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후한서 喬玄傳(교현전)에서 伯固(백고)

라디오에요 2009. 1. 20. 09:46

후한서 권51 喬玄傳(교현전)

    桓帝末,鮮卑、南匈奴及高句驪嗣子伯固並畔,為寇鈔,四府舉玄為度遼將軍,假黃鉞。玄至鎮,休兵養士,然後督諸將守討擊胡虜及伯固等,皆破散退走。
    在職三年,邊境安靜。
    靈帝初,征入為河南尹,轉少府、大鴻臚。建寧三年,遷司空,轉司徒。素與南陽太守陳球有隙,及在公位,而薦球為廷尉。玄以國家方弱,自度力無所用,乃稱疾上疏,引□災以自劾。遂策罷。歲余,拜尚書令。時太中大夫蓋升與帝有舊恩,前為南陽太守,臧數億以上。玄奏免升禁錮,沒入財賄。帝不從,而遷升侍中。玄托病免,拜光祿大夫。光和元年,遷太尉。數月,復以疾罷,拜太中大夫,就醫裡捨。

노태돈 교수의 '고구려사 연구'란 책을 보니까, '고국천왕의 존부'라는 소제목으로 伯固(백고)에 대해 언급해 놓았더군요.

   桓帝末,鮮卑、南匈奴及高句驪嗣子伯固並畔,為寇鈔,四府舉玄為度遼將軍,假黃鉞。玄至鎮,休兵養士,然後督諸將守討擊胡虜及伯固等,皆破散退走。

*高句驪 嗣子 伯固



伯固(백고)는 고구려 新大王(신대왕)을 뜻하죠.
伯固(백고)가 桓帝末(146년~ 167년)에 선비와 남흉노, 고구려의 嗣子(사자) 伯固(백고)가 후한을 자주 침공해서,
喬玄(교현)이 度遼將軍(도요장군)을 맡아서 이를 쫒아냈다는 기사입니다.

新大王(신대왕)의 재위기간은 15년.
新大王(신대왕), 재위 15년, 165년 ~  179년 

으로 별 문제가 없는데요.


桓帝末(환제말)이면 160년 전후가 될텐데.. 이때는 新大王(신대왕)이 태자로서 충분히 군사를 이끌고 후한을 침공하는게 가능한 일입니다.

노태돈 교수가 후한서 喬玄傳(교현전)까지 인용하는 이유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伯固(백고)가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격파하였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新大王(신대왕)의 재위기간이 어떻게 189년까지 늘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간단합니다.


*新大王(신대왕) = 伯固(백고).

*仇知王(구지왕) = 伯古(백고).

백제 仇知王(구지왕)의 이름이 伯古(백고)였기 때문에, 고구려 新大王(신대왕)의 이름 伯固(백고)와 글자가 비슷하여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된거죠.
학자들은 사라진 백제 仇知王(구지왕)의 이름이 伯古(백고)였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삼국지의 저자 陳壽(진수)는 삼국지를 지을 때, 고구려 신대왕 伯固(백고)의 기사에다, 백제 仇知王(구지왕) 伯古(백고)의 기사를 집어 넣은 것입니다.

陳壽(진수)는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하니까, 동일 인물인 줄 알고, 헥갈렸던 것이죠.

이는 삼국지의 저자 陳壽(진수)의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백제왕기 仇知王(구지왕) AD188년~ 226년.
伯古 己婁王第七子 而盖婁王之異母弟也 寬仁有聖德 國人敬慕之曰“仇臺王復來矣” 時盖婁王同母弟皆持寵 擅威不得人心 盖婁王深疾之 臨崩謂其后沙氏曰 “吾弟雖多唯伯古最賢 吾死而汝子皆幼 若諸弟得志 必不利於汝子 未若迎伯古以爲汝繼夫” 沙氏乃以深夜密納宮中 是夜雪深丈餘 諸王弟皆不能知
휘는 伯古(백고), 己婁王(기루왕)의 7번째 아들이며, 盖婁王(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성덕이 있으니 나라사람들이 그를 敬慕(경모)하며 말하길 "仇臺王(구대왕)이 다시 왔구나"라고 하였다. 이때 盖婁王(개루왕)의 同母(동모) 동생들이 모두 왕의 은총을 믿고 위세를 마음대로 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盖婁王(개루왕)이 이를 심히 걱정하여, 죽음에 임하여 그의 后(후) 沙氏(사씨)에게 말하기를,“내 아우들이 비록 많으나 오로지 伯古(백고)가 제일 현명하다. 내가 죽고 나면 너의 아들은 모두 어린데다, 만약 여러 아우들이 뜻을 이루면 필시 너의 아들들에게 불리할터이니, 伯古(백고)를 맞아 들여 너의 繼夫(새남편)로 삼음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후 沙氏(사씨)가 이내 깊은 밤에 몰래 伯古(백고)를 궁안으로 맞아드렸다. 이날 밤 눈이 수 장넘게 내려서, 여러 왕의 동생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155년에 구지왕은 태어남.
*구지왕 39년= AD226년, 72살로 사망.

元年 戊辰 十二月 以沙氏爲后 立母屹氏爲太后 王潛邸時納舍人賈杞妻苩氏 生子仁及女苩花 甚有寵 至是命復歸賈杞 命杞子其子女.
1년(AD188) 무진 12월 沙氏(사씨)를 왕후로 삼고, 어머니 屹氏(흘씨)를 태후로 삼았다. 왕이 潛邸(잠저)할때 舍人(사인) 賈杞(가기)의 처 苩氏(백씨)를 맞아들였는데, 백씨가 아들 苩仁(백인)과 딸 苩花(백화)를 낳았다. 총애가 깊어져 이때에 이르러 賈杞(가기)에게 복귀를 명하였고, 杞(가기)의 아들을 자녀로 하도록 명하였다.

*구지왕의 원년은 AD1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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