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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可解な景行天皇の記事
一般に三輪王朝、三輪王権と呼ばれるのは崇神,垂仁、景行天皇の三代である。これは、この天皇たちが三輪山付近にその宮殿をかまえ、陵もその近辺にあるからである。しかし、宮内庁の指定によれば、崇神天皇陵は天理市柳本町にある行燈山古墳、景行天皇陵は天理市渋谷町にある渋谷向山古墳とされているが、なぜか垂仁天皇陵だけは近鉄橿原線の尼ガ辻駅の西にある宝莱山古墳に比定され、一つだけ離れている。
これは垂仁天皇陵について『古事記』には「菅原の御立野の中にあり」、『日本書紀』には「菅原の伏見陵に葬った」とあるためである。しかし、不自然な点は否めない。古墳の比定はもとより不確定な要素が多い。日本の古墳にはその埋葬者を示す墓標はなく、埋葬者を現す古墳名も定まっていない。
現在天皇陵に比定されている古墳も、有名な仁徳天皇陵や応神天皇陵も含めて確実なものはないと言って過言ではない。それは、天皇および皇族の陵墓に指定されている古墳が宮内庁の管理のもとにあって発掘調査が出来ないことに加え、そもそもその指定に明確な根拠が無いためである。『記紀』にある記事を元にその参考地にある古墳の中から、伝承や規模などを考慮して選んだに過ぎないからである。
前記した纏向遺跡最大の箸墓古墳も、倭迹迹日百襲姫命の墓とされているが、当時の政治的な状況を考えると、むしろ纏向の王となった御間城入彦(崇神天皇)の陵である可能性があることについても既に述べた。そう考えていくと、『記紀』にある垂仁天皇の陵についての記事についても疑ってかかるべきかも知れない。
불가해한 게이코 덴노의 기사
일반적으로 미와 왕조, 미와 왕권으로 불리는 것은 숭신, 수 히토시, 게이코 덴노의 삼대이다.이것은, 이 천황들이 미와산 부근에 그 궁전을 지어 능도 그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궁내청의 지정에 의하면, 스진 덴노능은 텐리시 야나기모토쵸에 있는 행등산고분, 게이코 덴노능은 텐리시 시부타니쵸에 있는 시부야 무코야마 고분으로 되어 있지만, 왠지 스이닌 덴노능만은 킨테츠 카시하라선의 비구니가십역의 서쪽에 있는 보래산고분에 비정 되고 하나만 떨어져 있다.
이것은 스이닌 덴노능에 대해「고사기」에는「스가와라의 타치노안에 있어」, 「일본 서기」에는「스가와라의 후시미능에 매장했다」라고 있기 때문에 있다.그러나, 부자연스러운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분의 비정은 원래 불확정인 요소가 많다.일본의 고분에는 그 매장자를 나타내는 묘비는 없고, 매장자를 나타내는 고분명도 정해지지 않았다.
현재 천황능에 비정 되고 있는 고분도, 유명한 닌토쿠 천황릉이나 응신천황능도 포함해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해 과언은 아니다.그것은, 천황 및 황족의 능묘로 지정되어 있는 고분이 궁내청의 관리하에서 있어 발굴 조사를 할 수 없는 것에 더해 원래 그 지정에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고지기와 일본서기」에 있는 기사를 바탕으로 그 참고지에 있는 고분중에서, 전승이나 규모등을 고려해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이다.
전기 한 전향유적 최대의 저묘 고분도, 야마토적적일백습희명의 무덤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전향의 왕이 된 간성입언(스진 덴노)의 능일 가능성이 있는 것에 대하여도 이미 말했다.그렇게 생각해 가면, 「고지기와 일본서기」에 있는 스이닌 덴노의 능에 대한 기사에 대해서도 의심해서 걸려야할 것인가도 모르다.
