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gusan0579/4575573
지도설명: 홍대용의 연행도입니다. 요동반도의 지명과 강들의 위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서 해석의 난조를 보이고 있는것이 작금의 현상입니다. 충분히 근거사서들을 검색할 수 있는 실력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기록의 해석을 왜곡하며 오히려 큰목소리로 군림하고 난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시거던 떨지나 말지!좋은말로 충고를 해보아도 우이독경(牛耳讀經)입니다. 학문을 빙자하여 억지를 부려가며 동북공정을 이롭게 하려는 행위를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
遼東郡,秦置。屬幽州。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襄平。有牧師官。莽曰昌平。新昌,無慮,西部都尉治。望平,大遼水出
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長說。房,候城,中部都尉治。遼隊,
莽曰順睦。遼陽,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莽曰遼陰。險瀆,居就,室偽山,室偽
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顯,安市,武次,東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
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
海。沓氏。
*平郭,有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한서 지리지>는 서안평을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며 그 위치를 비교적 요동반도의 서남부에 배치된 평곽의 남쪽, 문현의 북쪽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沛水의 흐름을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의 평곽은 개주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서안평은 개주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실재의 흔적은 많은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리적인 특징으로 추정하면 평곽에 철관과 염관이 있었다고 함으로 서안평도 염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戶四萬五千六。口
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遼山,遼水所出,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水,西北經塞外。上殷台,莽曰下殷。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
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다시 현도군 조에서는 마자수를 설명하고 있는데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고 하며 이 물은 다시 서남쪽에 이르러 서안평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자수는 서개마(개주)의 남쪽으로 흐르는 고니하(古泥河)=浿水=청하=대통강으로 부르던 물로서 서북으로 역류하여 소요수(염난수)와 합류하며 다시 다른 경로의 서남으로 흘러서 서안평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추정이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요동만위치에 있어야 될 이 강물길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마자수는 현 국경의 압록강과는 어떻게 다른것인지는 물의 흐름으로 알 수 있습니다. 현 국경의 압록강은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없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전략...句驪一名貊*(耳)*。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
是也。[一]
注[一]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위의 현도군조에서는 서안평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마자수는 염난수와 합류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소요수와 합류한다는 대목이고, 이 소요수를 근거하여 고구려의 별종인 맥이라고 부르는 종족이 살았는데 이들을 소수맥으로 불렀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소수맥이 살았다는 개주의 서남쪽에 있어야 할 소수, 즉 소요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의 기록중에 <<삼국지>> 권 3의 <동이전>이나 <<수서>> 권 8의 <고려전>에 요서 안평을 일명 서안평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단순한 기록상의 오류가 아니라 서안평의 윤몰과 관계되는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一]하략
注[一]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三國魏志》卷三 《東夷傳》·《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志》五, <西安平>屬<幽州><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 這裏[遼]字衍, 或[遼]下脫[東]字. 爲<幽州>刺史< 丘儉>所破. 其玄孫<乙弗利>, <利>子<釗>, <烈帝>時與<慕容氏>相攻擊. <建國>四年, <慕容元眞>率衆伐之, 入自<南陝>, 戰於<木底>, 大破<釗>軍, 乘勝長驅, 遂入<丸都>, <釗>單馬奔竄. <元眞>掘<釗>父墓, 載其屍, 幷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毁<丸都城>而還. 自後<釗>遣使來朝, 阻隔寇 , 不能自達. <釗>後爲<百濟>所殺.
<위서> 고려전 교감기
魏正始中, 入寇遼西安平, ->
위정시(240-249)중에 요서안평을 침입하여, ->
三國魏志卷三0東夷傳ㆍ隋書卷八一高麗傳「遼西安平」作「西安平」. 按後漢書郡國志二安平國屬冀州, 志五, 西安平屬幽州遼東郡. 遼西郡沒有安平或西安平縣. 這裏「遼」字衍, 或「遼」下脫「東」字.
《삼국지ㆍ위지》권30 <동이전>ㆍ《수서》권81 <고려전>에는 「요서안평」이「서안평」으로 되어 있다.
생각컨대《후한서》<군국지>2에는 안평국은 기주에 속하며, <군국지>5에는 서안평이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였다. 요서군에는 안평 혹은 서안평현이 없다.
여기서「요遼」자는 연衍(군더더기)자字이거나, 「요遼」자 아래「동東」자가 탈락된 것이다.
<후한서 동옥저>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에 대한 주석
沈欽韓曰, 明志,海州衛, 本沃沮國地, 今奉天海城縣. 又奉天蓋平縣,高麗國蓋牟城, 本其地.
*주석자 심흠한은 동옥저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본옥저의 위치를 설명하기를, <<명지>>에 나오는 해주위가 본 옥저국지이고, 그곳은 지금의 봉천 해성현이며, 개평현이었다. 고구려의 개모성이 '그 땅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개마대산은 당연히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또는 단단대령을 벗어날 수 없고 동옥저는 그 천산산맥의 바로 동쪽에 그리고 평양성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것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는 동옥저가 있었기에 요동군의 서안평이 존재할 수 없는것입니다. 만약에 단동지역까지 요동군이 있었다면 요동반도의 중남부에 속한 많은 지명들도 포함이 되었어야 했을것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살수의 위치는 청천강이 아니라 초자하입니다. 초자하는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으며 벽류하의 동쪽에 있는 장하로 합류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을 동옥저 지역이라 하는것입니다. 구산은 벽류하라고 주장하였음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대동소이한 위치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등장하는 살수의 기록입니다.
○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 <<삼국사기>> 상 <고구려본기> 2 대무신 27년조
대무신 27년(서기 44) 추 9월 한 나라의 광무제는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으로 군, 현을 삼으니, 살수의 남쪽이 한나라의 영지가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시니 대수촌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이 전쟁으로 한달뒤 대무신왕이 서거한것으로 추정됨) 필자주.
그렇다면 살수의 남쪽이 어디일까요? 다시 다음 기록으로 살수의 남쪽을찾아 보시겠습니다.
[15卷-高句麗本紀3-大祖大王-04年]
○四年, 秋士{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대조대왕 4년(서기 56) 7월,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으로 성읍을 삼으니, 경계가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으로 창해에 이른다라는 해석은 지도를 참조하시면 요동반도의 남쪽 해변에서 동으로는 창해라는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설만으로는 함흥의 동쪽에 있는 동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다음으로 연결되는 남으로는 살수에 이른다는 기록이 함흥의 동 옥저설을 부정합니다. 만약에 살수가 함흥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면 청천강과는 관계가 없는 지명이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와서 정벌을 한곳이 함흥의 남쪽이 되어야 한다니 이때의 살수는 평안도와는 관계가 없는 지명입니다.
