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노히보코(天日槍) 설화와 도래인 집단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많은 주목을 받아 왔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신라계 도래인인 진씨(秦氏)와의 연관성이 주목되어 왔다.
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은 진씨(秦氏)에 관한 연구에서 『하리마풍토기(播磨國風土記)』에 보이는 아메노히보코(天日槍) 설화를 갖는 지역과 진씨(秦氏)의 거주지가 완전히 중복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나오키 코오지로(直木孝次郞)도 하리마(播磨)서부에 아메노히보코(天日槍) 전승이 많은 것은 실제 이 지역에 신라계 도래인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라계로 보이는 진씨(秦氏), 그리고 진씨(秦氏)와 동족 전승을 갖는 거지씨(巨智氏)가 하리마(播磨)서부에 넓게 분포하고 있음이 실제 사료를 통해 입증된다고 한다.
또한, 이즈시신사(出石神社)가 있는 이즈시정(出石町)은 산간 분지 속의 작은 지역이나 분지를 관통하는 이즈시川(出石川)을 따라 8㎞ 정도 가면 원산천(圓山川)과 만나고 여기서 바다(동해)까지는 약 15㎞ 거리에 불과해 이곳이 자연조건상 한반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중요 루트였음을 지적하였다.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다지마(但馬)에 머물렀으며 이즈시(出石)에서 제사지내고 있는 것은 신라계 집단의 다지마(但馬)지방 도일(度日)이 이루어져 그 지역이 새로운 제의(祭儀)를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편, 정상만랑(井上滿郞)은 시야를 좀더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노히보코(天日槍),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 등의 관련 지명을 모두 정리 종합하면,
한반도(韓半島) - 간몬해협(關門海峽) - 오이타현(大分縣) 붕고시(農後高田市) - 효고현(兵庫縣) 시사하군(宍粟郡) - 효고현(兵庫縣) 아하지섬(淡路島) - 오사카(大阪市) - 우지강(宇治川) - 사가현(滋賀縣) (蒲生郡) - 후쿠이현(福井縣) 쓰루가시(敦賀市) - 효고현(兵庫縣) 이즈시군(出石郡) -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군(出雲郡) -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완전히 서일본(西日本)을 일주하는 모양이 되는데,
이것은 신라계인 진씨의 분포 지역과 일치하는 것으로 오히려 진씨라는 동일 계통 씨족의 광범위한 거주지를 묶기 위해 구성된 전승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이해하기 쉽다고 했다.
결국 아메노히보코(天日槍) 전승의 본질은 다지마국(但馬國) 이즈시(出石)에 본거지를 갖고 이즈시신사(出石神社)를 씨사(氏社)로 하는 일족의 시조 신화이라는 점이며, 아메노히보코(天日槍)는 이 일족이 받드는 대륙계 샤머니즘의 종의(宗儀)와 관련된 일모(日矛, 창)가 인간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편력담은 이러한 새로운 종의를 신봉하는 집단의 도일(度日) 및 이동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즈시(出石)의 보물이 천황(天皇)에게 헌상되었다는 전승은 이 새로운 종의가 천황가(天皇家)에 의해 수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카와니시정에(川西町)는 아메노히보코를 조상으로 하는 이토이(糸井)씨족의 씨신이었던 이토이신사가 있다. 나라현의 가쿠엔야마토정에 사는 토박이 연구가 마쯔무라마사키(松村正樹)씨가 쓴 『역사의 갈래길』에 「츄우와에 남아있는 하타(秦)의 발자취」라는 부제를 단 「마호로바(야마토)의 도래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토이신사 본전 오른쪽에 조그마한 사당 3채가 나란히 놓여있는데 이 사당에 모셔져 있는 것은 ‘타지마국이즈시사동체아메노리보코야(但馬國出石社同體天一槍也)’라고 한다. 아메노히보코가 ‘천일모(天日矛)’라고도 쓰며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신라의 왕자로 부인인 아카루히메를 따라 일본에 도래한 인물로 추앙받기도 한다. 한국에서 건너온 히보코(히보코로 상징되는 집단)가 도착한 곳이 타지마국(但馬國) 이즈시(出石)이라고 한다. 이곳에 히보코를 모신 이즈시가 신사가 있는데 타지마국의 궁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도 이 일대에 히보코를 모신 신사가 열 곳 이상 있다.”
