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신라)

삼국사기 권45, 석우로 열전.

라디오에요 2009. 11. 12. 21:24


 

 

 

 

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 或云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湌爲大將軍 出討甘文國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火[주석126]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邯[주석127]兼知兵馬事 十六年 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艹樵][주석128] 暖熱[주석129]之 羣心感喜 如夾纊 沾[주석130]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七年[주석131]癸酉 倭國使臣葛那[주석132]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戲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爨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戲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味[주석133]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
論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兩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

 

"석우로(昔于老)[주석498]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로(水老)의 아들[주석499]이라고도 하였다.> 조분왕(助賁王) 2년(231) 7월에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주석500]을 쳐서 깨치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주석501] 4년 7월에 왜인이 침입해 왔으므로 [석]우로가 사도(沙道)[주석502]에서 추격하여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
15년 정월에 승진하여 서불한(舒弗邯)[주석503]이 되고 겸하여 군사의 일[兵馬事]도 맡았다. 16년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자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밤이 되어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석]우로는 몸소 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섶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 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기뻐하여 마치 솜을 두른 것같이 여겼다.
첨해왕이 재위하였을 때 사량벌국(沙梁伐國)[주석504]이 전에 우리에게 속하였다가 문득 배반하여 백제로 돌아가므로,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하였다.[주석505] 7년 계유(253)[주석506]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客館)에 와 있었는데 [석]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鹽奴][주석507]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주석508]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 하고 왜군에게로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그때] [석]우로의 아들[주석509]은 어리어서 걷지 못하므로 다른 사람이 안고 말을 타고 돌아왔는데,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때에 왜국(倭國)의 대신(大臣)이 와서 문안하였는데,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 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사론(史論): [석]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서 군무와 국정을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 이기기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아니하였으니, 그 계책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월등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마디 말의 잘못으로 스스로 죽음을 취하였고, 또 두 나라로 하여금 싸우게까지 하였다. 그 아내가 능히 원한을 갚았으나 역시 변칙이요 정도(正道)는 아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공은 또한 기록할 만하였다."

 