참고로 이병도박사의 <한국고대사연구> 269쪽에는 삼한도라는 지도가 있는데 옥저의 위치를 함경남도로 비정하고, 북옥저의 위치를 함경북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함경남도의 남쪽은 텅텅빈 바다밖에는 없는데 그 곳이 살수라는 설명이 전연히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옥저와 북옥저의 거리가 천여리 라는 기록도 무시하고 지도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방향도 옥저와 북옥저가 맞지를 않습니다. 지도상 함경남도와 북도는 동서간이라야 맞는얘기고, 남 북간은 틀린 설명이 아니겠습니까?
近思 (2007-06-24 12:59:56)
구산님//
본문 도입부의
~ 백성입니까 는
없어서 좋을 문장같습니다.
3총사의 맹동에 눈쌀을 찌푸릴 것 같으면 그냥 무시하시고
선생님의 견해를 올리시면 될 듯
眞明行 (2007-06-24 15:21:23)
구산님께서는 대체 뭘믿고 자신의 주장에 대해 그렇게 확신을 가지시기에..남의 얘기를 난장을 부린다든가, 우이독경이라느니 단정을 내리십니까? 그런 행위야 말로 서푼어치도 안되는 지식가지고 사람들 빈정이나 긁어대는 시건방이 아닙니까?
좋은 말로 타일렀다는데 구산님 입에서 한번이라도 그 좋은 말이 나왔는지 기억을 못하겠으며, 툭하면 발끈발끈 상대를 협박하시는 모습에 밥맛이 떨어졌습니다. 서안평이 압록강과 만난다면 동북공정에 이바지한다는 건 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런 말씀을 입에 담으신겁니까? 우리강토를 요동반도, 요서까지 확대시키면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까? 진실에 근거하지 않은채 민족적 감정을 내세워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과 무엇이 다릅니까?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구산님은 사료를 폭넓게 수렴하지 않고 특정 사서의 문구에 집착한 나머지 곡해가 곁들인 한문해석, 망문생의까지 일삼으시고 다른 사료들이 뭐라든 자신의 입장, 자신의 해석에 매몰된 분이십니다. 그건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학문하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아집을 변호하기 위해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찾고 계시는 것에 불과합니다.
眞明行 (2007-06-24 15:21:45)
우선 구산님이 인용하신 해당 문장들을 어떻게 엉터리로 취신하고 계시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한서 지리지>는 서안평을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며 그 위치를 비교적 요동반도의 서남부에 배치된 평곽의 남쪽, 문현의 북쪽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한서 지리지 어디에 서안평이 요동반도 서남부에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까?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마자수는 서개마(개주)의 남쪽으로 흐르는 고니하(古泥河)=浿水=청하=대통강으로 부르던 물로서 서북으로 역류하여 소요수(염난수)와 합류하며 다시 다른 경로의 서남으로 흘러서 서안평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고 추정이 되는것입니다.****
☞ 마자수가 서북으로 역류하여 소요수(염난수)와 합류하여 운운하는 부분에서 실소가 나옵니다. 소요수는 혼하가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대요수인 요하와 짝을 이루는 강은 혼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염난수와는 무관합니다. 게다가 저 문장은 마자수가 서북으로 역류한다는 문장이 아니지 말입니다. 서개마의 서북에서 염난수와 만난다는 뜻이지 저 문장 어디에도 西北流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없는 문장을 만들어 지어내 자기 편할대로 해석하는 것을 망문생의라고 합니다.
****위의 현도군조에서는 서안평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마자수는 염난수와 합류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소요수와 합류한다는 대목이고...****
☞ 小水는 소요수와 무관합니다. 글자만 비슷하면 때려맞히는 재야들의 습성을 빼다 박으셨군요. 구산님은 소요수=염난수라고 하셨으면서 동시에 小水라고도 하십니까? 소요수는 燕秦의 강역이었는데 무슨 근거로 고구려가 燕秦의 땅에서 살았다고 주장하십니까?
*******주석자 심흠한은 동옥저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본옥저의 위치를 설명하기를, <<명지>>에 나오는 해주위가 본 옥저국지이고, 그곳은 지금의 봉천 해성현이며, 개평현이었다. 고구려의 개모성이 '그 땅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
주석은 주석일 뿐입니다. 심흠한의 주석에 반증하는 다른 주석들과 정사의 기록은 수두룩 나옵니다. 왜 그 기록들은 무시하고 특출나며, 생경한 주석들에 집착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시는지요? 예컨대 동옥저의 동쪽으로 大海를 면했고 북쪽으로는 물길이며 남쪽으로는 동예, 다시 남쪽으로는 신라와 나란히 있다는 얘기들 말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물개나 바다표범 얘기를 해보고 싶으신겁니까?
眞明行 (2007-06-24 15:22:03)
마자수(馬訾水)와 관련하여 구산님께서 참고해야 할 사서가 있습니다. 通典의 기록입니다. 물론 한서 지리지나 후한서도 참고할만 하지만 이 通典의 기록이야말로 마자수(馬訾水)는 여기다라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馬訾水一名鴨綠水水源出東北靺鞨白山水色似鴨頭故俗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南又西與一水合即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澈所經津濟皆貯大船其國恃此爲天塹水濶三百歩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鴨綠水)라고도 하며, 水源이 동북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빛깔이 오리의 머리 빛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다. 요동과의 상거가 5백 리이며,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경과하고 또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한 다음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커서 너비가 3백 보(步)나 된다. 그 나라는 이것을 믿어 천참(天塹)으로 삼았는데, 평양성 4백 50리, 요수 동남쪽 4백 80리에 있다.
자~ 馬訾水의 水源이 동북 말갈의 白山이라고 하였으니, 어니하, 청하 같은 쭉대기 강들은 일단 무관함이 밝혀졌습니다. 요동과의 相距가 500리요, 요수의 동남쪽 480리에 있다고 했으니 요동반도 서남부에 있는 다른 강들도 해당 사항이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고로 마자수(馬訾水) 압록강입니다. 결코 다른 강이 될래야 될 수도 없습니다. 마자수가 안평성을 경유하여 바다로 가므로 안평성은 곧 한서 지리지에서 얘기하는 서안평이고 따라서 서안평은 압록강 하구 근처에 있습니다.
眞明行 (2007-06-24 15:22:22)
두번째로 鹽難水가 어떤 강이냐를 고증하는 기록으로는 盛京通志에 있습니다.
鹽難水前漢書地理志馬訾水西北流入塩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按新唐書亦云鴨緑水西與塩難水合馬訾水即鴨綠江塩難水即佟家江
鹽難水는 佟家江이다.
염전 운운하셨는데 염전과는 무관합니다.
라디오 (2007-06-24 18:56:47)
구산님/
오랫만에 글 올리셨군요.
요사지리지의 상경 임황부가 요동군 서안평이다..이미 잘 아시겠지만..
타당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上京道
上京臨潢府,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新莽曰北安平。太
祖取天梯、蒙國、別魯等三山之勢於葦甸,射金齪箭以識之,
謂之龍眉宮。神冊三年城之,名曰皇都。天顯十三年,更名上
京,府曰臨潢。
그리고, 찾았던 顯州 동북 220리에
壕州(호주)가 요동군 서안평현이였다는군요.
