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갓난아기(알)이였던 탈해가 아진포에 도착한 것은 혁거세 39년의 일.
혁거세 원년은 AD8년이므로, 혁거세 39년= AD46년(탈해가 태어난 해).
AD46년 탈해가 아진포에 도착.
AD72년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됨.
AD74년 大輔 벼슬에 오름.
AD88년 유리 이사금 즉위. 탈해와 경쟁.
AD107년 유리 이사금 사망. 탈해가 62세의 나이로 즉위.
AD130년 탈해 사망. (85살 사망)
경진년(庚辰年; AD80년)
신라 탈해왕 24년, 파사왕(婆娑王) 원년, 고구려 태조왕 28년, 백제 기루왕 4년, 한(漢)나라 건초 5년
여름 4월 신라 서울에 큰 바람(大風)이 불어 금성(金城) 동문(東門)이 무너졌다.
○가을 8월 신라왕 탈해(脫解)가 훙(薨)하니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유리왕(儒理王)의 둘째 아들 파사(婆娑)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훙하자 여러 신하들은 유리왕의 태자 일성(逸聖)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어떤 이의 말에 일성이 비록 적사(嫡嗣)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함이 파사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드디어 파사를 세우게 되었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하며 백성을 사랑하니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혁거세 39년에 해변의 노모(老母)가 궤(櫝)를 열고 알을 가져다 탈해(脫解)를 얻어 길렀으며, 유리왕 34년에 이르러 탈해가 즉위하였으니, 그때 나이 62세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연표(年表)를 상고해 보건대, 혁거세 39년은 임인년(壬寅年)으로써 유리왕 34년 정사년(丁巳年)과의 거리가 76년이 되니 그때의 나이가 62세라고 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
탈해가 왕위에 있은 지 24년째인 경진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향년(享年)은 말하지 않았지만 혁거세 39년 임인년부터 계산해 본다면,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99세가 되는 것이다.
탈해가 즉위할 때의 나이 62세로서 추산(推算)해 본다면 85세가 된다. 중수(中壽)로써 본다면 즉위할 때 나이 62세라는 말이 옳을 듯한데, 그렇다면 궤를 열었다고 한 때는 혁거세 53년 병진(丙辰)에 해당한다. "궤를 열었다" 라는 말이 이미 허탄(虛誕)한데다가 그 연수 또한 서로 엇갈리니 모두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옛날 신인(神人)들은 그 태어난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르며 그 향년(享年)도 또한 "1백세가 넘었으므로 우선 옛 사기(史記)대로 썼으니 이에 대해서는 깊이 변론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삼국사절요]
*赫居世 39년(BC19년, 壬寅)
*儒理 34년(AD57년, 丁巳) BC19년 + AD57년 = 총 76년.
*赫居世 53년(BC5년, 丙辰)
삼국유사
第四 脫解王
脫解齒叱今.(一作 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 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禮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有船來泊.
제4대 탈해왕
탈해 이사금 (토해니사금) 남해왕때 가락국 바다중에 배가 와서 정박한 일이 있었다.
(古本云 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禮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고본이 전하길, (탈해가) 임인년에 왔다는 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 즉위 초보다 나중의 일이고, 爭讓(쟁양)의 일은 없었다. 이전이라면 헉거세의 때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임인년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赫居世 39년(BC19년, 壬寅)=> 赫居世 32년(AD46년, 丙午)
丙午= AD46년, 탈해가 들어온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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