次に、この三代の和風諡号にあるイリについて考えてみよう。崇神天皇は御間城入彦(ミマキイリヒコイニエ)、垂仁天皇は活目入彦五十狭芽(イクメイリヒコイサチ)でともにイリがつく。ところが垂仁の子である景行天皇(大足彦忍代別・オオタラシヒコオシロワケ)にはイリがつかないが、その他の子には、前章で垂仁の後継者にふさわしいとして取り上げた五十瓊敷入彦命や稚城瓊入彦命(ワカキニイリヒコノミコト)などイリがつく子もいるのである。また景行天皇の子にも五百城入彦命(イオキイリヒコノミコト)、五百城入姫(イオキイリヒメ)、高城入姫(タカキイリヒメ)などイリのつく子もいるため、通説では景行天皇本人はイリがつかなくとも、その兄弟、子にイリのつくのがかなりあるため、その宮殿、陵の場所と合わせてやはりイリ系の天皇とされ、崇神、垂仁、景行の三代を三輪王朝、または三輪王権と呼んでいる。
しかし、今まで見てきたように、垂仁天皇の陵だけかけ離れていること、垂仁天皇の後継者にふさわしかった五十瓊敷入彦命に代わってあまり存在感が薄く、しかもイリのつかない大足彦忍代別が後継者となっていること、さらにもっと重要なことには、景行天皇の後を継ぐ成務天皇も和風諡号が稚足彦(ワカタラシヒコ)、その後を継ぐ仲哀天皇(日本武尊の子)も和風諡号が足仲彦(タラシナカツヒコ)となっていてタラシがつくこと、さらにその天皇たちの活躍の場が、大部分九州など西日本であることなどを考慮すると、どう見てもこの大足彦忍代別以降の天皇が、三輪王権としてそのまま大和朝廷を継承したとは思えないのである。『記紀』の系図にいかにイリ系統の人物が含まれていても、肝心の後継天皇本人の名前にイリがつかないのは、やはり景行天皇(大足彦忍代別)は三輪王権の人ではなく、垂仁天皇の実際の後継者とは別の系統、すなわち西日本のタラシ系統に属する人物だったと考えると納得がいくのである。
それでは、『記紀』にある景行天皇の記事について検証してみよう。まず『古事記』では、纒向の日代の宮に宮殿を定めたこと。さらに皇后や多くの妻達と八十人を数えるその子達の系譜がある。その中で吉備の臣の祖先である若建吉備津日子の娘、伊那昆能大郎女(イナビノオオイラツメ)を妻として生んだ御子の中に大碓命(オホウスノミコト)、小碓命(ヲウスノミコト)がいるがこの小碓命は後のヤマトタケル(日本武尊・倭建)である。また八坂之入日売命に生ませたのが稚足彦、のちの成務天皇である。
記事としてはこのあと、朝廷の他を耕す田部の民を定めたこと、食事のことを奉仕する膳の大伴部、屯倉を定めたことなど、坂手の池を作ったことなどが簡単に記されているのみで、あとの大半はヤマトタケル(倭建)の九州熊襲征伐の記事と、それを終えた後の東国征伐の記事で占められている。
一方、『日本書紀』ではやはり宮殿を纒向の日代の宮に定めたこと、播磨稲日大郎姫(ハリマノイナビノオオイラツメ)を皇后として双子の御子、大碓皇子(オオウスノミコ)、小碓尊(オウスノミコト・日本武尊)を生んだこと、影姫を娶って竹内宿禰(タケウチノスクネ)を生んだこと、さらに天皇は美濃に行き、八坂入媛との婚姻話があり、その間に稚足彦や多くの子達を生んだことなどが記されている。
다음에, 이 삼대의 일본식 시호에 있는 이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스진 덴노는 간성입언(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 스이닌 덴노는 활목입언 50협아(이크메이리히코이사치)로 함께 이리가 붙는다.그런데 수인의 아이인 게이코 덴노(큰 발언인대별・오오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에게는 이리가 붙지 않지만, 그 외의 아이에게는, 전장에서 수인의 후계자에 어울린다고 해 채택한 50경부입언명이나 치성경입언명(와카키니이리히코노미코트) 등 이리가 붙는 아이도 있는 것이다.또 게이코 덴노의 아이에게도 5백성입언명(이오키이리히코노미코트), 5백성입희(이오키이리히메), 타카기입희(타카키이리히메) 등 이리가 붙는 아이도 있기 위해, 통설에서는 게이코 덴노 본인은 이리가 붙지 않아도, 그 형제, 아이에게 이리가 붙는 것이 꽤 있기 위해, 그 궁전, 능의 장소와 합해 역시 이리계의 천황으로 여겨져 숭신, 수인, 경행의 삼대를 미와 왕조, 또는 미와 왕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봐 온 것처럼, 스이닌 덴노의 능만 동떨어지고 있는 것, 스이닌 덴노의 후계자에 어울렸던 50경부입언명에 대신해 너무 존재감이 얇고, 게다가 이리가 붙지 않는 큰 발언인대별이 후계자가 되고 있는 것, 한층 더 더 중요한 일에는, 게이코 덴노의 뒤를 잇는 세이무 덴노도 일본식 시호가 치족언(와카타라시히코), 