壕州。國舅宰相南征,俘掠漢民,居遼東西安平縣故地。
在顯州東北二百二十里,西北至上京七百二十里。戶六千。
原州。本遼東北安平縣地。顯州東北三百里。
國舅金德俘掠漢民建城。西北至上京八百里。戶五百。
原州는 북안평현이였다...
眞明行 (2007-06-24 21:57:43)
요사지리지는 믿을 게 못됩니다. 심지어는 실학자인 성호 이익과 안정복도 요사지리지의 기록은 믿지 않았어요. 단적인 근거로 서안평현의 경우 왕망이 북안평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므로 서안평과 북안평은 다른 곳이 될 수가 없지요. 요사지리지는 각각 설명하고 있네요.
구산 (2007-06-24 22:46:51)
라디오님/ <<요사>> <지리지>에서 말하는 상경 임황부와 중경 현덕부의 위치는 각각 다른 장소입니다. 그중에 중경 현덕부는 의무려산 남쪽과 13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상경 임황부는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서요하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그러니까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 있게 됨으로 개주의 서남쪽에서 찾아야 될 서안평과는 거리가 먼듯 합니다. 요사 지리지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기록을 의심하기 보다는 당시 발해내역의 지진에 의한 지각변동이 많았으므로 이동된곳이 많은줄 압니다. 공부를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디오 (2007-06-24 22:54:16)
壕州。(( 國舅宰相南征,俘掠漢民,居遼東西安平縣故地。))
在顯州東北二百二十里,西北至上京七百二十里。戶六千。
괄호 문장은 삽입된 문장으로 보입니다.
國舅宰相南征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한나라 백성을 노략질한 걸로 보이고.. 서안평현에 살았다..??
壕州(호주)는 서안평현을 설명하는게 아닌 느낌이 옵니다.
구산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구산 (2007-06-24 23:23:44)
다음글은 개주의 주변을 흐르는 고니하에 대한 얼키고 설킨 내용입니다. 여러종류를 종합한것입니다.
1)[遼史卷三十八 志第八地理志二 東京道 東京遼陽府]
沙河出東南山西北流, 徑蓋州入於海. 有蒲河;淸河;浿水, 亦曰泥河, 又曰蓒芋濼(한우락), 水多蓒芋之草
2)[盛京通志卷二十七 山川三 吉林各屬]
古泥河. 新唐書渤海大氐本粟末靺鞨, 附高麗國. 高麗滅, 保東牟. 直營州東二千里, 以泥河爲境. 萬歲通天中契丹反, 東渡遼水保大白山之東, 北阻奧婁河, 自固. 按元一統志引契丹地理志云, 浿水即古泥河也. 自東逆流數百里, 至遼陽瀦蓄不流. 有蓒芋草生於泊中故名蓒芋泊. 明一統志從之. 又以朝鮮大通江爲泪水. 考泥河在海城縣西南六十五里, 益(蓋?)平縣北五十里. 源出聖水山流至述眞山散漫爲遼時之蓒芋泊, 今爲蓒芋濼. 水多蓒芋之草, 與朝鮮境內之浿江不同. 又按太白即長白, 奥娄當爲阿로嚕河, 源出吉林安巴和託峯, 一西南流入哈達河, 一流至開原東南入淸河.[盛京通志卷二十七 山川三 吉林各屬]
***위의 2번항에서 [益(蓋?)平縣北五十里]익평현은 개평의 오자로 인식되어 가로안에 蓋자를 추가하였습니다. 구산
*** 1번을 다시 살펴보면 <<요사>>지리지에서는 니하를 사하로 부르고 있는데 그 경로를 동남산 서북으로 흘러, 개주를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데 포하, 청하, 패수, 니하, 헌우락, 등의 수명과 합류하거나 다른 이름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 이러한 이름들이 조선계에 있는 압록강(일명 마자수)에는 없습니다.필자주)
구산 (2007-06-24 23:25:38)
2번의 설명은 조금 복잡해집니다. 고니하(古泥河)는 <<신당서>>에서 말하길 발해대씨(대조영)가 고구려와 더불어 살던 근본지인 속말말갈 이고, 고구려가 망하자 동모산에 의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동모산은 영주(난하의 동쪽)에서 곧장 동쪽으로 2천리밖에 있었고, 니하로서 경계를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만세통천 [당 중종13](696)년 거란이 반란을 이르켜 역시 동쪽으로 요수를 건너 태백산에 의지하였다 하였으므로 이때 대조영의 세력과 합류된듯합니다.
또 거란 지리지를 인용한 원 일통지는 패수를 니하라고 하였으며, 이 니하는 동쪽에서 수 백리를 역류하여 요양에 이르러 물이 모여서 흐르지 않았으며 이 물이 고인데는 한우초라는 수초가 자라는데 하여 옛 이름을 '한우박'이라고 불렀다는것입니다. <<명 일통지>>에 의하면 또 이 조선 대통강을 일명 '뉘수'라고도 불렀다고 하네요.
고니하(古泥河)는 해성현의 서남쪽 65리, 개평현의 북쪽50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원 발원지 성수산에서 흘러 술진산에 이르러 여러갈래로 흩어지는데 요나라때 '한우박'으로 불렀었고, 당시는 한우초가 많은 물을 '한우락'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조선의 경내(평양의 대동강을 이름)에 있던 패강과는 다르다고 하였네요. 그리고 태백은 장백과 같은 뜻이며 오루는 아로하와 같고 이 물들은 원래 길림 안파 원탁봉이 발원지라 하고 있습니다. 한줄기는 서남으로 흘러 합달하가 되고, 한줄기는 개원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청하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구산 (2007-06-24 23:31:05)
이렇게 보면 물의 발원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흐르는 위치는 청하와 포하, 니하, 패수등과 공통점을 갖고 개주로 흐른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하의 위치를 해성현의 서남쪽 65리지점과 개주의 북쪽 50리지점이 고 니하(古泥河)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개주를 통하여 흐른 패수가 50리를 북류하여 해성현의 서남쪽 65리지점에서 합류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니하는 역류되어 북류하게 된 것이고, 두개의 물이 합류하는 지점은 다른 사정(예;지진등에의한)에 의해서 위치를 옮기는 변화가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古泥河라는 뉘앙스가 더욱 그러한 추정을 하게 합니다.
여하튼 이 고니하의 북방한계선은 해성현의 서남쪽 65리보다 북쪽일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물이 계속하여 서남방으로 흐르다 오호해와 서남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청니포(靑泥浦)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때 결국 청니포는 요동반도의 남쪽이 아니라 발해의 북안(요동반도의서안)에 있었다는 <<독사방여기요>> 지도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라디오 (2007-06-24 23:31:11)
어제 대명일통지 25권을 잠시 보니까.. 말갈 백산을 장백산이라 하였습니다.저는 압록수를 동,서로 분리해서 보는데, 동압록(동요하)가 북동쪽 말갈에서 발원한다고 봅니다. 지도상에는 동요하가 짧게 나와 있어.. 어느 합치는 긴 물줄기를 얘기하는게 아닌가 짐작합니다만..