498) 석우로(昔于老)
신라의 왕족, 장군. 나해 이사금의 아들, 또는 각간 水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흘해왕의 아버지. 부인은 조분왕의 딸 命元夫人이다. 于老音이라고도 한다(《三國遺事》 王曆 乞解尼叱今條).
나해 이사금 14년(209)에 浦上 8국이 가라를 침입하여 그 왕자가 구원을 요청해오자 이찬 利音과 함께 6部의 군사를 이끌고 이를 섬멸하고 포로가 된 6천 명을 빼앗아 되돌려 주었으며, 조분 이사금 2년(231)에는 이찬으로서 감문국을 토벌하여 郡으로 삼게 하였다. 동왕 4년(233)에는 왜인이 쳐들어 왔을 때에 沙道에서 火攻法으로 왜의 전함을 불태우고 섬멸시켰다. 동왕 15년(244)에는 서불한이 되어 군사의 일을 담당하였고, 다음해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해오자 나가 막았으나 패배하여 馬頭柵에까지 후퇴하여 지켰고, 왜국 사신에게 희롱하는 말을 하여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죽은 해를 본서 권2 신라본기에서는 첨해왕 3년(249)이라 하였고, 본 열전에서는 동왕 7년(253)이라고 적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로전설은 본 열전과 신라본기에 각기 실려 있으나 열전의 기사는 본기의 그것을 재록·집성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본기에 보이는 기사 내용이 열전에서는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우로전설에 대하여 본래 동해안의 于柚村 지역에 퍼져 있던 설화이었는데 신라의 왕족의 영웅신화로 변개·확대되어 정리되었다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于老傳說의 世界〉, 《한국고대의 국가와 사회》, 일조각, 1985).
우로의 出自를 신라본기에서는 나해왕의 태자라고 하였으나, 열전에서는 단순히 나해왕의 아들 혹은 각간 水老의 아들이라 하였으며 《三國遺事》 王曆에서는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다. 이처럼 기록에 따라서 우로의 출자가 다르게 기술된 것은, 우로는 원래는 나해왕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맏아들인 奈音(일명 利音)이 나해왕 25년에 죽자 그를 이어 태자가 되었던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서 권2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조에 보이는 동왕의 왕자 利音(일명 奈音)의 官歷이 우로보다 훨씬 앞서고 있어, 아무래도 利音을 太子, 우로를 次子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또한 석우로의 연대는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우로의 아들 흘해는 열전에 우로가 죽을 때에 걷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고 하였고, 신라본기 흘해왕조에서도 즉위시에 나이가 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흘해왕의 즉위 연대인 310년은 우로가 죽었다고 하는 249년 또는 253년으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신라의 世系가 후에 조작된 근거로서 신라의 초기 편년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한 자료이다(金光洙, 〈新羅 上古世系의 再構成 試圖〉, 《東洋學》 3, 1973, 372쪽 참조).
  • 499) 각간 수로(水老)의 아들
    이는 우로의 출생에 관하여 왕자가 아니라는 다른 기록을 전한 것이다.
  • 500) 감문국(甘文國)
    현재의 경북 김천시 開寧面 일대이다. 본서 권34 주석 138 참조.
  • 501) 감문국(甘文國)을 … 군현으로 삼았다
    조분왕 2년(231)에 신라가 이미 감문국을 쳐서 군현을 삼았다는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65쪽).
  • 502) 사도(沙道)
    여기에 보이는 사도는 그 뒤에도 왜병이 자주 쳐들어 온 곳으로, 성을 쌓아 막기까지 하였는데, 지금의 迎日灣 부근으로 보고 있는 견해도 있고(이기동, 앞의 논문 〈우노전설의 세계〉, 187쪽), 영덕의 옛 沙冬院 부근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29쪽 주 3), 한편 이를 迎日의 沙峴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中田薰, 〈古代 日韓航路考〉, 《古代 日韓交涉史斷片考》, 1956, 139쪽). 본서 권2 주석 9 참조.
  • 503) 서불한(舒弗邯)
    중종임신간본에는 「邯」자가 「耶」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오각이다. 서불한은 舒發翰으로도 표기되는데, 신라의 제 1관등인 伊伐湌(혹은 角干)의 별칭이다. 본서 권38 주석 11 참조.
  • 504) 사량벌국(沙梁伐國)
    현재의 경북 尙州市. 沙伐國으로도 칭해졌다.
  • 505) [석]우로가 … (사량벌국을) 토벌하여 멸하였다
    沾解으로부터 2대 후인 儒禮王 14년경에도 청도에 있던 伊西古國이 金城을 來侵하였다는 것을 들어 이를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65쪽).
  • 506) 7년 계유(253)
    본 열전에서는 첨해왕 7년 계유(253)에 우로가 죽었다고 하였으나 본서 권2 신라본기 沾解尼師今조에는 동왕 3년(249) 4월에 倭人에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기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 507) 소금 만드는 노예[鹽奴]
    이는 미천한 신분의 예로 사용되었다.
  • 508) 우유촌(于柚村)
    현재의 경북 울진에 비정된다. 于柚村이 蔚珍의 古名 于珍也와 통하며, 나아가 진흥왕순수비 중 창녕비에 보이는 喙部 출신 大奈末 比尸智의 관직명인 ‘于柚·悉直(三陟)·河西阿(江陵)郡使大等’의 于柚와 동일지명일 것이라 함은 일본학계에서 일찍부터 주장되어 왔다(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の名について〉, 《東洋學報》 15-2, 1926, 79쪽).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韓條에 보이는 辰韓 12개 국 가운데 하나인 優由(一本에는 優中)國도 이곳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柚村을 于村城, 곧 迎日灣 부근으로 보는 견해(中田薰, 앞의 논문 〈古代 日韓航路考〉, 164∼165쪽), 현재의 盈德郡 寧海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앞의 논문 〈우노전설의 세계〉, 188쪽).
  • 509) [석]우로의 아들
    訖解王. 그러나 흘해왕의 재위연대(310∼356)와 우로의 생존연대(?∼249 또는 253)와는 1주갑의 차이가 있다. 흘해왕이 즉위할 때에도 어리다고 한 기록은 그가 47년간을 재위한 점으로 보아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석우로의 연대를 1주갑을 내려야 할 것이다.
  • 126)
    原本·誠庵本 「水」. 三國史節要(卷3-19面)·鑄字本에 의거 수정.
  • 127)
    原本 「耶」. 誠庵本·三國史節要(卷3-22面)에 의거 수정. 鑄字本 「耶」. 朝·烈 「耶」, 北·燾 「耶(邯).
  • 128)
    原本·誠庵本 「槱」. 李丙燾本을 참고 수정. 「樵」와 同字. 北 「槱」. 朝·權·烈·浩 「蘇」.
  • 129)
    原本·誠庵本 「★」. 「熱」과 同字. 鑄字本 「熱」.
  • 130)
    原本·誠庵本 「沽」. 本書 卷2 沾解王 3年條에 의거 수정. 鑄字本 「沽」.
  • 131)
    「七年」, 本書 卷2 沾解尼師今 3年條에 干老가 倭人에게 살해된 것으로 기술되었음.
  • 132)
    三國史節要(卷3-26面 沾解王 3年條) 「耶」. 趙炳舜本 참조.
  • 133)
    原本·誠庵本 「未」. 本書 卷2 味鄒尼師今條에 의거 수정. 鑄字本 「未」. 朝·權·浩 「未」, 北 「未(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