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年 正月 稟主加亥病免 上以愛女毛利命爲稟主 上與史后幸押督 賑民
30년(AD155년) 1월, 稟主(품주) 加亥(가해)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상은 사랑하는 딸 毛利(모리)를 稟主(품주)로 삼기를 명하였다. 상은 史后(사후)와 함께 押督(압독)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毛利(모리)는 지진내례의 어머니이다. 지진내례는 일성이사금과 사이에서 아달라이사금을 낳고, 석추갈문왕과 사이에서 벌휴이사금을 낳는다. 지진내례의 출생기사가 없고, 사망기사에 나이를 적어 두지 않아 태어난 해를 알 수 없으나, 위의 기사에서 대략적인 출생시기의 파악이 가능하다.
三月 上還都 以吉元爲伊伐飡 茶耶稟主 支所禮右頭上
3월, 상은 도읍으로 돌아왔다. 吉元(길원)을 伊伐飡(이벌찬)으로, 茶耶(다야)를 稟主(품주)로, 支所禮(지소례)를 右頭上(우두상)으로 삼았다.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7년, AD106년.
二十七年 春正月 幸押督賑貧窮 三月 至自押督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27년(106) 봄 정월에 압독(督賑)에 거둥하여 빈궁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3월에 압독(督賑)에서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주(馬頭城主)에게 명하여 가야(加耶)를 치게 하였다.
*AD155년- AD106년= 49년 편차. 30년- 27년= 3년 편차.
*8월 기사는 파사 30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比只(비지)국의 반란 사건을 말하며, 이때 馬頭城主(마두성주)는 加樹(가수)이다.
七月 大蝗 王遍祭神山大川 而禳之曰 “朕德衰歟 臣下奸歟 昨夏大水 十道民饑 今此大蝗奈蒼生何 果蝗減而有年” 時閼智神君薨 上臨之 則曰 “臣以宗老無有上報 昇天 則可以除蝗” 果以薨日之夜 臭雨大降 虫自除 而穀大醒 故人曰 "閼智穀" 立其廟于南郊
7월, 蝗蟲(황충)이 크게 일어났다. 왕은 神山大川(신산대천)에게 두루 제사지내고, 굿을 하며 말하기를 “짐의 덕이 쇠하였는지, 신하가 간사한 건지, 지난 여름에는 크게 홍수가 나서, 十道(10도)의 백성들이 굶주리더니, 지금은 이처럼 蝗蟲(황충)이 어찌하여 蒼生(창생)하는가. 과연 蝗蟲(황충)이 감소했던 해가 있었던가.” 라고 하였다. 이때 閼智神君(알지신군)이 죽었다. 상은 그에게 임하자, (閼智神君(알지신군)이) 말하기를 “臣(신)은 宗老(종로)로서 보답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하늘로 오르면 곧 蝗蟲(황충)을 없앨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과연 죽는 날 밤에 몹시 비가 많이 내려, 벌레들이 스스로 없어져서, 곡식들이 크게 깨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閼智穀(알지곡)이라고 하였다. 南郊(남교)에 그의 묘를 세웠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5월달에 홍수가 났다.
*閼智神君(알지신군)은 파사이사금기 30년, AD155년에 사망.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0년, AD109년.
三十年 秋七月 蝗害穀 王遍祭山川 以祈禳之 蝗滅 有年
30년(109) 가을 7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지냈고, 기도하고 굿을 하였다. 누리가 줄어든 해가 있었던가.
*AD155년- AD109년= 46년 편차. 파사 30년으로 일치됨.
八月 比只與多伐草八作亂 命虹盧加樹討平之 比只太子宝日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 主和 其弟靑裔奔于金官
8월, 比只(비지)는 多伐(다벌), 草八(초팔)과 함께 亂(란)을 일으켰다. 虹盧(홍로, 南露軍事)와 加樹(가수, 馬頭城主)에게 명하여 討平(토평)시켰다. 比只(비지)의 太子(태자) 宝日(보일)은 전쟁으로 죽고, 次子(차자) 朱日(주일)은 召文(소문)으로부터 돌아와 화친을 주도하였고, 그의 남동생 靑裔(청예)는 金官(금관)으로 도망갔다.
*比只(비지)는 162년 5월 기사에 재등장하므로,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아니다.
*대가야가 건국한 계기가 이때 일어났다. AD155년.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9년, AD108년.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幷之
29년(108)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10도(十道)에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군사를 파견하여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AD155년- AD108년= 47년 편차. 30년- 29년= 1년 편차.
*홍수가 난 달은 5월달.
十二月 太公許婁薨 上與史后痛哀之 以尼今禮葬之 追尊爲葛文王 其妃道生欲赴殉地 摩帝扶之曰 “何不爲新太公生子” 上知摩帝意 乃以摩帝爲太公 吉道生于神井 爲妃 是日 以樊五伊伐飡 曷名稟主 吉元左頭上
12월, 太公(태공) 許婁(허루)가 죽으니, 상과 史后(사후)가 애통해하였다. 尼今(니금)의 禮(례)로서 장사지내고, 追尊(추존)하여 갈문왕(葛文王)으로 삼았다. 許婁(허루)의 妃(비) 道生(도생)이 殉地(순지)로 달려가려고 하자, 摩帝(마제)가 부축하며 말하기를 “어찌 새로운 太公(태공)을 위해 아들을 낳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였다. 상은 摩帝(마제)의 뜻을 알고는, 이에 摩帝(마제)를 太公(태공)으로 삼았고, 神井(신정)에서 道生(도생)을 결혼시켜, (摩帝(마제)의) 妃(비)로 삼았다. 이 날 樊五(번오)를 伊伐飡(이벌찬)으로, 曷名(갈명)을 稟主(품주)로, 吉元(길원)을 左頭上(좌두상)으로 삼았다.
