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백제)

백제 비류왕은 구수왕의 서자가 맞다.

라디오에요 2009. 3. 30. 19:40

肖古王(초고왕)

諱素古 仇知王第五子也 體鴻大有遠識 臨事不輕決 古尸田氏不敢擅威 國人稱之.
휘는 素古(소고), 仇知王(구지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체격이 컸으며, 앞을 내다볼 만큼의 식견이 있었다 . 정사에 임하여 경솔히 결정하지 않았다. 고시와 전씨는 감히 멋대로 하거나 협박하지 못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것을 칭찬하였다.

 

五年 庚戌 八月 沙氏生王子仇首 九月 以沙市爲上佐平 委以政事 烏候爲右佐平 委以兵事 富輪爲左佐平 委以密事 流太公古尸于小熊島移 太后於彭宣家 十月 遣將侵羅邊邑 掠其府庫 十二月 皀衣舍人眞可說王曰 “陛下以英明之姿 早破古尸之奸 以雪父王之恥 則可也 自古以來 未有讎母之君 伊時若非太后 陛下焉得以王 異日若有不測 則非太后 而孰有偕乎” 王大悟 乃冒雪夜 幸彭宣家 偕太后而歸.

5년(A.D.230) 경술 8월 沙氏(사씨)가 왕자 仇首(구수)를 낳았다.

 

*백제 仇首(구수)왕이 태어난 것은 AD230년입니다.

 

*보통 기존에 연구가들이 초고왕- 비류왕에 이르는 왕들의 나이를 계산을 한 결과,

비류왕은 구수왕의 2째 아들이 아니고, 구수왕의 손자쯤 된다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이에 대한 계산은 윤여동님 블로그에도 자세히 나와 있어요.

http://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288?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3002kumsukangsan%2F8450288

 

*비류왕이 어떻게 왕에 오르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분들은

'을불대왕전' 미천왕 5년조 2월, AD304년을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까지 사서중에 이게 제일 상세합니다.

 

*분서왕의 어머니 보과는 그녀의 정부 比流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比流者 仇首之庶子'

= 比流라는 자는 仇首의 庶子이다.

 

고이왕때 그의 어머니 餘씨와 함께 민간에 피닉하였다.

책계에게 달라붙어, 獄訟(옥송)을 영위하고, 법을 집행하고, 淸簡하였다.

보과와 상통하여 궁정에 들어와서 그의 무리들을 많이 심었다.

보과의 어머니는 일찍이 (낙랑왕) 子術에게 잡힌 적이 있어, 그래서 보과는 사졸들을 많이 양성하였다.

 

등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측 사서에서도 구수왕의 서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는 믿을만 합니다.

 

仇知王(구지왕), 재위 39년, 188년 - 226년 

肖古王(초고왕), 재위 29년, 226년 - 254년   
仇首王(구수왕), 재위 11년, 254년 - 264년 
古爾王(고이왕), 재위 23년, 264년 - 286년 

 

11, 比流王(비류왕) 304~344년

 

*구수왕은 234년이 아니라 264년에 죽습니다.

재위기간 11년, 230년 태어남~ 264년 사망. 35살에 죽음.

 

(15살이면 장가를 가므로, 247년 17살에 첫아들을 얻는다고 가정할 수 있다)

 

*고이왕은 초고왕 10년 235년에 태어나, 286년에 52살에 죽음.

 

비류왕 원년 304년- 구수왕 몰년 264년= 40살 차이.

 

*백제본기에서는 구수왕 몰년이 234년으로 되어 있지만, 백제왕기 기년에서는 264년으로,

30년이 주저 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류왕은 구수왕이 죽기 바로 전에 260년쯤에 태어난 걸 의미합니다.

비류왕이 즉위할 때는 이미 자신은 나이 40살이 넘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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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왕이 구수왕의 서자라는 사실은 다른 사서를 보지 않는 이상, 죽어다 깨어나도 알아 내지 못 해요.

그져 구수왕의 손자라고 다들 짐작할 뿐이죠.

사서 없이는 알아 내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비류왕의 어머니는 餘氏로 나와 있군요.