라디오 (2007-06-24 23:33:27)
청니포는 푸른하늘님이 계속 올려 주시길 바랬는데..저희가 우당탕하는 바람에 염증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발해만 안쪽에 있는게 확실할겁니다.
구산 (2007-06-25 00:03:40)
이러한 지명을 찾는 작업들은 기록들을 검토하고 타당성을 연계해야 하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결론을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사실이 왜곡된 통설을 기준하였을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통설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주의 남쪽을 흐르는 니하 즉 속말수가 상당기간 신라와 발해의 국경선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眞明行 (2007-06-25 00:08:33)
구산님이야 말로 사서의 기록을 왜곡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편한 기록만 쏙쏙 빼다가 마음대로 해석하지 마시고. 결국 마자수의 위치를 기록한 통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일체 해명이 없으시군요. 멀쩡한 통설을 왜곡(?)되었다 주장하시는 분들치고 사서를 제대로 인용하시는 분들이 없더군요. 통설과 강단을 싸잡아 매도하려는 그런 편견을 버리고 사서를 냉정한 시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특정문구에 집착하는 그런 태도를 버리시지 않는한 발전은 요원할 겁니다. 물론 제가 걱정할 바는 아닙니다.
구산 (2007-06-25 00:10:23)
고니하(古泥河)는 해성현의 서남쪽 65리, 개평현의 북쪽50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원 발원지 성수산에서 흘러 술진산에 이르러 여러갈래로 흩어지는데 요나라때 '한우박'으로 불렀었고, 당시는 한우초가 많은 물을 '한우락'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조선의 경내(평양의 대동강을 이름)에 있던 패강과는 다르다고 하였네요. 그리고 태백은 장백과 같은 뜻이며 오루는 아로하와 같고 이 물들은 원래 길림 안파 원탁봉이 발원지라 하고 있습니다. 한줄기는 서남으로 흘러 합달하가 되고, 한줄기는 개원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청하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개주의 고니하(古泥河)즉 패수는 일명 북한의 대동강 패강과는 다르다는 주의까지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라디오 (2007-06-25 00:16:24)
길림 안파 원탁봉과 장백산의 위치가 확인되는지요?
담인 (2007-06-25 10:51:15)
진명행님/
다음 기록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신당서 기록입니다.
有 馬 訾 水 出 靺 鞨 之 白 山 , 色 若 鴨 頭 , 號 鴨 淥 水 , 歷 國 內 城 西 , 與 鹽 難 水 合 , 又 西 南 至 安 市 , 入 于 海
마자수가 안시로 흘러드는거 같은데 그럼 마자수를 혼하로 봐도 될까요?
담인 (2007-06-25 11:10:51)
진명행님/
여쭙는 김에 몇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1. 저는 만번한에 있는 沛水가 燕-위만조선 국경이었다고 보는데 동의하십니까?
2. 만번한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요동반도 서쪽 개주 부근에 있다고 보는데 님은 다른 곳인지?
3. 저는 漢이 이 만번한 沛水로부터 서쪽으로 물러나 浿水로써 국경을 삼은 것으로 보지만, 님은 만번한 패수와 漢-위만조선 국경인 浿水가 같은 강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맞습니까?
4. 일단 님의 주장에 따라 漢-위만조선 국경이 沛水였다고 인정합시다. 그럼 漢 영역은 요동반도 패수의 서쪽, 위만조선은 패수의 동쪽이었다는 것인데 인정하십니까?
5. 그렇다면 漢이 위만조선을 치고 난 뒤의 요동군에는 패수 동쪽의 위만조선 영토가 편입됐다는 얘기인데 인정하십니까?
5.
眞明行 (2007-06-25 11:53:36)
담인/마자수를 혼하로 보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혼하는 같은 책 같은 문장에서 소요수로 이미 기술되어져 있기때문입니다. <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 상식적으로 소요수가 과거의 혼하였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러나 신당서의 문장 전체를 보았을때 만약 국내성과 평양성이 다 혼하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하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또 해당문장의 又西南至安市,入於海의 주어가 大遼、少遼인지 馬訾水인지 모르겠습니다. 水經注에는 《十三州志》를 인용하여 大遼水自塞外,西南至安市,入於海。 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眞明行 (2007-06-25 12:03:20)
1. 저는 만번한에 있는 沛水가 燕-위만조선 국경이었다고 보는데 동의하십니까?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燕과 위만조선이 어떻게 병립할 수 있습니까?
2. 만번한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요동반도 서쪽 개주 부근에 있다고 보는데 님은 다른 곳인지?
☞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3. 저는 漢이 이 만번한 沛水로부터 서쪽으로 물러나 浿水로써 국경을 삼은 것으로 보지만, 님은 만번한 沛水와 漢-위만조선 국경인 浿水가 같은 강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맞습니까?
☞ 네, 맞습니다.
4. 일단 님의 주장에 따라 漢-위만조선 국경이 沛水였다고 인정합시다. 그럼 漢 영역은 요동반도 패수의 서쪽, 위만조선은 패수의 동쪽이었다는 것인데 인정하십니까?
☞ 네, 그렇습니다.
5. 그렇다면 漢이 위만조선을 치고 난 뒤의 요동군에는 패수 동쪽의 위만조선 영토가 편입됐다는 얘기인데 인정하십니까?
☞ 글쎄요. 요동군에 편입되었는지, 낙랑군에 편입되었는지 믿을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사서에서는 위만조선의 영역에 낙랑군 등 4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만 나옵니다.
담인 (2007-06-25 12:32:52)
진명행님/
우선 신당서의 마자수 얘기부터 하지요.
신당서의 마자수는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시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기록이지요. 압록강이 혼하 유역 안시로 흐를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는 신당서를 쓴 구양수.송기 등이 안시.(서)안평 등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가 <한서>에서 보입니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동군의 각 지명이 혼하를 따라 죽 내려오기 때문에 서안평은 안시나 개주 부근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자수를 설명하면서 서안평에서 바다로 흘러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서>를 쓴 반고 역시 안평과 서안평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썼기 때문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안평의 바로 서쪽이 서안평이라는 얘기죠. 실제로 서안평은 요동반도 서쪽이고 천산산맥을 넘으면 바로 안평(단동)입니다. 또한 통전에서도 마자수가 안평성으로 흐른다고 했고 단동에서는 '안평'이라 쓴 기와도 출토됩니다. 결론적으로 단동지역은 안평이었으며 <한서>에서 마자수가 서안평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안평과 서안평을 구분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님이 요동군 지명을 그려 넣으신 지도를 보면 서안평 위치가 얼마나 이상한 곳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지명이 혼하 유역인데 서안평만 단동지역에 홀로 떨어져 있지요.
