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질(高質) 묘지명

라디오에요 2009. 1. 2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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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가 보이네요.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70319160114066&p=yonhap

고질 묘지명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은 이름이 질(質)이오, 자(字)는 성문(性文)이니 요동(遼東) 조선(朝鮮) 사람이다.

19대조는 고밀(高密)이니 후한(後漢) 말에 연군(燕軍. 모용외 군대)을 격파 해 본국(고구려)을 보존하는 데 공로가 있어 왕(王)에 봉해졌으나 세 번이나 거듭 사양하면서 받지 않고 고씨(高氏)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증조(曾祖)인 고전(高前)은 본번(本蕃. 고구려)의 삼품(三品)으로서 위두대형(位頭大兄)에 등용되었으며,
조부인 고식(高式)은 본번의 이품(二品)인 막리지(莫離支)로 혼자서 국정과 병마에 관한 일을 맡았다.

아버지 고량(高量)은 삼품으로 책성도독(柵城都督)이자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대상(大相)에 등용되었다.

…공(고질)은 본번의 삼품으로 위두대형과 대장군에 등용 되었다.
…공은 난리에 살고자 하지 않았으나 기미를 살펴 일어나…여러 형제를 거느 리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 성문(性文. 고질)은 (중국에 들어와) 고구려 부녀 세 사람과 성과 해자를 굳게 지키면서 적과 힘겹게 싸웠다.
…적의 흉악함은 날로 더해졌으나 구원병은 이르지 않았다.
…성은 고립되고 땅은 끊어졌으며, 병사는 다하고 화살은 소진되었다.

밤낮으로 적이 포위공격을 하니 병졸들이 따라서 함락되어 죽게 되었다.
포로가 되었으나 말과 형색은 늠름했다.

적의 흉악함과 위엄에 굴하지 않아 마침내 도륙을 당하게 되어 만세 통천 2년(697) 5월23일 마미성(磨米城)에서 죽으니 나이 72세였다.

… 성력 3년(700) 12월17일에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미향(平樂鄕) 언덕에 묻었다.
…(묘지명은) 조의대부(朝議大夫)이자 행봉각사인(行鳳閣舍人)인 위승경( 韋承慶)이 찬(撰)하고,
전우감문위장상(前右監門衛長上) 홍농(弘農) 유종일(劉從一) 이 글씨를 썼다.

의주(宜州) 미원현(美原縣) 사람인 요처괴(姚處괴<壞에서 土 대신 王>와 상지종(常智琮)과 유랑인(劉郞仁) 세 사람이 함께 글씨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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