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思公主(재사공주)
고구려사략 추모왕 17년 十七年 庚子 八月 行聖母大祭于南岺, 解素護送禮氏及類利太子于沸流松義之家. 時上獵于倭山. 類利來獻釼片 其服皆上古服也. 使居鸞坮而命摩離將兵万人而衛之, 妻以阿爾兮及溫. 阿爾兮皇后前夫仇台之出也. 17년 경자(BC21년) 南岺(남령)에서 聖母大祭(성모대제)를 거행하였다. 解素(해소)가 禮氏(예씨)와 類利太子(유리태자)를 비류의 松義(송의,송양의 아들)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이때 왕은 倭山(왜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類利(유리)가 와서 칼조각을 바쳤는데 그 복장은 모두 왕의 옛날 옷이였다. 鸞坮(란대)에서 거주하게 하고 摩離(마리)에게 명하여 병사 여러명을 이끌고 호위하도록 하였다. 阿爾兮(아이혜)와 溫(온공주)를 처로 붙여주었다. 阿爾兮(아이혜)는 황후(소서노)의 전남편 仇台(구태)의 소생이다.
*추모왕이 죽기 2년전에 추모왕의 2번째 부인이였던 禮氏가 아들 類利와 함께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찾아옵니다. 禮氏와 類利가 고구려로 오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미 추모왕은 소서노를 왕비로 맞아 들여 엄연히 고구려의 왕이 되었는데, 前부인인 禮氏가 오자 소서노는 권력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阿爾兮(아이혜)는 도절태자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사서에서는 阿爾(아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선 阿爾兮(아이혜)로 적혀 있죠.
*万人= 多人의 뜻입니다. 유리가 왔다고 해도 병사 10,000명으로 호위를 시키는 건 상식밖이죠. 그래서 이때 万人= 여러명, 여러 사람 의 뜻입니다.
十八年 辛丑 五月 神馬巨婁死. 上不樂久之有無何之症. 六月 禾小后崩 春秋三十三 葬于中川之原 桂后之塚西. 十月 上與禮氏類利謁神隧會群臣議正胤. 皇后大努與仇都仇賁等退居牛壤, 上憂恨添病秘之. 18년 신축(BC20년) 5월 神馬(신마) 巨婁(거루)가 죽었다. 상이 즐기지 않아서 오랜 시간이 지나 無何之症(무하지증)이 생겼다. 6월 禾小后(화소후)가 죽으니 나이는 33세였고, 中川之原(중천지원)에서 장례를 하였다. 桂后(계후) 무덤의 서쪽이다. 10월 왕은 禮氏(예씨)와 類利(유리)와 함께 神隧(신수)에게 제사하였고, 군신들을 모아 후계자를 의논했다. 皇后(황후)는 화가 많이 나서, 仇都(구도)와 仇賁(구분) 등을 데리고 牛壤(우양)으로 퇴거해 버렸다. 왕은 시름하고 한탄하여 병이 더해졌으나 이것을 숨겼다.
*無何之症(무하지증)= 병의 이름을 몰라서 고칠 수가 없는 병. *正胤(정윤)= 고려초 임금의 적자(嫡子)를 이르던 말. *隧神(수신)= 고구려(高句麗) 때 동쪽에 있는 큰 구멍 곧 수혈(隧穴)을 맡은 신(神). 고구려(高句麗) 사람들이 국토신(國土神) 또는 생산신(生産神)으로 받들었으며 10월에 이 신을 맞이하여 제사(祭祀) 지냈음
*이때 황후는 소서노를 말하죠. 마땅히 다음 후계자는 비류가 되는게 정상이나.. 禮氏가 오자..후계자가 類利로 결정이 되자..소서노는 화가 나서 牛壤으로 거처를 옮겨 버립니다.
十九年 壬寅 正月 以類利爲正胤 阿爾兮爲東宮妃 溫公主副之. 二月 鵲氏生鵲太子. 三月 以溫祚太子爲桓那沛者. 四月 上崩於西 都新宮 傳刃璽于正胤類利太子. 七月 皇太后禮氏生再思公主. 九月 葬大行于龍山 春秋四十. 以遺命禁殉葬. 仙記曰 上不樂居位 命太子治國. 乘黃龍而上天 遺棄玉鞭处爲龍山陵云. 19년 임인(BC19년) 1월 類利(유리)가 후계자가 되었고, 阿爾兮(아이혜)가 東宮妃(동궁비)가 되었고, 溫公主(온공주)가 보좌하였다. 2월 鵲氏(작씨, 낙랑국왕 시길의 딸)가 鵲太子(작태자)를 낳았다. 3월 溫祚太子(온조태자)를 桓那沛者(환나패자)로 삼았다. 4월 왕이 西 都新宮(서도 신궁)에서 죽으니, 후계자 유리태자에게 칼과 인장을 넘겨주었다. 7월, 황태후 禮氏(예씨)가 再思公主(재사공주)를 낳았다. 9월 龍山(용산)에서 크게 장사를 지냈는데 춘추가 40세였다. 유명은 순장을 금지하라는 것이었다. 仙記(선기)에 이르기를, 상은 왕의 자리에 있는 것을 즐기지 않아 태자에게 명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고,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가고 옥채찍을 버리고 남긴 곳이 龍山陵(용산릉)이 되었다고 전한다.