따라서 사서 기록을 검토할 때 앞선 시기의 사서가 더 신빙성이 있지만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전후 맥락을 살펴서 옳은 기록을 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1. 燕-위만조선이 아니라 燕-고조선 국경이 맞습니다.
2-4번까지 동의하셨습니다. 따라서 연-고조선 국경은 요동반도 패수, 즉 개주 부근이며 한-위만조선 국경도 개주 부근입니다. 맞지요?
그럼 패수 남쪽이나 동쪽은 모두 위만조선 영역이었습니다. 그럼 요동반도의 상당부분을 포함해 압록강 북쪽과 한반도는 위만조선입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압록강 유역은 위만조선 영역입니다. 그리고 님은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에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면 이 서안평은 漢이 위만조선을 평정한 뒤 요동군으로 편입시켰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眞明行 (2007-06-25 13:34:54)
동의하기 어렵군요. 반고는 漢書의 저술당시 서안평이 실존했던 당대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안평과 서안평을 혼동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게다가 한서의 지리지와 후한서의 군국지를 보건대 요동반도 부근에 안평과 서안평이 별도의 지명으로 기술된 사례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서의 서안평과 通典의 안평성이 같은 위치에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안평과 안평은 하나의 지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반고의 착각이었을 것이다로 생각하시는 건 님의 주장에 부합시키기 위해 자의적으로 추단한 것일 뿐 어떠한 근거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앞의 안시로 흐른다..이 부분의 문장은 해석하기 나름이겠지요. 주어가 마자수인지 대요와 소요인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지나치게 무리수를 두고 계시는것 같습니다. 신당서보다 앞선 시기의 문헌인 수경주에는 大遼水自塞外,西南至安市,入於海。라는 거의 똑같은 문장이 나오고 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로보아 西南至安市,入於海。의 주어는 마자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眞明行 (2007-06-25 13:39:49)
그리고 두번째, 고조선과 燕이 沛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해서 그것이 秦의 영역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엄연히 위만은 패수를 건넌 후 秦故空地에서 살았다 하여 당시 위만시대의 중국과 조선은 패수 말고도 秦故空地라는 상당한 이격공간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秦故空地의 영역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패수 이후의 공간에 대해 섣불리 단정을 내릴 수 없는 근거임은 확실합니다. 물론 서안평이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나서 요동군에 편입시켰다는 가정은 가능하고 그럴 개연성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낙랑군 요동군설을 입증하는 것이나 패수=혼하설을 입증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보여집니다.
담인 (2007-06-25 13:42:07)
진명행님/
有 馬 訾 水 出 靺 鞨 之 白 山 , 色 若 鴨 頭 , 號 鴨 淥 水 , 歷 國 內 城 西 , 與 鹽 難 水 合 , 又 西 南 至 安 市 , 入 于 海
마자수가 말갈의 백산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색깔이 오리 머리 같다 해서 압록수라 한다, 국내성 서쪽을 거쳐 염난수와 합해진다, 또 서남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주어가 압록수가 아니라면 어떤 강입니까? 염난수입니까?
염난수는 서남으로 흘러 안시에서 바다로 들어가나요?
眞明行 (2007-06-25 14:09:41)
신당서의 기록을 다시 보건대, 신당서에서는 마자수를 주어로 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신당서의 기록은 漢書의 기록, 수경주의 기록 그리고 通典의 기록과 상충되므로 해당 문장은 교차 참조할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신당서의 기록이 오류가 아니라면 담인님께서 白山에서 출원하여 국내성을 경유한 후 염난수와 합해지고 다시 서남류한다음 현재 安市로 비정되는 해성시 근방을 지나 바다로 떨어지는 강이 있는지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역시 이 기록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 唐代의 安市는 漢代의 安市와 동일한지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담인 (2007-06-25 14:11:04)
저는 신당서 기록이 오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님이 오류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려면 마자수와 합쳐지면서 안시로 흐르는 강을 찾아주시든지, 당대 안시는 압록강 하구였다는 근거를 대셔야지요.
眞明行 (2007-06-25 14:16:15)
저도 오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당서의 기록은 漢書의 기록, 수경주의 기록 그리고 通典의 기록과 상충된다고 하였고, 해당 마자수의 경유지를 보건대 그런 강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문제는 담인님이 그런 강이 있다고 주장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강의 경유지로 보아 안시와 서안평은 같이 붙어있다는 논증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무명 (2007-06-25 18:01:13)
통전을 보면 마자수가 어떤 강인지, 안평성이 어디인지 잘 나옵니다.
거리를 너무 잘 말해주고 있으며, 방향을 도저히 빼도박도 못하게 정해두었습니다.
통전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마자수는 압록강이며, 안평성은 지금의 단동부근입니다.
통전
馬訾水 一名鴨綠水,水源出東北靺鞨白山,水色似鴨頭,故俗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南,又西與一水合,即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清澈,所經津濟,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水闊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
번역: 마개수 일명 압록수다. 수원은 동북말갈백두산에서 나오며, 물색은 오리머리처럼 녹색이다. 그래서 속명이 그렇다. 요동에서 오백리 떨어져 있고 국내성 남쪽을 돌아흐른다. 또 서쪽에서 한물줄기와 합치는데 즉 염난수다. 두물이 합쳐져서 서남으로 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 이 강이 가장 크다. 큰 물결이 아주 맑은데 그곳이 나루를 건너는 곳에 큰 배를 두고있다. 고구려는 이강을 하늘이 내린 해자로 믿고 있다. 강넓이는 300보나 되고 평양성서북 450리에 있으며, 요수의 동남 480리에 있다.
구산 (2007-06-25 19:04:45)
무명님/
그러니까 한나라시대의 지명을 기록한 정사인 한서, 후한서,등의 기록은 무시해도 좋고 약 500여년이나 뒤에 발행되어 1988년에 교간된 정사도 아니요 단지 보조사료인 통전만이 옳다는 말씀이군요. 사서의 기록이 상충될때는 선대에 간행된 사료에 무개를 두는것이 정상이 아닌가요? 더구나 정사와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예와 같은 차등대우를 받는것이 통례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앞에 제시된 당대의 사료들을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뭉개버리는 소이는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찾고 있는것은 안평성이 아니라 서안평입니다.
1) 압록강이 평양성의 서북쪽에 있다는 기록은 옳지 않습니다.
압록강은 평양성의 북쪽에 있어야 옳은 기록입니다.
2) 서안평이 등장하는 하던 시대는 압록강은 고구려의 국경이 아니었습니다. 국내성이 어디에 있었는데 압록강을 고구려의 국경이라고 하는것입니까? 통설대로라면 평안도와 황해도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원 314년까지.
眞明行 (2007-06-25 19:46:16)
구산/ 통전의 기록이 어째서 한서나 후한서의 기록을 위배한다는 것입니까? 통전에서는 압록강이 高麗之中이라 했지 고구려 국경이라 한적 없습니다. 게다가 대무신왕때에 이미 압록강은 물론이고 살수이북까지 고구려 땅입니다.