그 후를 잇는 츄아이천황(야마토타케르노미코토의 아이)도 일본식 시호가 족중언(타라시나카트히코)이 되고 있고 타라시가 붙는 것, 한층 더 그 천황들의 활약의 장소가, 대부분 큐슈 등 서일본인 것 등을 고려하면, 어떻게 봐도 이 큰 발언인대별 이후의 천황이, 미와 왕권으로서 그대로 야마토 조정을 계승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고지기와 일본서기」의 계도에 얼마나 이리 계통의 인물이 포함되어 있어도, 중요한 후계 천황 본인의 이름에 이리가 붙지 않는 것은, 역시 게이코 덴노(큰 발언인대별)는 미와 왕권의 사람이 아니고, 스이닌 덴노의 실제의 후계자와는 다른 계통, 즉 서일본의 타라시 계통에 속하는 인물(이었)였다고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러면, 「고지기와 일본서기」에 있는 게이코 덴노의 기사에 대해 검증해 보자.우선「고사기」에서는, 마토이향의 날대의 궁에 궁전을 정한 것.한층 더 황후나 많은 처들과 80명을 세는 그 아이들의 계보가 있다.그 중에 길비의 신의 조상인 젊은 건키비츠 날짜의 딸(아가씨), 이나고능대낭녀(이나비노오오이라트메)를 아내로서 낳은 자중에 대대명(오호우스노미코트), 오스생명(우스노미코트)이 있지만 이 오스생명은 후의 야마트타켈(야마토타케르노미코토・야마토건)이다.또 야사카지지는 해매명에 낳게 한 것이 치족언, 후의 세이무 덴노이다.
기사로서는 이후에, 조정의 외를 경작하는 타나베의 백성을 정한 것, 식사를 봉사하는 선의 오오토모부, 미야케를 정한 것 등, 사카테의 연못을 만든 것등이 간단하게 기록되고 있을 뿐으로, 나머지의 대부분은 야마트타켈(야마토건)의 큐슈 쿠마소 정벌의 기사와 그것을 끝낸 후의 동국 정벌의 기사로 차지할 수 있고 있다.
한편, 「일본 서기」에서는 역시 궁전을 마토이향의 날대의 궁에 정한 것, 하리마도일대츠카사 공주(하리마노이나비노오오이라트메)를 황후로서 쌍둥이의 자, 오오우스노 미코(오오우스노미코), 오스노 미코토(오우스노미코트・야마토타케르노미코토)를 낳은 것, 영희를 장가가 타케우치숙녜(타케우치노스크네)를 낳은 것, 한층 더 천황은 미노에 가, 야사카입원과의 혼인이야기가 있어, 그 사이에 치족언이나 많은 아이들을 낳은 것등이 기록되고 있다.
その後天皇の12年、熊襲が背いたので天皇自ら筑紫に出向いた記事が続く。周防から九州に入り、この地の賊を征伐、その後大分で土蜘蛛を退治し、日向から熊本に出かけて熊襲征伐を成し遂げた記事が詳細に続き、その後大和に帰ったとしている。しかし、再び熊襲が背いたので今度はヤマトタケル(日本武尊)を九州に派遣して熊襲征伐をさせ、さらにその後も東国の征伐をさせたのであるが、ヤマトタケルはその帰路、伊吹山で病に倒れ死んでしまった。
天皇は、後にヤマトタケルの足跡を偲びたいと伊勢から東海道、上総国まで巡行したとある。その後坂手の池を作ったことや、田部や屯倉を作ったことなど古事記と同じ記事があり、やがて近江国に高穴穂宮を作ってお住みになり、その地で亡くなったこと、陵は山辺道上陵にあることなどが記されている。
これらを比較してみると、『古事記』ではその大半がその子ヤマトタケルの熊襲征伐と東国征伐の記事であるのに対し、『日本書紀』ではヤマトタケルに先立って景行天皇自らの詳細な九州征伐記事と、ヤマトタケルの死後に行った東国巡行記事が簡略に加わっていることが注目される。
これまで『記紀』の記事については何らかの史実があり、それらが投影、脚色されて出来上がったものと解する立場から検証してきたが、その立場からすれば、『日本書紀』にある詳細な景行天皇の九州征伐記事と簡略な東国巡行記事に注目せざるを得ず、またなぜ『古事記』が記載しなかった点も気にかかる。また、ヤマトタケルの九州と東国征伐記事の中味も前者が詳細なリアリティを感じさせる記事なのに対し、後者は牧歌的な歌と地名説話に終始している点も何らかの作為を感じさせる。次に景行天皇の九州征伐記事の詳細について検証してみよう。
그 후천황의 12년, 쿠마소가 등졌으므로 천황 스스로 치쿠시에 나간 기사가 계속 된다.스오우로부터 큐슈에 들어가, 이 땅의 도적을 정벌, 그 후 오이타에서 땅거미를 퇴치해, 양지에서 쿠마모토로 나가 쿠마소 정벌을 완수한 기사가 상세하게 계속 되어, 그 후 다이와에 돌아갔다고 하고 있다.그러나, 다시 쿠마소가 등졌으므로 이번은 야마트타켈(야마토타케르노미코토)을 큐슈에 파견해 쿠마소 정벌을시켜, 한층 더 그 후도 동국의 정벌을 시켰던 것이다가, 야마트타켈은 그 귀로, 이부키야마로 병에 쓰러져 죽어 버렸다.
