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우로의 나이는 왜 문제가 되는가?

라디오에요 2009. 1. 23. 22:04

     유고집 기년                             삼국사기 기년
9  벌휴 (재위 13년) 244 ~ 256      (재위 13년) 184- 196
10 나해 (재위 35년) 257 ~ 291      (재위 35년) 196- 230            
11 조분 (재위 18년) 292 ~ 309      (재위 18년) 230- 247
12 첨해 (재위 15년) 310 ~ 324      (재위 15년) 247- 261
13 미추 (재위 25년) 325 ~ 349      (재위 24년) 261- 284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
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 (或云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 二年七月 以伊湌爲大將軍 出討甘文國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火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邯兼知兵馬事 十六年 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槱[艹樵] 暖熱之 羣心感喜 如夾纊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七年 癸酉 倭國使臣葛那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戲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爨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戲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味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
論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兩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

"석우로(昔于老)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로(水老)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
조분왕(助賁王) 2년(231년) 7월에 이찬을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쳐서 깨치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4년(233년) 7월에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15년(244년) 정월에 승진하여 서불한(舒弗邯)이 되고 겸하여 군사의 일[兵馬事]도 맡았다.
16년(245년)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자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밤이 되어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석]우로는 몸소 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섶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 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기뻐하여 마치 솜을 두른 것같이 여겼다.
첨해왕이 재위하였을 때 사량벌국(沙梁伐國)이 전에 우리에게 속하였다가 문득 배반하여 백제로 돌아가므로,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하였다.

(첨해왕) 7년 계유(253)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客館)에 와 있었는데 [석]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鹽奴]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그때] [석]우로의 아들은 어리어서 걷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이 안고 말을 타고 돌아왔는데,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때에 왜국(倭國)의 대신(大臣)이 와서 문안하였는데,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사론(史論): [석]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서 군무와 국정을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 이기기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아니하였으니, 그 계책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월등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마디 말의 잘못으로 스스로 죽음을 취하였고, 또 두 나라로 하여금 싸우게까지 하였다. 그 아내가 능히 원한을 갚았으나 역시 변칙이요 정도(正道)는 아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공은 또한 기록할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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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나해왕 14년, AD209년.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湌利音將六部兵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4년(AD209년) 가을 7월, 바닷가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太子(태자) 于老(우로)와 이벌찬 利音(리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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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조분왕 2년
二年 秋七月 以伊湌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地爲郡
2년(AD231년) 가을 7월,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여 승리하고, 그 땅을 군으로 만들었다.

四年 夏四月 大風飛屋瓦 五月 倭兵寇東邊 秋七月 伊湌于老與倭人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4년(AD233년)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와 기와가 날았다.
5월, 왜병이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웠다. 그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웠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十五年 春正月 拜伊湌于老爲舒弗邯 兼知兵馬事
15년(AD244년) 봄 정월, 이찬 우로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群心感激
16년(245)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자,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수비하였다. 그 날 밤 날씨가 몹시 추워지자, 우로가 사졸들을 위로하고 직접 장작불을 피워 그들을 따뜻하게 하여 주었다. 사졸들이 진심으로 감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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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본기 첨해왕 3년, AD249년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3년(AD249년)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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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흘해왕
訖解尼師今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貌俊異 心膽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侯曰 “興吾家者 必此兒也” 至是基臨薨 無子 群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乃奉立之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해왕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우로 각간이다. 그의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우로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다. “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이 때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라 하고 그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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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왕력편
第十六 乞解尼叱今
昔氏 父于老音角干 卽奈海王 第二子也 庚午立 治(四)十六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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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기사는 복잡하죠.  연구 안 한 사람은 모르는게 많죠.

같은 삼국사기인데도.. 삼국사기본기과 석우로열전에 나오는 우로가 사망한 연대가 다르게 표기가 되어 있어..

본기에 나오는 첨해왕 3년(249년)을 선택하거나, 열전에 나오는 첨해왕 7년 (253년),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기존 분들이 인용하곤 했습니다.

삼국사기 우로열전과 삼국사기 첨해왕 3년기사는 우로의 사망연대가 서로 다르게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에 크게 3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죠. 살펴보면..

1, 삼국사기본기와 우로열전의 우로의 사망연대가 서로 다르게 표기가 되어 있다.
2, 우로의 나이는 100살이 넘는다.
3, 우로와 그의 아들 흘래왕과 나이가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로의 연대는 교묘하게 조작되어 있죠.
그래서, 나이와 연대가 서로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금성 동문이 벼락을 맞았다는 기사나 용이 나타났다는 기사와는 무관합니다. 우로의 이름과 연대표기를 조작한 것이지.. 그런 기사들과 연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연구를 많이 한 분들이 그런 성향이 많은데..그러지 말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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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의 나이에 크게 혼란이 가져다 주는 원흉은
나해왕 14년(209년)에 '太子(태자) 于老(우로)'고 표현되어 있는게 원인제공을 하고 있습니다.


'태자 우로' 가 아니라, 가야태자 '于考(우고)'라 표시해야 할 것을 조작해서 이름을 '于老(우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해 14년은 于老(우로)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우로가 활동한 시기는 '조분 - 첨해 - 미추'대의 시기인데...
'미추 7년'에 우로가 사망한 해를 '첨해왕 3년'으로 조작해 놓고,

마치 '나해 - 조분 - 첨해'대에 활동한 인물로 전체적으로 위쪽으로 끌어 올려 놓았습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미추왕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을려는 김부식의 음모이지요.
우로를 죽게 만드는 왕은 첨해왕이 아니라 '미추왕'입니다.

그래서, 조작 결과 나타나는 부작용은 미추왕 다음에 즉위하는 우로의 아들인, 흘래왕과 나이가 서로 멀어져 맞지 않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13 미추 (재위 25년) 325 ~ 349      (재위 24년) 261- 284
14 유례 (재위 15년) 350 ~ 364      (재위 15년) 284- 298
15 기림 (재위   7년) 364 ~ 370     (재위 13년) 298- 310
16 흘해 (재위   8년) 370 ~ 377     (재위 47년) 310- 356

또한, 기림왕과 흘해왕의 재위기간이 늘어 났기 때문에.. 아버지인 우로와 흘래왕과의 나이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선 분명히 우로의 아들은 흘래라 했는데 서로 나이가 벌어져도 한참 벌어져 버렸습니다.
기림왕에서 6년 + 흘래왕에서 39년(총 45년)이나 연대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라디오 (2008-08-22 14:38:23) 
삼국유사 왕력편
第十六 乞解尼叱今
昔氏 父于老音角干 卽奈海王 第二子也 庚午立 治(四)十六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
昔氏 父于老音角干 卽奈海王 第二子也 庚午立 治十六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 (원본)

즉위년 庚午= 370년입니다. 재위기간은 16년으로 나와 있죠.
유고집과는 연대가 차이가 납니다.
라디오 (2008-08-22 19:05:27) 
유고집-흘래왕 재위기간 8년
삼국유사-흘래왕 재위기간 16년.
삼국사기-흘래왕 재위기간 47년.

유고집-기림왕 재위 7년
삼국유사-기림왕 재위 12년
삼국유사-기림왕 재위 13년

기림왕 즉위년은 戊午년= 298년, 358년.

기림왕이나 흘래왕의 간지는 삼국사기랑 같죠. 재위기간은 삼국사기보다 1년 줄어서 표시했습니다. 그러니.. 삼국사기랑 다를 바가 없죠.
治(四)十六年 이라 판단할만 하죠. 벌휴왕은 재위기간이라든가 간지도 생략해 버려 놧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