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철이 전하는 박창화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대정 천황이 죽은 바로 그날 아침 일찍) 박창화가 "昭和"라는 연호를 지어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昭和"는 서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百姓昭明、協和万邦"을 줄여서 昭和라고 했는데, 당서에 보면 황제가 昭和를 주청한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원래 연호는 "昭和"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中島利一郎이 지어 올린 "光文"으로 연호를 정했는데, 東京日日新聞이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그걸 알아내서 호외를 날리는 바람에 천황의 연호를 공식 발표하기 전에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부랴부랴 "昭和"로 바꾸어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유명한 "光文 元号誤報事件"으로서 당시 東京日日新聞의 편집장이 오보의 책임을 지고 편집부를 떠났다고 합니다.
박창화 이외에도 "昭和"라는 연호를 지어 올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어쨋든 光文, 昭和를 비롯한 10여개의 연호가 궁내성 또는 추밀원 고문인 黑田長成 侯爵 등을 통해서 올라 갔고, 최종적으로 남은 5개 정도의 후보에서 光文이 1위였고, 昭和가 2위인지 3위였다고 합니다. 심의위원회의 토의를 거쳐 光文으로 확정된 시점에서 정보가 새나가서 東京日日新聞의 호외 사건이 터졌고, 부랴부랴 다시 회의를 해서 확정한 것이 昭和라고 합니다.
연호를 올려서 후보에까지 올라갔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학자"이면서 다소 과장을 하자면 五經 정도는 머리 속에 각인이 되어 있다고 하는 수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박창화가 昭和를 지어 올린 게 사실이라면 박창화는 "글 좀 읽었네~"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대의 일본 최고 수준의 한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정이 죽은 다음 해(소화 2년, 1927년) 2월에 中央史壇은 大正天皇特輯號를 내게 되는데, 바로 그 특집호의 필자들 중에 당대에 일본을 주름잡던 한학자들의 이름이 발견되며,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바로 그 한학자들이 대정이 죽은 다음 새 천황의 연호를 지어 올린 당사자들이라고 합니다. (궁내성에서는 누가 어떤 연호를 지어 올렸는지 공식적으로 확인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당사자들의 고백 등을 통하여 누가 어떤 연호를 올렸는지가 밝혀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창화는 그 해(소화 2년, 1927년) 12월에 中央史壇을 통해 논문을 발표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단단한 연결 고리가 박창화와 일본인 한학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당대의 한학자 그룹", "새로운 천황의 연호", "궁내성", "中央史壇"등의 키워드에 의해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창화의 후견인은 누구였는가 ?
후꾸오까번(福岡藩)의 번주이며, 40만석 이상의 대재벌로서, 한때 철도 사업에 관심을 가졌으며, 추밀원의 고문으로서 궁내성과 일정한 연관성을 가지고 궁내의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黒田長成 侯爵일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中島利一郎이란 한학자와 박창화 사이에 존재하는 닮은 점 때문입니다.
中島利一郎은 黒田長成 侯爵을 통해서 궁내성으로 光文이란 연호를 지어 올린 당사자이며, 中央史壇의 1927년 2월호에 大正天皇特輯號에 두 편의 글을 실명으로 기고한 당사자이며, 黒田長成 侯爵의 藩史編纂所에 근무하던 한학자였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박창화는 궁내성으로 昭和란 연호를 지어 올린 당사자 중의 한 명이며, 昭和란 연호는 黒田長成 侯爵을 통해 올라갔고, 中央史壇의 1927년 12월호에 논문을 기고한 당사자인 한학자였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1926년(소화 원년) 동경이란 시공간에서 中島利一郎과 박창화는 黒田長成 侯爵 가문인 福岡藩의 藩史編纂所에서 福岡藩史를 편찬하고 있던 사람들 중의 두 명으로서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윗 글은 예전의 역사21의 모모씨 글입니다만.. *요번에 역사비평 계간지 2003년 봄호를 복사해서 봤습니다. 그 란에 김태식 기자의 글도 올라 와 있어서 보니, 김기자는 박창화는 중앙사단에 논문을 올리기 이전에, 이미 화랑세기를 보았을거라 했지만, 그 의견에 동의하기 힘들더군요. 만일 봤다면, '신라사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의견이 반영되었을터인데.. 그런 흔적은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창화가 도서료에 취직한 이후에 화랑세기를 봤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주로 삼국사기랑 삼국유사를 비교해 나가면서, 동사강목도 언급한 걸 보니, 사전에 신라 역사 전반에 상당한 지식을 이미 구축해 놓은 상태였더군요. 박창화가 1923년에 일본에 간 후, 1933년에 궁내성 도서료(서릉부로 명칭이 바뀌기 전의 이름)에 취직하기 10년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이야기를 밝혀 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윗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일본인 후견인이 없다면, 도서료에 취직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