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菊露秋寫(국로추사) 辰斯王(진사왕) 정서 1/2

라디오에요 2009. 1. 24. 09:10

菊露秋寫(국로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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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斯王(진사왕)

[諱辰斯 枕流王弟] 在位七年
[휘는 진사, 침류왕의 동생] 재위 7년.

○丙戌 元年[羅三十年 麗二年]
병술 (386년) 원년 [신라 30년, 고구려 2년]

二月 王令國中 徵男女十五歲以上 大設關防 自靑木嶺北距八坤城 西至大海 而衛戍
2월 왕은 나라안에 令을 내려 15살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關防을 크게 설치하였다. 靑木嶺에서부터 북쪽의 八坤城까지인데 서쪽으로 大海에 이르렀고, 戍(수)을 방어하였다.

八月 麗王發兵攻濟 王遣鮮于老 說麗王曰 "兩國之民罷於兵革 四境蕭然 未可以武決雄 願結和親 欲以慰天下之心 大王策安決在乎" 麗王默然良久 遂許和親 而返旆[見東史]
8월 고구려왕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은 鮮于老(선우로)를 보내 고구려왕을 설득하며 말하길, "양국의 백성들은 전쟁으로 고달프고, 사방의 국경은 조용하니, 武(무)로서 決雄(결웅)할 수 없습니다. 和親(화친)을 맺기를 원합니다. 천하의 민심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大王(대왕)의 계책이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달려 있잖습니까?" 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은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마침내 화친을 허락하고 旆(깃발)을 되돌렸다. [견동사]

○丁亥 二年[羅三十一年 麗三年]
정해 (387년) 2년 [신라 31년, 고구려 3년]

九月 王拜眞嘉謨爲達率 以韓豆知爲恩率 使伐靺鞨戰於關嶺 久圍不決 王乃使使持節引兵 而還 [見濟史]
9월 왕은 眞嘉謨(진가모)를 拜하여 達率(달솔)로 삼았고, 韓豆知(한두지)를 恩率(은솔)로 삼았다. 말갈을 치게 하여, 關嶺(관령)에서 싸웠다. 오래동안 포위를 했으나 승패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왕은 이내 使持節(사지절)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돌아오게 하였다. [견제사]

○庚寅 五年[羅三十四年 麗六年]
경인 (390년) 5년 [신라 34년, 고구려 6년]

八月 王 以眞嘉謨爲車騎都尉 將兵數千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男女二百人而還 王大說 拜嘉謨爲兵官佐平[見濟史]
8월 왕은 眞嘉謨(진가모)를 車騎都尉(거기도위)로 삼았다. 병사 수천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서, 都坤城(도곤성)을 함락시켰고, 남녀 2백명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嘉謨(가모)를 拜하여 兵官佐平(병관좌평)으로 삼았다.

○辛卯 六年[羅三十五年 麗七年]
신묘 (391년) 6년 [신라 35년, 고구려 7년]

正月 王修宮室 鑿池造佳山 多種名花 養奇禽華獸 以悉耳目之所好 窮心志之所樂矣
1월 왕은 宮室을 수리하였다. 연못을 파고, 佳山을 만들고, 이름있는 꽃들을 많이 심고, 기이한 새들과 화려한 짐승들을 길렀다. 눈과 귀가 좋아하는 것을 갖추고, 마음이 즐거운 것을 추구하였다.

四月 靺鞨襲擊濟北鄙 掠石峴城[見濟史]
4월 靺鞨은 백제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石峴城을 빼앗았다. [견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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