*阿爾는 소서노가 전남편 仇台의 사이에서 낳은 유복녀입니다. 그런 阿爾가 類利의 처가 되는거죠.
*再思公主는 추모왕과 禮氏 사이에 태어난 유복녀입니다. 추모왕이 죽은 후에 再思公主가 태어나기 때문에... 추모왕은 재사공주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고구려사략 유류왕 29년 二十九年 庚午 六月 赤蛙攻黑蛙于茅川(葦沙河) 鏖之 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與其子多婁來朝 上命巫禱多婁福 五日歸 上親送於汗南 公主揮淚而去 新羅以陜夫爲太輔 穆公主改嫁乙芳 29년(庚午, AD10년) 6월
茅川(모천,葦沙河=위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다. 그들을 무찔렀다. 사람들은 帶素(대소)가 패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再思公主(재사공주)는 그녀의 아들 多婁(다루)와 함께 래조하였다. 상은 무당에게 명하여 다루의 복을 빌게 하였다. 5일 있다가 돌아가니, 상은 친히 汗南(한남)까지 배웅하였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신라는 陜夫(협보)을 太輔(태보)로 삼았다. 穆公主(목공주)는 乙芳(을방)에게 改嫁(개가)하였다.
고구려사초 光明大帝紀 29년 ◎二十九年 庚午 六月 赤蛙攻黑蛙于茅川(葦沙河) 鏖之 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來朝而去 鵲太子爲新羅太輔 29년(庚午, AD10년) 6월
茅川(모천,葦沙河=위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다. 그들을 무찔렀다. 사람들은 帶素(대소)가 패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再思公主(재사공주)가 래조하였고 떠나갔다. 鵲太子(작태자)는 신라의 太輔(태보)가 되었다.
*재사공주에 대해서는 고구려사초보다 '고구려사략'이 더 자세하게 나와 있죠.
*고구려사초는 再思公主來朝而去 재사공주가 단순히 래조하고 갔다는 것만 알려주는데 반해..
고구려사략 유류왕 29년 AD10년 二十九年 庚午 六月 赤蛙攻黑蛙于茅川(葦沙河) 鏖之 人以爲帶素敗亡之兆 再思公主與其子多婁來朝 上命巫禱多婁福 五日歸 上親送於汗南 公主揮淚而去 新羅以陜夫爲太輔 穆公主改嫁乙芳 29년(AD10년) 경오 6월 茅川(모천,葦沙河=위사하)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다. 그들을 무찔렀다. 사람들은 帶素(대소)가 패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再思公主(재사공주)는 그녀의 아들 多婁(다루)와 함께 래조하였다. 상은 무당에게 명하여 다루의 복을 빌게 하였다. 5일 있다가 돌아가니, 상은 친히 汗南(한남)까지 배웅하였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신라는 陜夫(협보)을 太輔(태보)로 삼았다. 穆公主(목공주)는 乙芳(을방)에게 改嫁(개가)하였다.
再思公主與其子多婁來朝 上命巫禱多婁福 五日歸 上親送於汗南 公主揮淚而去 = 再思公主(재사공주)는 그녀의 아들 多婁(다루)와 함께 래조하였다. 상은 무당에게 명하여 多婁(다루)의 복을 빌게 하였다. 5일 있다가 돌아가니, 상은 친히 汗南(한남)까지 배웅하였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고구려사략는 중간에 생략된 부분을 전하고 있습니다.
再思公主(재사공주)는 백제왕 多婁(다루)의 어머니이며, 친히 多婁(다루)를 위해 무당을 불러서 복을 빌어 주었고, 5일동안 머물렀으며, 멀리 배웅도 해줍니다. 재사공주는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는군요.
백제본기 온조왕 28년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28년(AD10년)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AD28년에 多婁(다루)는 백제의 왕이 됩니다.
多婁(다루)가 2월달에 백제왕이 된 후, 6월달에 고구려를 방문한 걸로 연결이 됩니다.
AD년에 태후가 사망한 것은 바로 多婁(다루)의 어머니, 재사공주였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