라디오 (2007-06-25 20:24:43)
"평양성서북 450리에 있으며, 요수의 동남 480리에 있다"
압록수가 현재 압록강이라면..위의 기사가 맞나요? 맞을리가 없죠.
현재 북한의 평양에서 서북 450리에 무엇이 있나요?
청천강이 흐르나? ㅎㅎ
기존 강단이 얘기하는 현재 압록강이 압록수가 맞아 들어가면야..
안 믿을 이유가 없죠.
맞지 않으니까.. 못 믿을 수 밖에..ㅋㅋ
Comte (2007-06-25 21:03:17)
노정기(路程記)
...
眞明行 (2007-06-25 22:39:28)
평양성이 요동의 남쪽으로 1천리에 있다라는 사서의 기록에 비추어 볼때 그 중간쯤되는 압록강이 남북으로 각각 450리와 480리라는 기록은 정확히 일치합니다. 라디오씨는 뭘 말한들 믿겠나요? 가르쳐줘도 모르는 분들 참 많지요. 안타깝습니다.
구산 (2007-06-25 23:37:12)
志 唐書卷四十三下 志第三十三下 p-1146
營州西北百里曰松?嶺,其西奚,其東契丹。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
***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 요수에서 안동도호부(故한의 양평성)까지 500리라면, 통전에서 말하는 마자수는[遼水東南四百八十里] 요수 동남쪽으로 480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어느 압록수 일가요? 이게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말씀입니까? 진명행님!
眞明行 (2007-06-26 00:42:49)
구산님/해당 문장은 요수에서 안동도호부(양평)까지 500리라는 뜻이 아니라 燕郡城에서 汝羅守捉, 遼水를 건너 안동도호부에 이르기까지 총 500리라는 뜻입니다. 통전의 기록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한서와 후한서의 기록과 상충된다고 하셨는데 뭘 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거니와 신당서 지리지의 해당 기록도 문장을 곡해하시고서는 괜히 놀라신 것입니다.
구산 (2007-06-26 10:18:36)
진명행님/
위에 올려놓은 지도를 크릭하셔서 세밀한 검토를 해보세요. 평안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과, 구 요동성, 신 요동성, 성경을 거쳐서 몇개의 강을 건너서 광령성을 지나 산해관으로 연결되는 로정(路程)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가 당나라 당시의 기록과 동일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당시의 지도가 없는만큼 대용하기 위해서 선택한것입니다. 그런데 님이 말씀하시는 영주에서 연군성까지의 거리가 180리라 하였고, 연 군성이 있는 여라수착(汝羅守捉)에서 요수를 건너 구 양평성까지의 거리가 500리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님께서는 연 군성과 여라수착이 요수와 거리가 많이 떨어진걸로 아시는데 착각하신걸로 보입니다. 왜냐면 연군성이란 요수의 경계선에 위치한 여라수착의 주둔지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라수착이란 요수를 건너는 나루터에서 통행자들을 검문하는 일종의 검문소입니다. 요수를 건너 압록강까지 가는길은 거의 외통입니다. 심양, 신 요동성, 구 요동성을 거쳐 압록강 북쪽의 박작성까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소개되는 거리가 다 다른것입니다. 그것도 조금 차이가 나는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나는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문제가 전연히 없는것처럼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는 님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다시 기록에 나타난 거리를 비교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담인 (2007-06-26 10:25:26)
통전의 기록은 아무 문제가 없으며 상당히 정확합니다. '평양성서북 450리에 있으며, 요수의 동남 480리에 있다'는 것은 압록강이 그렇다는 겁니다. 즉 압록강은 평양성에서 볼 때 서북 450리, 요수에서 동남으로 480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니 매우 정확한 기록입니다.
문제는 통전에서 압록강 하구를 서안평이 아니라 안평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또한 단동에서는 '안평'이라 쓴 기와도 발견되지요. 그럼 단동지역은 안평이었으므로 서안평은 어디겠습니까? 안평의 서쪽에 있어야겠지요. 그 서안평이 바로 <한서> 서안평인데 평곽 근처에 있습니다. 따라서 단동지역이 안평, 그 서쪽인 평곽 근처가 서안평, 그렇게 됩니다. <한서>에서 마자수 하구를 서안평이라 했는데 이는 <한서>를 적은 반고가 안평과 서안평을 구분하지 않고 썼기 때문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眞明行 (2007-06-26 10:55:57)
<당서>에 의하면, 안동부 남쪽에서 압록강 박작성(泊汋城)에 이르는 7백 리인데, 옛 안평현(安平縣)이라고 하였지만, 晉書에서는 해당지역이 서안평으로 나오므로 님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반고가 착각했다고 보기도 어렵지요
무명 (2007-06-26 11:19:09)
압록강을 요하로 가져 가고 싶은 사람들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요하는 압록강처럼 물이 맑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보시면 요하는 물색이 항상 흐리지요.
반면에 압록강은 물색이 항상 맑습니다.
산계곡에서 나오는 물과 건조지대를 지나오는 물의 색이 다를수밖에 없죠.
그런데 압록강을 요하로 가져가면 무슨 이익이 있길래 그렇게 하시죠?
구산 (2007-06-26 11:32:38)
문제 1) <<후한서>>에서 말하는 동옥저의 위치가 고구려개마대산의 동쪽이라면 한나라 당시에 단동지역에 요동군의 서안평이 존재할 수 없는것이고, 이를 부정하려면 후한서의 동옥저설을 부정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됩니다.
2)<<한서>>지리지가 기록한 개마대산의 서쪽에 등장하는 지명이 북에서 남으로 연결되는 순서를 이탈하였으며, 단동은 요동군의 최남단인데 왕망이 북안평으로 불렀다는 이유가 타당치 않습니다.
***平郭,有鐵官、鹽官。西安平,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한서>>의 반고는 정확한 기록을 하였다고 봅니다. 마자수로 부를수 있는 강은 발원지가 같은 세군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고가 한서를 쓸 당시 지금의 압록강은 사서 기록 �에 있던 강이지요. 그곳은 요동군의 영역이 아니었고, 동옥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반고가 서안평을 평곽 근처에 둔것은 개주 남쪽으로 흐르는 마자수 즉 고 니하로 흐르는 패수를 말한것으로 보기때문입니다.
당시 요양 주변으로 패수현을 두고 있는것을 보더라도 추정이 가능한 것이지요. 한서가 기록된 이후 초기 요동군의 강역은 후한과 공손도의 요동국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로부터 통전이 쓰여지던 600여년 뒤에는 마자수의 위치는 바뀌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의 기록까지 맞아 떨어지는게 아니기때문에 이렇게 실랑이를 하는것입니다.
眞明行 (2007-06-26 11:46:13)
****<<후한서>>에서 말하는 동옥저의 위치가 고구려개마대산의 동쪽이라면 한나라 당시에 단동지역에 요동군의 서안평이 존재할 수 없는것이고...
☞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개마대산 동쪽에 있고 옥저의 동편으로는 大海를 면해있다는 기록이 대체 서안평과 무슨 상관인가요?
