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1年~33年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24년, 25년, 26년, AD149년, AD150년, AD151년

라디오에요 2009. 10. 28. 20:41

 

 

二十四年 三月 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吉門爲中外大軍事 沙乙那爲大軍母

24년(AD149년) 3월, 摩帝(마제)를 伊伐飡(이벌찬)으로, 美禮(미례)를 稟主(품주)로, 吉門(길문)을 中外大軍事(중외대군사)로, 沙乙那(사을나)를 大軍母(대군모)로 삼았다.


五月 月瓠卒 以角干禮葬之 瓠性精敏謹厚 不爭功名 只帶頭上虛位 而不介于意 惟以國家爲念 開導少壯 人皆惜其卒以五軍頭上爲左右頭上 以白馬爲左 車門爲右 以允良爲北軍事 妻吉門女成門 發良爲水酒太守 漢鳥爲別軍事

5월, 月瓠(월호)가 죽어 角干(각간)의 禮(례)로서 장사지냈다. 月瓠(월호)의 성품은 精敏(정민)하고 謹厚(근후)하였, 功名(공명)을 다투지 않았다. 단지 頭上(두상)이라는 형식적인 직위를 두르고 있었으나, 私慾(사욕)에 개입하지 않았다. 오로지 國家(국가)를 생각하였고, 少壯(소장)들을 開導(개도)하였다. 사람들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였다. 五軍頭上(5군두상)을 左右頭上(좌우두상)으로, 白馬(백마)를 左頭上(좌두상)으로, 車門(차문)을 右頭上(우두상)으로 삼았고, 允良(윤량)을 北軍事(북군사)로 삼아, 吉門(길문)의 딸 成門(성문)을 시집보냈고, 發良(발량)을 水酒太守(수주태수)로, 漢鳥(한조)를 別軍事(별군사)로 삼았다.

 

*謹厚로 수정.

*少壯(소장)= 나이가 젊고 혈기(血氣)가 왕성(旺盛)함.  젊고 씩씩함.

 

七月 大雹殺鳥群于推火 命還朱日于加耶 其妻靑氏並子同歸

7월, 推火(추화)에서 큰 우박이 내려 새떼를 죽였다. 朱日(주일)에게 加耶(가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그의 처 靑氏(청씨)는 아들과 더불어 함께 돌아갔다.


十月 大震 破屋傷命 上躬訪宗老太公 責己

10월, 대지진이 일어나, 집을 무너뜨리고 목숨을 상하게 하였다. 상은 몸소 宗老(종로, 閼智神君)와 太公(태공, 許婁)을 방문하고, 자신을 책망하였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1년, AD100년.

二十一年 秋七月 雨雹 飛鳥死 冬十月 京都地震 倒民屋有死者

21년(100) 가을 7월에 우박이 내려 날아다니던 새가 죽었다. 겨울 10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민가가 쓰러지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AD149년- AD100년= 49년 편차.   24년- 21년= 3년 편차.

 


 

 

二十五年 正月 加耶世主遣其三子靑裔 入朝

25년(AD150년) 1월, 加耶世主(가야세주, 正見)가 그녀의 셋째아들 靑裔(청예)를 보내 入朝(입조)하였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2년, AD101년.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22년(101년, 辛丑) 봄 2월,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에 옮겨가 살았다.

 

*AD150년- AD101년= 49년 편차.   25년- 22년= 3년 편차.

*이 기사는 파사이사금기에서 누락되었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茶耶爲稟主 沙乙那愛吉元 而不肯爲稟主 上許其志 遂以茶耶代之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3월, 吉門(길문)을 伊伐飡(이벌찬)으로, 茶耶(다야)를 稟主(품주)로 삼았다. 沙乙那(사을나)는 吉元(길원)을 사랑하여 稟主(품주)가 되기를 꺼려 하였다. 왕이 그 뜻을 허락하고, 茶耶(다야)로 대신하게 하였다. 摩帝(마제)를 中外大軍事(중외대군사)로, 美禮(미례)를 大軍母(대군모)로 삼았다.


十二月 音汁伐與悉直谷爭界 王命其地老辨之 地老曰 “加耶王子靑裔多智 可以立議” 上許之汗門爲京都兵官 汗兒子也

12월, 音汁伐(음즙벌)과 悉直谷(실직곡)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은 그 地老(지로)에게 명하여 변별하도록 하였다. 地老(지로)가 말하기를 “加耶(가야)의 王子(왕자) 靑裔(청예)가 지혜가 많으니 의견을 세울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허락하였다.汗門(한문)을 京都兵官(경도병관)으로 삼았는데, 汗兒(한아)의 아들이다.

 

 

 

二十六年 二月 靑裔巡遊六部 部氓以其神智聚觀之 部主皆以伊干迎之 厚饗 漢祇主保齊獨以家奴接之 甚薄 靑裔之臣耽下里恥之 殺其奴 逃依音汁伐主 上命索之 不應 命吉元伐之 以爲郡悉直君奉治押督君王乙皆以其地納之

26년(AD151년) 2월, 靑裔(청예)가 6부를 巡遊(순유)하였다. 部氓(부맹)들은 그가 神智(신지)하다며 모여들어 살펴보았다. 部主(부주)는 모두 伊干(이간)으로서 맞이하여, 후하게 대접했으나, 漢祇主(한기주) 保齊(보제)는 홀로 家奴(가노)로서 접대하니, 심히 박하였다. 靑裔(청예)의 신하인 耽下里(탐하리)가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노비를 살해하고, 도망하여 音汁伐主(음즙벌주)에게 의지하였다. 상은 그를 찾으라고 명하였으나, (音汁伐主(음즙벌주)는) 응하지 않았다. 吉元(길원)에게 명하여 그들을 쳐서, 郡(군)으로 삼았다. 悉直君(실직군) 奉治(봉치)와 押督君(압독군) 王乙(왕을) 모두 그 땅을 바쳤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AD102년.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 謂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陁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桃李華

23년(102)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을 찾아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의논하여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국(悉直國)과 압독국(押督國) 두 나라의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AD151년- AD102년= 49년 편차.   26년- 23년= 3년 편차.

*신라본기는 8월달 기사로 적혀 있고, 파사이사금기에서는 전 해 12월달로, 다음 해 2월달 기사로 적혀 있어, 달수가 다르다.


三月 摩帝爲伊伐飡 吉門爲中外大軍事

3월, 摩帝(마제)를 伊伐飡(이벌찬)으로, 吉門(길문)을 中外大軍事(중외대군사)로 삼았다.


九月 穀大登 加樹爲馬頭城主

9월, 곡식이 크게 풍년이 들었다. 加樹(가수)를 馬頭城主(마두성주)로 삼았다.


十月 桃李皆華 誦歌連野

10월,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모두 피었다. 노래를 읊는 소리가 들판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