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正始三年碑(관구검 기공비)

라디오에요 2009. 1. 23. 08:32

 

 魏毋丘儉紀功碑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遺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魏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玄」
▨裨將軍」

[출전 :『中國內의 高句麗遺跡』(1994)]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7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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牙門將軍 七品官職 

督에서 위쪽 오른쪽이 十이군요. 牙는 ㄷ+ㄱ+ㄱ 이렇게 붙어 있고..門은 확대해서 보니..門으로 보이는군요.

討寇將軍이 위서 명제기에 나온다는데.. 명제기는 삼국지 명제기를 말하겠죠.


三國誌 卷三 魏書三 明帝紀第三

討寇將軍이 안 나오네요. 이상하군요.

 

<삼국지>에서는 토구장군과 관련된 기록이 2개 보이네요.

<삼국지 위서> 무제 註
楊 秋 , 黃 初 中 遷 討 寇 將 軍

<삼국지 위서> 鄧艾전
賜 爵 關 內 侯 , 加 討 寇 將 軍 , 後 遷 城 陽 太 守

 

도독(都督) -
위문제(魏文帝) 때 각 주(州)의 군사와 자사(刺史)의 관원을 통활하기 위해 설치한 관직.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특정한 관명이 아니라 산관(散官)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도독都督에 대한 설명.
관직명. 도독은 원래 후한 순제 말에 풍곤에게 지절로 양주에 속한 여러 군의 군사적인 업무를 감독하도록 한데서 시작되었다. 조조는 한의 승상으로 군사를 감독하였는데, 10군, 20군을 감독하게 되어 비로소 도독이란 명칭이 생겼다.

 

관구검기공비 [毌丘儉紀功碑]

길이 25.7cm, 너비 26.4cm, 자경(字徑) 약 2.7cm. 건립연도 245년. 1906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도로공사중 발견되었으며, 이는 비(碑)가 아니라 단순한 석각(石刻)이라는 설도 있다. 비문 가운데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 ’ 등 6행만 알아볼 수 있다. 위나라는 244년 8월 관구검을 시켜 고구려를 침범하여 환도성(丸都城)을 점령하고, 245년에도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시켜 다시 침공하였다. 이 비를 세운 사실을 《삼국사기》는 ‘이 전역(戰役)에 위장(魏將)은 숙신(肅愼)의 남계(南界)에 이르러서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고, 환도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이 전역(戰役)에 위장(魏將)은 숙신(肅愼)의 남계(南界)에 이르러서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고, 환도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해석을 제대로 했군요.

이 비는 正始三年碑라고 명칭해야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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