***<<한서>>지리지가 기록한 개마대산의 서쪽에 등장하는 지명이 북에서 남으로 연결되는 순서를 이탈하였으며, 단동은 요동군의 최남단인데 왕망이 북안평으로 불렀다는 이유가 타당치 않습니다.***
☞ 한서 지리지가 북에서 남쪽순으로 지명을 기술했다 하시는데 이건 근거없는 말씀이고, 두번째 왕망이 북안평으로 칭한 이유는 동안평이 산동근처에 있었기때문에 상대적으로 북쪽에 있는 서안평을 북안평이라고 한 것입니다.
****반고가 한서를 쓸 당시 지금의 압록강은 사서 기록 �에 있던 강이지요. 그곳은 요동군의 영역이 아니었고, 동옥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
☞ 이것도 자의적인 생각입니다. 현토군의 서개마와 염란수를 거론하는 마당에 마자수만 빼먹으라는 주문은 별로 설득력이 없군요. 그리고 동옥저땅이 왜 거기에 있습니까? 혹시 성경통지나 심흠한의 주석만 믿고 그런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구산 (2007-06-26 12:26:14)
다음은 각 사서들 마다 상이한 요양에서 박작성까지의 거리입니다.
통전
馬訾水 一名鴨綠水,水源出東北靺鞨白山,水色似鴨頭,故俗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南,又西與一水合,即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清澈,所經津濟,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水闊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
***요동에서 500리, 요수 동남으로 480리.(요동에서 500리면 그만이지 요수 동남으로 480리가 무슨 얘긴가? 요수를 기준으로 할려면 요수에서 요양까지의 500리를 더하여 1000리가 되어야 계산이 맞는데. 그리고 외통수길에서 왜 요수가 기준으로 나오는것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만약 서안평이 단동지역에 있었고 평안도가 한의 낙랑군이었다면 압록강의 남북의 요지를 한나라가 관장하고 있는데 압록강을 고구려중에 있는 제일가는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술 더떠서 천혜로 이루어진 해자라는 천참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입니다. 나루란 물을 건너서 왕래하는 곳인데 이곳을 한나라가 수백년간 점령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나루로 인정할 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신당서>>, <<황화사달기>>, <<무경총요>>등에서는 요양에서 박작성까지의 거리를 700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평성이라는 지명은 없습니다. 이들 사서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를 올립니다.
《新唐書》와 《武經總要》가운데 둘 다 송나라 때에 편찬된 것으로서 《무경총요》는 1044년, 《신당서》는 106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로 인용되는 《신당서》를 《무경총요》가 재인용하였을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新唐書》와 《武經總要》의 출전에 관한 문제입니다. 賈耽의 道里記와 《皇華四達記》는 모두 당나라 賈耽(730-805)이 저술하였습니다. 《新唐書》藝文志에는 그의 저술로서 地圖?10권, 《皇華四達記》10권, 《古今郡國縣道四夷述》40권, 《關中隴右山南九州別錄》6권, 《貞元十道錄》4권, 《吐蕃黃河錄》4권이 열거되어 있습니다.15)그는 평생 地理에 큰 관심을 가지고 사방의 사절들에게 직접 탐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합니다.16)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저술들은 失傳되어 단편적으로 다른 책들에 인용되어 나타날 뿐입니다.
按皇華四達記, 營州東百八十里, 凡九遞至燕郡城. 自燕郡東經波羅寺抵, 渡遼州七十里驛至安東都護府約五百里.(《武經總要》前集 권16하, 宜州)
皇華四達記曰, 自安東府, 東南至平壤城八百里, 西南至都里海口約六百里, 西北至建安城約五百里, 正南微東, 至鴨綠江北泊約七百里.(《武經總要》前集 권16하, 東京)
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又經汝羅守捉, 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 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西至建安城三百里, 故中郭縣也,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 故安平縣也.(《新唐書》)권43하)
라디오 (2007-06-26 13:27:26)
波羅寺抵 = 汝羅守捉 어느쪽이 맞는지요?
무경총요가 신당서보다 앞선다니..
波羅寺抵가 맞는 말일까요?
宜州 아래쪽에 遼州이므로 잘 하면 비밀에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다.
구산님, 《武經總要》전문을 올려 줄 수 있는지요?
구산 (2007-06-26 13:56:38)
역사21 게시판의 사료모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眞明行 (2007-06-26 14:00:23)
***요동에서 500리, 요수 동남으로 480리.(요동에서 500리면 그만이지 요수 동남으로 480리가 무슨 얘긴가? 요수를 기준으로 할려면 요수에서 요양까지의 500리를 더하여 1000리가 되어야 계산이 맞는데. 그리고 외통수길에서 왜 요수가 기준으로 나오는것인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꼬투리를 찾기 위해 문장을 보시니 자꾸 당연한 것도 침소봉대하여 느껴지는 것입니다. <去遼東五百里>리는 뒤에 나오는 요수와 480리 거리에서 별 차이 없습니다. 前者는 행정구역명을 거론한 것이고 後者는 구체적인 지명을 가지고 거론한 것에 불과합니다.
요수에서 요양까지 500리라고 한 기록은 님이 한문해석을 잘못하신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연군성에서 요양까지의 거리입니다. 상식적으로 요수(=요하)에서 요양까지 500리 거리가 말이나 됩니까?
****만약 서안평이 단동지역에 있었고 평안도가 한의 낙랑군이었다면 압록강의 남북의 요지를 한나라가 관장하고 있는데 압록강을 고구려중에 있는 제일가는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한술 더떠서 천혜로 이루어진 해자라는 천참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입니다. 나루란 물을 건너서 왕래하는 곳인데 이곳을 한나라가 수백년간 점령하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나루로 인정할 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 역시 이 부분도 제가 진즉에 설명드렸던 부분입니다. 고구려는 대무신왕때 이미 살수 이북까지 다 차지한바 있습니다. 또 해당 唐書의 기록은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을 당시의 마자수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천참 운운하는 부분은 시기적 배경을 혼동하신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구산 (2007-06-26 15:24:34)
20년(서기 37)
▶ 왕은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24년(서기 41)
▶ 봄 3월에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27년(서기 44)
▶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였다.
*** 대무신왕은 기원 20년에 낙랑을 점령하였다가 7년만에 후한 광무제에게 다시 뺏겼습니다. 그런데 이때 계속 청천강 이북의 땅은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었던것으로 주장하고 계시네요. 정말일까요. 그럼 태조대왕때의 기록을 보시겠습니다.
태조대왕 94년(기원 146)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쳐서,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장수를 보내어 기습작전으로 서안평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를 사로잡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안평을 점령하였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되는것은 서안평은 대방령이 주둔하던 지명이라는 사실과 낙랑과 이웃하여 빈번히 왕래하던 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방의 본거지가 황해도라면 낙랑군 땅을 지나서 압록강의 북쪽에 있었다는 서안평을 지배할 수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산 (2007-06-26 15:32:30)
다시 미천왕시대를 보시겠습니다.
