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고구려)

신채호 - 조선상고사

라디오에요 2015. 8. 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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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편집]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 ( 百濟本紀 ) 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 ( 召西奴女大王 ) 이니 하북 ( 河北 )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 그가 죽은 뒤에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 ( 彌鄒忽 : 지금의 仁川 ) 에 , 또 한사람은 하남 ( 河南 ) 위례홀 ( 慰禮忽 ) 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 ( 篇 )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 온조왕 13 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아니랴 ?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 ( 優台 ) 이므로 , 비류 ·온조의 성도 부여요 , 근개루왕 ( 近蓋婁王 ) 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 본기에는 비류·온조를 추모 ( 鄒牟 ) 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 이다 .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 ( 正宮 ) 으로 대우하고 , 비류·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 유류 ( 橋留 ) 가 그 어머니 예씨 ( 禮氏 ) 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 예씨가 원후 ( 元后 ) 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 ( 小后 ) 가 되었으며 ,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의논하여 ,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 많은 금 ·은 ·주보 ( 珠寶 ) 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 烏干 ) ·마려 ( 馬黎 ) 등 18 사람을 데라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 ( 箕準 ) 의 자손이었다 .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지 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濊族)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 백제본기에 낙랑왕(樂浪王)이라 낙랑태수(樂浪太守)라 기록되어 있는데 , 이것은 백 몇 십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漢郡이라 하여 낙랑태 수라고 쓴 것이며, 예(濊)라 쓰지 않고 말갈(靺鞨)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濊)를 말갈(靺鞨)이라고 한 당(唐)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古記)의 예(濊)를 모두 말갈(靺鞨)로 고친 것이다 .


2)召西奴가 죽은뒤 두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 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 ·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 --지금 한양의 북악(北岳)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

오간 · 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 서 두 백제가 되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년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13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년 곧 온조 원년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分漢城民)”고 한 것은 비류 · 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 은 '메주골'이요, 위례홀은 '오리골(본래는 아리골)'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그 유래가 또한 오래다 .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 ·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졌다.