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유리명왕 3년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鶻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주석5]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3년(BC17년) 가을 7월에 골천(鶻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들어 [이들을] 후처(後妻)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골천인의 딸이고, 또 하나는 치희(稚姬)인데 한(漢)나라 사람의 딸이다.
두 여자가 사랑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나라 사람 집의 천한 첩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좇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黃鳥]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노래하였다.
“훨훨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4년 ~ 10년조 생략되었음)
十一年 夏四月 王謂羣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주석6]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良馬一十匹
11년(BC9년)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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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서는 3년조에 화희(禾姬)와 치희(稚姬)가 싸운 기사가 나오고, 더불어 황조가까지 나옵니다.
이는 삼국사기가 4년 ~ 10년 기사가 생략되면서, 생략된 기사가 몰아서 한꺼번에 3년조에 압축 편집된 결과입니다.
송씨를 죽음로 설정한 것은, 유리왕의 후처로서 화희(禾姬)와 치희(稚姬)를 맞이 한다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
김부식이 기사를 조작한 것이지요.
그 조작한 부작용으로 송씨가 죽은 후 20년후에 대무신왕이 태어난다는 모순이 일어납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사람은 삼국사기가 편집되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화희(禾姬)와 치희(稚姬)가 시집와서 6개월든지~1년든지 살아 봐야 싸울 것 아닙니까?
어떻게 편집되었다는 구체적인 면은 사서 없이는 알아 내기 어렵죠.
*유리왕 3년에는 송씨는 죽지도 않았죠. 유리왕 7년에 버젓이 해명태자를 낳습니다.
유리왕 3년에 죽은 사람은 溫公主(온공주)입니다.
삼국사기 기사를 그대로 믿으면 완전 낚이는거죠.
유류기 3년
三年 甲辰 正月 分國中爲五部 以順奴絶?奴賜沸流 治之 都彌鄒忽(密山) 以灌奴桂婁賜溫祚 治之 都牛壤 涓奴上治之 兼統黃龍卑離荇人勾茶諸國 事五部 置沛者于台使者評者等職 三月 納禾黍女于後宮 五月 與太后如海山求神仙, 皇后及溫公主馬公主再思公主從之 歷鏃山鹽山而還 東明神宮成 七月 以松讓女爲妃 作離宮於鶻川凉谷之東西 與皇后溫公主居之 汗南王溫祚入朝 以牛壤挾小 請移都於尉那城(鏡泊湖東岸) 許之 上謂皇后曰 溫祚年雖十七 奏事明白 勝於沸流 南方無憂矣 皇后曰 沸流幼多疾病 未得敎誨 故徒善而已 溫祚自幼勇壯 馬黎敎之 故如此當爲陛下之一臂 上曰 豈徒一臂哉 渠是我而我是渠也 皇后大喜曰 豈料聖恩如此哉 溫祚歸國 皇后欲往汗南曰 妾容皃已衰慚愧老牝 請赴汗舐犢 上止之曰 先帝以卿遺朕 而禁殉者欲固邦本也 卿若赴汗 朕與誰爲國追念 先帝無使朕孤依 旧宗國無失民望 皇后乃喜而止 十月 溫公主難産而崩 春秋二十 上哀慟之 減食二日 十二月 阿爾后生女玄
十月 溫公主難産而崩 春秋二十 上哀慟之 減食二日
10월, 溫公主온공주가 난산하여 죽었다. 춘추 20살이였다. 상은 애통해 하며 2일동안 감식하였다.
*화희(禾姬)가 시집온 것은 몇 월달일까요? 3월달입니다.
三月 納禾黍女于後宮
=3월, 禾黍(화서)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禾黍(화서)의 딸= 화희(禾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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