우선 “한국에서 건너온 히보코가 도착한 곳이 타지마국의 이즈시”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마쯔무라 씨가 잘못 쓴 것은 아니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 3년조에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오다 갖고 온 물건은 우태옥(羽太玉) 한 개, 이즈시의 작은 칼 한 개, 이즈시의 창 한 자루, 거울 한 점, 쿠마노히모로기(熊神籬) 한 구 등 합쳐서 일곱 종류이다. 타지마국에 보관하면서 항상 신물(神物)이라 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른바 일곱 개의 신보(神寶)인데 신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쿠마노히모로기 한 구’와 훗날 신궁․ 신사의 신체가 되는 ‘거울 한 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고사기』에는 ‘오진경(奧津鏡)’, ‘변진경(邊津鏡)’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접어두고 『고사기』에 “이때에 아메노히보코는 우지가와에서 거슬러 올라가 북쪽 오우미국(近江國) 아나읍(五名邑)에 들어가 잠시 살았다. 또한 오우미에서 와카사국(若狹國)을 거쳐 서쪽 타지마국에 이르러 그 곳에 주거를 정하다”라고 씌어 있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마쯔무라 씨가 히보코가 도착한 곳이라 쓴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타지마는 아메노히보코 집단이 최후로 도착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일파가 상륙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메노히보코와 같은 인격신인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가 도래한 경로가 나카토(長門․ 山口縣)에서 이와미(岩見․ 島根縣)에 이르는 동해 연안으로 에치젠(越前․ 福井縣)의 쯔루가(敦賀)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들 아메노히보코 집단의 일파는 타지마 해안에서 마루야마천(圓山川)으로 거슬러 올라가 온통 습지로 이루어진 그 일대를 개발했다. 이는 마치 하타이족이 야마시로(山城․ 京都府)의 아라시야마(嵐山) 산기슭에 호즈천(保津川)의 급류를 막아 지금의 치토리가후치(千鳥久淵)를 넓게 파서 넓혀 오오이천(大堰川․ 桂川)을 만들어 쿄오토분지를 개발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아메노히보코는 ‘국토개발의 신’으로 타지마국의 으뜸가는 신사인 이즈시신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즈시에서는 1989년 4세기 목관묘에서 고분 부장품 중 사철이 발견된다. 철의 원료인 사철이 고분에 부장된 경우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고분에 철과 관계된 수장이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철은 5세기에 이미 국산화되었다고 하나 그 최초의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이즈시에는 이미 제철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나타내는 사료이다. 철기는 죠오몬시대 말기(기원전 2세기경)에 대륙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사철을 원료로 한 것은 5세기 후반에 국산화되었던 듯하나 그 이전은 확실치 않다.
『엔기식』(헤이안 중기 궁중의 연중 의식과 제도에 관해 기록한 50권으로 된 율령의 시행세칙)에 아메노히보코를 ‘국토개발의 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이즈시신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마침내 타지마의 이즈시가 아메노히보코의 ‘도착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아메노히보코족이란 결코 한 집단이 아니고 그 유적은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다.
