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도서관소장 이종휘의 수산집, vol 七, 卷之十四, 동국여지잡기, 국가전자도서관 페이지수는 111P. 원본 페이지는 110P.
소명출판사의 東史 해석책에서는 283P에서 지마 11년 기사를 누락시켜 놓았다.
해석했던 두 사람이 신라본기에 나오지 않는 기사라, 멍때리면서 누락시켜 버린거라 생각할 수 있다.
지마 11년 기사는 東史에서 살아 남았다.
壬戌 新羅祗摩王十一年 扶餘遣兵助漢禦高句麗
= 壬戌(임술, AD122년) 신라 지마왕 11년 扶餘(부여, 百濟)가 병사들을 보내 漢(한)나라를 도와 高句麗(고구려)를 막았다.
*壬戌= 122년 (신라본기와 동일한 연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1년 기사에는 안 나와 있는 기사이다.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1년, AD122년.
十一年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 倭兵大來 爭遁山谷 王命伊湌 翌宗等諭止之 秋七月 飛蝗害穀 年饑多盜
11년(122년) 여름 4월에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아갔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서울 사람들이 "왜나라 군사가 크게 쳐들어온다."고 말을 잘못 퍼뜨리고는 다투어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었다. 왕이 이찬 익종 등에게 명하여 타일러 말렸다. 가을 7월에 누리가 날아와 곡식을 해쳤다. 흉년이 들고 도둑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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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東史의 기사를 祗摩記(지마기)에서 살펴보면,
지마기 11년. 169년.
十一年 正月 大公伊飡 艾水稟主
11년(AD169년) 1월 大公(대공)을 伊飡(이찬)으로, 艾水(애수)를 稟主(품주)로 삼았다.
*2월, 3월 기사 생략.
七月 上聞勾利將侵扶余 謂角干昌永曰 “扶余乃吾兒之外祖 有脣齒之係 安可坐見” 乃發西北路精兵一萬 進至甘買坪 余王聞之 感謝曰 “吾婿有義 兩國賴安” 乃犒 大享將卒而交歡 勾利竟不至 留一月而歸
7월, 상은 勾利(구리, 高句麗)가 장차 扶余(부여)를 침략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角干(각간) 昌永(창영)에게 말하기를 “扶余(부여, 百濟)는 곧 내 아들의 外祖(외조, 외할아버지)로서, 脣齒之係(순치지계)인데 어찌 앉아서 볼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이에 西北路(서북로) 精兵(정병) 1만명을 일으켜 나아가 甘買坪(감매평)에 이르렀다. 余王(부여왕)이 소식을 듣고 감사하며 말하기를 “나의 사위가 의리가 있구나. 양국이 의지하여 안심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犒饋(호궤)하며 장졸들을 크게 접대하여 交歡(교환)하였다. 勾利(구리)는 결국 도달하지 못하고, 한 달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犒饋(호궤)= 군사(軍士)들에게 음식(飮食)을 베풀어 위로(慰勞)함. 호군(犒軍). 호석(犒錫)
*交驩(교환)=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사귀어서 즐김. 즐김으로써 서로 사귐
十月 扶余召文遣使 入朝獻貢
10월 扶余(부여)와 召文(소문)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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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祗摩記(지마기)와 연대비교를 하면, 169년- 122년= 47년의 편차가 납니다.
*위의 기사는 122년에 일어난 일과 169년에 일어난 일하고는 연대가 서로 다릅니다.
서로 구분하기 힘들군요^^
吾婿有義= 나의 사위가 의리가 있구나.
이 구절을 생각해 보면, 백제 己婁王(기루왕)의 딸과 신라 祗摩王(지마왕)과 서로 혼인한 사이란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祗摩記(지마기)의 재위기간이 33년으로, 신라본기의 23년보다 재위기간이 10년 늘어나 있습니다.
6, 지마 (재위 33년) 159 ~ 191 (재위 23년) 112-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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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본기 태조왕 70년, AD122년. ==> 국조왕 10년(AD122년, 壬戌)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 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122)에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구하고 깨뜨렸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고구려사초 新大帝紀 5년, AD169년
五年 己酉 二月 幽州賊喬玄來寇句麗城 禾晉擊其軍於河山 破之
四月 閱兵於西河 詔曰 “兵者國之元氣也 朕與士卒同甘苦 以禦賊 大小官民悉體此旨” 漢人耿臨自稱玄菟太守與喬玄 來寇丘利地 禾白擊退之 獲其妻子圖釼
5년 己酉(기유, AD169년)
2월, 幽州(유주)의 적 喬玄(교현)이 句麗城(구려성)에 쳐들어 왔기에, 禾晉(화진)이 河山(하산)에서 그 군대를 쳐서 격파하였다.
4월, 西河(서하)에서 병사들을 사열하였고, 조서를 내리길 “병사들은 나라의 근본적인 힘이요. 짐도 士卒(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여 도적들을 막을 것이오. 大小(대소)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 이 뜻을 새겨야 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漢人(한인) 耿臨(경림)이 玄菟太守(현도태수)를 自稱(자칭)하고 喬玄(교현)과 함께 丘利(구리)의 땅으로 쳐들어 왔다. 禾白(화백)이 이를 격퇴시키고 그 처자와 인장 및 보인을 노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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