천황은, 후에 야마트타켈의 발자국을 그리워하고 싶으면 이세로부터 토카이도, 가즈사노쿠니까지 순행했다고 있다.그 후 사카테의 연못을 만든 것이나, 타나베나 미야케를 만든 것 등 고사기와 같은 기사가 있어, 이윽고 오오미국에 고혈수궁을 만들어 사셔, 그 땅에서 죽은 것, 능은 산언저리 도상능에 있는 것등이 기록되고 있다.
이것들을 비교해 보면, 「고사기」에서는 그 대부분이 그 아이 야마트타켈의 쿠마소 정벌과 동국 정벌의 기사인데 대해, 「일본 서기」에서는 야마트타켈에 앞서 게이코 덴노 스스로의 상세한 큐슈 정벌 기사와 야마트타켈의 사후에 간 동국 순행 기사가 간략하게 더해지고 있는 것이 주목받는다.
지금까지「고지기와 일본서기」의 기사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실이 있어, 그것들이 투영, 각색 되어서 완성된 것과 푸는 입장으로부터 검증해 왔지만, 그 입장으로부터 하면, 「일본 서기」에 있는 상세한 게이코 덴노의 큐슈 정벌 기사와 간략한 동국 순행 기사에 주목 하지 않을 수 없어, 또 왜「고사기」이 기재하지 않았던 점도 마음에 걸린다.또, 야마트타켈의 큐슈와 동국 정벌 기사의 내용물도 전자가 상세한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기사인데 대해, 후자는 목가적인 노래와 지명 설화로 시종 하고 있는 점도 어떠한 작위를 느끼게 한다.다음에 게이코 덴노의 큐슈 정벌 기사의 상세한 것에 대하여 검증해 보자.
景行天皇の九州征伐
景行天皇(オオタラシヒコ)の九州征伐記事については、『古事記』に記載がなく、『日本書紀』のみに詳細に記載があること、さらにヤマトタケルの死後に行った東国巡行の記事が『日本書紀』に簡略に記載されていることを前項で述べたが、『記紀』の記載では、かなりの違いがあることも多い。たとえば武烈天皇の項では、『古事記』は何も書いていないが『日本書紀』には多くの民を残虐な刑に処すなど、残虐性を好んだことなどが書かれている。全体的に『古事記』は天皇の系図と歌や美辞麗句的な記載が多いが、『日本書紀』にはいわばマイナス記事とも言えるリアリティを感じさせる記事が意外に多く書かれている。
게이코 덴노의 큐슈 정벌
게이코 덴노(오오타라시히코)의 큐슈 정벌 기사에 대해서는, 「고사기」에 기재가 없고, 「일본 서기」에만 상세하게 기재가 있는 것, 한층 더 야마트타켈의 사후에 간 동국 순행의 기사가「일본 서기」에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을 전항에서 말했지만, 「고지기와 일본서기」의 기재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도 많다.예를 들어 부레쓰 덴노의 항에서는, 「고사기」은 아무것도 쓰지 않지만「일본 서기」에는 많은 백성을 잔학한 형에 곳등, 잔학성을 좋아한 것등이 쓰여져 있다.전체적으로「고사기」은 천황의 계도와 노래나 미사여구적인 기재가 많지만, 「일본 서기」에는 말하자면 마이너스 기사라고도 말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기사가 의외로 많이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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