그들은 큐우수의 이도시마스이도우(糸島水道)까지 상륙했던 것은 물론, 치쿠젠의 『위지(魏志)』「倭人傳」에서 말하는 이토국〔伊都國. 이곳의 왕이었던 이토노아가타누시(怡土縣主)는 아메노히보코족]의 이토군〔伊都郡, 현재는 이토시마군(糸島郡)〕을 거쳐 부젠(豊前)․ 분고(豊後)로 퍼져 나갔다. 지금 현재 누구나 아메노히보코 집단의 유적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하리마(播磨․ 兵庫縣)등이다. 그중에서도 오우미(近江․ 滋賀縣)․ 셋쯔(攝津․ 大阪市) 등이다. 그중에서도 오우미는(近江)는 마치 아메노치보코족의 나라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곳이다. 아라(安羅)신사․ 카가미(鏡)신사 등 아메노히보코를 제신으로 하는 신사는 물론 제철 터도 발견되고 있다.
아메노히보코와 관련된 전승은 여러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 상이한 점들이 있다.
먼저 <일본서기(日本書紀)>자체에서도 본문의 내용과 일설(一說)의 내용은 도일(度日)과정과 공물(貢物)의 종류에서 차이를 보인다. 본문은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가 도일했다는 짧은 설명과 함께, 그가 가지고 가 다지마노쿠니(但馬國)에 보관하여 신물(神物)로 삼게 된 7가지 보물에 대해 적고 있다. 반면, 일설은 천일창이 작은 배를 타고 가서 하리마노쿠니(播磨國)에 정박하여 시사하노무라(宍粟邑)에 있다가 천황의 사신을 만나게 되어 거주할 곳을 정하러 토도하(菟道河)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쪽으로 오우미노쿠니(近江國) 아나노무라(吾名邑)에 들렀다가 다시 히강(近江)으로부터 와카사노쿠니(菟狹國)을 거쳐 서쪽으로 다지마노쿠니(但馬國)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다. 그리고 다지마노쿠니(但馬國)의 이즈시마(出嶋) 사람 후토미미(太耳)의 딸 마타오(麻多烏)와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가지고 보물은 본문과 달리 ‘엽세주(葉細珠), 족고주(足高珠). 제록록적석주(鵜鹿鹿赤石珠, 빛나는 돌), 이즈시가다나(出石刀子), 이즈시창(出石槍), 일경(日鏡), 웅신리(熊神籬, 구마노히모로키), 담협천대도(膽狹淺大刀)’ 등 8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사기>에도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의 도일 기사가 있는데, 도일 시기와 동기, 경로 등에 있어서 <일본서기>와 차이를 보인다. 즉 <고사기>의 경우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인 아카루히메를 찾아 도일했다면, <일본서기>의 아메노히보코(天日倉)는 일본에 상황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귀화하고 있다. <고사기>의 전승은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가 조국으로 돌아간다며 일본으로 도망간 아내를 찾아 그녀가 숨어있는 난파에 도착하나, 신(神)의 저지로 들어가지 못하자 다지마노쿠니(但馬國)에 도착해 마타오(侯尾)의 딸인 사키쯔미(前津見)와 결혼해 아들을 날고 정착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들의 이름도 <일본서기>와 차이를 보이며, 물품도 8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가계(家系) 역시 다르다.
아메노히보코(天日倉)가 갖고 간 물품이 <일본서기>와 <고서기> 사이에 각각 전승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공통점은 모두 히례(比禮), 옥(玉), 거울(鏡) 등을 비롯해 제의의 주물(呪物), 제구(祭具), 신보(神寶)라는 것이다. 또한, <고사기>의 8가지 물품 중 나미후루히레(振浪比禮), 나미키루히레(切浪比禮), 카제후루히레(振比禮), 카제키루히레(切風比禮) 등과 같이 항해와 관련된 물품도 있다.
이밖에도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 설화는 <파마국풍토기(播磨國風土記)>, <축전국풍토기(筑前國風土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고어습유(古語拾遺)>등에 기록되어 있다.
* 나미후루히레, 나미키루히레 - 파도를 일으키고 가라앉게도 하는 주력이 있는 수건.
* 카제후루히레, 카제키루히레 - 바람을 일으키고 가라앉히기도 하는 주력이 있는 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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