

‘奇生聖晉’으로 판독을 한 榧本과 栗原은 “생(生)을 성진(聖晉)에 의지하고 있는 까닭에”로 보았는가 하면,

‘奇生聖音’으로 판독을 한 경우는 또 ‘聖音’을 일반명사로 보는 경우와 고유명사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일반명사로 볼 경우도 첫째 부류는

이를 단순히 어은(御恩), 신성한 계시(啓示), 성스러운 소식(聖上의 말씀) 등으로 보아

“생(生)을 어은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福山),

“기묘하게 신성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王仲殊),

“귀하게 생겨남이 있으니 성상의 말씀으로 짐짓”,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이 생겨난 까닭에”(이도학) 등으로 해석하거나,

성음은 성상의 말씀, 즉 백제왕세자의 말씀으로 보았다(김정배).

 

둘째 부류는 ‘성음’을 불교와 연결시켜

불타(佛陀)의 소리, 석존(釋尊)의 은택(恩澤)·가호(加護) 등으로 보고서

“기이하게도(생각지 않게도) 석존의 가호 아래 생겨서”

또는 “석가의 가호가 생기어”로 해석하는 입장이다(村山, 김창호).

고유명사로 보는 경우는

기생(奇生)은 백제의 귀수(貴須), 귀수(貴首), 구수(仇首), 근수(謹首), 구소(久素), 수(須)이고,

뒷부분도 성음으로 읽을 수 있다면 백제왕세자 기생(奇生)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와(西田),

기생(奇生)은 귀수(貴須), 구수(仇首)와 유사하며

성(聖) 내지 성음(聖音)은 경칭적(敬稱的) 의미의 인명 어미

또는 왕자의 뜻인 ‘セシム’의 전와(轉訛)로 왕자(王子)를 의미하는 경어(敬語)이기 때문에

“백제왕(근초고왕)과 세자 귀수(貴須)왕자”로 해석된다는 견해가 있다(三品).

 

지금까지 이러한 인명설(人名說)이 상당히 지지를 받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는 “백제왕세자 기(奇)가 성음이 생기어”라고 해석하고

기(奇)를 곤지(昆支)왕자에 비정한 견해도 있다(김창호).

 

▲왜왕(倭王)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앞의 ‘奇生聖音’에 대한 해석과도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故’자(字)는 앞의 내용과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 때문에’로 해석하거나

‘특별히’,  ‘일부러(짐짓)’로 해석한다.

 

‘倭王旨’는 일반적으로 왜왕의 뜻 · 소지(所旨) · 요청으로 보아

“왜왕이 요청한 그 뜻을 위하여 만들었다”(福山, 榧本, 김정배)로 해석하는데,

“왜왕의 성음에 대한 마음가짐 때문에 만들었다”로 보기도 한다(山尾).


그러나 앞의 ‘奇生聖音’을 인명(人名)으로 본 입장에서는

‘倭王旨’의 ‘旨’자는 ‘替’자로 이것은 찬(贊), 찬(讚)과 통한다고 보고 응신천황에 비정했다

(西田. 三品 · 栗原도 西田說 취함).

또 지(旨)를 근기(近畿) 대화(大和)의 천황가(天皇家)가 아니라

구주(九州)의 비미호(卑彌呼) · 일기(壹岐)를 계승한 왕조의 왜왕의 이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古田武彦), 왜왕의 이름으로 간주하기는 하되 구체적인 비정은 유보한 견해도 있다(佐伯).

이상의 두 입장은 모두 ‘旨(替)’를 명사로 본 견해인데

지(旨)를 명사가 아니라 부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藪田은 ‘旨造’ 대신 ‘敬造’라고 읽고서 “고(故)로 왜왕의 은혜 때문에 공경스럽게 만들어서”로 보았으며,

왕중수(王仲殊)도 지(旨)는 형용사에서 부사로 전화한 것으로

‘旨造’는 정제(精製) · 교조(巧造 : 정교하게 만들다·교묘하게 만들다)의 의미라고 보았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할 것이다.

칠지도가 헌상품이냐 하사품이냐의 근거로 거론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둘째 글자가 잘 보이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傳示後世’로 판독이 되어

“후세에 전하여 보이다”의 의미라고 보는 것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이 희망형이냐 명령형이냐 하는 데서는 입장의 차이가 나타난다.

 

백제 헌상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후세에 전하여 보이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로 보고,

백제 또는 동진하사설의 입장에서는 제왕이 신하에게 훈시하는 관계적 용어로

하행문서(下行文書) 양식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이것은 단지 “기념으로 한다”는 정형구로 금석문의 길상구, 상용구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하행문서 양식이라고 하거나 하사설의 근거로 삼기는 곤란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山尾 · 佐伯).

 

- 칠지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 한, 일 학자

 : 星野恒, 喜田貞吉, 木崎愛吉, 末永雅雄, 榧本杜人, 福山敏男, 西田長男, 藪田嘉一郞

   栗原朋信, 山尾幸久, 王仲殊, 村山正雄, 上田正昭, 佐伯, 宮崎市定, 鈴木靖民, 菅政友, 高橋健自

 : 이병도, 황수영, 조동원, 이도학, 김정배, 허흥식, 김정학, 김창호, 김석형, 이진희, 손영종

 

 

 

 

 칠도(七支刀)  

 

 

 

(1)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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