백제왕기에는 비류왕의 출자는 나와 있지 않아요. 반쪽짜리 사서입니다.

여동생 素嬭(소내)가 왕후가 되었으므로, 소내의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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仇首王(구수왕) 재위 11년, 254년 - 264년 


諱仇首 肖古王長子也 身長七尺 威儀秀異 爲政以仁 執法以明
휘는 仇首(구수), 肖古王(초고왕)의 장자이다. 키가 7척이였고, 위엄있는 자태가 남달랐다. 인으로서 정치를 하였고, 현명함으로 법을 집행하였다.

元年 甲戌 三月 立妹妃素嬭爲后
1년(A.D.254) 갑술 3월 여동생 素嬭(소내)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

 

二年 乙亥 二月 選壯丁能射者 屬新騎監
2년(A.D.255) 을해 2월 활쏘기에 능한 장정을 선발하여 新騎監(신기감)에 배속하였다.

四年 丁丑 七月 龜宮太后宝皐夫人薨 春秋五十七 后以公孫渡王季女 有傾國知色文母之德 事仇知肖古二君 生五女三子 至是從太王于狗原得疾 而薨于穴+出室
4년(A.D.257) 정축 7월 구궁의 태후 宝皐夫人(보고부인)이 죽으니 춘추 57세였다. 후는 공손탁왕의 막내딸로서 傾國知色(경국지색)과 文母之德(문모지덕)이 있었다. 구지왕과 초고왕 두 임금을 섬겼으며 5명의 딸과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때 이르러 태왕을 따라가서 구원에서 병을 얻어 穴+出室(줄실)에서 죽었다.

六年 己卯 七月 地震 侵羅邊鄙
6년(A.D.259) 기묘 7월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변방 마을을 침략하였다.

七年 庚辰 十月 伯父餘勿公薨 以太王之兄有泰伯之德 讓國閑居不喜 論人長短 唯與方士輩潛究仙道 太王敬以師之 以其三女爲小后 尊之曰 "仙舅太上" 國人號 以北院大王
7년(A.D.260) 경진 10월 伯父(백부) 餘勿公(여물공)이 죽었다. 태왕(초고왕)의 형으로서 泰伯(태백)의 덕이 있었다. 나라를 양보한 후 한가로이 지내니 즐겁지 않았다.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논하며 오로지 방사 무리들과 더불어 남몰래 선도를 탐구하였다. 태왕이 여물공을 스승으로서 존경하였고, 여물공의 셋째 딸을 소후로 삼았었다. 그를 존경하여 말하기를 "仙舅太上(선구태상)이로다" 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北院大王(북원대왕)이라 불렀다.

八年 辛巳 四月 禁國人私通于外 交易物貨賣買女色 以損國情 嚴防水路
8년(A.D.261) 신사 4월 나라사람들이 해외로 사사로이 통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물품을 교역하거나 여자를 매매하는 것은 國情(국정)에 손해를 끼치므로 엄하게 수로를 막았다.

九年 壬午 五月 太后田氏有疾 赦中外罪因
9년(A.D.262) 임오 5월 태후 田氏(전씨)가 병이 들어, 나라안팎의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十一年 甲申 六月 王薨 太子沙伴卽位 幼少不能爲政 太王命王弟古爾代立攝輔 太子仍娶素嬭后 未幾太子薨 遂定大位 仇首王以聰明之姿神威之質 銳意圖治 發憤忘食 夙興夜處 竟損聖躬 壽只三十五 國人莫不傷之
11년(A.D.264) 갑신 6월 왕이 죽었다. 태자 沙伴(사반)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맡을 수 없었다. 태왕(초고왕)이 명하여, 왕의 동생 古爾(고이)가 대신하여 집정하고 보좌하도록 하였다. 태자는 이내 素嬭(소내) 왕후를 취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죽으니, 마침내 大位(대위)를 결정하였다. 仇首王(구수왕)은 총명한 자세와 신위한 자질을 가져 굳은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였다. 화가 나면 식사를 잊어 버렸고,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일을 하여 결국 성스러운 몸을 망쳐, 수명이 단지 35살로 끝나니 나라사람들이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