*太公(태공) 許婁(허루)가 죽음. 파사이사금기 30년, AD155년의 일. 摩帝(마제)가 太公(태공)이 됨.
三十一年 正月 上與史后祭火神于井中 以摩帝次子莫兮爲京軍事 君乙爲北軍事 以支所禮女加車爲莫兮妻 行京軍母 以玉君之子玉權爲護城大師 尹公之子逸聖爲太子 兵官使屬祇摩 日知之子馬日爲殿中郞 昌永爲大井大師 神籬將軍命督三軍 乃京路護城太子之軍也 狗壤主河己卒 子屯己立
31년(AD156년) 1월, 상은 史后(사후)와 함께 井中(정중)에서 火神(화신)에게 제사지냈다. 摩帝(마제)의 次子(차자) 莫兮(막혜)를 京軍事(경군사)로, 君乙(군을)을 北軍事(북군사)로, 支所禮(지소례)의 딸 加車(가거)를 莫兮(막혜)의 처로 삼아서, 京軍母(경군모)를 행하게 하였다. 玉君(옥군)의 아들 玉權(옥권)을 護城大師(호성대사)로, 尹公(윤공)의 아들 逸聖(일성)을 太子(태자)로 삼았고, 兵官(병관)은 祇摩(지마)에게 속하게 하였다. 日知(일지)의 아들 馬日(마일)을 殿中郞(전중랑)으로, 昌永(창영)을 大井大師(대정대사)로 삼았다. 神籬將軍(신리장군)이 三軍(3군)을 명령하고 감독하였고, 곧 京路(경로)와 護城(호성)은 太子(태자)의 군대이다. 狗壤(구양)의 主(주) 河己(하기)는 죽고, 아들 屯己(둔기)가 섰다.
*逸聖(일성)이 太子(태자)가 됨.
*AD156년= 丙申= 火猿. 火神(화신)에게 제사지냈다.
*狗壤(구양)은 백제와의 변경이다.
*神籬(신리)는 일본에서 에도시대(1603∼1867) 사학자 도데이칸(藤貞幹 1732∼1797)도 고대 일본 왕실에서는 신라신만을 숭상하며 제사지냈다고 밝혔다. 도데이칸은 “신라 아메노히보코(天日槍·천일창) 왕자가 신라로부터 ‘히모로기’(神籬, 일종의 제사용 신단)를 가지고 건너왔는데, ‘히모로기’는 후세의 신사(神詞)가 되었다. 신라말 ‘신리(神籬)’를 빌려 ‘히모로기’라는 다른 한자어로 새겨서 읽었다.
二月 上命祇摩太子與妃愛禮聽政 摩帝率百僚朝于大井
2월, 상은 祇摩太子(지마태자)에게 명하여 妃(비) 愛禮(애례)와 함께 政事(정사)를 듣도록 하였다. 摩帝(마제)가 百僚(백료, 百官)를 거느리고, 大井(대정)에서 조회를 하였다.
三月 祇摩太子宴摩帝美禮于大井 太子謂美禮曰 “爾女已娠我子 可以繼天 但我無威難制天下何” 美禮大喜曰 “汝乃吾女之愛夫 與吾一體也 可以大符委之也” 摩帝亦醉 而許之 太子以吉公爲伊伐飡 馬知那爲京軍事 馬知那妻兪生爲京軍母 乃太子之胞妹也 吉公妻暖生爲稟主 莫兮爲太公私臣
3월, 祇摩太子(지마태자)가 大井(대정)에서 摩帝(마제)와 美禮(미례)에게 연회를 하였다. 太子(태자)가 美禮(미례)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딸은 이미 저의 자식을 임신하여, 하늘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위엄이 없어 天下(천하)를 다스리기 어려우므로 어찌합니까?” 라고 하였다. 美禮(미례)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곧 제 딸의 사랑하는 남편으로서, 저와 한 몸입니다. 大符(대부)가 그대에게 맡겨질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摩帝(마제) 역시 술에 취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太子(태자)가 吉公(길공)을 伊伐飡(이벌찬)으로, 馬知那(마지나)를 京軍事(경군사)로, 馬知那(마지나)의 처 兪生(유생, 파사의 딸)을 京軍母(경군모)로 삼았다. 兪生(유생)은 太子(태자)의 胞妹(포매)이다. 吉公(길공)의 처 暖生(난생)을 稟主(품주)로, 莫兮(막혜)를 太公(태공, 摩帝)의 私臣(사신)으로 삼았다.
七月 上與史后遊卞山 親祀雙神
7월, 상은 史后(사후)와 함께 卞山(변산)으로 놀러가서, 雙神(쌍신, 日知와 韓那)에게 친히 제사지냈다.
十月 愛禮妃君生子班君 太子洗之 上聞之 自卞山歸見 賜妃玉寶金紫大衣
10월, 愛禮妃君(애례비군)이 아들 班君(반군)을 낳아, 太子(태자)가 씻어 주었다. 상은 소식을 듣고, 卞山(변산)에서 돌아와, 아기를 살펴보았다. 妃(비)에게 玉寶(옥보)과 金紫大衣(금자대의)를 하사하였다.
*班君(반군)의 출생, AD1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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