3년(302)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 명을 붙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아직까지도 서안평은 한나라 영역인데 8천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압록강을 건너 낙랑군 영역에 있는 평양성으로 보냈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구산 (2007-06-26 15:44:29)
*12년(311)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이때 비로소 원한의 서안평을 수복시켰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연이어 313년과 314년에 낙랑과 대방을 수복시켰다는 기록이네요.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眞明行 (2007-06-26 15:54:51)
***아직까지도 서안평은 한나라 영역인데 8천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압록강을 건너 낙랑군 영역에 있는 평양성으로 보냈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
고구려의 수도가 현 평양으로 된 것은 장수왕때의 일로 미천왕代와는 무관하며, 미천왕시기의 평양성은 현 평양성이 아닙니다. 당시 평양성이 여러군데 있었음은 잘 아시고 계시겠죠? 심지어는 신라의 漢城府를 평양이라 부른 적도 있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담인 (2007-06-26 16:16:23)
미천왕 시기 평양은 대동강 평양입니다.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패한 뒤 옮긴 수도가 어디입니까? 단군왕검의 택지입니다.
만일 미천왕 당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면 고국원왕이 어떻게 평양성에서 백제에게 죽음을 당합니까?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쓴 임금이 아니라 북진정책을 쓴 임금입니다.
眞明行 (2007-06-26 17:15:13)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패한 뒤 옮긴 수도는 평양이지만, 그 평양이 현재 평양인지는 입증이 안됩니다. 게다가 단군왕검의 택지라는 것은 관념적인 얘기일 뿐입니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현 평양에 도읍했다는게 담인님의 지론인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김부식도 평양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국원왕은 낙랑이 멸망한 후의 왕이고, 평양 동황성이라 했지 평양성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미천왕때에 평양성을 신축했다거나 증축했다면 왜 평양성으로 옮기지 않고 동황성으로 옮겼을지 그것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추진했건 북진정책을 추진했건 수도를 평양의 대성산성부근으로 옮기고 다시 평원왕때 현 평양의 장안성으로 천도한 것은 사서에 나오기때문에 반증할 증거가 없는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眞明行 (2007-06-26 17:15:52)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패한 뒤 옮긴 수도는 평양이지만, 그 평양이 현재 평양인지는 입증이 안됩니다. 게다가 단군왕검의 택지라는 것은 관념적인 얘기일 뿐입니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이 현 평양에 도읍했다는게 담인님의 지론인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김부식도 평양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국원왕은 낙랑이 멸망한 후의 왕이고, 평양 동황성이라 했지 평양성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미천왕때에 평양성을 신축했다거나 증축했다면 왜 평양성으로 옮기지 않고 동황성으로 옮겼을지 그것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추진했건 북진정책을 추진했건 수도를 평양의 대성산성부근으로 옮기고 다시 평원왕때 현 평양의 장안성으로 천도한 것은 사서에 나오기때문에 반증할 증거가 없는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구산 (2007-06-26 17:35:16)
진명행님/혹시 수착(守捉)의 역활이 뭘 하는곳인지 알고계시면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眞明行 (2007-06-26 17:56:57)
구산/守捉의 역할은 이미 구산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담인 (2007-06-26 18:17:33)
장수왕이 수도를 옮긴 평양은 지금의 요양지방입니다.
무명 (2007-06-26 18:21:26)
담인님/
점쟁이 처럼 말씀하지 마시고...
장수왕의 평양이 요양인 이유를 말해야되지 않을까요?
구산 (2007-06-26 20:44:59)
진명행님/ 그러시다면 위에서 연군성과 여라수착에 대해서 아실만큼 해명을 해 드렸는데 거기에 대한 반론은 한마디 없이 구산의 한문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말씀만 되풀이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것입니까?
眞明行 (2007-06-26 23:51:25)
구산/연군성과 여라수착에 대해 대단한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新唐書•地理志•三十九》에 "隋於營州之境汝羅故城置遼西郡"라 하였고, 《水經注》에"渝水又東南,逕一故城東,曰汝羅城。又南,逕營丘城選南入海"라 하였으니, 渝水는 오늘날의 小凌河를 말하며 따라서 汝羅는 오늘날 義縣 부근입니다. 태평환우기에 이르기를 營州東二百里汝羅城이라 하였으니, 여기서 다시 2백리를 또 가야 遼水가 나오며 다시 100리를 더 가면 양평이 나옵니다.
따라서 遼水를 건너 500리 운운하신 구산님의 해석이 틀린 것입니다.
당시 유성군에는 燕郡、汝羅、懷遠、巫閭 4곳의 守捉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각각 별개의 城으로서 구산님이 풀이하신 바, 나루터에서 통행자들을 검문하는 검문소와는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구산 (2007-06-27 13:44:28)
진명행님/
님께서 올려주신 여러가지의 자료들로는 간단명료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머리가 아둔한 구산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만, 당시 기록에 나타나는 영주가 어디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주를 조양으로 보느냐 아니면 산해관지역으로 보느냐하는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당서가 기록한 내용으로 추정한다면 조양을 영주로 보았을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유는 영주북 400리에 시라무렌강인 황수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양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서 연군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영주의 경계이고, 요서군이 여라고성을 설치한 곳이라고 해석이 되네요.그리고 태평환우기는 영주동쪽으로 200를 가면 여라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터 양평까지의 거리가 500리라는것이 님의 주장이지요? 그런데 님께서는 여라수착에서 200리를 더 가야 요수가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100리를 더 가면 양평이라고 하셨네요. 이 계산은 맞는다고 보십니까? 전체 500리에서 여라성에서 요수까지 200리를 빼면 요수에서 양평까지는 300리가 남아야 하는것이 옳은 계산이 아닌가요. 이문제의 결론은 님이나 구산이나 200리의 계산이 잘 못된것입니다. 구산은 요수에서 양평까지의 거리를 500리라 하였고, 진명행은 100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재 요수에서 양평까지의 거리는 300리인데, 그런대도 구산만 대단한 오해를 한 사람이 되어 있네요. 아래 제시한 신당서에 의하면 양평에서 서쪽으로 300리에 건안성이 있었는데 이곳이 고 중곽현(故中郭縣)위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이 건안성은 요수의 도강을 수비하는 역활을 담당하던 성으로 보입니다. 중곽이란 요동만 북안의 중간이라는 뜻이 있겠지요.
***요수에서 양평까지의 거리가 300리라 하더라도 양평에서 박작성까지의 거리가 700리라면 압록강까지의 거리는 최소 1000리가 되는데 480리라고 하였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그냥 덮고 넘어 가야 하는가 입니다.
志 唐書卷四十三下 志第三十三下 p-1146
營州西北百里曰松?嶺,其西奚,其東契丹。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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