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응신천황 11년 시세조를 보면
"어떤 사람이 상주(上奏)하기를 「일향(日向 히무카)국에 카미나가히메(髮長媛)라는 처녀가 있는데, 제현군우제정(諸縣君牛諸井)의 딸입니다. 그 여인은 국색(國色)이라 할 만큼 얼굴이 아름답습니다(是國色之秀者)」라고 하였다. 천황은 즐거워하며 마음속으로 부르려고 생각하였다" 는 기사가 있으므로, 제가 카미나가히메를 최초의 야마토나데시코(大和撫子)라고 주장하여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髮長媛카미나가히메라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서 소개한 것은 단순히 그녀가 국색(國色)이라 할 만큼 미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깊이 음미하면 음미할 수록 "應神천황과 仁德천황이 『일본서기』가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父子之間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강한 의문이 생긴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지요.
무슨 근거로 그러냐구요?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서 왕이 찜해놓은 여자를 왕세자가 탐난다고 자기에게 달라고 할 수 있나요? 거꾸로 왕세자가 먼저 사랑한 여자라도 왕이 뺏어가는 판에...
더구나 오호사자키는 『記紀』에 응신천황의 4번째 아들로 되어 있는데, 제4자라는 오호사자키가 부친인 응신의 시녀가 될 여인을 탐내어 청한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또 그 욕구를 부친에게 직접 말하지 아니하고 대신(大臣)인 타케우치스쿠네를 통하여 부탁하였다는 것도 이상하지요.
그리고 오우진천황이 카미나가히메를 오호사자키에게 주면서
"물이 고이는 요사미(依綱)연못의 제방에 말뚝박는 사람이 말뚝을 박고 있었던 것도 모르고, 순채(蓴菜)를 뜯는 사람이 손을 뻗치고 있었던 것도 모르는 것처럼 나의 마음이 매우 어리석어 지금 후회하고 있네"
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되어 있는데, 오우진천황과 오호사자키가 정말 부자지간이라면 이런 식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기술될 수 있을까요?
또 『일본서기』를 보면 응신천황은 신공황후가 69년간 섭정을 한 끝에 70세에 즉위하여 41년간 재위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라는 책(하권)의 화천국(和泉國) 대조군(大鳥郡) 대산릉(大山陵)조를 보면,
"닌토쿠천황릉이다. 오호사자키황자는 24세에 즉위하여 난파 고진에 도읍하였다.
(大[焦+鳥][燎-火+鳥]皇子 二十四歲卽位, 都于難波高津) …"
라고 기술되어 있으니 어찌된 것일까요?
※[和漢三才圖會: 일본에서 양안상순(良安尙順)이 중국의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모방하여 17세기말부터 18세기초에 찬(撰)한 것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사물을 모은 다음 그림을 그려서 설명한 것]
다시 말하면 응신천황이 죽은 다음에 24세의 오호사자키가 바로 즉위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오호사자키는 오우진천황 17년에야 태어난 것이 되는데, 『일본서기』에는 오우진천황과 오호사자키가 카미나가히메(髮長媛)라는 미인을 놓고 사랑경쟁을 한 시기를 오우진천황 13년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13년조를 보면 "3월에 천황이 전임(專任)의 사자를 보내어 카미나가히메를 불렀다. 9월 중순에 "카미나가히메가 일향에서 도착하여 상진읍(桑津邑)에 안치시켰다. 여기서 황자(皇子) 오호사자키가 카미나가히메를 보고 그 얼굴의 미려함에 감동하여 언제나 연정(戀情)을 품고 있었다" 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일본서기』의 기사와 《화한삼재도회》의 내용 중 어느 한쪽이 틀렸다고 하지 않는 이상, 83세의 오우진천황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오호사자키 님이 카미나가히메라는 미인을 놓고 사랑경쟁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꼴입니다. 어떻게 말도 안되는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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