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고구려)

고구려사략 유류왕 42년. AD23년.

라디오에요 2009. 1. 20. 09:53

고구려사략 유류왕 42년. AD23년.

 

高句麗史略 (추모왕,유류왕)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43.pdf

고구려사략 유류왕 42년. AD23년.

四十二年 癸未 十一月 帶弗來侵 東宮以逸待勞 伏兵 出奇 大破其軍於鶴盤岺下(鶴立同) 其兵棄馬登山而走 皆被伏兵 所擒歸者百一 上大悅 而撫東宮曰 "芻牟復來"

42년(AD23년) 계미년 11월, 帶弗(대불)이 쳐들어 왔다. 東宮(동궁, 무휼)은 以逸待勞(이일대로)의 전략으로 병사들을 숨기고,  기묘한 계책을 내어, 鶴盤岺(학반령)아래에서 그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그 병사들은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도망갔으나, 모두 복병들에게 당하였다. 사로잡히고 귀화한 자들이 100명이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東宮(동궁)을 위로하며 말하길, "추모왕이 다시 왔구나" 라고 하였다.

*帶弗, 원문에는 帶素 적었다가..앞의 기사에 帶素가 죽고, 대불이 즉위했다고 해서, 현재 대불로 적음. 추후에 점검할 사항.
*以逸待勞(이일대로); 【성어】 (수세를 취하여) 쉬면서 힘을 기른 후 지친 적을 치다. 三十六計 勝戰計 第四計 나오는 전략중 하나.
*出奇 기묘(奇妙)한 계략을 냄. 【용례】→출기무단(出奇無端).
*擒 사로잡을 금 ㉠사로잡다 ㉡붙잡다 ㉢생포하다(生捕--) ㉣포로(捕虜)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2년, AD13년 (B.C.19~A.D.18. 재위기간 37년)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

32년(AD13년) 겨울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恐 (1) [동사]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惊恐; 놀라 무서워하다
     恐怖; 활용단어참조
     有恃无恐; 믿는 데가 있어 두려워하지 않다  
(2) [동사] 놀래다. 위협하다.  
(3) [부사] 아마.
     恐另有原因; 아마도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다
     那消息恐不可靠; 아마 그 소식은 확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의 엠파스 삼국사기의 해석본은 恐=아마 ~일 것이다.로 해석했음.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3년, AD14년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烏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縣屬玄菟郡
33년(서기 14)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고구려본기 유리왕 32년기에 나온다. 10년의 차이가 난다. 무휼이 A.D.4년에 태어났으므로 이해에 20살이 되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10살 소년이 기묘한 계책으로 물리쳤다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이 기사는 무휼의 나이가 걸리는 기사입니다.
고구려사략 유류왕 42년 기사가 삼국사기에선 32년 기사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 기사는 또하나의 필사본 원고지 고구려사략으로 고구려사초보다는 내용이 더 자세하고 재위기간 47년으로 되어 있지요. 고구려사초와 고구려사략의 재위기간은 동일하게 47년으로 삼국사기보다 10년이 늘어나 있습니다.

고구려사초에선 유리왕 32년 기사가 없으므로.. 그 사이로 집어 넣은 걸로 판단합니다.
즉, 아래에 있던 기사가 위에 가서 붙어 있는 꼴이죠.

무휼은 AD4년에 松后가 낳은 아들이고, AD14년에 태자가 되니, 11살에 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AD23년에는 20살로 태자가 된 후에 부여와의 전쟁에 참가하니 합리적이죠

삼국사기는 유리왕 42년 기사가 유리왕 32년 기사로 점프를 해서 순서가 뒤바껴서 삽입이 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리왕의 재위기간이 10년이나 더 늘어나 있어, 삼국사기랑 차이가 납니다.
이로써 무휼은 10살에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느냐의 의문은 제거되나.. 여전히 나이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유리왕 42년 기사가 삼국사기에선 32년 기사로 들어가 있다.

고구려사초에선 유리왕 32년 기사가 없으므로.. 그 사이로 집어 넣은 걸로 판단합니다.

무휼은 AD4년에 松后가 낳은 아들이고, AD14년에 태자가 되니, 11살에 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AD23년에는 20살로 부여와의 전쟁에 참가하니 합리적이죠.
태자가 된 후에야 전쟁에 참가할 자격이 생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